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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수(遼水)는 지금의 요하(遼河)가 아니라, 조백하이다(2)
◉수양제기 침략할 당시의 요수도 조백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영양왕조의 기록을 보면,
영양왕 22년(AD 611년) 수양제는 조명을 내리기를 “고구려는 무리가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崇聚),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를 침범하였다....나는 풍속을 살피러 유주와 삭주에 순행을 왔으니 이에 고구려의 죄를 물으려 다시 올 수 없다...아름다운 땅 낙랑과 현도 및 요동이 지금 오랑케 고구려의 땅으로 되었다.”라고 하였다.
***참고: 위에서 수양제는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을 점령해 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또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다고 하며, 말갈의 무리와 요서(遼西)까지 침범하였다고 분개한다. 삼국사기에도 영양왕이 말갈과 함께 요서 지방을 공략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영양왕이 점령한 갈발지간과 요서지방은 어디일까?
갈발지간(碣渤之間)이란 지금의 갈석산 서쪽에 위치해 있던 낙랑군 갈석현(碣石縣)을 말하는 것이며, 발(渤)이란 당시 유주(幽州)의 발해군(渤海郡)을 말하는 것이다. 이 지역을 고구려가 빼앗고 있다고 한 것이다. 이는 고구려 영양왕 때 이미 만리장성의 안쪽 평주(平州) 전 지역인 낙랑, 요동을 점령하고 유주에 속한 발해군과 현도군도 오랑케 고구려의 땅이었음을 조서에서 밝히고 있다. 평주의 전 지역과 유주에 속한 일부 군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이후 고구려의 영토이었다.
또 수양제는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누방), 2) 장잠(長岑), 3) 명해(溟海), 4) 개마(蓋馬), 5) 건안(建安), 6) 남소(남소), 7) 요동(遼東), 8) 현도(玄菟), 9) 부여(夫餘), 10) 조선(朝鮮),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 수나라 우 12군의 진격로>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黏蟬), 2) 함자(含資), 3) 혼미(渾彌), 4) 임둔(臨屯), 5) 후성(후성), 6) 제해(提奚), 7) 답돈(답돈), 8) 숙신(肅愼), 9) 갈석(碣石), 10) 동이(東𦖮), 11) 대방(帶方), 12) 양평(陽平)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위의 수양제 고구려 침략경로를 보면 좌12군 7번째 침입경로에 요동(遼東)이 있고, 8번째 경로에 현도(玄菟) 10번째 조선(朝鮮), 11번째 옥저(沃沮), 12번째 낙랑(樂浪)이 있었고, 우12군 4번 째는 임둔(臨屯), 11번째는 대방(진번)이 있었다.
수위 한무제가 설치했다고 하는 한사군인 낙랑, 현도, 임둔, 진번(대방)이 모두 한반도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에 있었고, 수양제의 최초 공격 목표 지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요수가 조백하로 추정되며, 조백하 부근에 요동, 낙랑, 현도, 진번(대방) 및 옥저가 밀집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의 한국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요동이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이라거나, 현도가 압록강 변이라거나, 조선이 평양이라거나, 낙랑도 평양이라거나, 옥저가 함경도라는 주장, 임둔이 원산과 강원도 북부라는 주장은 결코 용납될 수 잆다. 어떻게 한국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해괴한 지역으로 수양제가 침략경로최초 목표를 삼았겠는가?
수양제의 우12군 진격 경로에도 첫 번째 점선(黏蟬: 점제는 이병도가 잘못 읽은 것),이 나온다. 이병도는 그의 책자 국사대관에서 점선(黏蟬: 점제)이 평안도 용강지역이라 하면서 점제현(秥蟬縣) 신사비 사진을 게재하였다. 이병도는 일본인들이 기만적으로 요서지방에서 뜯어다 옮겨 설치한 점제현 신사비를 일본인들의 주장그대로추종하고 뒷받침 해 줌으로써 오늘날도 점제현이 평안도 용강 지방이라고 확정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이다.
점제현신사비는 한자 그대로 ”점선현(黏蟬縣) 신사비로 읽어야 마땅하다. 이병도는 “점선현 신사비”를 “점제현 신사비”라고 왜곡한 토를 달았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라. 수양제의 우12군 진격 경로 첫 번째 경로는 점선(黏蟬)이지 점제黏蟬)가 아니다.
또 이 점제현은 만리장성의 안쪽 낙랑군의 속현(屬縣)이고 조백하 부근의 지명이ㅇ서 수양제 침략 목표가 된 것이므로 이병도가 일본인들의 날조한 것을 그대로 추종하여 평남 평강지역이 결코 아니다. 점선현은 평안도에 존재한 사실이 역사적으로 전혀 없다.
또 수양제의 침략경로 우12군 4번째 분명히 임둔(臨屯)이라고 적혀 있다. 한국의 역사학자라는 자들은 무슨 근거인지 함경도 원산 지역과 강원도 북부 지방에 임둔군이 있었다고 하며, 한사군 지도에도 그렇게 표시하고 있다. 어떻게 수양제가 원산이나 강원도를 고구려 침략 최초 목표로 사용할 수 있었겠는가? 임둔은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이 분명하다. 임둔은 강원도에 설치된 사실이 역사적으로 전혀 없다.
그뿐이랴 우 12군 10번째의 길이 동이(東𦖮)이었고, 11번째 길은 대방(帶方)이었으며, 12번째 길이 양평(陽平)이었다. 이병도는 진번군고(眞蕃郡考)에서 해괴한 논리를 제시하면서 동이를 황해도 황주 지방이라 하였고, 대방도 황해도와 경기도 지방이라 하였는데, 참으로 해괴한 논리이었다. 동이와 대방은 수양제 침략경로에 있었고,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이었다.
그뿐이랴 수양제 침략경로 우12군 12번째에 위치한 양평 역시 “양평은 요동의 속현으로 금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後漢書 李賢이 註)”고 하였는데, 이 지역은 지금의 진황도시 부근이고, 요동군도 이 지역에 있었음을 역사 기록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위와 같은 역사적 기록을 볼 때 고구려의 국경지역은 수양제의 조서 그대로 낙랑과 현도 및 요동을 비롯하여, 지금의 조백하인 요수(遼水) 서쪽의 요서 지역인 갈발지간(碣發之間: 낙랑군 갈석현과유주 발해군 지역)과 요수의 동쪽 지역인 요동을 비롯한 수양제 침략경로 24개 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혹시 사람들은 고구려가 당시의 요수(遼水)인 지금의 조백하 서쪽인 갈발지간(갈석과유주 발해군 지역)과 요동을 비롯한 24개 침략 경로를 모두 점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19대 광개토왕 때 이미 평주를 공격하여 평주의 숙군(宿郡 : 치소가 있던 군)을 점령하였다. 20대 장수왕 24년(AD 436년) 북연왕 풍연이 고구려에 항복하였으며, 이후 중국의 혼란기가 계속되었고, 장수왕 50년(AD 462년)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을 보내 양국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이후 중국은 남북조 시대에 혼란이 계속되었으므로 이 시기에 고구려 국경은 요서지방까지 확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남북조 시대 화북 지방에서는 북방 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후위, 북제, 북주가 차례로 건국되었다가 수에 의하여 통합되고, 수는 다시 강남의 진을 병합하여 오랫동안의 분열 시대를 끝맺고 중국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AD 589년).
그러므로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경로 24개 지역이 고구려 서쪽 국경 지역이고 지금의 조백하인 요수를 중심으로 서쪽의 요서와 동쪽의 요동을 모두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었음은 삼국사기 기록이 올바름을 보여준다.
수양제가 즉위 22년 차인 고구려를 침략한 영양왕 22년(AD 611)은 『수경』을 저작한 역도원(郦道元, 472~527년)이 죽은 후 불과 84년 후이므로 역도원이 기록한 요수(遼水)와 수양제가 건넌 요수는 같은 요수이다.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삼월에 당태종이 정주에 다달아 시신들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예전 중국의 땅이었으나, 수양제가 4번이나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였으나 능히 소득을 얻지 못하였다(三月 帝至定州 謂侍臣曰 遼東 中國之地 隨氏 四出 而不能得)”
위의 기록을 보면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경로 좌12군 7번째의 침략 경로에 있었던 요동성조차 수양제는 함락시키지 못한 채 평양성을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한 영양왕 22년(AD 611) 2월에 요수에 도착했고, 약 5개월이 지난, 6월 말에야 겨우 요동성 남쪽에 도착하였지만, 도저히 요동성을 함략하지 못하였다. 수나라의 여러 장수가 출동하여 압록수에 도착하였는데, 압록수(鴨淥水)는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 아니다. 강 이름의 한자도 다르다. 이때의 압록수는 당시 요동성 부근이어서 역사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요동성도 함락하지 못한 수양제의 군대는 1달이 못된 7월 평양성 근처까지 진격하여다가 7월 살수로 후퇴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조백하 부근의 요동성도 함락 못한 수양제 군사가 어떻게 천리가 넘는 평양까지 진격한 후 살수까지 후퇴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당시의 압록수나 평양이나 살수는 모두 요동성 가까운 지역에 있었던 점을 역사학자들은 밝혀야 한다. 고구려군에 패한 수나라 군사들이 하룻밤낮 사이에 압록수(鴨淥水 )까지 4백 오십리를 도망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압록수는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고, 청천강에서 4백 오십나 떨어진 곳도 아니다.
이상에 살펴본 바와 같이 수양제의 군사들은 결코 지금의 평양 가까이 간 사실이 없고, 요동성에서 4백 오십리 정도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고 보아야 한다. 또 수나라의 수군도 패수(浿水)를 60린나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 근처에 다다르고 고구려군과 싸우다 대패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평양은 대동강을 60리나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지 않다.
◉ 당태종이 침략할 당시의 요수도 조백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당시에도 수양제의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선 시기 혼란기가 계속되었으므로 전술한 수양제 침략 경로 24개 지역은 모두 고구려 국경 지역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당태종이 건넌 요수 역시 곽도원(AD 472~527년)이 저술한 수경주(水經註)에 기록된 소요수와 대요수가 합쳐진 요수(遼水)가 분명하며, 이 요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지금의 조백하임이 분명하다.
보장왕 3년(AD 644) 당태종은 유주와 계주(지금의 천진시) 등지를 순행하면서 고구려 연개소문의 죄를 요동과 갈석에서 묻겠다고 하면서 1차 고구려 정벌계획을 밝힌다. 이듬해(AD 645년),
이세적이 군대를 몰고 통정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玄菟)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영주도독 장검은 요수를 건너 건안성을 격파하였다고 하였다. 5월에 이세적이 현도성을 함락시고 남녀 8천명을 모두 죽였다고하였다. 이후 요동성에 도착하였고, 당태종은 요택 늪지대를 지나고 요수를 지나 요동성에 다다른다. 당태종은 말하기를 수양제가 4번이나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요동성 조차 빼앗지 못했다고 기록된 지역이다.
이상의 삼국사기 기록을 검토해 보면 이세적의 군대는 장안에서 직선 거리로 가깝고 물이 얕아 건너기 쉬운 요수의 상류를 건넜을 것이다. 이 요수는 수경주(水經註)에서 고구려 오랑케의 땅이며, 예전의 고구려 현(高句麗縣)이 있었고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인 지역일 것이며, 소요수가 발원하는 지역에 현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기록은 현도가 압록강변 지역이 아니라, 고구려 서쪽 국경 지역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현도(玄菟)는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경로 좌 12군 8번째의 침략 경로에 있어서 이세적이 함락시킨 현도는 압록강변이 아니라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 조백하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 북경시(北京市) 경내를 흐르는 주요 하천은 영정하(永定河), 조백하(潮白河), 북운하(北運河) 및 거마하(拒馬河) 등이 있어 모두 발해만으로 유입된다. 수경주에 우북평(지금의 북경시)을 지나는 강이 대요수, 소요수 패수 등 여러 강이 있는데, 북송 때 기록된 무경종요(武經宗要)에 조선해가 북경 동북쪽 고북하를 지나는 조선해라는 기록은 지금의 조하(潮河 )와 일치하고 이 조하가 백하와 합쳐져서 갈석산 부근의 왕검성이던 험독을 지난다는 사실도 요수가 지금의 조백하일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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