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불 뱀과 구리뱀 이야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려서부터 많은 의문을 자아냈다. 당연히 이제까지 뭔가 아! 그렇구나 하는 통찰도 없었거니와 공감이 가는 해설조차도 만나지 못하였다. “고난의 신비가 항상 우리 가운데” 라는 표어에는 언어나 논리만으로는 손에 잡히지 않는 진수를 일상에서 살아간다는 전제가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위의 성서본문이 나에게 시사 한 점을 정리해본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 이라고 뱀에 물린 자는 그 뱀을 형상화한 구리 뱀을 보면 살았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차라리 관(觀)에 가깝다. 안다, 이해한다는 뜻!
영어로는 이해한다를 understand, 즉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의 아래에 자신의 자리를 잡아 자신을 비움으로서 대상의 이해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산스크리트어를 뿌리로 둔 라틴어의 적자 이탈리아어로는 산스크리트어로 의식을 뜻하는 말과 관련된 sapere(이해하다, 숙지하다)를 쓴다. 반면 독일어의 Verständnis(이해, 앎) 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면으로 마주보는 대결의 자세가 필요함을 전제로 한다. 한자 이해(理解)는 복잡한 것을 세부로 나누어 차근차근 알아간다는 의미다.
구약성서의 구리뱀 이야기와 가장 맥락이 가까운 것은 독일어의 Verständnis 가 아닐까? 자신이 고통에 시달리며 죽게 된 원인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면함은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자신이 살아온 삶과 그 결과인 지금의 나와 현실을 수용하게 한다.
여기서 요한복음은 한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바라봄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역사를 넘어 전 방위적으로 암약하는 죽음의 힘을 직시케하며 그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보게 한다. 도망가지 않고 십자가 아래 머무르는 사람은 바로 이사야 53장 야훼의 넷째 종의 노래를 듣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 아래에 머물러 종국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이 야훼의 종과 동화되는 일이 아닐까?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로마인 백인대장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