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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고전독서-시카고플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맥베스
맥베스는 왕권을 위협하는 반역자를 처단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마녀들에게서 왕이 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충직한 신하였던 맥베스는 그 예언이 허황되다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운명에 합당한 자격인 듯한 저 자신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도 한다. 마녀들은 맥베스와 동행 중이던 뱅코에게도 그의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늘어놓지만, 뱅코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뱅코는 맥베스에게 마녀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 것을 충고하지만, 이미 마음 깊은 곳에 잠재해 있던 맥베스의 야욕을 깨우고 말았다. 더 큰 야심을 지니고 있었던 이는 이 예언을 전해 들은 맥베스의 아내였다. 두 내우는 결국 던컨 왕을 시해할 계획을 세우고, 그들의 저택을 방문한 왕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맥베스는 그 야욕을 실현시키기까지 많은 갈등을 겪는다. ‘너무나 겸손하게 왕권을 행사하고 그 권좌가 너무나 깨끗한’ 덩컨 왕을 살해하면서까지 그 지위를 찬탈하려는 야욕은, 스스로 생각해도 정당하지 않다. 그 불의 앞에서 주저함으로나마 추스르고 있는 일말의 양심은, 야욕의 타당성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다. 야욕에 있어 보다 적극적이면서도 침착한 인물은 맥베스의 아내이다. 우유부단한 맥베스를 때론 다그치기도, 때론 다독이기도 하는 그녀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도 가장 진취적이고 과단성이 있는 여성상이다.'뒤웅박 팔자'일지언정 자신이 매어 있는 대상의 지위를 바꾸고자, 이방원을 멈추게 하지 않았던 원경왕후와 같은 경우라고나 할까? 예언에 담긴 맥베스의 미래는, 곧 아내의 미래이기도 했다. 맥베스가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될 일이었다.
왕위를 손에 넣었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며 미쳐 가는 맥베스 가책은 그를 더욱 잔인하게 만든다. 마녀들이 건넨 예언 중에는 뱅코의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도 섞여 있었다. 이미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다른 이의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니…. 왕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맥베스에겐 숙청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가책이 몰고 온 비극은 맥베스의 부인도 빗겨 가지 않았다. 그녀는 몽류병에 시달리다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야욕이 그들을 불안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맥베스에게도 비극적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모든 걸 체념한 채 지나온 시간을 반추해 본다. 그리고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자신의 어리석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가련한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 치고 안달하다 사라져 버리는 것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은
함성과 광기로 가득하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리어왕
리어왕은 세 딸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누가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물었다. 이에 첫째 고네릴과 둘째 리건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최대한으로 어필한다. 그러나 막내딸 코델리아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 그만 어필에 실패한다.
리어왕은 장황한 수사를 늘어놓는 고네릴과 리건의 감언에 현혹되어 코델리아의 진정성을 내치고 만다. 그러나 아버지의 신임을 얻은 두 딸은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재산을 탐하고 있었고, 결정적 순간에는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며 제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리어왕은 왕좌에서 물러나 딸들의 행복한 보살핌을 받기 원했지만, 폭풍우 속에서 백발을 휘날리는 야인의 신세로 전락한다.
두 딸에게서 배신을 당한 리어왕은 거센 폭풍우 속에서 신을 향한 오열을 토해 낸다. 죄를 교묘히 감춘 자들을 향한 저주와 원망을 한껏 담아낸 분노이면서도, 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이기도 하다.
신들이여, 보소서. 이 가련한 늙은이를
나이만큼 슬픔도 커 이렇듯 무참히 짓밟힌 나를!
내 딸들이 아비에게 불효토록 한 것이 당신들의 뜻이더라도
그것을 얌전히 견뎌 만큼 날 바보로 만들지 마시오.
내게 정당한 분노를 일으켜 주시오.
한편 《리어왕》에서 다른 한줄기의 플롯으로 전개되는 에드가의 이야기 역시 리어왕의 가정사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복동생인 에드먼드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버리면서, 에드가는 초라한 행색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이는 자신을 숨기는 동시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이전의 삶을 모두 폐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의 아버지 글로스터는 리어왕의 충신이다.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안목은 오만한 왕이나 충성스러운 신하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글로스터는 에드가의 거지행색을 보고서도 그가 아들임을 알아채지 못한다. 에드먼드의 간계로 자신의 두 눈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으로 에드가와 소통할 수 있었다. 이 장면은 인간이 얼마나 가시적인 것들에 현혹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며, 이 작품의 일관된 주제이기도 하다.
햄릿
나는 선왕의 혼령이며, 지금의 왕이자 친동생인 클로디어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선왕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타났다. 유령은 햄릿에게 복수를 명한다. 유령과의 만남 이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의심들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햄릿은 혼란스럽다. 선왕이 죽은 후부터 날로 심해지는 햄릿의 광기. 중신(重臣) 폴로니어스는 그의 광기가 자신의 딸로 인한 상사병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왕에게 이 사실을 고한다. 왕은 햄릿의 광기가 행여 무슨 일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불안이다.
한편 햄릿은 유령의 말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 유령이 정말 아버지의 혼령이었을까? 자신의 망상에서 비롯된, 애꿎은 이들을 향한 복수심은 아닐까? 신중에 신중을 기하던 햄릿은, 자신의 불신을 잠재워 줄 묘안으로 유랑극단에게 연극 하나를 부탁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을 소재로 한, 유령에게서 들은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연극, 〈곤자고의 살인>이다.
햄릿의 숙부이자 지금의 왕인 클로디어스는 햄릿이 앓고 있는 광기의 원인을 찾기 위해, 의도적으로 햄릿과 폴로니어스의 딸 오필리아와의 만남을 주선했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잔혹한 운명을 한탄하고 있던 햄릿은 '한때 사랑했던' 오필리아에게 사랑의 종결을 고한다. 커튼 뒤에 숨어 몰래 엿듣고 있던 왕은 햄릿의 광기가 사랑의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확인하자 불안은 더욱 가중된다.
드디어 무대에 오른 진실의 막. 유령이 건넨 말대로 전개되는 극을, 왕과 왕비는 차마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들을 지켜본 햄릿에게선 유령에 대한 의심이 사라진다. 왕은 기도로써 면죄를 받으려 하지만, 기도의 순간은 햄릿에게 복수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햄릿은 그 절호의 순간 앞에서 칼을 빼들었다가 이내 단념하고 만다. 엉뚱하게도 그 칼이 폴로니어스에게 꽂히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폴로니어스의 죽음을 전해 들은 왕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서둘러 햄릿을 영국의 특사로 임명한다. '도착하면 즉각 햄릿의 머리를 자르라'는 비밀서신과 함께….
아버지의 비보에 딸 오필리아는 미쳐 버리고, 아들 레어티즈는 미치기 일보직전이다. 왕은 아버지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레어티즈를 부추긴다. 우연히 왕의 비밀서신을 중간에 가로채 읽게 된 햄릿은 위기를 모면하지만, 다시 고국(덴마크)으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건은 레어티즈와 결투였다. 햄릿은 레어티즈에게 자신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과하지만, 이미 원수로서 임한 결투에 뒤늦은 사과는 무의미하다.결투가 한창일 때, 왕이 햄릿을 처단할 용도로 마련해 놓은 독주(毒酒)를 왕비가 마시게 된다. 레어티즈는 독이 묻은 칼로 햄릿을 찌르고, 햄릿도 그 칼을 받아 레어티즈를 찌른다. 이 모든 게 왕(클로디어스)의 계략이었음을 알게 된 햄릿은, 이 모든 이야기의 원흉인 클로디어스를 독이 묻은 칼로 단죄함으로써 복수극을 끝맺게 된다.
이삭을 신의 제물로 바치는 순간에는 아브라함조차도 신을 의심했다. 아니 저 자신을 의심했다. 저 음성은 과연 신의 것일까? 내가 미친것이 아닐까? 아니 내가 과연 아브라함이 맞을까? 그러니 유령에 대한 햄릿의 의심은 지극히 당연한 실존적 상황이다. 저 유령이 과연 내 아버지이긴 한 걸까? 피폐해진 정신이 가닿고 있는 환영은 아닐까? 더군다나 어머니와 삼촌을 복수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는 저 유령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서로를 짝으로 품은 숙부와 어머니를 진즉부터 의심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한 굳이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진실들이 있지 않던가. 내 의심이 맞을까 봐서 두려워 차라리 그냥 묻어 두고 싶은 불편한 진실들. 햄릿의 어떠한 선택도 폐륜의 범주인 것이 딜레마였다.
클로디어스가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며 신께 용서를 구하던 순간이, 햄릿에겐 절호의 기회였지만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햄릿의 변은 이렇다. 악을 악의 상황 속에서 처단하여,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확실히 파멸시키겠다는 것. 신께 죄를 고백하던 성령의 순간이 아닌, 악의 본연을 드러내는 복수가 정당화되는 순간을 기다리겠다는…. 이는 당장을 외면하고 싶은 우유부단으로 보아야 할까? 때를 기다리는 치밀함으로 보아야 할까?
“다들 햄릿이 자기를 위해 쓰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 책은 나를 위해 쓰였다.”
시인 에드워드 토마스의 어록은, 《햄릿》을 읽은 독자만큼의 햄릿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로버트 윌슨의 평으로 잇대자면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 가장 사실적이고 현대적인 작품이며, 다른 어느 극작품보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정신과 삶, 그리고 우리 자신의 시대의 정신과 삶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작품이다.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는 행동의 적극성 여하에 따라 인간을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구분했다. 햄릿에게 따라붙는 수식은 '사색적이고 우유부단한'이다. 'To be, or not to be'의 독백을 두고 많은 이들은그의 우유부단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곡절의 순간마다 그 정도의 갈등과 고뇌는 겪고 사는 우리네 삶이기도 하지 않던가. 더군다나 폐륜과 폐륜 사이에 놓은 진실을 마주한 햄릿의 입장을 우유부단으로 단정할 수있는 일일까?
오델로
오델로의 신임이 두터웠던 부하 이아고가 오델로를 파멸로 몰아간 원인은, 부관의 자리를 두고 카시오에게 밀린 인사 문제였다. 이아고는 오델로의 부인과 카시오 사이에서 마치 부정한 연정이라도 싹트고 있는 양꾸며 낸 거짓말로 오델로를 속인다. 오델로의 아내 데스데모나는 집안의 반대를 무릎 쓰고 오델로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택한 정숙한 아내였다. 그러나 이미 불신이 싹트기 시작한 오델로에게, 사랑하는 남자 때문에 아버지를 저버릴 수 있는 여인은 남편 또한 저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했다.
기품과 용맹으로 존경받던 오델로가 어찌 이리도 쉽게 의처증 환자로 전락했을까? 의처증 환자의 대부분은 자신에게도 불륜의 욕망이 있는 경우이다. 즉 배우자에게서 자신의 욕망을 읽어 내는 것이다. 오델로의 경우는 배우자에게서 자신의 열등감을 읽어 낸 경우이다. 오델로는 흑인이다. 그는 결코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열등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의 승화가 이루었을지언정, 백인 중심의 시대와 사회에서 열등감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자신과의 결혼을 반대한 데스데모나 집안이다.
사랑에 흑백의 구분이 없었던 데스데모나의 고결함도, 오델로의 열등감 앞에서는 결국 흑색을 두드러지게 하는 백색이었다. 불륜의 상대로 의심되는 카시오 역시 백인이다. 이아고의 간계는 오델로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약한 고리를 건드린 것이다. 열등감에 잠식당한 사랑은 결국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하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더욱 비극적인 결말은, 너무 뒤늦게 오델로에게 도래한 진실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등장인물들의 결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시인 새뮤얼 존슨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삶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가 지닌 결함이 우리 삶을 이루는 주요 함수인지도 모르겠다. 그 결함이 잠재한 비극의 가능성이 현실화 되는 빈도수가 날로 증가하는 오늘날에,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은 보다 적나라하게 우리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델로의 열등감과 맥베스의 야욕, 리어왕의 오만, 그리고 햄릿의 숙부와 어머니가 품었던 욕정. 그들은 곧 우리의 분열증인 경우는 아닐까? 때문에 그 비극들에 더욱 격하게 공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