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 중에 죽음처럼 무겁고 심각한 일은 없다. 더욱이 사사로운 죽음이 아니라 공적인 죽음이라면. 그런데 공적인 일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개인이 막중한 공적인 이유를 표방하고 죽었다면 참으로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런 일이 있었다.
작년에 허세욱이라는 택시기사가 분신자살을 한데 이어 최근에 이병렬이라는 노동자가 또 다시 분신자살을 했다. 두 사람 다 오늘의 세상에서 쏠리고 몰린 별 볼이 없는 홀 몸뚱이 인생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FTA 반대’.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등 거창한 주제를 내걸고 분신자살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놓고 공감을 느끼기 보다는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허세욱 씨가 분신을 했을 때도 FTA 때문에 분신자살 까지 할 일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이 거창한 명분을 걸고 분신을 한 것을 보고 혹자는 정신이 불안정 한 사람, 중졸 출신으로 배운 게 없는 사람 등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했다. 나는 이런 많은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정용섭 목사를 떠올린다. 왜냐하면 그가 여러 번 이 문제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나는 조헌정 목사의 설교비평에 대한 반론에 대하여 정 목사가 편 반론 가운데서 허세욱 씨의 죽음을 평한 최초의 글을 읽었다.
"FTA 반대집회에 참가했던 어떤 택시 기사 분이 분신하신 적이 있습니다. 죽음을 선택한 그분의 심정을 저는 감히 평가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일에 생명을 바칠 수밖에 만든 어떤 악한 힘이 그에게 작용한 거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 건 분명합니다. 생명을 던질 만한 사안이 아닌 것에 생명을 걸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악한 힘의 작용일 테니까 말입니다."
허 씨는 53 년생으로 중학교도 졸업 못하고 시골에서 올라와 온갖 굳은 일을 하며 혼자 사는 월 120만원 수입의 택시기사였다. 허세욱 씨는 철거되기 전 봉천동 달동네에 살다가 한국에서 바로 내가 하던 일, 지역의 빈민 활동가를 만나서 비로소 세상에 대한 눈이 떠져 자기를 벋어나 사회와 이웃을 볼 줄 알게 되었고 그 후부터 시민 단체, 민노당 등에 가입하여 회비를 꼬박 꼬박 내며 몸으로 하는 일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다. 즉 풀뿌리 같고 무지렁이 같은 민초가 깨어나는 전형적인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는 충분히 현실에 절망해 있었고 FTA로 인해 앞으로 더욱 무섭게 변화될 세상에서 살아 나갈 힘을 잃었던 것이다. 들의 세계관이 좁았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 받을 민중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그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다. 내가 이런 내용의 글을 썼더니 정 목사는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그분의 죽음 앞에서 너무 화가 나서 견디기 힘들었지요. 제가 과문한 탓인지 FTA 반대 집행부가 고 허세욱 씨의 죽음에 큰 책임이 있다는 사과 성명 같은 걸 발표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제가 집행부의 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집행부는 허세욱 씨의 장례식을 두고도 가족들과 싱경이를 벌였더군요. 저는 목사들이 사회운동을 너무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게 좀 불안합니다. 반 FTA 집행부에도 아마 목사들이 참여한 것으로 아는데요. 군사독재 이후에도 여전히 선악이원론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접근하는 게 말입니다. 다만 저는 FTA 체제가 그렇게 절망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집행부가 왜 그에게 알리지 않았는지가 궁금하네요. 나쁘게 말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운동 사업을 위해서 사태를 침소봉대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
나는 허세욱 씨의 죽음을 바라보는 정 목사의 시각에서 김지하를 떠올릴 수 있었다. 91년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백골단에 타살된 직후 계속되는 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그 때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을 썼고 그 글은 마치 심판의 게임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소리처럼 모든 상황을 끝내버렸다. 게임의 결과는 한 마디로 민주진영이 대패하고 노태우 정권이 승기를 잡았었다. 김지하는 그동안 자신이 쓴 글과 행동에 의하여 일깨어진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갑자기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고 일갈을 해서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싸워나가야 할 세상이 아무리 강고하고, 죽음이 그에 저항하는 강력한 수단이라고 해도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글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었다. 김지하의 일갈은 골방에서 신문을 보면서 얻어맞는 정신적 폭력이었다. 10 년 후에 김지하는 자신이 그 때 많이 아파서 정신과의의 상담을 받을 정도였다고 했지만 그가 준 상처는 너무나 크다. 그러나 당시 그의 글은 많은 이들에게 배반감과 모독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죽음의 굿판'을 벌인 군사독재와 재벌에게 시인이 면죄부를 준 까닭이며 모순에 저항함에 대한 모독이었기 때문이다. 김지하는 모든 생명이 다 같이 존귀하다는 것만 이야기 했지 그 순간 그 모든 생명을 다 같이 존귀하게 여기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와 자연의 시스템이 있다는 상식적인 사실을 외면했다. 김지하는 자신의 생명사상의 근거들 가운데 하나로 최제우의 동학사상을 들었었다. 그렇다면 동학혁명이 일으킨 죽음의 굿판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김지하는 동학교도들의 폭력적인 투쟁의 근거인 동학사상을 근거로 생명사상을 외치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나이가 들고, 늙어가고 마지막 죽음을 맞을 때 자신의 삶에 대해서 혹 어떤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혹은 젊어서 혈기에 왕성하던 생명이 세상사에 찌들어 가면서 눈에서 점점 생기게 잃어가게 되더라도. 살아볼 수 있다는 것, 기회를 가져볼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분신한 그들에게도 생명은 역시 소중한 것이었을 것이다.
80 년대 한창 분신자살이 줄을 이을 때 생활교회에서 상담전문가의 인도를 받아 2박 3일간 외부에 단절하고 공동체 훈련을 한 적이 있었다. 훈련 중에 담요 한 장을 한가운데 놓고 우리 일행 11명이 타고 가던 배가 침몰 하는 것을 가정하고 10 명밖에 탈수 없는 구명보트에 탈건가 말건가 하는 것을 결심해야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인도자의 호각에 맞추어 행동을 하고 보트에 탄 사람은 탄 사람이나 타지 않은 사람은 각기 그이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 프로그램에서 보통 다른 곳에서는 서로 타겠다고 소란을 떠는 법인데 별나게도 우리 그룹에서는 나를 포함한 3명의 잔류 희망자가 남았다. 왜 구명정에 타지 않았느냐는 인도자의 물음에 대하여 평소에도 늘 주저주저하던 강 양은 우물쭈물하다가, 미혼인 김 군은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죽을 사람은 자기 밖에 없을 것 같아서 구명선에 타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막연하게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내가 죽어야 할 것 같아서 배를 타지 않는 편에 남았다. 그런데 인도자는 이런 나의 태도가 목사라는 형식을 벋지 못한 진지하지 가식적인 자세라고 비판했다. 즉 나의 이런 결정은 감정이 이성에 억제된 상태에서 나온 부자연스러운 결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견해에 쉽게 동의를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생명에 대한 애착에 사로잡혀 있는 것만은 아니고 죽을만한 이유가 있을 때는 서슴없이 죽음의 길을 택할 수도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재로 내 주위에서 당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이 피곤하고 힘에 겨워 죽을 기회가 있으면 죽고 싶은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애착을 보이지 않고 서슴없이 죽음을 택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허세욱이나 이병렬 씨 같은 경우도 이런 경우일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신앙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사람들에 대하여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 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 이라고 하니까 대단한 사람들 같지만 다른 성서에는 “이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했다.” 혹은 이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살 가치가 없었다. “ 로 기록되어 있다. 모든 시대에 걸쳐 이런 사람들처럼 산다고 하는 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만약에 이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없고 모두들 목숨이 아까워 바들바들 떠는 사람들만 있었다면 세상은 지금 보다도 훨씬 살벌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언제나 사는 것만이 최선은 아닌 것이다. 산다는 것은 아무리 아름답고 귀중한 것일지라도 허 씨, 이 씨처럼 죽을 만한 이유가 있을 때 죽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깜냥도 안되는 어리고 무식한 노동자가 ‘노동법 준수’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무모하게 자신의 몸을 불사른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 살아 있으면 올해 나와 같이 환갑을 맞이할 전태일이 남긴 몇몇 글 중에 ‘죽음을 결정하던 날’이라는 글이 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명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
1970년 8월 9일의 일기
지금 이 시간에도 이라크, 파키스탄, 아프간에서 자살 폭파가 계속되고 있다. 자기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없는 법인데 그들은 왜 폭탄을 안고 죽을까? 이들의 정치적인 죽음이 종교인들이 가장 귀중한 가치를 두는 순교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종교적 순교 행위는 거룩한 것이고 정치적 자살행위는 부정될 수 있을까?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은 단순한 우발적 감정적 행동이 아니었다. 공생애의 처음도 아니고 예수가 대중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고 있던 정점에서의 행동이었다. 성전은 유대 지배층의 제사장 그룹의 정치, 경제, 종교적 근거였기 때문에 예수의 성전 정화 시도는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 지배계급에게는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9.11 뉴욕 테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사건 직후 유대교 지도층은 예수를 죽이자는 쪽으로 여론이 조성되었다.
예수를 감히 테러분자와 같이 보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방법론에서 비교할 뿐이다. 테러범들이 온몸으로 자신을 던지는 방법과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심”(빌 2:8)과 최소한 원칙은 같은 것이 아닌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것처럼 테러범들은 폭탄을 지고 간다. 테러와 십자가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자기희생이고 차이점은 ‘살리는가? 죽이는가?’이다. 예수는 자기를 죽여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했고 테러범들은 죽으면서 천국에 같이 갈 동창생들을 모집한다. 온 몸에 신나를 끼어 얹고서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면서 노동자의 기본권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희망, 참된 민주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희망,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지고 죽는 것은 인류가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오른 예수의 마음과 다름이 있을까?
정 목사는 그가 운영하는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이명박을 패러디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옮겼다는 죄목으로 단칼에 나를 잘라 버렸다. 물론 그의 방점은 이명박 비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의 비호에 있는 것을 잘 이해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 차이가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이유와 종교적인 이유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노시개(노무현 씹할 놈 개새끼)라는 욕까지 먹었지만 종교 때문에 욕을 먹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무종교인이었고 이명박이 기독교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이다. 대중이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모욕한 것이 아니라 이명박 자신이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욕되게 한 것이다.
90년도엔가 광나루 장로회 신학대학에 신앙 강좌를 하러 갔을 때였다. 그 당시는 총학생회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을 때여서 나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도 학생들의 초청을 받아 강사로 나설 수 있었다. 강연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사미자라는 여 교수와 잠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분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이 가진 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근거로 해서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변혁을 이루는데 큰 에너지가 되기는 하지만 미움은 사랑과 반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사랑으로만이 자랄 수 있는 생명을 파괴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라고 물었다. 나는 짧은 시간에 내 생각을 이야기 할 수 없기에 묵묵히 앉아 있었지만 참으로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에는 이 분이야말로 참으로 문제를 피상적으로 밖에 보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에게는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가득 차있는 것 같이 보이는 화가 난 학생, 노동자 빈민은 증오심에 찬 것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감정은 그 교수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 고상한 음악을 들으면서 좋다고 느끼는 것처럼 춥고 떨리고 배고프고 억울한 사람들이 자기의 아픔을 그대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다만 그 교수는 그런 현실이 자기 현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현실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시끄러운 불협화음으로 들릴 뿐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위장의 상태에 따라서 주위의 사물이 다르게 보이게 되어 있다. 배가 고프면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하여 감각이 예민해지기 쉽지만, 배가 부르면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즉 배의 기름기와 눈의 시력은 비례한다. 기름기가 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사람들의 배고픔, 슬픔, 억울함 등이 정확하게 보이지를 않는다. 허세욱, 이병렬 씨는 기름끼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 민중들이 당할 고통이 자기의 고통으로 느껴진 것이다.
‘6월 항쟁’ 21주년이 되어 미국산 늙은 쇠고기 기름으로 다시 봉화가 타오르고 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한다. 쇠고기 기름으로 봉화가 타오를지언정 부디 다시는 사람의 피가 민주주의의 제단에 뿌려지는 일이 없기를....
첫댓글사미자라는 교수가 신학대학(만약에 좋은 뜻이라면) 참으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 한심하기 그지없는 머저리 같은 콩알 만한 정의감으로, 덕지덕지 배운 지식으로 교수라는 이름으로 밥을 먹고 살고 있으니 그 밑에서 배우면서 사미자라는 교수의 강의보다는 도색잡지에 몰두하는 시간이 더 참되다고 느끼지 못하고 참으로 좋은 강의로구나 하면서 목사가 된 사람들은 뻔하겠군요. 정용섭 목사에게 당한 테러는 그만 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용섭이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 말만 실컷 하고 현실을 모르고 말만 하다가 말로 끝나고 그러고 밥 먹고 사는 애 같습니다. 못 알아 듣고 제대로 목사로서 살아보고 싶어하지도 않고 살짝 뭐
해 놓고 대단한 것 처럼 부풀리고, 남이 떠받들어 주는 걸 즐기고 적당히 돈 벌면서 한 번도 자기를 위험속으로 몰지 않고, 폼만 잡는 목사들 많습니다. 노골적으로 돈 벌기에 혈안이 된 목사는 더욱 많겠지만, 정용섭이는 그냥 말만 살짝살짝 하고 남이야 죽든지 어떻게 되든지 사실은 별 관심이 없고, 에헤헤 ^^ 나 많이 알지? 나 똑똑하지? 그거봐 난 고급이야 ^^ 이러고 먹고 사는 사람 같습니다. 그런 놈들 많지요. 사랑을 말하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 실천안하고 예수를 말하면서 아 예수여~ 글만 달랑 써놓고 여기저기 퍼 나르고 절대 자기가 쓴 글의 예수처럼 절대로 살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예수가 이렇다고 하면서 기부해달라고
뻔뻔하게 잘 말하는 예수 팔아 밥 먹는 신학자와 예수 팔아 밥 먹는 목사님들 많습니다. 사람들이 구분을 못하는 거죠. 정용섭이도 그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모르는 사람은 정용섭이가 최고이고, 철저히 예수를 지적자위행위로만 소모하고 그러고 뭔가 얻은 것 처럼 좋아할 겁니다. 정용섭이는 이제 그만 잊으시는 게 어떠실지요?... 이 정도면 된 거지 하면서 밥 잘 먹고 잘 나가던 차에, 아니 이 지목사란 사람이 누구 밥그릇에 재를 뿌리려고 자꾸 나보고 실천을 하래? 그러다 나 다치면 어쩌려고? 허허, 이 사람 그렇게 안봤는데 아주 무대뽀구만. 예수 팔아 밥 먹는 룰을 어기다니.. 속으로 이리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지요. 남이야 죽는 살든, 내 밥그릇이 예수 팔아 먹기이니 잘 팔아서 나 좀 먹고 살아야 하겠는데, 왜 나보고 내가 쓴 글처럼 나와 내 밥그릇을 일치시키래 하면서 짜증내하는 목사들 신학자들 많습니다. 이런 인간들에게는 화 내는 것 조차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왜 지성수 목사님이 유독 많이 전투적으로 사셨는가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지성수 목사님 수준이 안되는 사람들을, 자꾸 대등하다고 보고 그 사람들에게 기대를 했기 때문에 화도 나시는 것 같습니다. 그냥 멍청이구나 하고 또 멍청이 만났네 하면 되실 것을... 알지도 못할 걸 뭘 일깨워주시려고 ...
누구나 죽는 게 무섭죠. 누구도 죽기 싫어하죠. 약자가 싸워야 하는데 싸울 수단이 없을 때, 아무런 시선도 끌지 못하고 현실이 변하지 않을 때, 자기를 죽여서라도 이 현실을 제대로 봐라. 분실자살은 사실 그런 뜻이죠. "서로 사랑하라" "생명은 소중하다" 끝없는 거짓말들 ... 배의 기름기도 그렇지만, 요즘은 미국이 대량생산한 밀에 에너지보다도 살 찌는 성분이 많아서.. 싸구려 고기 조금과 밀 왕창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배 나오고, 부자들은 몸짱이고 날씬한 세상입니다. 그들은 마음과 양심과 정신에 기름끼가 껴서 세상을 보지 않겠죠. 이미 돈 맛을 봐서, 자꾸 맛있는 게 당겨서, 쓴맛을 거부하겠죠. 입으로는 쓴맛을 말하면서.
예수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나처럼 살아라. 그의 생 마지막에는 분실자살같은 십자가에 매달려 고문당하다가 타살당함이 나와 있습니다. 살고 죽고 어떻게 사는 것은 자유이지만, 원 예수교의 가치를 자신이 겁나서 훼손하고 적당하게 해석하거나, 남들을 야만인이나 무지한 이로 몰아붙이며 자기의 비겁을 정당화해서는 안되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는 나처럼 살면 좋은 날은 결코 없거니와, 알면서도 죽을 때 까지라도 약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라고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몸으로 보여주셨죠. 예수를 믿으며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삶의 자리가 다르다"라는 것은 참 무섭고 엄숙한 것이지요.. "분신자살"을 한 사람의 처지와 마음자리를 들여다보고 공감할 수 업다면, 그 "분신자살"을 놓고 말하는 것은 참 말이 안 되것지요... 그나저나, 잘난 김선비나 어리숙한 삼돌이나 다 같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세상이 어서 오기를..
아마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왜냐하면 삼돌이야 김선비랑 놀고 싶겠지만 김선비는 삼돌이같은 무지렁이가 가까이 오는 것조차도 싫어할 것이기때문에...하지만 진정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서로가 낮아진다면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종교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반대되는 주장과 삶을 살고있으니...먹사교는 이래저래 반드시 깨부셔져야할 악성 암덩어리이지요...
지목사님 글에 꼭히 딴지를 걸자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테러리스트의 살인을 같이 비교한 것입니다. 님도 그 오류를 아시기에 미리 설명을 한 것같습니다마는, 어쨋든 저 둘은 전혀 비교조차도 할 수없는 다른 것이 아닐까요? 한분은 모든 모순과 폭력을 스스로의 한 몸에 받아내었고 테러리스트들은 스스로 죽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을 죽이는 것이니까요...전혀 같이 비교할 수 없는 것을 같이 비교하는 것은 예수님에대한 매우 심한 모독이겠기에 그저 몇자 적습니다....
이슬람테러리스트들의 문제점들은 분명히 있지만, 그들로 인해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이고 부정확한 정보들로 이슬람을 왜곡하고 편협하게 바라보는 것 역시 무서운 일인듯 합니다.. 사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전도랍시고 많이 죽였고, 그걸 숭고한 일이라고 떠받들었겠지요... 그리고, 이제 와서는 이슬람을 폭력의 종교라고 하는 건 자기들의 과거를 모르는 무지한 짓일 터이고...; 아무튼, 서로 평화롭게 같이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것지요..
우리가 과거를 참고 삼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언제까지 과거만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 기독교가 종교의 이름으로 나쁜 짓을 많이 했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러한 문제는 그리 심하지 않은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오늘 바로 이순간에도 종교의 이름으로 잔인한 폭력을 행하며 전세계를 이슬람화하겠다는 미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문제를말하는 것입니다.
일정부분 동의합니다. 다만, 드러난 이슬람의 폭력성이 이슬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제한된 정보로 판단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 이슬람쪽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기독교는 비폭력적일까요? 전혀 아닐 겁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어느 종교에나 폭력적인 분파들은 있지요. 그리고, 현재 이슬람권은 서구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여겨 방어적인 측면에서 폭력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고, 서구권은 이슬람을 폭력적인 사회로 몰고가는 경향이 있지요. 아무튼, 쉽지 않군요. 웃긴 건, 미국에서 이슬람교도가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 종교자체가 큰 문제라기 보다는 폭력적인 정치세력과의 결합이 문제인듯..
samllgarden님, 님이 "이슬람쪽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기독교는 비폭력적일까요?" 라고 물었는데 어떤 폭력을 말하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해줄 수 있나요? 제가 요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이슬람교인들이 하듯이 햇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이 과거 기독교의 잘못에대한 반사적인 반응으로 오늘날의 이슬람교에대해 비현실적인 환상을 갖고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합니다. 네덜란드에서 이슬람 여성의 문제를 들춰넸던 고호라는 사람은 이슬람 청년에 칼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고 그 정보를 준 여성은 지금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호메트를 희화한 그림을 보고 전 이슬람 국가들이 미친듯이 소란을 일으킨 적도 있지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에수님에 대해 더한 모욕을 하고 희화화를 해도 그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래도 그 다른 것을 모르겠나요? 저러한 모든 것이 정치경제적인 문제인가요? 어떤 분이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자고 하셨는데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 그차제가 문화의 핵심적인 부분이며 문화를 형성하는 주 요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러한 폭력적이고 비판에 대해 불관용적인 이슬람 문화의 원인을 이슬람교에서 찾는 것입니다.
님들과 저는 현재 일어아고 있는 같은 사건들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기독교인이기때문에 이슬람교를 인류의 재앙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는 행태를보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님들의 그러한 현실에 대한 다른 해석들이 종교다원주의에 충실하고자하는 이념적 열의로 인한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이슬람도 변할 수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슬람의 그 폭력성과 잔인함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정치경제적으로는 보지만 종교적인 시각에서는 보지말자는 것은 오류일 것입니다.
님들이 그래도 기독교적인 문화가 강한 호주에서 이렇게 기독교를 비판하듯이 님들이 이슬람문화권에서 이슬람을 비판한다면 님들이 갖게될 반응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혀를 자르는 잔인한 처형일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 비판하면 죽이겠지요. 저는 혀를 자르는 사진과 죽이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자 이래도 그 문제를 못보시고 이슬람교에는 문제가 없는데 기독교국가들이 탄압을 해서 그 사람들이 그런다고 할 것인가요? 만일 그정도로 현실에 눈을 감고 말씀을 할 정도라면 더이상의 대화의 가치자체가 없겠지요...
smile 님! 암살당한 레바논 대통령의 딸이, 세월이 지난 후, 미국의 CNN쪽인지 History 채널쪽인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했던 대답이 참 인상적이더군요. "당신의 아버지는 종교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보느냐?" "아니다, 종교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정치가 나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레바논에서 기독교쪽과 이슬람교쪽은 어쩔 수 없이 서로 공존을 하며 살고 있지요. 물론, 이전에 1960년대인지 70년대인지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레바논 내의 기독교측이 이스라엘쪽과 한통속이 되어 비기독교인들을 대량학살한 적도 있었구요. 그리고, 돌과 칼이 아닌 총과 미사일로 죽이는 것도 폭력이지요.
제가 이슬람의 폭력에 눈을 감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내모는 상황을 함께 고려하자는 것이지요. 이슬람의 폭력에는 그렇게 치를 떨면서, 이스라엘과 서구의 기독교국가들의 무력행위에 대해선 크게 문제제기를 하지 않지요. 그리고, 이라크에서 미군이 하루 몇명 죽는 것은 미국인들이 슬퍼하기라도 하지만 이라크인 수백명이 죽는 것은 그냥 잠시 뉴스거리랍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인들이 나쁜놈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게 우리의 대체적인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이슬람권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실존의 세계의) 사람들을 사람취급하지 않고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그냥 단순히 폭력적인 사람들이라는 딱지만 붙이겠지요.
samllgarden님, 저는 님이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오해하시는 것같군요. 레바논문제는 청지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적을 한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심지어 같은 이슬람인들에대한 이슬람인들의 그 무분별한 테러와 여성억압, 비판자들에대한 전반적인 이슬람교인들의 폭력성과 생명경시등을 말한 것입니다. 즉 정치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의 내부에 있는 그 폐쇄성과 폭력성을 말하는것입니다. 님이 레바논의 정치분쟁을 통해 이슬람의 그러한 전반적인 행태를 변호할 수있다면 한번 해보세요... 제가 기꺼이 배우겠습니다. 부디 오해없으시기를...
레바논의 정치분쟁이 단순히 정치만의 문제일까요? 정치인들이 종교를 폭력적으로 이용하고 있지요. 그리고, 사실 종교는 정치와 분리될 수 없겠지요. 개인적으로 심화되지 않은 종교가 악한 정치와 결합될 때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겠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이슬람의 폭력성이 압도적이라면 "미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가 이슬람교"라는 사실을 설명하기가 참 어렵겠지요..
"기독교비판하듯이 님이 이슬람문화권안에서 이슬람을 비판한다면 어떤 일이 님에게 생기겠습니까? 자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되묻고 싶군요. 이슬람권의 폭력적인 문화 말고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나요? 이슬람권이 직면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급한 것이 무엇일까요? 비판의 자유일까요? 아니면, 안전보장과 생존권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다만, 이슬람권은 폭력적이다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만큼이나 이슬람권 사람들에겐 기분나쁠 것 같군요.. 그들이 나쁜 관습을 고칠 수 있도록 돕는 길은 다양하겠지요. 그럼, 이만 총총.
이제 님은 독재를 비호하는 단계에 까지 가셨나요? 집단의 안전을 위해 비판을 억압하는 것은 독재자들와 전체주의자들이 인권탄압을 위해 쓰는 보물같은 핑계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슬람의 모든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내부에 있는 폐쇄성과 폭력성을 지적하는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의 인류문명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면 안되나요? 비판하면 큰일이 나니 또 자존심을 상하게하니 그것도 하지 않아야하는 건가요? 어쨋든 님과의 토론은 이만해도 되겠지요? 더 이상 의미있을 것같지도 않으니...
smile 님! 이의신청 정당하다고 생각 합니다. 이슬람의 테러 행위가 위험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분석하는 시각에는 좀더 깊이가 요구된다고 봅니다. 이슬람의 테러행위가 미국지배의 세계질서에 유일한 안티테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할가요? 또 역사상 최초의 자기를 죽이는 전쟁을 첨단무기로 이길 수 있을까요? 제가 호주에서 만나는 많은 무슬림들은 그들을 심정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지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정치적인 면도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문제삼는 것은 그보다는 더 근원적인 것같습니다. 곧 이슬람이라는 종교로 만들어진 그 폐쇄적이고 관용이 없고 폭력적인 문화 그 자체입니다. 만일 지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해 하는 이의제기를 같은 식으로 이슬람교에 했다면 제가 보기에 지목사님께 닥칠 그 결과는 뻔합니다. 그것은 고통스런 죽음이겠지요. 그것이 제가 보기에 문제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정치적인 저항은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볼때 이슬람교의 문제는 정치와 상관없이 그 종교 자체의 패악성입니다.
지목사님, 제가 드리는 말씀은 현재의 문제입니다. 예전의 그 십자군이 지금 우리를 향해 칼들고 오지는 않지요. 그러나 이슬람테러리스트는 현재의 문제입니다. 현재 그들이 그들의 신앙을 들먹이며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정치경제적인 문제로 불 수도 있지요. 하지만 역시 종교적인 문제로 보는 것도 정당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많이 변했습니다. 지금 기독교에서 심각하게 십자군전쟁을 하자는 이야기를 저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부시가 그런말을 했다가 기독교자체의 반대에의해 거부되었지요. 그러나 이슬람교의 폭력은 지금 현재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종교다원주의가 사람들로하여금 비현실적으로 이슬람교에 호감을 갖게할 수있다는 것을 우려합니다. 물론 지목사님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슬람교의 가르침에도 좋은 점들이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오늘낭의 그 폭력의 문제에 대해 보여왔던 이슬람교인들의 태도와 비판에 대한 그들의 난폭한 불관용은 그러한 가르침이 진실인지를 의심케합니다.
스밀레님. 사건. 인물을 명확하게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슬람교의 평가는, 서구권 문명에 길들여진 우리 입맛의 시각과 기독교적인 마인드에 세뇌되어 일방적으로 이슬람교를 악으로 몰았던 지난 날에서 벗어나, 좀 더 공평하고 공정하게 사태를 보자는 그런 측면이 아닐까요? 가치판단은 그것이 나온 배경을 먼저, 그리고 흘러온 시간과 역사의 궤적과 자료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옳고 그름을 자기 주관적인 기준과 세상의 보편 상식의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니, 말이 그렇게 나온 것이고, 양비론은 아니지만 미국의 깡패짓과 이슬람교의 폭력성과 기독교의 폭력성...
그리고 안티들의 폭력성... 그 모두는 잘못된 것이라면 모두 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어느 것이 좀 더 적기에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의 과정이겠죠. 내게 이제 없는 그 무언가를 상대가 가지고 있다면 호기심을 가지고 신비롭게 보고 호의적으로 보는 것. 그런 맥락 차원에서 보시면 좋지 않을가요 ㅋ 예수님도 마호멧도 나쁘게 살라 하지 않았지만 그 뜻을 왜곡하고 따르지 않는 것은 모두 우리 후대의 잘못인 걸요... 성인과 범부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범부이구요. 사태를 볼 때는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ㅋ 아침에 대화를 건 사람은 저랍니다 ^^ 잘 지내시나해서요
좌파님 어찌보면 제가 이슬람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현실에 근거한 올바른 견해입니다. 종교다원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져 현실의 위험성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일 것입니다. 샤리아라는 그 이슬람의 율법, 명예살인, 여성억압, 무차별테러, 잔인한 처형 등등 저는 그러한 문제가 이슬람교의 내부의 문제라고 봅니다.
smile 님! 우선 저는 이슬람 신자들을 매일 만나며 살지만 이슬람에 전혀 모릅니다. 다음으로 내가 만나는 아랍사람들(주로 레바론)은 기분 나쁨니다. 호주에서도 질이 안 좋기로 소문이 나있습니다. 현재의 이슬람은 기독교처럼 신앙이 개인화되어 있지 않고 아직도 기독교의 중세처럼 집단화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즉 신학적인 문제라는거지요. 다음 지구상에는 기독교보다 이슬람이 더 많습니다. 또 이슬람은 포교를 목적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물으면 대답해주라는 정도. 실제로 느기끼에도 기독교는 징그러울 정도로 사람 귀찮게하지만 이슬람은 전도 하는 거 못 보아씁니다. 그저 내가 보고 느낀 것만 적습니다.
ㅎㅎ 지목사님, 감사합니다. 님의 체험에서 나온 솔직한 말씀이 듣기에 좋습니다...문제는 님의 말씀처럼 중세에 사는 사람들의 시대착오가 오늘날의 인류에 큰 재앙을 안겨 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언젠가는 시대착오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언제가 될지 알 수가 없으며 그 사이에 많은 끔찍한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이 매우 우려되는 것입니다.
기분 나쁠 일이야 있겠습니까? 외국에 살다 보면 더 많은 자료를 접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덜 부정적일 겁니다. 결국 우리는 정보자료를 가지고 판단 하는거니까요. 알 자지라 방송이 생기고 나서 세계가 아랍에 대한 이해가 많이 달라졌지요. smile 님도 기회가 있으면 인터넷으로 한번 보세요. 미국의 시각이 아닌 아랍의 시각에서 자기들의 문제를 보도하는 방송을.
제가 만난 이슬람 사람들은 무지 순진하고 착하고, 그랫었어요. 사람의 근본문제는 아닌거 같고, 종교의 문제도 아닌듯 합니다. 정치적 상황들, 미국을 중심으로한 기독교 폭력 세력이 문제의 핵심이며 전세계의 반 미, 반FTA , 그리고 반 기독교의 양상으로 나타나는것으로 판단돼는데요. smile님이 막 열내시니까 마치 이슬람이 나쁜 종교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슬람도 기독교에서 파생된 아주 좋은 종교랍니다.
저는 위의 사실들이 님들의 이슬람에대한 근거없는 환상들을 끝내주기를 기대합니다. 참고로 기독교와 미국을 욕하는 것이 저들의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실 분이 있다면 제가 정중히 듣겠습니다. 저에게도 잘 알고 지내는 이슬람친구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이지요.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비인간적인 종교문화가 문제이지요.
첫댓글 사미자라는 교수가 신학대학(만약에 좋은 뜻이라면) 참으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 한심하기 그지없는 머저리 같은 콩알 만한 정의감으로, 덕지덕지 배운 지식으로 교수라는 이름으로 밥을 먹고 살고 있으니 그 밑에서 배우면서 사미자라는 교수의 강의보다는 도색잡지에 몰두하는 시간이 더 참되다고 느끼지 못하고 참으로 좋은 강의로구나 하면서 목사가 된 사람들은 뻔하겠군요. 정용섭 목사에게 당한 테러는 그만 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용섭이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 말만 실컷 하고 현실을 모르고 말만 하다가 말로 끝나고 그러고 밥 먹고 사는 애 같습니다. 못 알아 듣고 제대로 목사로서 살아보고 싶어하지도 않고 살짝 뭐
해 놓고 대단한 것 처럼 부풀리고, 남이 떠받들어 주는 걸 즐기고 적당히 돈 벌면서 한 번도 자기를 위험속으로 몰지 않고, 폼만 잡는 목사들 많습니다. 노골적으로 돈 벌기에 혈안이 된 목사는 더욱 많겠지만, 정용섭이는 그냥 말만 살짝살짝 하고 남이야 죽든지 어떻게 되든지 사실은 별 관심이 없고, 에헤헤 ^^ 나 많이 알지? 나 똑똑하지? 그거봐 난 고급이야 ^^ 이러고 먹고 사는 사람 같습니다. 그런 놈들 많지요. 사랑을 말하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 실천안하고 예수를 말하면서 아 예수여~ 글만 달랑 써놓고 여기저기 퍼 나르고 절대 자기가 쓴 글의 예수처럼 절대로 살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예수가 이렇다고 하면서 기부해달라고
뻔뻔하게 잘 말하는 예수 팔아 밥 먹는 신학자와 예수 팔아 밥 먹는 목사님들 많습니다. 사람들이 구분을 못하는 거죠. 정용섭이도 그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모르는 사람은 정용섭이가 최고이고, 철저히 예수를 지적자위행위로만 소모하고 그러고 뭔가 얻은 것 처럼 좋아할 겁니다. 정용섭이는 이제 그만 잊으시는 게 어떠실지요?... 이 정도면 된 거지 하면서 밥 잘 먹고 잘 나가던 차에, 아니 이 지목사란 사람이 누구 밥그릇에 재를 뿌리려고 자꾸 나보고 실천을 하래? 그러다 나 다치면 어쩌려고? 허허, 이 사람 그렇게 안봤는데 아주 무대뽀구만. 예수 팔아 밥 먹는 룰을 어기다니.. 속으로 이리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지요. 남이야 죽는 살든, 내 밥그릇이 예수 팔아 먹기이니 잘 팔아서 나 좀 먹고 살아야 하겠는데, 왜 나보고 내가 쓴 글처럼 나와 내 밥그릇을 일치시키래 하면서 짜증내하는 목사들 신학자들 많습니다. 이런 인간들에게는 화 내는 것 조차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왜 지성수 목사님이 유독 많이 전투적으로 사셨는가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지성수 목사님 수준이 안되는 사람들을, 자꾸 대등하다고 보고 그 사람들에게 기대를 했기 때문에 화도 나시는 것 같습니다. 그냥 멍청이구나 하고 또 멍청이 만났네 하면 되실 것을... 알지도 못할 걸 뭘 일깨워주시려고 ...
누구나 죽는 게 무섭죠. 누구도 죽기 싫어하죠. 약자가 싸워야 하는데 싸울 수단이 없을 때, 아무런 시선도 끌지 못하고 현실이 변하지 않을 때, 자기를 죽여서라도 이 현실을 제대로 봐라. 분실자살은 사실 그런 뜻이죠. "서로 사랑하라" "생명은 소중하다" 끝없는 거짓말들 ... 배의 기름기도 그렇지만, 요즘은 미국이 대량생산한 밀에 에너지보다도 살 찌는 성분이 많아서.. 싸구려 고기 조금과 밀 왕창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배 나오고, 부자들은 몸짱이고 날씬한 세상입니다. 그들은 마음과 양심과 정신에 기름끼가 껴서 세상을 보지 않겠죠. 이미 돈 맛을 봐서, 자꾸 맛있는 게 당겨서, 쓴맛을 거부하겠죠. 입으로는 쓴맛을 말하면서.
예수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나처럼 살아라. 그의 생 마지막에는 분실자살같은 십자가에 매달려 고문당하다가 타살당함이 나와 있습니다. 살고 죽고 어떻게 사는 것은 자유이지만, 원 예수교의 가치를 자신이 겁나서 훼손하고 적당하게 해석하거나, 남들을 야만인이나 무지한 이로 몰아붙이며 자기의 비겁을 정당화해서는 안되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는 나처럼 살면 좋은 날은 결코 없거니와, 알면서도 죽을 때 까지라도 약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라고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몸으로 보여주셨죠. 예수를 믿으며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삶의 자리가 다르다"라는 것은 참 무섭고 엄숙한 것이지요.. "분신자살"을 한 사람의 처지와 마음자리를 들여다보고 공감할 수 업다면, 그 "분신자살"을 놓고 말하는 것은 참 말이 안 되것지요... 그나저나, 잘난 김선비나 어리숙한 삼돌이나 다 같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세상이 어서 오기를..
아마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왜냐하면 삼돌이야 김선비랑 놀고 싶겠지만 김선비는 삼돌이같은 무지렁이가 가까이 오는 것조차도 싫어할 것이기때문에...하지만 진정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서로가 낮아진다면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종교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반대되는 주장과 삶을 살고있으니...먹사교는 이래저래 반드시 깨부셔져야할 악성 암덩어리이지요...
목사 님들께서 "목사로서의 역할(기능)"에서야 평신도와 차이가 있어야지만, 삶의 다른 측면들에서는 사실 모셔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 좋것지요. 목사 님들이 그걸 못하면 그누가 그걸 할까요? ㅎㅎ 예수도 자기 제자들하고 친구 먹자고 했는데..ㅋㅋ~
지목사님 글에 꼭히 딴지를 걸자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테러리스트의 살인을 같이 비교한 것입니다. 님도 그 오류를 아시기에 미리 설명을 한 것같습니다마는, 어쨋든 저 둘은 전혀 비교조차도 할 수없는 다른 것이 아닐까요? 한분은 모든 모순과 폭력을 스스로의 한 몸에 받아내었고 테러리스트들은 스스로 죽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을 죽이는 것이니까요...전혀 같이 비교할 수 없는 것을 같이 비교하는 것은 예수님에대한 매우 심한 모독이겠기에 그저 몇자 적습니다....
이슬람테러리스트들의 문제점들은 분명히 있지만, 그들로 인해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이고 부정확한 정보들로 이슬람을 왜곡하고 편협하게 바라보는 것 역시 무서운 일인듯 합니다.. 사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전도랍시고 많이 죽였고, 그걸 숭고한 일이라고 떠받들었겠지요... 그리고, 이제 와서는 이슬람을 폭력의 종교라고 하는 건 자기들의 과거를 모르는 무지한 짓일 터이고...; 아무튼, 서로 평화롭게 같이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것지요..
우리가 과거를 참고 삼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언제까지 과거만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 기독교가 종교의 이름으로 나쁜 짓을 많이 했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러한 문제는 그리 심하지 않은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오늘 바로 이순간에도 종교의 이름으로 잔인한 폭력을 행하며 전세계를 이슬람화하겠다는 미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문제를말하는 것입니다.
일정부분 동의합니다. 다만, 드러난 이슬람의 폭력성이 이슬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제한된 정보로 판단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 이슬람쪽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기독교는 비폭력적일까요? 전혀 아닐 겁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어느 종교에나 폭력적인 분파들은 있지요. 그리고, 현재 이슬람권은 서구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여겨 방어적인 측면에서 폭력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고, 서구권은 이슬람을 폭력적인 사회로 몰고가는 경향이 있지요. 아무튼, 쉽지 않군요. 웃긴 건, 미국에서 이슬람교도가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 종교자체가 큰 문제라기 보다는 폭력적인 정치세력과의 결합이 문제인듯..
samllgarden님, 님이 "이슬람쪽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기독교는 비폭력적일까요?" 라고 물었는데 어떤 폭력을 말하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해줄 수 있나요? 제가 요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이슬람교인들이 하듯이 햇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이 과거 기독교의 잘못에대한 반사적인 반응으로 오늘날의 이슬람교에대해 비현실적인 환상을 갖고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합니다. 네덜란드에서 이슬람 여성의 문제를 들춰넸던 고호라는 사람은 이슬람 청년에 칼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고 그 정보를 준 여성은 지금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호메트를 희화한 그림을 보고 전 이슬람 국가들이 미친듯이 소란을 일으킨 적도 있지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에수님에 대해 더한 모욕을 하고 희화화를 해도 그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래도 그 다른 것을 모르겠나요? 저러한 모든 것이 정치경제적인 문제인가요? 어떤 분이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자고 하셨는데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 그차제가 문화의 핵심적인 부분이며 문화를 형성하는 주 요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러한 폭력적이고 비판에 대해 불관용적인 이슬람 문화의 원인을 이슬람교에서 찾는 것입니다.
님들과 저는 현재 일어아고 있는 같은 사건들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기독교인이기때문에 이슬람교를 인류의 재앙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는 행태를보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님들의 그러한 현실에 대한 다른 해석들이 종교다원주의에 충실하고자하는 이념적 열의로 인한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이슬람도 변할 수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슬람의 그 폭력성과 잔인함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정치경제적으로는 보지만 종교적인 시각에서는 보지말자는 것은 오류일 것입니다.
님들이 그래도 기독교적인 문화가 강한 호주에서 이렇게 기독교를 비판하듯이 님들이 이슬람문화권에서 이슬람을 비판한다면 님들이 갖게될 반응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혀를 자르는 잔인한 처형일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 비판하면 죽이겠지요. 저는 혀를 자르는 사진과 죽이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자 이래도 그 문제를 못보시고 이슬람교에는 문제가 없는데 기독교국가들이 탄압을 해서 그 사람들이 그런다고 할 것인가요? 만일 그정도로 현실에 눈을 감고 말씀을 할 정도라면 더이상의 대화의 가치자체가 없겠지요...
smile 님! 암살당한 레바논 대통령의 딸이, 세월이 지난 후, 미국의 CNN쪽인지 History 채널쪽인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했던 대답이 참 인상적이더군요. "당신의 아버지는 종교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보느냐?" "아니다, 종교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정치가 나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레바논에서 기독교쪽과 이슬람교쪽은 어쩔 수 없이 서로 공존을 하며 살고 있지요. 물론, 이전에 1960년대인지 70년대인지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레바논 내의 기독교측이 이스라엘쪽과 한통속이 되어 비기독교인들을 대량학살한 적도 있었구요. 그리고, 돌과 칼이 아닌 총과 미사일로 죽이는 것도 폭력이지요.
제가 이슬람의 폭력에 눈을 감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내모는 상황을 함께 고려하자는 것이지요. 이슬람의 폭력에는 그렇게 치를 떨면서, 이스라엘과 서구의 기독교국가들의 무력행위에 대해선 크게 문제제기를 하지 않지요. 그리고, 이라크에서 미군이 하루 몇명 죽는 것은 미국인들이 슬퍼하기라도 하지만 이라크인 수백명이 죽는 것은 그냥 잠시 뉴스거리랍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인들이 나쁜놈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게 우리의 대체적인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이슬람권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실존의 세계의) 사람들을 사람취급하지 않고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그냥 단순히 폭력적인 사람들이라는 딱지만 붙이겠지요.
samllgarden님, 저는 님이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오해하시는 것같군요. 레바논문제는 청지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적을 한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심지어 같은 이슬람인들에대한 이슬람인들의 그 무분별한 테러와 여성억압, 비판자들에대한 전반적인 이슬람교인들의 폭력성과 생명경시등을 말한 것입니다. 즉 정치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의 내부에 있는 그 폐쇄성과 폭력성을 말하는것입니다. 님이 레바논의 정치분쟁을 통해 이슬람의 그러한 전반적인 행태를 변호할 수있다면 한번 해보세요... 제가 기꺼이 배우겠습니다. 부디 오해없으시기를...
smallgarden님, 제가 님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만일 님이 기독교비판하듯이 님이 이슬람문화권안에서 이슬람을 비판한다면 어떤 일이 님에게 생기겠습니까? 자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
레바논의 정치분쟁이 단순히 정치만의 문제일까요? 정치인들이 종교를 폭력적으로 이용하고 있지요. 그리고, 사실 종교는 정치와 분리될 수 없겠지요. 개인적으로 심화되지 않은 종교가 악한 정치와 결합될 때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겠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이슬람의 폭력성이 압도적이라면 "미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가 이슬람교"라는 사실을 설명하기가 참 어렵겠지요..
"기독교비판하듯이 님이 이슬람문화권안에서 이슬람을 비판한다면 어떤 일이 님에게 생기겠습니까? 자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되묻고 싶군요. 이슬람권의 폭력적인 문화 말고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나요? 이슬람권이 직면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급한 것이 무엇일까요? 비판의 자유일까요? 아니면, 안전보장과 생존권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다만, 이슬람권은 폭력적이다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만큼이나 이슬람권 사람들에겐 기분나쁠 것 같군요.. 그들이 나쁜 관습을 고칠 수 있도록 돕는 길은 다양하겠지요. 그럼, 이만 총총.
이제 님은 독재를 비호하는 단계에 까지 가셨나요? 집단의 안전을 위해 비판을 억압하는 것은 독재자들와 전체주의자들이 인권탄압을 위해 쓰는 보물같은 핑계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슬람의 모든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내부에 있는 폐쇄성과 폭력성을 지적하는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의 인류문명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면 안되나요? 비판하면 큰일이 나니 또 자존심을 상하게하니 그것도 하지 않아야하는 건가요? 어쨋든 님과의 토론은 이만해도 되겠지요? 더 이상 의미있을 것같지도 않으니...
참고로 저는 이슬람테러리스트들의 종교와 테러가 인류를 대적하는 커다란 재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의 종교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세뇌된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겠지요.
이글의 다른 부분은 좋은 내용이라 읽으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괜히 딴지 걸어서 미안합니다...
smile 님! 이의신청 정당하다고 생각 합니다. 이슬람의 테러 행위가 위험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분석하는 시각에는 좀더 깊이가 요구된다고 봅니다. 이슬람의 테러행위가 미국지배의 세계질서에 유일한 안티테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할가요? 또 역사상 최초의 자기를 죽이는 전쟁을 첨단무기로 이길 수 있을까요? 제가 호주에서 만나는 많은 무슬림들은 그들을 심정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지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정치적인 면도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문제삼는 것은 그보다는 더 근원적인 것같습니다. 곧 이슬람이라는 종교로 만들어진 그 폐쇄적이고 관용이 없고 폭력적인 문화 그 자체입니다. 만일 지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해 하는 이의제기를 같은 식으로 이슬람교에 했다면 제가 보기에 지목사님께 닥칠 그 결과는 뻔합니다. 그것은 고통스런 죽음이겠지요. 그것이 제가 보기에 문제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정치적인 저항은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볼때 이슬람교의 문제는 정치와 상관없이 그 종교 자체의 패악성입니다.
smile 님! 적어도 고등종교에서 종교자체에 패악성이 있다고 볼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그 원인을 찾으면 몰라도. 중세의 십자군 전쟁의 기독교의 패악성을 예를 들어 볼지라도.
지목사님, 제가 드리는 말씀은 현재의 문제입니다. 예전의 그 십자군이 지금 우리를 향해 칼들고 오지는 않지요. 그러나 이슬람테러리스트는 현재의 문제입니다. 현재 그들이 그들의 신앙을 들먹이며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정치경제적인 문제로 불 수도 있지요. 하지만 역시 종교적인 문제로 보는 것도 정당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많이 변했습니다. 지금 기독교에서 심각하게 십자군전쟁을 하자는 이야기를 저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부시가 그런말을 했다가 기독교자체의 반대에의해 거부되었지요. 그러나 이슬람교의 폭력은 지금 현재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종교다원주의가 사람들로하여금 비현실적으로 이슬람교에 호감을 갖게할 수있다는 것을 우려합니다. 물론 지목사님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슬람교의 가르침에도 좋은 점들이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오늘낭의 그 폭력의 문제에 대해 보여왔던 이슬람교인들의 태도와 비판에 대한 그들의 난폭한 불관용은 그러한 가르침이 진실인지를 의심케합니다.
지목사님, 지금까지 제가 말을 많이 했으니, 이제는 님의 좀더 구체적인 의견이나 설명을 듣고 싶네요...님은 어째서 이슬람이 고등종교이고 오늘날 저렇게 많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을 선호(?)하시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기장! 정용섭 목사를 기억하는 게 아니고 그가 대변하고 있는 분신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 ㅋ
스밀레님. 사건. 인물을 명확하게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슬람교의 평가는, 서구권 문명에 길들여진 우리 입맛의 시각과 기독교적인 마인드에 세뇌되어 일방적으로 이슬람교를 악으로 몰았던 지난 날에서 벗어나, 좀 더 공평하고 공정하게 사태를 보자는 그런 측면이 아닐까요? 가치판단은 그것이 나온 배경을 먼저, 그리고 흘러온 시간과 역사의 궤적과 자료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옳고 그름을 자기 주관적인 기준과 세상의 보편 상식의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니, 말이 그렇게 나온 것이고, 양비론은 아니지만 미국의 깡패짓과 이슬람교의 폭력성과 기독교의 폭력성...
그리고 안티들의 폭력성... 그 모두는 잘못된 것이라면 모두 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어느 것이 좀 더 적기에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의 과정이겠죠. 내게 이제 없는 그 무언가를 상대가 가지고 있다면 호기심을 가지고 신비롭게 보고 호의적으로 보는 것. 그런 맥락 차원에서 보시면 좋지 않을가요 ㅋ 예수님도 마호멧도 나쁘게 살라 하지 않았지만 그 뜻을 왜곡하고 따르지 않는 것은 모두 우리 후대의 잘못인 걸요... 성인과 범부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범부이구요. 사태를 볼 때는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ㅋ 아침에 대화를 건 사람은 저랍니다 ^^ 잘 지내시나해서요
예 저는 잘 지냅니다...감사합니다. 님도 잘 지내지요?...
좌파님 어찌보면 제가 이슬람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현실에 근거한 올바른 견해입니다. 종교다원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져 현실의 위험성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일 것입니다. 샤리아라는 그 이슬람의 율법, 명예살인, 여성억압, 무차별테러, 잔인한 처형 등등 저는 그러한 문제가 이슬람교의 내부의 문제라고 봅니다.
smile 님! 우선 저는 이슬람 신자들을 매일 만나며 살지만 이슬람에 전혀 모릅니다. 다음으로 내가 만나는 아랍사람들(주로 레바론)은 기분 나쁨니다. 호주에서도 질이 안 좋기로 소문이 나있습니다. 현재의 이슬람은 기독교처럼 신앙이 개인화되어 있지 않고 아직도 기독교의 중세처럼 집단화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즉 신학적인 문제라는거지요. 다음 지구상에는 기독교보다 이슬람이 더 많습니다. 또 이슬람은 포교를 목적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물으면 대답해주라는 정도. 실제로 느기끼에도 기독교는 징그러울 정도로 사람 귀찮게하지만 이슬람은 전도 하는 거 못 보아씁니다. 그저 내가 보고 느낀 것만 적습니다.
ㅎㅎ 지목사님, 감사합니다. 님의 체험에서 나온 솔직한 말씀이 듣기에 좋습니다...문제는 님의 말씀처럼 중세에 사는 사람들의 시대착오가 오늘날의 인류에 큰 재앙을 안겨 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언젠가는 시대착오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언제가 될지 알 수가 없으며 그 사이에 많은 끔찍한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이 매우 우려되는 것입니다.
학습이 되는 군요. 모든 주장이 다 일리가 있네요. 저는 쭉 보고 배우면서 거기서 입맛에 맞는 것을 저의 주장으로 흡수하겠습니다. 지금 모든 이들이 발언한 주장이 다, 시쳇말로 한가닥씩 해요 ㅋ 스밀레님이 오셔서 카페가 활성화되었군요 ^^ 좋은 일입니다.
지목사님, smallgarden님, 제가 이슬람문제를 우려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서...갑자기 오바했는지 모르겠네요...기분 나쁘셨으면 용서하세요...
기분 나쁠 일이야 있겠습니까? 외국에 살다 보면 더 많은 자료를 접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덜 부정적일 겁니다. 결국 우리는 정보자료를 가지고 판단 하는거니까요. 알 자지라 방송이 생기고 나서 세계가 아랍에 대한 이해가 많이 달라졌지요. smile 님도 기회가 있으면 인터넷으로 한번 보세요. 미국의 시각이 아닌 아랍의 시각에서 자기들의 문제를 보도하는 방송을.
제가 만난 이슬람 사람들은 무지 순진하고 착하고, 그랫었어요. 사람의 근본문제는 아닌거 같고, 종교의 문제도 아닌듯 합니다. 정치적 상황들, 미국을 중심으로한 기독교 폭력 세력이 문제의 핵심이며 전세계의 반 미, 반FTA , 그리고 반 기독교의 양상으로 나타나는것으로 판단돼는데요. smile님이 막 열내시니까 마치 이슬람이 나쁜 종교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슬람도 기독교에서 파생된 아주 좋은 종교랍니다.
어쩔수 없네요. 강투님, 참고하세요...매우 많지만 세개만 올립니다. 저런 것이 미국때문인가요? (하지만 경고, 경고, 경고: 강투님, 그리고 다른 분들, 다음 장면들은 잔인하므로 만일 님들이 예민하시거나 미성년자이시면 보지마십시오. 이건 농담아닙니다. 다시 심각히 말씀드립니다. 어떤 분이든 예민하시거나 미성년자이시면 보지마십시오.) http://www.toxicjunction.com/get.asp?i=V3881
http://images.google.com/imgres?imgurl=http://www.belch.com/img/beheading.jpg&imgrefurl=http://www.belch.com/blog/2006/10/26/gays-wake-up-realize-islam-wants-to-murder-them/&h=240&w=277&sz=5&hl=ko&start=10&um=1&tbnid=dT6Cw9iP0Bn-aM:&tbnh=99&tbnw=114&prev=/images%3Fq%3Dislam%2Bexecution%2Bpic%26um%3D1%26hl%3Dko%26rls%3Dcom.microsoft:*:IE-SearchBox%26sa%3DN
http://images.google.com/imgres?imgurl=http://www.iran-press-service.com/ips/bm~pix/b2_208~s170x340.jpg&imgrefurl=http://www.iran-press-service.com/ips/articles-2004/august/ateqeh_executed_27804.shtml&h=255&w=170&sz=9&hl=ko&start=5&um=1&tbnid=Y98UKjgP-z21xM:&tbnh=111&tbnw=74&prev=/images%3Fq%3Dislam%2Bexecution%2Bpic%26um%3D1%26hl%3Dko%26rls%3Dcom.microsoft:*:IE-SearchBox%26sa%3DN
저는 위의 사실들이 님들의 이슬람에대한 근거없는 환상들을 끝내주기를 기대합니다. 참고로 기독교와 미국을 욕하는 것이 저들의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실 분이 있다면 제가 정중히 듣겠습니다. 저에게도 잘 알고 지내는 이슬람친구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이지요.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비인간적인 종교문화가 문제이지요.
헐 스마일님이 흥분하셧었네요. 저는 짧은 상식으로 말씀드린건데요. 저는 사실 이슬람에 대해 무지하답니다. 다만 내가 만나는 바이어들을 보고 일면의 판단일 뿐이에요. 너무 흥분 하시지 마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