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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다리에는 인공뼈가
증 언 자 : 전성준(남)
생년월일 : 1961. 11. 22(당시 나이 19세)
직 업 : 무직(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6
개 요
광산군 신가리에 있는 보이스타운에서 생활하고 있던 중 TV가 나오지 않자 21일 광주로 나와 동운동 파출소와 광주역 파출소가 불타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광주공원에서 군트럭을 타고 법원 부근을 순찰하고 공원으로 돌아가던 11시 30분쯤 어디선가 날라온 총알에 의해 우측 대퇴부에 부상을 입었다. 적십자병원, 기독병원, 전남대병원 등을 다니면서 많은 수술을 했지만 아직도 목발을 짚고 생활한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 시절
세 살 때 나는 부모님과 헤어졌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님은 전북 고창에서 방앗간을 경영하시다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오셨다 한다. 어머니는 시골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관계로 할머니와 사이가 무척 안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아버지를 먼저 다른 여자와 재혼시키고 어머니와 이혼을 시키셨다. 우리 형제들은 결국은 흩어졌다. 내 위의 형 둘은 송정리 외가댁에 맡겨졌고, 나는 너무 어리다 하여 할머니가 기르셨다고 한다. 할머니와 고모는 어린 나에게 쌀을 갈아 미음을 끓여먹이면서 길렀지만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광주역에 데려다 버렸다. 학교 보낼 일이 짐스러워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할머니가 광주에 가자고 하여 어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섰는데, 할머니는 나를 버리고 혼자 시골로 가신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고아가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따뜻한 밥 한그릇 변변히 먹지 못하는 배고픈 생활을 하면서 어떨 때는 남의 집에 들어가 밥을 훔쳐먹기도 했다. 그런 생활이 지속되다 보니까 결국 광주소년원까지 가게 되었다. 소년원에서 퇴원을 하려고 해도 보호자가 없으면 퇴원이 되지 않아 1년이 넘도록 퇴원을 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광산군 신가리에 있는 보이스타운에서 유석우 목사가 왔다. 보이스타운이라는 곳은 기독교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소년원에서 오갈 데 없는 나 같은 애들을 데려다가 함께 생활하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유석우 목사와 상담을 한 끝에 우선 오갈 데 없으니까 그곳으로 가는 것으로 하되 생활해 보고 맞지 않으면 다시 나오겠다는 조건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보이스타운에서 몇 년 생활하다 보니까 지루하기도 해서 고향에 내려가 농사라도 지어볼 생각으로 찾아갔다. 할머니는 내가 돌아온 것을 못내 못마땅해 하셨지만 부지런히 농사일도 거들고 남의 집 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으면 착실히 갖다드리기도 했더니 차츰 대하시는 게 달라지셨다. 그러던 중에 영광에 있던 큰형님이 오셨다. 큰형님은 이미 결혼하여 생활하고 계셨다.
"형, 나 기술이라도 하나 배웠으면 좋겠는디."
"농사일이 힘드냐?"
"힘든 것보다도 그냥, 어디 좋은 디 없을까?"
"그럼 영광으로 한번 가보자."
큰형님과 영광으로 온 나는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어느 가구점에서 자리가 하나 비어 가구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자개농을 만드는 기술을 배웠지만 적성에도 맞지 않고 시골이어서 벌이도 시원치 않아 그만두었다. 1980년 3월 보이스타운에 다시 들어와 5월을 맞이했다.
불에 탄 파출소
정확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TV가 나오지 않았다. 답답해서 라디오 사이클을 맞추다보니까 이북방송이 흘러나왔다.
"지금 광주에서는 민중들이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공수부대들이 난폭하게 진압을 해서 세 살 먹은 어린애까지도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학생들을 공수들이 무자비하게 짓밟고 곤봉으로 내려친다 합니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 방송을 듣고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21일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에 광주에 좀 갔다 와야 되겠다고 하니까 김광채 전도사 및 김동료 형님이 못 나가게 말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뿌리치고 보이스타운을 나섰다. 걸어서 동운동에 오자 동운동 파출소가 시커멓게 불타 있었다. 파출소내의 물건들과 파출소 내부까지 시커멓게 되어 있었는데, 이미 불타버려서 그랬는지 주위에는 사람들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난리가 나긴 났는 모양이구나 생각하면서 시내 쪽으로 계속 걸었다. 도로에서 학생, 시민들이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주유소(동운동에서 고속도로 미처 못 가서 있는 주유소. 지금은 없어졌음)에서 기름을 넣고 가는 것이 보였다. 유리창이 다 깨진 시내버스, 지프차, 군트럭, 15톤 군함레커 등 수없이 많았다. 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들 몽둥이를 들고 머리띠를 묶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나도 차에 탈까 하다가 어디로 갈지 몰라 계속 걸었다. 광주역에 도착해 보니 광주역 안의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는 상태였고, 역전파출소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파출소 안에 들어가보니까 책상들이 다 엎어져 있고 파출소에 있던 액자, 사진 등이 파출소 바닥에 내팽개쳐진 채 엉망으로 뒤섞여 있었다. 광주역 분수대 안에서는 커다란 트럭 세 대가 엎어진 채 불타 있었지만 주변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내가 광주역 주변을 어정거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트럭이 와서 멈추었다. 나는 엉겹결에 차에 올라탔다. 높아서 올라가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트럭에는 20여 명의 청년들이 타고 있었는데 머리에 띠는 묶지 않고 각목만 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김밥 2박스 정도, 음료수 4박스, 또 많은 양의 빵 등이 쌓여 있었다. 도로마다 돌멩이들이 무수히 뒹굴고, 인도 주변에 있던 화단들이 모두 엎어져 있었다. 시내의 어느 구석도 온전하지 않았다. 깡통, 수루탄 파편들이 나뒹굴고 가게는 철시된 상태였다. 내가 탄 차가 공원에 도착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많은 차량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였고, 공원 한쪽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총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부상을 당하고
나도 총을 받았다. 처음에는 M1을 받았는데 무거워서 카빈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카빈을 들고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카빈은 안전핀을 잘 잠궈야 돼요. 사용할 때는 열고 사용해야 돼요."
한번도 총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총을 들고 공원 옆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시내의 가게들은 철시된 상태였지만 공원 옆의 몇몇 가게들은 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돈도 주지 않고 국밥 한 그릇을 먹었다. 그러고는 멍하게 앉아 있는데 4톤 트럭이 한 대 지나갔다. 그 트럭에는 백발이 된 할아버지와 손자인 듯한 어린 아이가 총에 맞았는지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것을 보자 울컥 화가 치밀어올랐다.
나도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군트럭 한 대가 왔다. 나는 차를 세워 기사 옆자리에 올라탔다. 그 차는 뒷문이 안 열어지도록 무엇인가로 덮여 있고, 뒤에 탄 사람들도 차 앞의 창문을 통해서 내리게 되어 있었다. 기사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고 차에 탄 사람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앞뒤에 가득 타고 있었다.
내가 올라탄 잠시 후 차는 백운동 로터리 쪽으로 갔는데, 시민들이 도로에 나와서 음료수와, 밤에 춥겠다고 겨울 잠바를 올려주었다. 어두컴컴한 밤이었는데도 시민들이 나와서 환영을 해주는 것이 자못 감격스러웠다.
백운동을 다 돌아도 특별한 일이 없어 공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내 생각에는 공원에 연락본부가 있어서 모든 차가 공원에서 지시를 받고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 같았다. 기사가 내려가 보고를 하고 왔다. 우리는 그동안 쉬고 있다가 11시가 넘어서야 다시 공원에서 나왔다.
그때는 가로등도 신호등도 모두 없애버린 상황이고 운행하는 차량도 전부 라이트를 끄고 다녔기 때문에 주위는 어둠에 잠겨 조용했다. 다만 차 다니는 소리만 씽씽거릴 뿐이었다. 법원 앞에 도착했을 때 기사가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다니는 것도 좋은데 뭣을 좀 먹고 갑시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법원 앞 광장에 따로 앉아 김밥, 빵, 음료수 등을 먹었다. 스물다섯 명 정도였지만 전부 초면이어서 별로 이야기하지도 않고 먹었다. 기사가 또 말했다.
"이렇게 돌아다녀봤자 별일도 없으니까 공원으로 다시 들어가서 알아보고 나옵시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 조선대 사거리를 거쳐 시내 쪽으로 나왔을 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드르륵 총소리가 났다. 차의 오른쪽에서 총을 쏘았는지 나와 내 옆사람이 총에 맞았다. 오른쪽 대퇴부가 화끈거리고 아팠다. 우리 차는 지나는 자가용에 우리 둘을 옮겨실어주었다.
잠시 후 적십자병원에 도착했다. 복도까지 환자들로 꽉차 있었다. 나랑 같이 총상당한 사람은 눈언저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어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갔고, 나는 그때까지도 어떻게 된 것인지 다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만 올 뿐 피도 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다리를 못 움직이도록 판자로 묶어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환자들은 수없이 많이 있는데, 전문의사들은 전부 들어가 버렸는지 인턴 3명과 간호원 4명 밖에 없었다.
기독교병원에서 수술을 받다
나는 적십자병원에서 이틀 동안을 진통제만 3번 맞았을 뿐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했다. 말할 수 없이 통증이 와서 간호원을 부르면 진통제만 놓아준 것이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기독교병원 사회사업과에 있는 김녹견 씨에게 전화를 좀 해달라고 간호원에게 부탁을 했다. 김녹견 씨는 보이스타운 이사로 어떻게 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락을 받은 김녹견 씨는 엠뷸런스를 보내왔다. 그래서 23일 나는 기독교병원으로 옮겨갔다. 환자가 많은 것은 기독교병원도 마찬가지였다.
휴게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지하에 50여 명 정도 누워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조금 덜 다친 사람들인지 장기를 두고 있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고 오후에 8병동 8호실로 옮겼다. 8호실이면 2등실인데도 병실이 부족하니까 세 명이 사용했다.
6월 초순에야 수술을 받았다. 수술환자가 너무 많이 있어서 그렇게 늦은 것이다. 나의 오른쪽 허벅지 부근에 총알이 박혀 뼈가 으스러져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뼈라도 붙게끔 하는 수술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신빙성 있는 얘기인 줄은 모르겠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전남대 병원이나 적십자병원에는 약품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지 않아서 환자들을 많이 치료하지 못했다 한다. 그러나 기독교병원에는 약품이 많이 준비되어 있어서 하루 저녁에 24명도 수술을 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아무튼 나는 수술을 받은 다음 병실에 누워 조사를 네 번이나 받았다.
"어떻게 다쳤느냐?"
"그냥 어디 가다가 길에서 다쳤어요."
"혹시 폭도가 아니냐?"
"아니, 그냥 법원 앞에서 총에 맞았단 말이에요."
나는 그래도 다행히 먼저 조사를 받고 온 사람들이 "정확하게 한 대로 말하면 폭도라고 그냥 끌고 가버린다"는 귀뜸을 해주어서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일단 그들은 폭도라는 생각만 들었다 하면 아무리 심한 응급환자라도 필요없이 통합병원으로 옮겨가버렸다. 나는 다리를 수술하여 움직이지 못하니까 병실에 그냥 누워서 조사를 받았지만 다른 환자들은 다른 곳으로 가서 받았다. 광주경찰서와 서부경찰서에서 강력계 형사들이 둘이 나왔는데, 왜 네 번씩이나 조사를 했느냐면 그동안 조사한 내용이 조작인가 아닌가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다.
나는 김녹견 씨가 적십자병원에서는 폭도라고 기록되어 있는 진료카드를 정신병자로 꾸며주는 등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그후 수술한 것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갈 무렵 화장실에서 넘어져버렸다. 간신히 맞추어놓은 뼈들이 다시 흐트러져버렸다고 했다. 재수술을 했다. 병원에서도 못 움직이도록 깁스를 해주었다. 깁스를 한 다음에는 퇴원을 했는데 보이스타운에서 2개월 동안 친구와 동생들이 간호를 해주었다.
대수술을 몇 번이나
지역개발협의회에서 1980년 당시의 부상으로 몸에 이상이 있는 사람 20여 명에게 전남대병원에서 재진단을 받으라는 연락이 왔다. 5월 28일 전남대병원으로 갔으나 "병실이 없으니 며칠 있다 오라"고 했다. 며칠 후에도 병실이 없자 남녀 같이 쓰는 병실로 들여보냈다. 나는 다리뼈에 구멍을 뚫고 추를 달아 다리를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외국에서 인공뼈를 수입해서 끼워넣는 수술을 했다. 아침 7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장장 17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치료비가 엄청났겠지만 정부에서 전부 알아서 하는 모양이었다.
그 후 목발을 짚고 다니기는 하지만 걸어다니니까 인공뼈가 닳아져버렸다. 그래서 기독교병원, 여수 신풍병원에서 두 번씩이나 교체수술을 받았다. 대수술을 몇 번씩이나 하고 나니 몸이 무척 좋지 않았다. 1989년 5월 22일 저녁 11시경 갑자기 열이 나고 피가 넘어왔다. 나는 같이 있던 동생에게 말했다.
"도저히 못참겠다. 병원에 좀 데려다 주라. 죽어도 병원에 가서 죽어야겠다."
동생은 택시를 불러 나를 태우고 기독교병원으로 갔다. 2주일간 종합진찰을 한다고 하더니 어느날 간호원이 느닷없이 주사를 놓아 주었다. 의사가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주사를 놔 주요."
"폐에 이상이 생겼으니까 조심하고 약 잘 드세요."
그 후 나는 기독교병원에서 치료를 계속 받다가 6월에 목포로 내려갔다. 마침 오청동에서 '목포로 수련회를 가는데 같이 가서 진찰을 받는 게 어떠냐'고 권유를 했기 때문이다. 수련회를 가는 곳은 목포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병원으로 폐결핵 환자들의 요양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목포의원에서 5개월을 요양한 다음 퇴원하여 다시 보이스타운에서 생활하고 있다.
오청동 회원으로
처음에 나는 5·18 광주의거부상자회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나 박옥재 회장을 비롯한 집행부가 관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젊은 측들이 순수하게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다시 모임을 결성하여 운동을 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유가족, 부상자, 구속자 청년들의 모임으로 오청동을 결성했다. 나는 오청동 창립 당시부터 같이 활동해 오고 있는데, 다른 유관단체 어느 곳보다도 순수하게 투쟁해 왔다고 생각한다.
모임이 있으면 엽서로 연락을 해주는데, 연락이 안 오면 내가 직접 물벼락세탁소에 가보든지 사무실로 전화를 해본다. 이제까지 계속 싸움을 해왔지만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청동에서는 이 땅에 민주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5·18 광주민중항쟁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투쟁을 할 것이다. 진상규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다음에 배상을 받든지 해야 되는데 일부 오월단체에서는 보상받는 것에만 급급한 것 같다.
나는 비록 5·18로 인해 평생 불구의 몸으로 지내야 하는 불행을 당했지만 참여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까 내가 조국이라도 사랑해야 되지 않겠는가. 미국이라는 나라도 이제는 자신들의 잇속을 그만 좀 챙기고, 우리나라를 그만 좀 이용하고 물러갔으면 좋겠다. 양키는 물러가라.
(조사.정리 장옥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