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서 열흘을 보내고 6/20일에 스코틀랜드로 기차 이동을 한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 아침에 일찌감치 역으로 나와서 전광판을 한참 들여다보고 시간을 맞추고 벤치에 앉아서 기차가 들어오는 시간을 체크 한다.
나이 듬에 따라서 세상을 들여다보는 눈치도 함께 쌓이는 법이니 전광판을 가끔 들여다 보면서 이리저리 통박을 굴러서 탑승을 잘해야한다
물론 한국서 기차 티켓을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데 예약 안하면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비싸진다
기차 안에서도 가끔 가방을 통째로 분실하는 사례들이 있어 이렇게 자전거 자물쇠를 이용하고 편하게 쉰다
내것을 가져가봤자 냄새나는 옷 몇 벌이지만 살려면 귀찮다
에든버러는 영국 스코틀랜드 수도이자 제2의 도시다
규모는 영국 제7위 규모.
2022년 기준 인구는 53만 990명이다. 면적은 264km2.
우리나라 면적이 223평방키로이니 남북한 보다 조금 크다
나는 여기서 4일을 할애했다
영어와 스코틀랜드 어로는 Edinburgh,
"이든의 성"이라는 뜻이다. 현 에든버러와 인근 지역은 로마시대부터 Eidyn이라고 불렸으며 캐슬 록 위에 세워진 에든버러 성에서 그 명칭을 딴 것.
현지에서는 '에딘브라' 혹은 '에딘브러' 라고 발음.
세개의 별명으로는 '북방의 아테네', 또는 '북방의 로마', 얼드리키
'북방의 아테네 (Athens of the North)'라는 별칭은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명문 대학 든버러 대학교를 중심으로 애듬스미스, 데이비드 휼을 비롯한 많은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활약했던 도시라 생겼다.
에딘버러 구시가지가 언덕 위에 마치 고대 그리스 폴리스처럼 지어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칼뱅주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John Knox)를 중심으로 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중심지로 개신교의 교파 중 하나이자 한국에서 가장 많이 믿는 장로회(Presbyterian church)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북방의 로마 (Rome of the North)'라는 별명은 에든버러 시의 지리에서 비롯한다. 로마가 7개의 언덕을 끼고 세워진 도시인 것처럼( 작년에 로마를 소개할 때 많이 설명했다) 에든버러 또한 7개의 언덕을 끼고 생긴 도시라는 것이 그 이유.
'얼드 리키 (Auld Reekie)'는 스코트어 별명으로 '.
"오래되고 연기나는" 혹은 "오래되고 냄새나는" (...)이라는 뜻이 된다.
두 어원 모두 에든버러의 산업혁명 시대와 연관이 있는데, 전자는 에든버러의 많은 공단들에서 나오는 연기를 두고 한 것, 그리고 후자는 그 공단들로 인한 오염으로 인해 생긴 끔찍한 냄새를 두고 생긴 것이다.
이곳은 일찌기 브리튼인들이 살던 곳이다.
브리튼인들은 로마인과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 섬에 오기 전까지 잉글랜드 전역과 웨일즈, 현 스코틀랜드의 로우랜드에 퍼져 살던 켈트족의 일파이다. 또 다른 켈트족 일파인 픽트 족은 현 에든버러 북부의 포스(Forth)만 건너편과 현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에 살았다.
이 지역에 살던 브리튼인의 왕국인 고드딘(Gododdin)은 600년 즈음에 현 에든버러 성이 있는 언덕 위에 요새를 짓고 Din Eidyn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에딘버러의 시작이다.
7세기에 이곳을 지배했던 데이라 왕국의 왕 에드윈이 여기에 성을 지어 에드윈의 성이란 뜻의 에든버러가 됐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지만,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요새와 그 주변에 형성된 마을 이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변화했지만, 'Eidyn'은 끝까지 남아 후일 중세영어로 요새를 뜻하는 -burgh와 합쳐서 지금의 에든버러가 된다.
7세기 잉글랜드 북부에 앵글인들이 세운 노섬브리아왕국은 이쪽 지역으로의 영토 확장을 꾀했고 결국 7세기 중반 고드딘 왕국은 멸망한다. 이후 300년간 에든버러는 앵글로색슨족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 사이 브리튼 섬 북부에 살던 픽트족과 브리튼족, 게일족, 바이킹 일부가 스코트족에 흡수되면서 스코틀랜드라는정체성이 생기고 10세기가 되어 스코틀랜드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14-15세기 이래 스코틀랜드의 수도였으며, 1999년 이후부터 스코틀랜드 자치의회(Scottish Parliament)가 위치한다.
주요 건물로는 에든버러 성,홀리루드 궁전, 에든버러 동물원, 왕립식물원, 그리고 에든버러 대학교의 올드 칼리지와 뉴 칼리지 건물 등이 있다.
13세기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가 공격해 들어가면서 펼쳐지는 영화 Braveheart,
스코틀랜드 전사로 실존인물 윌리엄 월리스의 혈투끝에 포로가 돼서 사지가 찢어지는 형벌, 상상해본다
아래 동상,
이를 잠시 소개하자
애덤 스미스( Adam Smith,1723~1790년) 는 스코틀랜드출신의 영국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 보이지 않는 손의 저자이다.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심화를 제공했다고 한다
애덤 스미스는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애덤의 부친은 스미스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
4살 경에 일단의 집시들에게 납치되었지만 삼촌에 의해서 구출되어 모친에게로 돌아왔다.
스미스의 전기 작가인 존 레이는 장난스럽게 애덤 스미스는 별로 쓸 만한 집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첨부한다. 스미스의 부친은 연합조약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 해안에 밀수가 급증한 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것을 지켜본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거짓됨의 참람함을 깨닫고 정부의 법과 규칙을 강화하는 방법 즉, 관세보호 등을 찾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국부론’을 쓰는 계기가 된 것이다.
14살에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 1740년 옥스포드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 1746년에에 자퇴하였다.
1751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1750년 데이비드 흄을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776년유명한 ‘국부론’을 발표하여, 국가가 여러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않는 자유 경쟁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 '에 의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발전된다고 주장하였다.
1787년 글래스코 대학 학장을 지냈다. 그는 영국 정통파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윤리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시장 경제야말로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으며, 사회의 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할 수 있다고 보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그는 시장의 가격은 공정한 룰안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시장의 적절한 가격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독점이나 제3자의 개입에 의한 어떤 것도 반대하였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통한 자유무역과 노동분업이 왕이나 군주보다는 보통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의 중앙계획경제 체제에서는 정치권력이 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데 반해 시장경제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위정자들, 범법자들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가치론,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만큼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그의 '노동가치설'이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부가가치는 노동 일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마르크스와 달리 애덤 스미스는 가치척도 수단으로서의 노동 가치에 주목했다.
애덤 스미스는 금가치가 불안정한 시대여서 각국 간 생산물 가치를 금같이 불안정한 측정수단보다는 안정적 척도인 노동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마르크스가 애덤 스미스를 비판하고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판 노동가치설을 주창하였고 결과적으로 애덤 스미스가 잉여가치론에 큰 영향을 준 셈이다.
스미스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적 사상은 영미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가진 시장중심의 철학은 시장경제라는 형태의 산업혁명의 기초를 낳았고 가격이 생산의 동기를 주는 가격은 시장이 결정한다라는 보이지 않는 손의 철학을 만들어 냈다. (나중에는 다른 이론이 입증되어 이 이론은 거의 사장이 되었다고 하지만 )
그의 국부론이 마르크스의 잉여 가치론에 큰 영향을 줬다는 것과,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도 어떤 형태로든 노동의 결과물을 보수로 받는것에 대한 설명에는 일관성을 잃는 점이 있다는 부분을 주목.
마르크스의 잉여 가치론은,(이 부분 공부를 더 하기로 했다)
노동자 또는 노동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하면 ,
초과된 잉여가치 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의 결과물은 100% 자본가에게 귀속 된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혹자들은 애덤 스미스를 보수 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애덤스미스는 위에도 서술 되어있듯, 독점과, 제3의 존재 개입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일정 부분의 자유는 사회와 국가의 존립을 위해 일정 부분 통제되어야 하며 반드시 자정 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사회적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는 선순환적 작용으로서 군주국이나, 계급사회에서 일반적인 사람들도 경제적 안락을 누릴 수 있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마저도 신분이나 출생, 성별, 인종, 연령, 계급 등의 이유로 박탈하는 사회구조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일정부분 사실로서 증명되었고, 일정 부분은 부정적 요소 즉 자본 만능주의가 잘못 사용되었을 경우 특정 집단의 대다수가 자본 잠식 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특정 권력층에 권력과 자본이 몰려 있을 경우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설명하는 부분이 없다.
또한 자본시장을 통제하는 자들과 정치의 결탁을 일정 수준 이상 견제하지 않으면 기형적이고 더욱더 계급화된 사회상을 갖게 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이론은 일정 부분은 오류가 있는 듯 하다.
과거 시장이 있었든 곳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가 합쳐진 문장으로 보인다
도착과 함께 숙소 주변의 오래되고 낡은 교회들 구경을 마치는데,
교회가 신도가 줄어드니 유지불가로 개인에게 팔려서는 여러가지 상가로 변신한 것들도 있다.
내일은 유명한 에든버러 성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