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차맛어때 원문보기 글쓴이: 후박나무
일체개고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하여
[책상은 그 자체는 고통이 아니다.]
후박나무
글 순서
1,들어가는 말
2.dukkha에 대한 경전의 정의
3.dukkha를 이해하는 주석서의 방식
4.삼특상
5.나가는 말
1,들어가는 말
불교인이건 비불교인 이건 불교의 dukkha(苦)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연기나 무아에 대한 敎義 도 그러한 면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dukkha(苦)에 대한 오해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지적은 이미 여러 불교학자와 스님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는데 그대표적인 예가 1959년에 왈폴라 라훌라스님에 의해 출판된 [what the buddha thought]에도 언급되고 있다. 라훌라 스님은 dukkha(苦)라는 용어는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으며 이러한 오해에 바탕하여 불교를 염세주의로 보는 시도가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고성제에서의 dukkha 는 단순히 고통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dukkha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내보이고 있다.
‘빠알리어의 dukkha는 일반적으로 행복,평안,쉬움등의 반대말인 고통,아픔,슬픔,비극의 의미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성제에서의 dukkha라는 용어는 인생과 세상에 대한 붓다의 견해로서 깊은 철학적 의미와 크고 넓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4성제에서의 dukkha는 일반적으로 고통이란 말을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에 덧붙여 불안전,무상,공,비실체의 깊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1)
이러한 견해는 그 뒤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라훌라 스님의 견해를 이어받은 듯한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고성제와 제행개고나 일체개고의 고는 단순한 고통(그것이 육제척이든 정신적이든) 즉 pain 혹은 괴로운 느낌(苦受)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학자들이나 남방학자들 가운데는 근원적인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unsatisfactoriness(불만족성)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고성제와 일체개고의 dukkha(苦)의 내용은 일체 유위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물질도 苦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성제와 제행개고의 고는 단순한 고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받아들이셔야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통찰지가 아니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2)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히는 법으로서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해서 마치 불교가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로 오해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괴로움, 고(苦)란 말은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들의 성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dukkha에는 불완전성, 동요성, 흔들림, 변화, 혼란' 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으며 괴로움은 심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실제적인 세계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정신물리적인 총체적인 불안을 의미합니다.’4)
왈폴라 라훌라스님이 dukkha의 의미를 확대 해석해 놓은 이후로 많은 학자들이 고를 존재의 속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고는 무상과 무아 같은 존재들의 성질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苦의 이해는 과연 붓다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것일까?
나는 이러한 고의 해석은 붓다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고 이러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가장 실감나고 실천적인 가르침으로 다가와야 할 4성제와 삼특상의 가르침을 건조하고 현학적인 교리로 만들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우려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일체 유위법은 苦이며 그러므로 물질도 苦입니다. 苦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하는 의문은 잠시 내려놓으시고 일단 부처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떻게 관찰하더라도 苦일 수밖에 없다고 설파하셨다고 받아들이셔야 합니다.’5)
이러한 설명이 당도하는 결론은 당연히 조건지어진 현상에 포함되는 태양도, 달도, 책상도, 돌맹이도 고이며 이것이 붓다가 설명한 고의 뜻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팃낫한 스님은 이렇게 만물이 고통이다라는 설명은 고를 실체시하려는 시도라고 지적하면서 아울러 영원하지 않음으로 고통이고 따라서 무아니다 라는 논법은 비논리적이며 고통을 무상과 무아와 같은 반열에 두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다.6) 이글에서는 경전과 주석서를 통해 이제 까지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 잘못 이해된 고에 대한 해석을 비판하고 일체개고에 대한 바른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2.dukkha에 대한 경전의 정의
먼저 dukkha에 대한 가장 널리 알려진 경전의 정의는 쌍윳따 니까야의 ‘초전법륜경’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 경전과 그 밖에 다른 3가지 경전의 부분을 인용한다.
a.Dhammacakkappavattana suttaṃ
비구들이여, 이것이 성스러운 고통의 진리이다. 태어남은 고통이다. 늙음은 고통이다. 병듦은 고통이다. 죽음은 고통이다. 싫어하는 것과 함께 하는 것은 고통이다. 좋아하는 것과 떨어져 있음은 고통이다. 무엇이건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오온에 취착하는 것이 고통이다.7)
b.Dukkha suttaṃ
비구들이여,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에 관하여 설명할 것이다.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어떠한 것이 괴로움인가? 오온에 취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 다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육체에 취착 하는 것, 감수에 취착하는 것, 지각에 취착하는 것, 형성에 취착하는 것, 의식에 취착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괴로움이라고 한다.8)
c.Dukkhaṃ suttaṃ
세존이시여, 괴로움, 괴로움이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괴로움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라다여, 육체가 괴로움이며, 감수가 괴로움이며, 지각이 괴로움이며, 형성이 괴로움이며, 의식이 괴로움이다.9)
d.Dukkhasuttaṃ.
비구들이여, 일체는 괴로운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떠한 일체가 괴로운 것인가?
시각도 괴로운 것이며 형상도 괴로운 것이며 시각의식도 괴로운 것이며 시각접촉도 괴로운 것이며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도 괴로운 것이다.10)
위에서 인용한 4개 경전에서 a.b 2개의 경전은 취착(upādāna)을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고 c.d 2개의 경전은 눈과 형상을 직설적으로 괴로움(cakkhuṃ bhikkhave dukkhaṃ, rūpā dukkhā)이라고 말하고 있다. 분명 a.b와 c.d 의 경전은 苦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초전법륜경’등에서 보이듯이 취착이 고통이라고 설해지는 a.b의 경전은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고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c.d의 경전으로 고를 이해하려 할 때 자칫 잘못하면 오온=고 라는 등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문맥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오온이 곧 고라고 이해하게 되면 이것은 苦를 주관적인 느낌이 아닌 객관적인 속성으로 이해 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즉, c.d와 같은 경전은 일체 유위법이 苦(책상 그 자체가 고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 주장을 정당화 시켜주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5온 대한 취착이 고인가? 아니면 5온 그 자체가 고인가? 이와 같은 설명을 하기위해서 주석서에 나타난 고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법을 살펴보자.
3.dukkha를 이해하는 주석서의 방식
위 경전에서 확인 한 바와 같이 만약 우리가 물질,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이 괴로움이라는 것과 눈과 형상이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움은 소멸시켜야 하는 것이므로 5온과 6입들을 소멸시키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라는 해석이 나올 것이다. 5온과 6입을 소멸시키는 것이 불교라면 이것은 중도론이 아니고 단멸론이 된다. 옛 스님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붓다고사가 지은 법집론(Dhammasaṅgaṇi) 의 주석서인 앗타살리니(atthasalini)에서는 고통을 설명하는 경전의 언어를 5가지로 이해해야 함을 설명하고 있다.
1), 느낌으로서의 고통 Dukkhavedanā
‘(4선에서)줄거움을 버리고 괴로움을 버리고..’ 11)
등에서 고통은 고통스런 느낌으로 설명된다.
상식적인 괴로운 느낌을 괴로움이라는 말이다.
2). 바탕으로서의 고통 Dukkhavatthu
‘태어남은 고통이다.’12)
등에서 태어남은 고통의 바탕이 되기에 고통이라고 설명된다.
로,병,사의 괴로움은 태어남이 바탕이 된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밖의 모든 괴로움이 어찌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
3). 대상으로서의 고통 Dukkhārammaṇa
‘그러므로 마할리여! 형상은 괴로움이고 괴로움에 떨어진 것이고 괴로움에 사로잡힌 것이다.’13)
등에서 감각 대상되는 형상에서 고통이 생겨나기에 대상으로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4). 원인으로서의 고통 Dukkhapccaya
‘나쁜 짓을 쌓는 것은 고통이다.’14)
등에서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은 고통의 원인이 되기에 원으로서의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5).장소로서의 고통 Dukkhapccayaṭṭhāna
‘오 비구여! 단지 말로 설명해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얼마나 지옥이 고통스러운지는...’15) 등에서 지옥이라는 고통스러운 장소를 가지고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경전에서 나타나는 고통을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은 경전의 문장을 오해없이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이 될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 고통이라는 것은 1번에서 5번까지에서 공통으로 적용되는 뜻이다. 특히 3번과 4번처럼 고통을‘대상으로서의 고통’과 ‘원인으로서의 고통’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고통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위에서 인용한 4개 경전에서 취착(upādāna)을 고통이라고 설하는 a.b 경전은 ‘고통의 원인’을 말하고 있는 문장이다. 즉, 색수상식에 취착하는 것은 고통이기에 취착(upādāna)이라는 원인으로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오온과 6근을 직설적으로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c.d 경전은 ‘고통의 대상’을 말하고 있다. 즉, 고통은 형상을 대상으로 하여 생겨나기에 형상(Rūpaṃ)이라는 대상으로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대상으로서의 고통’ 과 ‘원인으로서의 고통’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경전을 다시 음미해보자.
e.Natumhākasuttaṃ.
비구들이여, 눈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버려라.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유익하고 안락할 것이다. 형상도 그대들의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버려라.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유익하고 안락할 것이다.16)
f.Chandarāga suttaṃ
라다여, 육체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과 환희와 갈애를 버려라. 이와 같이 육체를 버리면 그것은 뿌리가 잘린 종려나무 줄기처럼 사라지게 되어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라다여, 감수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과 환희와 갈애를 버려라. 이와 같이 감수를 버리면 그것은 뿌리가 잘린 종려나무 줄기처럼 사라지게 되어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17)
경전 e 에서 ‘눈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버려라.’ ‘형상도 그대들의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버려라(pajahatha).’라는 문장을 눈과 형상을 없애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만약 이와 같이 해석하면 불교는 자살을 부추기는 단멸론의 종교가 될 것이다. 경전 e에서 ‘눈과 형상을 버려라.’는 말은 눈과 형상에 집착하면 고통이 생겨나기에 눈과 형상에 대한 취착을 버리라는 뜻으로 ‘그것을 버려라(pajahatha)’라는 단어를 이해해야 할것이다. 이러한 뜻을 경전 f에서는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육체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과 환희와 갈애를 버려라.’라고 명확하게 버려야 할것을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형상은 괴로움이다.(rūpaṃ dukkhaṃ)라는 문장을 형상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말로 이해 하면 안된다. 형상은 괴로움이 일어나는 대상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경전에서 나타나는 없애고 소멸시키고 버려야 하는 것들은 욕망과 갈애이지 눈과 형상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경전에서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koṭṭhitasuttaṃ
‘벗이여 꼿티까여, 시각이 형상에 묶인 것도 형상이 시각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난 욕망과 탐욕이 있는데 그것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벗이여, 예를 들어 검은 소와 흰 소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줄에 묶여 있다고 합시다. 누군가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 있다던가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옳게 말하는 것입니까?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 있지 않고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줄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거기에 묶여있습니다.’18)
‘눈이 형상에 묶인 것도 형상이 시각에 묶인 것도 아니고 그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난 욕망과 탐욕이 있는데 그것에 묶여 있다.’ 그러므로 버려야 할 것은 눈이나 형상이 아니고 주관과 대상에서 생겨나는 욕망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경전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몇몇 불교 학자들에게 이러한 경전의 문장이 큰 문제를 안겨 주었던 것 같다.‘눈을 버려라’’형상을 버려라’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단멸론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경전에는 분명히 ‘눈을 버려라’라고 말한다. 몇몇 학자들은 이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버려지는 눈과 형상을 ‘허망한 마음상태’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즉, 눈과 형상을 ‘허망한 정신 현상’으로 간주함으로서 ‘눈과 형상을 버려라’라는 말을 이해 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오온의 色도 마음에서 나타난 ‘허망한 마음’‘무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19) 이와 더불어 12연기를 해석할 때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식,명색.6입이 멸한다고 하는 환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이들은, 6입이 정신과 육체를 뜻한다면 6입이 멸한다는 것은 단멸론이 되므로 6입도 ‘허망한 마음 상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20) 그러나 5온이나 6입이 ‘허망한 마음’이나 ‘정신현상’으로 이해할 만한 경전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이러한 해석은 단지 그들의 경전을 이해하는 태도가 어긋나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온과 6입을 설명하는 책들이 시중에 많이 나돌고 있고 이들의 주장을 먼저 접한 사람들은 이러한 이해가 옳다고 끝까지 고수하게 되니 실로 안타까운 한국불교의 현실이라 하겠다.
4.삼특상
이제 이글에서 설명 하고자 하는 일체개고의 뜻을 설명할 차례이다.
먼저 일체개고(Sabbe saṅkhārā dukkhā)라는 의미를 알아보기 전에 행(saṅkhārā)가 어떤 의미인지 살펴 보고자 한다.
1).제행무상과 제행개고의 문맥에서 제행으로 나타나는데 항상 복수로 쓰입니다. 이 경우의 제행은 유위법(sankhata-dhamma)들을 뜻합니다. 즉 열반을 제외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유위법들을 행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경우에 행은 ‘형성된 것들’에 가까운 뜻입니다. 그 외 목숨의 상카라(ayu-sankhara), 존재의 상카라(bhava-sankhara), 생명의 상카라(jivita-sankhaara)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경우도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2).오온의 네 번째인 행온으로 나타납니다. 이 경우에도 항상 복수로 쓰입니다. 오온 가운데서 色은 아비담마의 색법이고 수상행(受想行)은 아비담마의 心所法들이고 識은 아비담마의 심법입니다. 그러므로 오온에서의 행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52가지 심소법들 가운데서 수(느낌)와 상(인식)을 제외한 나머지 심소법들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 의도, 주의, 집중, 의욕, 유익한(善) 심리현상들, 해로운(不善) 심리현상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행은 ‘심리현상들’로 이해해야 합니다.
3).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 즉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납니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데 〈청정도론〉에서는 ‘공덕이 되는 행위(punna-abhisankhara),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로 설명이 되듯이 ‘업지음들’ 혹은 ‘의도적 행위들’로 해석됩니다. 이 경우의 행은 업(karma)과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kamma-formations(업형성들)로 이해합니다.
제행개고의 제행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모두 포함하는 일체 유위법들을 뜻하는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행온은 수(느낌)와 상(인식)과 식(알음알이)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심리현상들을 뜻하므로 두 번째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12연기의 행과 삼행은 의도적 행위들(업)을 뜻하므로 가장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21)
제행개고의 해석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고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근원적으로 제행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모두 포함하는 일체 유위법들’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5온,12처,18계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특상에서 말하는 제행무상과 제행개고의 행은 우주만물로 범위를 확대시키지 말아야 한다. 삼특상에서의 제행을 지금 여기서 경험할 수 있는 5온,12처,18계(인간)로 이해하지 않고 ‘조건 지어진 모든 것’‘우주만물’등으로 객관화 시켜버린다면 삼특상 법문은 건조한 교설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후대에 정형화되고 명제화된 삼특상을 이해 하려고 할 때 생기는 문제인데 현재 많은 불교 서적이 제행과 고를 일방적으로 객관화 시킨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므로 삼특상이라 불리어지는 이 법문이 애초에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경전에서 수없이 나타나는 아래와 같은 법문이 삼특상(三特相)이라 불리어지는 법문의 원형이다.
Bandhasuttaṃ
라훌라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육체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22)
위와 같은 형식이 나타나는 경전을 쌍윳따 니까야 전체를 살펴본 결과 무상, 고, 무아로 말해지는 대상은 언제나 5온과 12처와 18계와 6계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제행(Sabbe saṅkhārā)은 5온과 12처와 18계와 6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설하신 5온과 12처와 18계와 6계라는 이 법수들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5온은 인간이 무아임을 드러내기 위해, 12처는 인간의 의식이 발생하는 영역(바탕)을 설명하기 위해, 18계는 12처에서 발생한 식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이것을 세계(loka)의 발생이라고도 부른다), 6계는 5온 중에서 色을 더욱 자세히 분석하여 地水火風空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모든 법수들은 인간을 해석하고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행무상이란 명제에서 제행은 ‘육체(色)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감수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묻고 있으며 대답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붓다와 라훌라의 대화는 다른 경전에서는 그 대상을 오온과 6입과18계와 6계로 넓혀가며 그 하나 하나가 무상하냐? 고냐? 라고 붓다가 질문한다. 라훌라와 다른 제자들은 그때마다 ‘무상합니다‘ ‘고통입니다’ 라고 한결같이 대답한다. 십대 초반의 어린 라훌라가 이렇게 ‘무상합니다’ ‘고통입니다‘ 라고 하는 대답이 과연 일체 유위법(우주만물)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라는 대답이었을까?
라훌라는 5온과 12처와 18계와 6계라고 지칭되는 법들이 모두 나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몸도 무상하고 마음도 무상하고 그 무상함은 나의 바램과 기대와는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무상한 것은 고통이라는 상식적인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붓다와 라훌라의 대화는 아주 상식적인 것이기에 라훌라는 조금도 망설일 필요가 없이 ‘무상 합니다‘ ‘고통입니다’라고 지체 없이 대답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모든만물 =고이기에 책상이나 돌맹이도 그 자체로 고라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경전은 붓다가 어떠한 상황에서 고가 발생한다고 설명 하는지 무엇을 고라고 설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Bhadrakasuttaṃ
촌장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대가 예전에 찌라와씨의 어머니(촌장 자신의 아내)를 만나 보지 못했고 그녀에 대해 듣지 못했을 때에도 그대에게 찌라와씨의 어머니(촌장의 아내)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이나 사랑이 생겨났었습니까?"
[촌장] "세존이시여,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세존] "촌장이여 그녀를 만나 보고 나서나, 그녀에 대한 것을 듣고 난후에, 찌라와씨의 어머니(촌장의 아내)에 대해서 욕망이나 탐욕이나 사랑이 생겨납니까?"
[촌장]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
[세존] "촌장이여, 그대는 이와 같이 '어떠한 괴로움이 일어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욕망을 뿌리로 하고 욕망을 인연으로 하고 생겨난 것이다. 욕망이야말로 괴로움의 뿌리이다' 라고 알아야 합니다."23)
붓다는 이와 같이 인간에게 보여지고 들려지고 경험된 것을 집착하고 사랑하기에 괴로움이 생겨난다고 설하고 있다. 자신의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을 본 일도 없고, 소문을 들은 일도 없다면 그 처녀에 대해서 집착이나 사랑하는 마음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처녀에 대한 집착이나 사랑은 그녀를 보고 난후에 소문을 듣고 난후에 생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행무상,일체개고라고 할 때 제행은 나에게 경험 되어진 것이어야 하고 그 경험되어진 제행을 대상으로 나에게 집착과 갈애가 일어나고 고통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제행무상과 일체개고의 일체(제행)는 구체적으로 나에게 경험되어지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고로 일체(제행)개고란 일체(제행) 그 자체가 고통이 아니고 그 ‘제행’을 대상으로 하여 나에게 생겨나는 바램과 집착이 있을 때 고가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붓다고사의 언어를 빌려 설명하자면 ‘일체개고’란 무상한 육체에 취착하게 되면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뜻으로‘대상으로서의 고통’을 ‘일체개고’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문하나!.. 옛날 한문으로 번역한 번역승들이 왜 같은 Sabbe saṅkhārā라는 단어를 무상을 말할 때는 제행으로, 고를 설명할 때는 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아마 번역가들은 제행개고라고 제행무상과 같은 용어로 번역하면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이 고다’, ‘세상만물이 고다’라고 해석되는 오해를 두려워 했던 것 같다. 일체라는 단어는 경전에 명확하게 ‘일체(Sabbe)는 12처’라고 설명이 되어 있기 때문에 제행이란 단어 대신에 더 안전한 일체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결국 요즘에는 이 일체도 오해되고 있지만...)
그런데 붓다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무아를 납득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삼특상에서는 ‘제법무아’라고 선언된 그 사실도 위 경전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붓다는 이 무아 부분만큼은 간접적인 질문으로 제자들의 동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즉, “무상하고, 고통이고 변화 하는 법에서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라고 유도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삼특상 법문을 하시는 목적이 무아를 납득시키기 위한 목적이란 것을 의미하고 이렇게 유도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무아라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은 이 무아라는 법문을 하고 싶어서 붓다는 無常과, 苦라는 상식을 동원하여 결론적으로 ‘나의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던지는 ‘色이 무상한가? 무상한 色이 고통인가 줄거움 인가?’ 라는 물음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너의 몸이 때로 병들고 상처 받는 일이 있는가? 너의 사랑스럽고 소중한 몸이 병이 들거나 상처를 입을 때 그것이 너에게 고통스럽겠는가? 즐겁겠는가?’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누가 ‘고통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것인가?
5.나가는 말
지금까지 일체개고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았다. 처음에 오취온이 고라는 2개의 경전과 오온이 고라는 2개의 경전을 인용하였다. 오취온이 고라는 것은 오온에 취착하는 것이 고통이라는 ‘원인으로서의 고통’으로 설명했고 오온이 고라는 것은 ‘대상으로서의 고통’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삼특상 안에서 2번째 위치하는 일체개고라는 문장이 나오게 되는 맥락을 살펴보았고 제행개고란 ‘제행=고통’이라는 뜻이 아니고 제행은 ‘고통을 일으키는 대상’이라는 뜻 즉, ‘대상으로서의 고통’임을 살펴보았다.
불교는 고통을 해결하는 종교이다. 만약 모든 유위법이 고통이라면 또 , 그 고통이 느낌이 아니라 존재의 속성이라면 어떻게 고통의 소멸이 가능하겠는가? ‘오온을 버려라’는 가르침에서 버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오온을 없애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우리는 금생에 이 몸을 가지고 열반을 실현 하겠는가? 4성제에서는 고의 원인은 갈애라고 설명한다. 만약 물질(책상)이 그 자체로 苦라면 물질(책상)이 스스로 갈애를 일으켜야 할 것이다. 12연기에서는 苦의 원인을 무명이라 말한다. 만약 책상이 그자체로 苦라면 책상 스스로 무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이 된다. 어떻게 책상이 스스로 갈애를 일으키고 무명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4성제와 일체개고에서의 苦는 모든 존재의 속성’이라든가 ‘고에는 불안전,무상,공,비실체의 의미가 있다’라는 해석들은 폐기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어떻게 해서든 ‘일체=고’ 라는 공식을 맟추기 위해 苦의 의미를 변형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삼특상 법문이 나오게 배경과 삼특상으로 정리되는 맥락을 무시한 체 무상,고,무아를 동일 선상에서 서로 비교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고 혼란만 가중 시킬 뿐이다. 이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일체개고의 고는 괴로운 느낌(苦受)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unsatisfactoriness(불만족성)의 깊은 뜻이 있으며 그러므로 물질도 고라는 것이다”라고 해석은 삼특상이 만들어진 경전상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체 실천적인 법문을 박제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행(오온,12처) 그 자체는 苦도 아니고 樂도 아니다. 붓다가 일체를 고라고 하는 까닭은 그 무상한 유위법(오온,12처)을 대상으로 생겨나는 원함, 바램, 탐욕등이 苦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는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상태, 느낌인 것이고 苦라는 느낌은 갈애와 취착이 그 원인이 되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미주]
1) [what the buddha thought. by walpola rahula.17p]
2) 초기불전 연구원. 각묵스님
3) 인터넷의 글 .
4) 쌍윳따니까야 주석.
5) 초기불전 연구원. 각묵스님
6) [the heart of buddha's teaching.by thich nhat hanh. p21]
7)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ṃ ariyasaccaṃ: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vyādhipi dukkho maraṇampi dukkhaṃ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 saṅ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s.n.5.p451.Dhammacakkappavattana suttaṃ)
8) Dukkhañca vo bhikkhave, desissāmi. Dukkhasamudayañca
Dukkhanirodhañca dukkhanirodhagāminiñca paṭipadaṃ taṃ sunātha:
Katamañca bhikkhave, dukkhaṃ: Pañcupādānakkhandhātissa vacanīyaṃ,
Katame pañca, Seyyathīdaṃ: rūpūpādānakkhandho vedanūpādānakkhandho saññūpādānakkhandho saṃkhārūpādānakkhandho viññāṇūpādānakkhandho. Ayaṃ vuccati bhikkhave, dukkhaṃ.
(s.n.3.p159.Dukkha suttaṃ)
9) "dukkhaṃ dukkha"nti bhante, vuccati, katamannu kho bhante dukkhanti?
Rūpaṃ kho rādha dukkhaṃ, vedanā dukkhā, saññā dukkhā, saṃkhārā dukkhā viññāṇaṃ dukkhaṃ. (s.n.3.p196.Dukkhaṃ suttaṃ)
10) Sabbaṃ bhikkhave dukkhaṃ. Kiñca bhikkhave sabbaṃ dukkhaṃ: cakkhuṃ bhikkhave dukkhaṃ, rūpā dukkhā, cakkhuviññāṇaṃ dukkhaṃ, cakkhusamphasso dukkho, yampidaṃ cakkhu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dukkhaṃ. (s.n.4.p28.Dukkhasuttaṃ.)
11)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s.n.3.p470)
12) jātipi dukkhā (s.n.5.p451)
13) yasmā ca kho mahāli, rūpaṃ dukkhaṃ. Dukkhānupatitaṃ, dukkhāvakkantaṃ (s.n.3.p69)
14) Dukkho pāpassa uccayo(dhp.117게송)
15) yāvañcidaṃ bhikkhave, na sukaraṃ akkhānena pāpuṇituṃ yāva dukkhā nirayāti.(m.n.3.p167)
16) Yaṃ bhikkhave na tumhākaṃ taṃ pajahatha, taṃ vo pahīnaṃ hitāya sukhāya bhavissati. Kiñca bhikkhave na tumhākaṃ? Cakkhuṃ bhikkhave na tumhākaṃ. Taṃ pajahatha. Taṃ vo pahīnaṃ hitāya sukhāya bhavissati. Rūpā na tumhākaṃ, te pajahatha, te vo pahīnā hitāya sukhāya bhavissanti. (s.n.3.p82.Natumhākasuttaṃ..)
17) Rūpe kho rādha, yo chando yo rāgo yā nandi yā taṇhā taṃ pajahatha. Evaṃ taṃ rūpaṃ pahīnaṃ bhavissati ucchinnamūlaṃ tālāvatthukataṃ anabhāvakataṃ āyatiṃ anuppādadhammaṃ. Vedanāya yo chando yo rāgo yā nandi yā taṇhā taṃ pajahatha. Evaṃ sā vedanā pahīnā bhavissati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katā āyatiṃ anuppādadhammā.(s.n.3.p194.Chandarāga suttaṃ)
18) Na kho āvuso koṭṭhita, cakkhu rūpānaṃ saññojanaṃ, na rūpā cakkhussa saññojanaṃ. Yañca tattha tadubhayaṃ paṭicca uppajjati chandarāgo taṃ tattha saññojanaṃ........Seyyathāpi āvuso kāḷo ca balivaddo odāto ca balivaddo ekena dāmena vā yottena vā saṃyuttā assu, yo nu kho evaṃ vadeyya: kāḷo balivaddo odātassa balivaddassa saññojanaṃ, odāto balivaddo kāḷassa balivaddassa saññojananti. Sammā nu kho so vadamāno vadeyyāti. No hetaṃ āvuso. Na kho āvuso kāḷo balivaddo odātassa balivaddassa saññojanaṃ, napi odāto balivaddo kāḷassa balivaddassa saññojanaṃ, yena ca kho te ekena dāmena vā yottena vā saṃyuttā, taṃ tattha saññejanaṃ. (s.n.4.p163.Koṭṭhitasuttaṃ..)
19)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p100]
20) [불교의 이해와실천]이중표
21) 초기불전 연구원. 각묵스님
22)Taṃ kimmaññasi rāhula, rūpaṃ niccaṃ vā aniccaṃ vā'ti? 'Aniccaṃ bhante'. Yam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ti? Dukkhaṃ bhante. Yam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nnu taṃ samanupassitu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ṃ bhante. (s.n.2.p249.Bandhasuttaṃ)
23) Taṃ kimmaññasi gāmaṇi yadā te ciravāsissa mātā adiṭṭhā āsi assutā, ahosi ciravāsissa mātuyā chando vā rāgo vā pemaṃ vāti. No hetaṃ bhante. Dassanaṃ vā te gāmaṇi āgamma savanaṃ vā te gāmaṇi āgamma evante ahosi: ... Imināpi kho etaṃ gāmaṇi pariyāyena veditabbaṃ yaṃ kiñci dukkhaṃ uppajjamānaṃ uppajjati sabbantaṃ chandamūlakaṃ chandanidānaṃ, chandohi mūlaṃ dukkhassāti. (s.n.4.p330.Bhadrakasuttaṃ)
15.09.2007
첫댓글 오랜 만에 인사드립니다. 새로 약간 수정하여 글을 올립니다. 먼저 올린 글에 초심님이 꼬리말을 달았는데 지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이글은 예전에 노랑님이 각묵스님의 고에 대한 설명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기에 고에대한 이해에 조금이라도 조움이 될까하여 올립니다. ....()
아~~, 그랬었군요^^.. 이해합니다^^()
바라문이 부처에게 일체가 무엇입니까? 묻는 질문에 대답한 12처는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본질에 대한 의문입니다.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존재의 본질이 되는 궁극적 실체에 대하여 부처의 생각을 묻는 것이겠죠.
외도들은 일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일체는 브라만이다' (범아일여,전변설 - 정신적 실체) 하고 부처당시 사문들은 사대,7요설,12요소설 (적취설, 정신적 물질적실체)등이라고 주장합니다. 외도사상은 크게 전변설과 적취설로 나눕니다. 전변설은 하나의 실체가 자기전개를 통해라는 변화를 통해 이 세계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사상으로 기독교사상과 비슷하고, 적취설은 다수의 실체가 모여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상으로 과학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도 일맥상통 합니다.
이 두 사상 전변과 적취설을 통해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입과 맛,몸과 감촉,정신과 사물] 이라고 12처를 해석하는 문제점을 알기 위하여 세계가 요소들로 이루어 졌다는 적취설의 외도의 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육사외도 사상은 유물론, 도덕부정론, 기계적 불멸론, 숙명론등이 있습니다.그리고 육사외도 사상을 통합정리한 자이나교 교주 나간타가 있습니다. 아지차 케사 캄발리는 유물론자로 그는 세계와 인간은 사대로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파쿠다캇차야나는 7요소설을 세워 지수화풍고락명아 로 이루어져다고 주장하고 우연론자 였던 막칼리고살라는 지수화풍,허공,득수,고,락,생,사,영혼등의 12요소설을 세워 인간과 세계를 설명합니다.
나간타는 세계구성원리가 5종인데 명아(정신)와 비명아(물질,허공,법,비법) 이라고 주장 합니다.또 서양철학 데카르트는 이원론 세계관을 통해 정신(주관)과 물질(대상)으로 세계가 이루어져 있다면서 이들의 원할한 가교역활을 위해 '신'을 등장 시킵니다.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입과 맛,몸과 촉감,정신과 사물]의 해석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눈,형상,귀,소리,입,맛,몸,촉감,정신,사물]은 객관적 존재의 12가지로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 일체' 일 것입니다.
부처가 설한 12처가 외도들이 사용한 요소, 정신과 물질로 설명 되어져야 할까요? 다음을 인용 합니다. [ 우리는 인지 구조의 핵심에 정신적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은 물질적 실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의 생각에 따르면 물질과 정신은 단지 언어일 뿐이다. 그래서 물질이 무엇인가, 정신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한다면 의혹만 증대할 뿐 결국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까닭을 붓다는 그것이 우리의 인지 구조(12처)의 영역(境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인용]
12처가 무엇이길래 정신,물질이라는 언어사용은 토끼 뿔이라는 말과 다를바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그 이유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정신,물질이라는 언어는 객관적으로 실체성을 갖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상호인과관계를 가지고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연기설의 입장에서는 이 세계를 실체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관계로 볼때 독립적으로 실체성을 갖는 정신, 물질이란 언어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정신이 무엇인가,물질이 무엇인가 알려고 하면 의혹만 증대한다고 하나요? 우리가 아무리 나무(물질)나 영혼(정신)을 객관적 대상으로 이해하려해도 이것은 불가능합니다.칸트는 "물자체"를 말합니다. 물자체란.. 대상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며.. 칸트는 말하길.. 우리는 '물자체'를 의식할 수 없고 오직 인식되어진 것만 의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연기설 입장에서 보면 세계는 나에 의해 인식되고 있는 현상일 뿐입니다.쉽게 말하여 내가 말하는 나무(물질),영혼(정신)이란 인식된 나무, 영혼으로 '마음' 이라면 욕심 낸 것 일까요? 정신, 물질이란 언어는 관념이 만들어낸 언어에 불과 한 것을 우리들은 실제로 그런듯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의 말대로 '인식되어진 것으로만 의식'된다는 칸트의사유는 불교의 혜안을 업그레이드 합니다.
12처가 마음임을 설명하는 경전을 보지 못하였다는 의구에 대한 답입니다. 12처가 '마음'임을 입증하는 경입니다.신수대장경 장아함 214경이 12처가 구체적으로 마음임임을 시사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답> 有二因緣生識 ... 眼色因緣生眼識 彼無常 有爲 心緣生 此三法和合觸 觸已受 受已想 想已思 此等諸法 無常 有爲 心緣生
두 인연(내입처와 외입처)이 있어 識이 생긴다. ... 안입처와 색입처를 인연으로 안식이 생긴다. 그것은 무상하고 유위이며 미음을 인연으로 하여 생긴다. 이들 세 가지 법이 화합한 것이 촉이다. 촉하면 수하고, 수하면, 상하고, 상하면 사한다. 이들 모든 법은 무상하고 유위이며 마음을 인연으로 하여 생긴다.
이와 같이 이 경에서는 내입처와 외입처, 그리고 이들을 인연으로 해서 생긴 식, 수, 상, 사를 모두 心緣生法, 즉 마음을 인연으로 해서 생긴 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입처와 외입처를 인연으로 하여 생긴 것들을 마음을 인연으 하여 생긴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곧 12입처가 마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상 설명을 통해 부처가 말하는 일체는 마음이고 외도가 주장하는 일체는 실체성을 가진 정신,물질이며 이 언어의 비합리성을 통해 12처를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입과 맛,몸과 촉감,정신과 사물]의 해석은 바람직 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습니다.그러나 일체는 인식된 일체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걸음마를 띤 자리에 불과 합니다.
부처가 말하는 12처'안이비설신의색성향미촉법'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나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처(處)가 어디에 쓰이고 어떠한 의식상태에 쓰이는지 공부해야 할것 같습니다.이 문제에 대하여 그동안 많은 토론하여 왔으나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앎이 바른지 아닌지 생각하며 '한국불교'를 내려놓는 발언은 늦추어도 늦지 않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