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1세때 있었던 제2차 유대인 귀환령에 따라서, 바빌론에 살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나라가 재건되고 회복되는 것에 감사해서 7일 동안 잔치를 베풀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다. 그후 그들은 지도자들을 뽑았다. 그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의 처자와 가축을 끌고, 왕이 보내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찬양대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동안에 노래를 하며 퉁소를 불고 심벌(cymbal)을 치면서 즐거워하였다. 찬양대를 뒤따르는 유대인들도 찬양대의 연주에 맞추어 찬양을 하면서 행진하였다.
시편 126장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다."
당시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자의 숫자는 20세 이상의 장년만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4,628,000이었다. 이것은 모세의 출애굽한 숫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성경 「출애굽기」 12장40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이라"고 되어 있으나,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과 블레셋 그리고 애굽을 떠돌던 때부터 계산한 것이고, 야곱과 그의 자손 70명이 가뭄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한 시기부터 모세의 출애굽한 시기까지는 215년이다. 그리고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건너간 곳은 스에즈 만이 아니고 아카바 만이었다. 따라서 현재의 시내산은 가짜이고, 미디안 광야 즉 요르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북부에 있는 라오즈 산이 진짜 시내산이다. 성경 「출애굽기」 3장1절~4장,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더니, 그 양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모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모세가 말하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였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하는지라, 모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같이 모세가 떨기나무를 보고 다가가 여호와의 음성을 들은 호렙산이 라오즈 산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그런 주장을 하신 김승학 장로님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최근에 개방한 라오즈 산을 여러사람들과 함께 탐방하고 오셨다. 그곳에는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한 므리바 반석도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계신가 하였음이더라."(출애굽기 17장6절~7절)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땅을 떠난지 3개월이 되던 날 시내광야에 도착했다(출19:1). 그리고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모세가, 레위지파를 빼고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들의 숫자를 세어보니 603,550명 이었다(민1:46). 야곱의 자손이 215년만에 70명에서 603,550명으로 불어난 것과, 요시야 왕의 자손들 총15,432명이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70년 만에 제1차로 몇만 명, 그 후 17년이 지나서 제2차 귀환때 4,628,000명이 된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빌론에서 귀환한 유대인의 숫자로 성경 에스라 2장에 나오는 고레스 왕때 귀환한 숫자 42,462명만을 언급하고, 다리우스 1세때 대거 귀환한 숫자는 모르고 있다.
아무튼 다리우스 1세때 유대인들을 이끌고 귀환한 지도자는 유다지파 스알디엘(Salathiel)의 아들 스룹바벨이었다. 그는 BC598년에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서 바빌론으로 끌려온 유대왕국 여호야긴 왕의 손자였다. 대제사장 요사닥(Josedek)의 아들 예수아(Jeshua)가 2차 귀환 때도 스룹바벨과 함께 동행했는지는 잘 모른다. 이렇게 제2차 귀환때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들 중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유대인 일부가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 외의 사람들은 각기 이스라엘 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다·베냐민 지파와 적대관계에 있던 구다인들은 유대인들이 성전을 지으면서 부르는 나팔소리를 듣고 와서는, 자기들도 성전건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우리들도 여러분 못지않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드립니다. 또한 우리는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구다와 메대에서 이곳 사마리아로 이주했을 때부터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이같이 답변했다. “당신들이 우리와 성전을 같이 짓도록 허락할 수 없소. 처음 고레스 왕이나 지금 다리오 왕이 성전건축을 우리에게만 맡겼기 때문이오. 다만 성전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말리지 않겠소.”
구다인들은 후에 사마리아인이라 불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몹시 분노하여 수리아 총독을 찾아가서, 전에 고레스 왕과 캄비세스 왕때 처럼 한창 진행 중인 유대인들의 성전건축을 중단시키고, 방해를 놓아 공사가 지연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수리아와 베니게의 총독인 신시네스와 그의 일행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누구의 허락을 받고 성전을 짓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는 그간의 일을 쭉 설명한 후 말했다. "따라서 우리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총독께서 확인하고 싶으시면, 다리오 왕께 편지를 쓰십시오. 다리오 왕께서 선왕들의 기록들을 살펴보시면 우리가 총독께 한 말이 조금도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신시네스는 즉시 다리오 왕께 편지를 보냈으며, 다리오 왕도 의심이 생겨 궁중기록을 찾아보도록 명령했다. 마침내 바사 왕들의 여름 휴양지로 쓰이는 메대의 수도 엑바타나(지금의 하마단)에서 고레스칙령을 발견하였다. 이에 다리우스 1세는 신시네스에게 답신을 보냈다. "다리오 왕이 총독 신시네스와 그의 동료들에게 문안하노라. 내가 고레스 왕에 대한 기록들을 발견하여 베껴서 보내니, 거기에 적혀진 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도록 하라. 이제 잘들 있기를 바라노라." 신시네스와 그의 동료들은 다리오 왕이 보낸 기록을 읽고, 왕의 의도를 알아차린 후 그대로 시행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건축을 도왔다.
유대인들은 BC519년부터 성전건축을 재개하여, 그해 2월1일 기초를 세운 후, 예상보다 더 빨리 성전이 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때가 다리우스 왕 9년(BC513) 12월23일이었다. 참고로 성경 「에스라」 6장15절은 "다리오 왕 제6년(BC516)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고 써있다. 성전이 완공되자 제사장의복을 갖추어 입은 제사장들은 나팔을 들고 섰고, 레위인들과 아삽(Asaph)의 자손들은 다윗이 처음 규정한 대로 서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 일반백성들은 현재의 처지에 만족하였으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노인들은 옛날 솔로몬성전의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과 현재의 새 성전, 즉 스룹바벨성전을 비교해 보니 너무나 초라하다는 생각에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다.
곧 니산월(1월) 무교절이 가까워 오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조상들의 율법을 따라 무교절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 처자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1월14일에는 유월절제사를 드리고 7일간 절기를 지키면서 경비를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또한 하나님께서 바사 왕의 마음을 온유하게 해주셔서, 다시 조상들의 나라에 돌아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신 은혜를 기리는 감사제를 드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아주 풍성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유대인들은 대제사장을 행정의 수반으로 하고, 그가 귀족들과 협의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종교적 과두정치(oligarchy)를 운영하였다. 처음에는 왕손 스룹바벨이 유대총독이 되어 유대인들을 지도했지만, 그 후에는 폐르시아 왕에 의해 다른 유대총독들이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부임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제사장직은 아론의 자손들이 맡는 전통이 그대로 이어졌는데, 유대사회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적 과두정치가 흔들리게 되는 것은, BC330년에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BC 3세기 초에 페르시아의 뒤를 이은 그리스계 시리아왕국 즉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향력 하에서 대제사장 직이 정치권력과 금권에 의해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셀레우코스 왕조에 저항한 마카비 가문이 그들의 조상 하스몬의 이름을 딴 하스모니안 왕조(BC142~63)가 세워질 때까지 유대의 정치적·종교적·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종교적 과두정치 초기에, 바빌론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면서, 이전부터 전해오는 히브리어성경들을 편집하였다. 그 편집된 성경이 톨레미(Ptolemy) 2세인 필라델푸스 왕(Philadelphus:BC283~247)때 헬라어로 번역되어 알렉산드리아도서관에 보관되었다. 필라델푸스 왕은 신령한 히브리어성경에 대한 소문을 듣고, 유대의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협조를 받아, 유대의 성경학자들을 알렉산드리아에 초청하여 번역을 위촉했던 것이다. 그 당시 헬라어는 지중해세계의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로마제국 내에서도 헬라인뿐만 아니라 헬라어를 아는 로마인과 그 외의 민족들도 헬라어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현재의 구약성경은 헬라어성경(Septuaginta)을 모체로 탄생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