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쇠실 김구 은거가 자주독립 감나무
노벨문학상을 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의 설국은 왜국 ‘니키타현’이다. 풍광과 품질 좋은 쌀의 고을이지만, 1922년 8월, 조선인 노동자 집단학살 피의 고장이니 혈국이기도 하다. 당시 여기 ‘시나노가와’댐 공사장 8백여 인부는 주로 경남 일대의 농민이었다. 그때 밀양에서 온 19살 김갑철은 도망가다 잡혀 온몸 10여 군데를 쇠갈고리에 찍힌 뒤 눈구덩이에 나체로 묻혔다. 또 우윤성 등 3인도 벽돌 찍는 틀 속에 나체로 넣어져 인간벽돌이 되었다. 그렇게 사망자만도 1백여 명인 이곳은 하얀 눈 나라의 붉은 핏빛 ‘지옥의 계곡’이었다. 이 끔찍한 만행을 ‘박열’ 등 ‘흑도회’가 밝혔고, ‘한바’라는 합숙소에 죄수처럼 갇혀 하루 14~15시간의 살인적 노동, 저임금으로 혹사당한 것도 드러났다.
보성읍에서 득량으로 가려면 ‘그럭재’를 넘는다. 이 그럭재의 남쪽은 반섬산, 북쪽은 대룡산이다. 이 두 산 사이 좁은 샛길을 들어서면 아늑하고 평화로운 보금자리 터가 있으니 바로 쇠실 마을이다. 이곳 역시 풍광 좋은 낙원이고, 맑은 물 내려보내 키운 아래 고을 예당 쌀은 찰지고 향기롭다. 더하여 애국애족, 자주독립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성스러운 터이다.
그러기에 ‘기차가 그럭재를 넘으니 쇠실이었다’는 노벨상 문장은 아니지만, 이곳 쇠실 성지를 조선인 강제노역과 살육의 지옥인 니키타의 설국 따위와 감히 비교하면 안 된다.
한 해의 봄이다. 그 대룡산 기슭 쇠실마을의 꽃과 나무, 새 소리, 시냇물에 봄바람과 봄 햇살이 내려앉는다. 마을 들머리 언덕의 휘휘 늘어진 능수 복사꽃에 이미 마음을 빼앗겼는데, 눈부시게 피어난 봄꽃에 쇠실은 말 그대로 선경이다. 신선이 사는 곳이구나 한다.
여기 김태권 문패가 있는 집은 ‘백범 김구 은거가’이다. 이 집에서 김구는 1898년 40여 일 머물렀고, 1946년 9월에 다시 찾아 마을 사람들을 만났으니 바로 역사의 현장이다.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여관에서다. 스물한 살의 김구는 흰 두루마기 사이로 칼집이 보이는 조선 옷차림의 왜인을 만났다. 김구는 이 자가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이거나 공범으로 여기고 왜 육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를 처단했다. 그리고 ‘국모 원수를 갚으려 이 왜놈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동 김창수’라는 거주지와 성명을 써 놓고 고향으로 갔다.
3개월 뒤, 김구는 체포되었고 해주감옥에서 인천감옥으로 옮겨져 사형 집행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고종의 형 집행 정지 어명이 있었는데, 역시 사흘 전 처음 개통된 전화 덕분이었다.
이듬해인 1898년 3월 19일, 김구는 인천감옥을 탈출 서울, 수원, 오산, 광주, 함평, 강진, 해남, 장흥 등을 돌아 보성 쇠실 마을에 이르렀고, 일제는 김구의 부친 김순영을 수감했다.
김구는 안동김씨다. 김구가 강진 내동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다. 안동김씨인 김창묵은 ‘강진은 사방이 트여 은신에 적합지 않으니, 안동김씨 집성촌 보성 쇠실 마을로 가라’고 했다.
그런 인연으로 이곳에 2006년 건립된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이 있다. 또 당시 김구가 머문 김광언의 5칸 초가는 기와로 바뀌어 증손자 김태권이 지키고 있다.
1946년 9월 22일, 48년 만에 김구가 찾아와 옛 지인들을 만나던 날이다. 보성군민은 보성역에서 쇠실 마을까지 빨간 카펫처럼 깨끗한 황토를 깔고, 마을 사람은 마을 앞에 파리의 개선문보다 더 멋진 소나무 대문(솔문)을 세웠다.
그리고 오늘, 은거가 장광 뒤 감나무는 그날을 지켜본 증인이다. 이제 감이 열릴까 싶은 나이 든 감나무가 붉은 감 대신 눈부신 봄볕을 매달고 있다. 해마다 봄은 오지만, 진정한 자주독립은 언제쯤일까? 푸른 대숲에서 감나무 가지가 치켜든 푸른 봄 하늘을 치어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