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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국대학생 도청 지키다 사망
증 언 자 : 박병규(남)/김양애(어머니)
생년월일 : 1961. 5. 4(당시 나이 19세)
직 업 : 대학생(현재 사망)
조사일시 : 1988.9
개 요
1980년 당시 동국대학교 1학년이었던 박병규 씨는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대학에 휴교령이 내리자 광주에 내려와 전남대 정문 앞 시위에 참여한다.
그 후 도청 안에서 시체관리 일을 하다가 27일 사망했다. 유족 모두가 유족회 등 5월 단체에 가입, 활동하고 있으며 어머니 김양애 씨가 이러한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
일부러 광주에 내려오게 했는데
우리 병규는 1980년 당시 서울에서 동국대학교(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유난히 세상이 어지러웠던 그해 봄 어느 날 나는 식당을 경영하는 병규 사촌누이한테 놀러 갔는데, 그애가 학생들의 데모가 크게 났으니 빨리 병규를 내려오게 하라는 말을 했다. 깜짝 놀란 나는 병규에게 전화를 했다. 데모 같은 것 하지 말고 집에 내려오라고 하면 오히려 반발해서 안 내려올까봐 그냥 집에 다녀가라는 말만 했다. 병규는 선선히 19일 오전에 내려올 테니 광주고속터미널로 마중 나오라고 했다.
그때 이미 공수부대가 들어와 학생들을 때려죽이기 시작한 지도 모르고 나는 아들을 오히려 사지에 불러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시국 돌아가는 것이 불안하다는 정도밖에 몰랐다. 하여튼 19일 오전에 나는 병규 아버지와 광주고속터미널로 마중을 나갔다. 우리 집이 양동에 있었기에 광주고속터미널까지는 걸어서 갔다. 유동 삼거리를 지나면서 보니 금남로 쪽에서 데모를 하고 있는 것이보였다. 이곳저곳에 사람들이 모여 "학생들은 모조리 잡아가더라"는 말을 했다. 마음이 조급해진 우리는 서둘러 광주고속터미널로 달려갔다.
들어오는 차마다 자세히 살피며 병규를 기다렸다. 빠짐없이 보고 있었는데도 아들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병규가 우리를 먼저 알아보고 찾아왔다. 광주고속터미널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해남이나 어떤 섬으로 갈 학생들을 한데 모아 인도하는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게 유독 눈에 띄었다. 우리는 불안해서 걸어갈 수 없어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택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되도록 큰길을 피하고 골목으로만 해서 걸었다. (터미널에서 아들만나 돌아오는데) 아세아극장 앞에 도착했을 때 젊은 사람들 상당수가 모여 각목으로 공중전화 박스를 때려부수고 있었다. 그들은 양동 파출소를 때려부수러 가자고 외치며 우루루 몰려갔다. 우리는 얼른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지꼴로 돌아와
집에 도착한 병규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보더니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갔다. 나는 그날 월산동에 살고 있는 사촌 집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느라고 병규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저 친구집에 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모처럼 몸 보신좀 시켜주려고 닭 한 마리를 고아놓고 있었는데 이틀이 지나도록 병규가 들어오지 않았다. 21일부터는 딸 경순(여상고 2학년, 현 오청동 회장)이를 데리고 병규를 찾아나섰다. 우리 모녀가 금남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전북에서 대학생들이 온다는 말이 쫙 퍼졌다. 거리를 꽉 메운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관광버스 몇 대가 도청을 향해 가는 것이 보였다.(아들은 22일 새벽에 손에 가시 달린 몽둥이를 들고 거지 꼴로 들어왔다. 배가 19일부터 한끼도 못먹어 배가 고파왔다고 했다.) 그 사람들과 섞여 무심코 따라가는데 갑자기 최루탄이 터졌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밟혀죽기 딱 알맞은 순간이었 다. 나는 몸이 비대해서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했다. 사람들한테 꼭 밟혀 죽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별일이 없었다.
잠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 사람들이 '김대중 석방'등을 외치며 광주역 쪽으로 몰려갔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대열의 한쪽 옆으로 비켜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양동시장을 지날 때에 학생들이 리어카에 죽은 사람을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
"시민 여러분, 공수부대놈들이 이렇게 사람을 죽였습니다. 저들이 광주 사람을 다 죽이려고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들은 슬픔에 찬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호소하고 다녔다. 리어커에 실린 시체는 발이 삐져나와 흔들거렸다.
이런 일들을 보고 겪으면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특히나 내가 오랫 동안 존경해 왔던 김대중 씨가 구속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어떻게든 시위대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집 앞 큰길에서 데모하는 사람들에게 물을 떠다주었다.
며칠 동안 소식이 없던 병규가 22일 새벽에 불쑥 집에 들어왔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물론이고 얼굴, 머리 모양새가 영락없는 거지 형상이었다. 게다가 손에는 가시가 잔뜩 달린 몽둥이까지 들고 있었다. 지금껏 어디서 무엇 하다 이제사 오느냐며 안부반 나무람반으로 다급하게 묻는 내게 병규는 전남대학교에서 싸우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밥은 물론이고 물 한모금 가져다 주는 사람이 없어 배가 고파 집에 왔다고 했다. 서둘러 밥을 지어 먹이고 옷을 갈아 입게 한 다음 목욕, 이발까지 시켰다. 가시가 달린 몽둥이를 들고 싸워서 그런지 병규 손바닥에는 여러 개의 가시가 박혀 있었다. 나는 눈이 어두워 딸 경순이가 가시를 빼주었다.
한편 우리 집에는 19일에 시골에서 제사를 지내러 왔던 친척 두 분이 난리가 나는 통에 발이 묶여 묵고 있었다. 며칠을 속수 무책으로 지내던 분들이 한창 바쁜 모내기철이라 더 이상 머물러 있지 못 하고 집을 나섰다. 내가 그분들을 남평 가는 길목까지 바래다주고 집에 와보니 병규가 나가고 없었다. 집 앞 구멍가게 주인이 우리 병규가 친구들과 함께 나가더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때는 이미 시민들이 도청을 장악하고 있던 때라 나는 병규가 그저 구경 나갔거니 생각하고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김밥 만들어 도청으로
도청에 있는 학생들이 배를 곯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내가 동네 부녀회장을 맡고 있어서 쌀을 거둬 밥을 지었다. 순식간에 쌀이 한 가마니나 걷혔다. 양이 많아 식당에서 밥을 쪄내고 동네(양동시장) 아낙네들을 모아 김밥을 쌌다. 필요한 모든 재료는 양동시장에서 즉시 구입할 수 있었다. 물건을 스스로 내주는 사람은 물론이고 누구나 일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준비된 것을 물 두 통과 함께 리어커에 싣고 도청으로 달려갔다.
다른 한쪽에서는 태극기를 만들고, 계란과 물을 준비하여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시위대들에게 올려주었다. 모두 가슴이 뿌듯한 광경들이었다.
도청에 가자 학생들이 몹시 배가 고팠던지 쌀 한 가마니 분량의 김밥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고마와하는 학생들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우리는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도청 앞에서는 매일같이 궐기대회가 열렸다. 우리 병규는 그때 도청 안에서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소식을 듣고 도청으로 달려갔더니, 병규는 어깨에 수습위원띠를 두르고 일하고 있었다. 나는 병규를 발견하자 곧바로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병규야, 집에 가자. 이러다 변이라도 당하면 어쩔라고 이러냐, 응? 지금 빠져 나올 수 없으면 나중에라도 몰래 빠져나오너라."
"어머니, 걱정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염려 말고 돌아가 계세요."
나는 할 수 없이 그냥 돌아서야 했다. 그 뒤 26일쯤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도청에 시체들을 보러간다고 했다. 나는 병규도 다시 만나볼 겸 따라나섰다. 도청에는 죽은 사람이 많은 데다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아는 얼굴이 나오면 서로 알려주라고 구경시키는 것이라 했다. 정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못 들어간다고 했다.
엉겁결에 아무 신분증도 없이 나갔던 나는 주민등록증을 들고 다시 도청으로 갔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보람도 없이 내 바로 앞에서 내일 다시 오라며 문을 닫아 버렸다. 그날 저녁 8시 30분경에 병규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 걱정하시는 건 알지만 여기 있는 친구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그냥 들어갈 수가 없네요. 내일 아침에 일찍 갈께요."
내 아들을 내놓아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5월 27일 새벽 광주를 재진압하러 쳐들어온 군인들의 총을 맞고 병규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전날(26일) 밤늦도록 경순이와 그동안 미처 치우지 못했던 쓰레기들을 치우느라 27일 아침에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새벽 6시쯤 헬리콥터가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은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소리치고 다닐 때에야 잠이 깼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났구나 싶어 도청에 있는 병규를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도로는 이미 군인들이 장악하고 있어 사람들을 못 가게 막았다. 나는 군인들에게 시댁이 남동인데 지금 시어머니가 위독하다고 해서 가는 길이라고 둘러대며 군인들을 뚫고 가다가 친정 동생들을 만나 함께 도청 앞으로 갔다.
도청 앞에는 트럭이 늘어서 있고 군인들이 피가 질질 흐르는 것을 실어 날랐다. 죽은 시체인가 본데 뭘로 싸놓아서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시체에서 피가 질질 흘러 내렸다. 한쪽에는 기자들도 있었는데, 우리나라 기자들은 담배만 피우고 있고 외국 기자들만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우리 앞에서 피가 흐르는 시체를 실어 날으면서도 도청에 있던 사람들은 도망쳤다고 했다. 상무관에 아들 이름 적힌 관이 있어. 망월도 시케 썩은 냄새에 코피 쏟아지고 구역질.)
기자건 시민이건 도청 안으로는 아무도 못 들어갔다. 사람들이 도청 안에 있던 사람들 소식을 군인들에게 중구 난방으로 물었다. 어떤 높은 놈(계급 모름)이 오더니 도청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갔다고 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지 피가 질질 흐르는 시체들을 우리 눈 앞에서 실어나르면서도 그런 거짓말을 서슴없이 했다.
"우리 아들이 살았으면 집으로 돌아왔을 것인디 아직도 안 온 것이, 필시 너희들이 내 아들을 독 안에 든 쥐 모냥 가둬놓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내 아들 내 놓아라, 이놈들아!"
내가 막무가내로 악을 쓰며 울부짖었지만 모두 다 도망갔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얼핏 보니 한쪽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잡아 차에 태우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우리 병규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 송정리 헌병대로 가보면 생사도 알아볼 수 있고, 잡힌 사람 명단도 볼 수 있을 것이란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막상 헌병대에 가보니 생사확인은 커녕 안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어떻게 수소문해 본 끝에 상무대 근처에 사는 민간인 한 사람이 잘 아는 헌병이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을 중개자로 해서 2만 원의 뇌물을 주고서야 그 헌병을 만날 수 있었다. 헌병은 모든 서류를 다 뒤져보더니 처음엔 병규란 이름이 없다고 했다. 그러더니 한참 머뭇거리다가 도청 앞에 가서 시체를 찾아보라고 했다. 차마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해 망설였던 것 같다.
택시를 타고 도청 앞으로 달려갔다. 도청은 군인들이 무장을 하고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도청 맞은편에 있는 상무관으로 가라고 해서 상무관을 뒤졌다. 한쪽 구석에 우리 병규의 이름과 학교가 써진 병규의 관이 놓여 있었다. 정말 내 아들 병규인지 확인하려는데 다른 식구들이 나와 병규 아버지를 강제로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내버렸다. 내가 집으로 가지 않으려고 큰소리로 울부짖자 외국인 기자들이 달려들어 내 모습을 사진기로 찍어댔다. 그날은 꼼짝 못 하고 집에 붙잡혀 있었다.
다음날인 28일 나는 병규의 사진을 확대해서 가져오라는 동장의 연락을 받고 병규 고등학교 앨범 사진을 확대했다. 동장과 함께 확대한 사진을 들고 상무관으로 가니 아무리 찾아보아도 우리 병규 관이 없었다.
상무관 안에는 유가족들인지 사람들로 붐볐다. 가족이 확인된 시체들과는 달리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은 관을 종이로 싸서 따로 한군데에 모아두고 있기도 했다. 그 안은 온통 시체 썩은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이런저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울 정신도 없을 만큼 넋이 나가버려 친정 동생이 병규 사진을 들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다. 한참 후에야 우리 병규가 벌써 망월동으로 실려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무렵 방송에서는 도청에서 마지막 날 사망한 사람이 2명뿐이라고 했다 한다. 그렇게 발표해 놓고 시체가 많은 것이 들통날까봐 도청과 상무관에 있는 시체들을 밤에 몰래 망월동으로 옮겨버렸던 것이다. 병규도 망월동으로 옮겨졌다. 다시 망월동으로 달려간 나는 한바탕 울부짖고 나서야 장례지낼 준비를 했다. 병규는 이미 입관이 되어 있어서 새로 맞춘 널은 물리고 옷만 갈아입혔다. 그때 보니 병규는 뒤쪽에서 총을 맞았는지 앞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병규의 왼쪽 손목에는 59번이라고 써진 흰 종이가 달려 있었다.
병규의 묘자리 바로 위쪽에는 어느 섬에 산다는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있었다.
그 시체는 죽은 지 오래되었는지 널을 비닐로 싸놓았는데도 붉은 살이 삐져나올 정도로 심하게 부패해 있었다. 냄새 또한 지독해 숨을 쉬는 것은 고사하고 나는 코피까지 쏟았다. 내 아들이 죽어 있는 상황이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약한 냄새였다. 여기저기서 토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옛날에 조카 한 명이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묘를 잃어버린 일이 있어서 우리 병규도 나주군 금천면의 고향에 묻기로 했다. 그래서 장의차를 불러 고향으로 갔다. 장례를 지내는 동안 주위 사람들이 나와 남편을 묘 가까이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기어이 기절하고 말았다. 그뒤로 다시 깨어났지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중에 동생에게 들으니 내가 기절한 뒤 한참 있다 깨어나더니 병규 제사상에 차려놓은 떡이며 과일을 듬성듬성 집어먹더라고 했다. 그래서 동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한다.
'세상에 아들이 죽어 금방 땅에 묻었는데 그 제사 음식을 먹다니……. 나 같으면 억지로 먹으라고 해도 안 넘어갈 텐디…….'
정신이 좀 이상해져 버린 것이 아닌가도 생각했었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내 행동을 보고는 너무도 정신이 말짱해 보이더라고 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장례를 치르느라 이웃 집에서 빌려쓴 돈도 갚고, 장의차도 돈 줘서 보내고, 집에서 장례를 도와준 사람들에게까지 신경을 쓴 것이다. 그런 후 방에 들어 가더니 코를 골며 자더라고 했다.
나는 다음날 깨어나서야 비로소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나는 원래 몸이 뚱뚱해서 혈압이 높은 편이다. 그런데 병규가 죽고 난 뒤 며칠 동안 밥을 굶은 데다가 사람들이 나를 진정시키느라 준 신경안정제를 자꾸 먹은 것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내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까지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를 살린 것이 우리 병규가 아닌가 싶다. 내가 온 정신이었으면 어떻게 아들 제사상에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 병규의 혼이 나를 살리느라 떡이며 과일을 먹게 만든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살아나긴 했지만 그때부터는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을 밥 한술 못 넘기고 누워 있으려니 하루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워따 워따 뭔 일이다냐. 내가 뭔 죄가 많아 자식 죽고 눈까지 안 보이끄나."
자식 죽고 눈까지 멀게 되었구나 싶으니까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그때 내 소식을 들은 동네분들이 약도 지어오고 이것저것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분들이 나를 위로하느라 당시 군복무를 하고 있던 큰아들 면회나 한번 다녀오라고 부추겼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 형제를 두고 있다 하나가 죽자 남은 아들이 더욱 소중해진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나는 딸 경순이를 데리고 큰아들에게 면회갔다. 동생이 도청에서 군인들과 싸우다 죽은 것 때문에 어디에 갇혀 있지나 않을 지 염려를 했었는데, 다행히 큰아들은 아무 탈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제 동생이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군에 있는 아이에게 괜히 말했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다 생각하고 그간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숨겼다. 그러자니 속이 답답하고 혈압이 올라 경순이가 머리에 찬물을 끼얹어주어 나를 진정시키곤 했다. 큰아들은 그뒤로 휴가와서야 병규가 죽은 것을 알았다.
온 식구가 민주화투쟁 대열에
그날 이후 식구 모두가 가슴에 상처를 안고 어디다 말도 못 한 채 답답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남편은 병규가 죽은 뒤에 홧병을 얻어 3년 여를 앓았다. 광주항쟁 직후만 해도 자식이 죽었어도 어디다 말 한마디 못하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 식구들은 유족회 활동을 하면서 우리 병규의 억울한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남편은 나와 계남이가 유족회 활동을 하는 것 때문에 경찰서에서 자꾸 조사나와 홧병이 깊어져 1984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향에 묻혀 있던 병규는 땅 주인이 묘가 있는 밭을 논으로 만드는 바람에 망월동으로 이장했다. 나는 송영도 회장과 정수만 씨 어머니와 시청에서 망월동의 묘 133번을 샀다. 1987년 8월 17일에 병규를 망월동으로 이장했다.
처음부터 병규를 망월동에 묻지는 않았지만 유족회 활동은 처음부터 했다. 우리집은 나뿐만 아니라 큰아들 계남이와 세째딸 경순이까지 모두 5·18 관계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작년(1987년) 10월 대통령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때에 전남여고 동문회원 몇 명이 청와대의 초청을 받아 서울에 간다고 했다. 그말을 들은 우리는 계란을 준비해 가지고 그들이 출발하기로 한 시청 앞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멋지게 차려입은 여편네들한테 계란세례를 퍼부어 주었다. 그러나 완전히 막지는 못하고 관광버스 6대가 가려던 것을 4대만 가게 하는 데 그쳤다. 경찰들이 쫓아와 유족들을 망차에 실었던 것이다. 경찰들이 어찌나 난폭하게 하던 지 보다 못한 어떤 할아버지가 전경들에게 호통을 치는 모습도 보였다.
"너희들은 부모도 없냐?"
나는 몸이 좋지 않아서 그냥 집으로 가려고 길가로 나왔다. 그런데 언제 봤는지 사복 형사 몇 명이 나를 쫓아와서는 망차로 끌고갔다. 내가 차로 태워지려는 순간이었다. 먼저 차 안에 실려졌던 젊은 사람이 나를 잡고 있는 형사를 발로 걷어 찼다. 그 바람에 그들 사이의 승강구에 넘어져버린 나는 연거푸 세 번이나 배를 걷어채였다. 허리도 몹시 심하게 다쳤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나도 모르게 똥을 싸버렸다. 그 상태 그대로 망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아침도 못 먹고 나와 허기진 데다 숨구멍도 없는 차 안이 몹시 답답해 혈압이 높은 나는 죽을 지경이었다.
참다 못한 내가 물 좀 먹자고 했더니 그들이 순순히 차를 멈췄다. 나는 물을 먹게 하려나보다 생각하고 얼른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다리를 잘 못 쓰는 청년 한명을 더 내려놓더니 차가 떠나버렸다. 주변에는 물은 커녕 인가도 없는 첩첩산중이었다. 허리를 다친 나와 다리를 못 쓰는 청년이 대책없이 앉아 있는데 다행히 우리와 가까이 내버려진 유족들이 거슬러 올라왔다. 우리는 물어물어 근처 파출소로 몰려갔다. 그곳 지서장은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며 우리 모두를 버스에 태워 광주까지 보내주었다.광주에 도착한 우리는 시청으로 몰려갔 다. 시장은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부상당한 사람 11명만 기독교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온몸에 타박상을 입은 데다 허리를 크게 다쳐 옷에다 똥을 두 번이나 싸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87년 전국체전 때에는 3일 전부터 집 주위와 아들이 운영하는 주산학원까지 감시했다. 올해(1988년)는 시청에서 3백만 원을 생활보조 융자금으로 유족들과 부상자들에게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유족이나 부상자 전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어려운 사람 몇 명만 뽑아서 준다고 했다. 자연히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유족회는 그 돈을 받지 않기로 했는데, 부상자측이나 관제 유족(박찬봉 씨가 회장으로 있는 5·18 의거 유족회를 말함-조사자주) 중에서는 받겠다는 사람이 나왔다. 의견이 갈라지면 안 되겠기에 돈을 지급하기로 한 날 우리 유족회는 시청으로 몰려갔다. 그동안 모임에는 나오지도 않던 사람들이 돈 준다고 하니까 많이도 나와 있었다.
"그동안 얼굴 한번 안 내밀고 잘들 살더니, 돈 준다니까 다들 나왔구먼. 사람이 그러면 못쓰는 것이여. 아무리 우리가 살기 팍팍허드라도 이런 짜잘한 돈을 받아서는 안 되여. 이보다 더 큰 보상을 받는다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돈 3백만 원에 이게 뭔 꼴들이요. 광주시민덜 얼굴에 똥칠하지 말고 우리 뭉칩시다." 돈 3백만 원으로 사람을 치사하게 만드는 정부와 그것에 놀아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분통이 터진 내가 외친 말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떤 젊은 놈이 내 팔뚝을 뒤에서 잡고 꽉 주물러버렸다. 내가 큰소리로 누군지 밝히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그날이 마침 손주 돐인데다 팔뚝 통증도 심해서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결국 받지말자는 사람보다 받자는 사람이 더 많아 융자금 3백만 원은 전원 지급하기로 결정되었다.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뒤에 유족들에게 30만 원이 나왔는데, 그때도 서로 받으려고 아우성쳤다고 한다. 돈으로 사람을 이간질시키는 간교한 작태였다.
지난 8월 18일에는 유족과 부상자, 그리고 민가협이 함께 모여 국회로 갔다.
경찰은 출발 전부터 저지를 했는데, 우리는 각자 미리 약속된 장소에 모여 정읍 휴게소에서 재집결하기로 하고 광주를 빠져나갔다. 나는 교도소 앞에서 관광차를 타고 국도를 따라 간신히 정읍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새벽같이 나오느라 잠도 설치고 밥도 굶었는데, 플래카드를 싣고 미리 출발시킨 봉고차가 오지 않아 꼼짝없이 굶고 있었다. 경찰들에게 잡혀 못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서울에 가지 말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우리는 그대로 그냥 돌아갈 수 없다고 결정해 기다리기로 했다. 1시간 30분을 꼬박 기다리고 나니 봉고차가 왔다. 시내를 빙빙 돌며 경찰들을 따돌리느라 애먹었는데 결국 전남대 안으로 들어가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어렵게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한 우리는 즉시 성명서를 낭독하고 결의문을 채택하는 집회를 가졌다. 경찰들이 새까맣게 몰려왔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굽힘이 없이 '오월의 노래' 등과 구호를 외쳤다. 많은 사람이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갔다. 2백여 명 중 41명을 제외한 사람들이 서울시내 12개 경찰서로 분산, 수용되었다.
나는 행방불명자 가족 몇 명과 구로경찰서로 끌려갔는데 그곳 서장이 광주 사람이라고 했다. 경찰서에 노태우 사진이 걸려 있길래 그것을 부수려고 하니 서장이 말렸다. 어차피 또 새로 걸어놓을 텐데 지금 깨면 뭐 하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명씩 불려나가 조사를 받았다. 내가 제일 나중에 조사받았다. 무슨 특별한 조사는 아니었고 무조건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나는 조사받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면서 도장 찍기를 거부했다. 그날밤을 유치장에서 보내고 다음날 풀려 나오면서 나는 그 경찰서에 압수되어 있던 플래카드를 가져 왔다.
"이것이 다 우리들 서러운 돈 걷어서 만든 것이여. 일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니 또 써먹어야 쓰것어. 그리고 앞으로 조사를 하려면 우리들 잡어다 허지 말고, 전두환이 노태우 놈 잡어다 무릎꿇쳐놓고 조사해 봐."
우리 딸이 잡혀간 곳에서는 보리밥에 단무지 네쪽이 올라오는 형편없는 식사가 나왔다고 했다. 어떤 곳은 단체로 단식을 하자 불고기에다 식후에 커피까지 대접하는 등의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고 한다. 연행되지 않은 사람들은 평민당 당사무실에 모여서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다음날 오후 우리는 모두 그들이 대절해 준 관광버스를 타고 광주에 왔다. 이런 식으로 고초를 겪지만 유족회 활동을 계속해서 해오고 있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었는데
나는 1980년 당시 양동시장에서 명태장사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마음만 좋았지 생활능력이 전혀 없었고, 풍수나 관상 등을 봐주며 겨우 담배값이나 벌어쓰는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병규는 어려서부터 무척 고생하면서 컸다. 병규가 중학생이 되도록 우리 집은 꽁보리밥을 먹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집에서 먹는 것 보다는 쌀이 조금이라도 더 섞인 밥을 도시락으로 싸주었지만, 언제나 병규가 제일 꽁보리밥이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한번은 병규가 학교에 갔다오더니 말했다.
"어머니, 인자 도시락 안 싸가지고 다닐라요. 챙피해서 못 가지고 다니겠소."
그러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배가 고파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보리밥이라도 좋으니 다시 싸달라고 했다. 기가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방 하나에 일곱 식구가 살아야 하는 처지라서 쌀밥은 꿈도 꾸지 못했다. 병규는 그래도 아무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80년 초에 군에 가 있는 제 형을 면회하러 간 적이 있는데 형보다 훨씬 키도 크고 건강한 병규를 보고 부대 사람들이 모두 놀랄 정도였다. 대학 갈 것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미국에 이민간 큰딸이 학비를 대준다고 하여 병규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담요 하나를 가지고 독서실에서 고생하며 공부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고생한 보람도 없이 한 학기도 제대로 못 마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올림픽 전에 진상규명되어야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처음엔 잘 몰랐다. 나중에 들으니 전두환, 노태우가 정권을 잡으려고 광주시민을 모조리 죽여없애라는 명령을 했다 한다. 처음에는 31사단 사단장인 정웅 씨에게 명령했으나 전라도가 고향인 정웅씨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자 공수부대를 투입시켰다고 한다. 그때 광주에 온 공수부대원들에게는 며칠 동안 밥을 굶긴 데다 술을 먹여 보이는 대로 총을 쏘게 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와는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어찌 생각해 보면 우리 병규가 죽은 데는 내 책임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일부러 광주에 내려오라고만 하지 않았어도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광주에 내려온 다음이라도 병규를 못 나가게 했으면 안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미국에 있는 큰딸이 초청했을 때 이민을 가버렸더라면 그 당시에 없었을 테니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왕지사 죽을 목숨이었는 지는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 자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런 생각 끝에는 언제나 광주학살의 원흉이고 내 귀한 아들을 죽인 놈들이 떠오른다. 전두환, 노태우 일당과 미국말이다.
나는 그놈들을 잡아다 쇠고랑을 채워 징역살게 한 뒤에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상문제는 그다음의 일이다. 그런데 그놈들이 정권을 잡고 있으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니 우습지도 않다. '지그가 범인인디, 지그가 보상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전라남북도에서 뽑아준 평민당 국회의원들은 뭐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모조리 평민당을 당선시켜 보내줬는데도 노태우 하나 못 이기니 말이다. 전두환이부터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미국에 몸이 팔린 상태이다. 그러니까 미국놈들이 우리나라 국민을 잡아먹어도 아무 소리 못 하는 것 같다.
나는 올림픽이 끝나기 전에 우리 병규를 비롯한 5·18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그 가족들의 8년간의 싸움 또한 헛되지 않게끔 진상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현재 나는 미국에 사는 큰딸이 사준 집에서 큰아들 내외와 딸 경순이와 함께 살고 있다. 현재 생활비는 아들이 주산학원을 운영하는 수입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주산학원이 다른 학원들과 달리 경기가 좋은 것은 아니다. 유족회 활동에 따른 일종의 감시로 경찰이 자주 출입해 학원의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운 상태이다. 최근에는 그나마 건물 주인이 학원 자리를 비워달라고 해 더욱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우리 온 식구가 그 학원 하나에 매달려 있는데 어떻게든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할 판이다.(조사.정리 임금옥)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