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만리가 한글 창제에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갑자상소 내용을 잘 읽어보면 그 해답이 있습니다.
“주상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내가 그대들을 불렀을 때는 당초 죄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상소문 중에서 한 두 가지 말에 대하여 묻고자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대들이 事理 (사리) (일의 도리)를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말만 바꾸어서 응대하니 그대들의 죄는 벗어날 수가 없다.”
“같은 해 풀려 나와 응교로 복직된 뒤 1445년 집의가 되었는데, 이듬해 세종이 불경(佛經)을 간행하려 하자,
왕실에서 흥천사(興天寺)를 다시 고쳐 짓고 또 경찬회(慶讚會)를 설치하였음을 들면서,
불교는 괴탄(怪誕)하고 환망(幻妄)하여 나라를 미혹시키고 조정을 그릇되게 하는 것이라
고 주장, 왕실의 불교 숭상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다시 좌천되었다.”
- 이듬해에 문종이 즉위하자 우부승지를 거쳐 1451년(문종 1) 대사헌이 되었다.
- 세종26년, 1444년(甲子)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
“세종이 諺文廳(언문청)을 설치하고 음운과 문자에 관한 연구를 거듭하여 1443년(세종25년)에 마침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이는 당대의 선비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 신진사류 등 당대의 선비들이 반대한 이유는
이조가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된 국가인데 이러한 언문을 이용하여 많은 불경들을 한글로 언해하면
이는 유교국가의 이념에 背馳(배치)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세조 때에 간경도감을 두어 많은 불경들을 언해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를 짐작 할 수가 있다.”
- 한자음의 개혁 정책은 끝내 일반인과 유학사류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왕 자신이 철회하고 만다.
또한 세종은 호불정책을 실시하여, 궁중에 내불당을 설치하는 등 국시에 어긋나는 일로써 유학자들의 우려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 평생의 좌우명으로 소학 외편에 나오는
“현명한 이가 재물을 가지면 곧 큰뜻을 해치며, 어리석은 이가 큰 재물을 가지면 곧 그 과실을 더할 뿐이다”
라는 말로 後孫들을 훈도 하였다.
“賢而多財則, 損其志, 愚而多財則, 益其過” (현이다재칙, 순기지, 우이다재칙, 익기과)
“이로써 조선(朝鮮) 관료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청백리(淸白吏)로 추존 되었으며
후일 이분의 청빈의 정신을 흠모한 민중들에 의하여 최만리공이 살던 약현을 만리현이라고 불렀고
다시 이 지명이 해방후 행정구역 개편시에 만리동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오늘에까지 이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집현전은 주로 經書(경서)와 文籍(문적)을 다스리며 옛것을 고증하고 임금과 왕세자의 講論(강론)을 맡아
국가경영과 왕권 을 보우하는 최고의 구심체로서 이곳에 참여하는 것을 당시 선비 사회에서는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다.”
“세종 21년 공이 42세 때, 강원도에 民亂(민란) 이 일자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최만리를 강원도 黜陟使(출척사- 무능한 관원을 내치고 유능한 관원을 올려 씀)로 임명했다.
그때 외직으로 나갔을 뿐 늘 세종대왕 을 보필하는 집현전 부제학으로 재직하였다.
(당시에는 대제학이란 직책은 겸임직이었고 명예직이었음. 정인지- 대제학) ”
-‘최만리가 세종대왕과 같은 해에 태어나 세종께서 즉위한 해에 文廣科(문광과) 에 급제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학자로서 최만리를 세종이 총애한 것은 평생토록 집현전을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가 있거니와
조선조 500년 동안 왕이 신하와 함께 침석에 드시면서 까지 경륜을 나누었다.’
“한글은 태어날 때부터 불쌍하게 태어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글은 세종 시절에 어떤 실패한 정책의 부산물로 태어났다.”
“그래서 세종이 직접 집현전으로 가서 개인적으로 새로운 발음기호의 제작을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부탁한 까닭으로 승정원 일기에는 기록도 안 되어 있다.”
“대제학으로 정인지가 있었으나 당시 집현전 대제학은 겸직이었고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실제 집현전의 업무는 하지도 않았다.”
“공직 생활 20 여 년을 아무 이권도 없는 집현전에서만 근무한 진정한 선비였다.”
“따라서 집현전 학자들은 최만리의 지휘하에 순조롭게 발음기호를 하나하나 만들어 갔고,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완성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날짜도 없이 12월 기록 맨 끝에 추가로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 최만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집현전 학자들이 발끈하였다.
오랫동안 써 오던 우리나라식 한자 발음을 버리고 왜 중국식 발음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 불만의 요지였다.”
“그래서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상소문을 써서는 최만리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 보고 이번에는 세종이 발끈하였다.
그렇게 믿었던 최만리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중국어에서 운(韻)이란 발음에서 모음 부분 이하를 말하는 것으로(산, 간, 만 발음에서의 [an] 발음)
한시를 쓸 때에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며,
중국 본토 발음인가 사투리 발음인가 하는 것을 가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최만리는 "지금까지 힘들게 만들었던 그 발음기호들이 겨우 이런 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인가"
하면서 홧김에 발음 기호(한글)에 대한 비판도 몇 마디 곁들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글 창제 과정에서는 아무도 반대한 사람들이 없었으며 반대할 이유들도 없었다.”
“정창손만을 파직시킨 것으로 보아 이 상소문의 책임 집필자는 최만리가 아니라 정창손일 가능성이 많다.
이 정창손은 나중에 영의정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는 대정치가가 된다.”
“최만리는 집현전 장기근속자답게 엄청 가난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더 존경했다.”
“세종조 청백리가 모두 15명인데 최만리가 서열 두 번째로 올라 있다.
세종 시절 청백리의 첫째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한성부윤 "정 척"이라는 분이었고
최만리 다음 서열로 청백리에 오른 분은 그 유명한 "황 희" 정승이다.
청백리에 오른 최만리는 역대 왕들의 위패가 있는 종묘에서 세종과 함께 모셔지고 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쁜 최만리"가 들어갈 뻔하였으나
마침 그 때 필자가 교과서 심의 위원으로 있던 때여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다행히 뺄 수 있었다.”
“어쨌든 중국어의 정확한 발음을 귀로 확인하기 위하여
요동으로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한족 출신 관리를 만나려고 요동으로 열 몇 번이나 출장 갔다 온 성삼문만 엄청 고생했다.
(성삼문의 출장 목적은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종으로서는 애써 만든 발음 기호까지 버리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어린 백성이... " 어쩌고 하는 서문을 붙여서 백성용 문자로 반포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최만리 사후 1년 반 뒤의 일이었다.
이 글씨들의 명칭은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배우기가 너무너무 쉬워서 별도의 교육기관이 없이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이것이 훈민정음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다.”
“너무 쉽게 만든 것도 탈이었다.”
“여자들끼리만 전승되던 한글은 연산군의 모친 윤비가 죽는 데에 크게 공헌을 세웠다고 하여
효자 연산군에 의하여 크게 낭패를 본 적도 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글을 우리나라의 공식 글자로 승격시키는 데에는
1890년대에 일본의 힘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었다.”
“일본이 우리 한글의 우수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에 그리 해 준 것은 아니고,
우리나라를 어떻게 해서든 중국과 떼어놓겠다는 전략적 필요성이 그 이유였고,
한글을 주로 사용하는 서민들의 힘을 강화시켜 기존 우리 양반들의 발언권을 축소시켜 놓자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나라에 독립협회도 만들어 주고 독립문도 세우게 하고 독립신문도 창간되게 하여
신문사 윤전기 용 한글 활자를 무제한 제작하여 우리나라에 보급하였다.”
“1890년대만 해도 "독립"의 개념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우리도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라는 개념이었다.
일본은 이 때에 우리 나라에 심어 준 "독립정신" 때문에 나중에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한글 창제 450년만에 맞이한 때늦은 한글 시대의 새로운 주인공은 최남선, 이광수 등 중인계급의 후예들이었다.”
“배달겨레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가장 큰 자랑거리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이라는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듯하다.
이미 유네스코에서 세계 인류 문맹자를 없애자는 뜻에서 주는
<문맹퇴치상>이 <킹 세종 리터러시 프라이즈>로 이름지어졌다는 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 읽으면서 글쓴이의 혜안에 눈이 환하게 밝아지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소리에는 「바른소리」라는 것이 없다.
소리에는 「짧은소리」, 「긴소리」, 「힘들어간소리」,「높은소리」, 「낮은소리」, 「된소리」,
「거센소리」등으로 갈래지어질 뿐, 「바르다」, 「그릇되다」가 잣대가 될 수가 없다.”
- 목판본 <원각선종석보>가 세종 20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에 걸린 시간은 최소 5년 이상 걸렸다고 볼 수 있다.
“10월 9일 <한글날>은 잘못되었다.
두 번째, 이른 바 한글날이라는 것도 바로 잡혀지길 바란다.
배달 문자가 발표된 것은 세종 25년 계해년 12월이었다.”
“배달글자인 「ㄱㄴㄷㄹㅁㅂ……ㅎ」28개 글자는 책이 아니기에 「반포」(斑布)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일본사람 進平을 무식쟁이이라고 말했던 바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책을 돌리는 것을 「반포」라고 한다. ”
- 訓民正音 이라는 이름으로 된 책이 이룩되었다.
“곧 우리가 알고 있는 한글날은 훈민정음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진 날이 아니라 훈민정음이라는 책이 만들어진 날이라는 것이다.”
- 잘못된 것들이 있으면 하루 빨리 바로 잡아 올바른 것을 기리는 쪽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이것이 사필귀정인데 아직 우리 학계에서는 바른 것을 보고도 지난날 자기의 잘못이 부끄러워 올바른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외면하는 못된 버릇이 남아 있다.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 수업은 프랑스의 단편 소설이다.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有名하다.
母國語 사랑을 드높이기 위하여 꾸민 이야기로서 세계 곳곳에서 교과서와 많은 매체에 끊임없이 쓰이고 있다.
“이야기의 骨子는 프랑스가 프로이센(독일)과의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프랑스語로서의 수업을 할 수 없게 된
늙은 '아벨'교사가 실직하여 마지막 수업을 하는 자리에서 프랑스와 프랑스語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쏟는 것을
어린 학생 '프란츠'의 눈으로 그린 것이다.
읽는 학생들로 하여금 가슴 뭉클하게 하는 名作으로 꼽히고 있다.”
“이 소설이 초등 6학년 2학기의 마지막 단원으로 실려 있다.
다음과 같은 유명한 句節이 포함되어 있다.”
- 한 국민들이 남의 나라의 노예들이 되더라도 자기 나라의 말만 잘 간직하고 있으면,
그것은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重大하고도 根本的인 착오가 있다.
우리 교과서에 실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우선 소설이라는 설명 또는 표시가 어디에도 없는 것부터 잘못이다.
사실로 오해하게 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소설은 프랑스와 독일의 國境에 위치한 알자스 지역을 무대로 한 소설이다.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바로 그 해 1871년부터 시작하여 73년까지 매주 월요일 파리의 新聞에 連載된 것이다.
연재가 끝나자 한 권의 단편집이 되어 간행되었다.
「마지막 수업」은 그 첫머리에 나온 한 편이다. 130년 전에 꾸민 이야기다.”
“알자스 지역은 유럽의 많은 땅이 그러했던 것처럼 太古, 겔트系 原住民의 땅이었다.”
“言語는 계속 獨逸語 지대였다.
1910년 단계에서 주민의 94.6%가 독일어를 쓰고 있었다.
이 소설이 쓰여진 1871년 住民의 母語는 물론 독일어였다.”
- 프랑스人의 입장을 아름답게 浮刻한 데 있다.
- 국가적 威信을 더 이상 떨어뜨리지 않기 위하여 당장 이 소설은 교과서에서 追放해야 할 것이며
이와 비슷한 경우를 찾아서 역시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국어의 교재로서 적합하지 않는 내용이다.
국어의 학습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글전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理念을 注入하기 위한 것이다.
학문적 條理를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記述 방법이 유치하다.”
“飜譯은 언어와 언어 사이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문자와 문자 사이에서는 번역이 아니라 音寫가 있을 뿐이다.”
“"한글은 컴퓨터 시대에 가장 앞장 설 글자이다."라는 설명이 있으나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지금 컴퓨터 처리방식은 한글이나 漢字나 英字나 모두 형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각 부여된 符號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덮어놓고 가장 앞섰다고 자랑할 근거가 전혀 없다.
다시 말해 똑 같은 조건 하에서 처리되고 있다.”
- 본격적인 음성 컴퓨터는 腦가 자신의 構造와 機能을 완전히 분석하여 또 다른 뇌를 창조하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이름도 또한 같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自然은 民族을 만들지 않았다.
다만 하나 하나의 인간을 만들었을 뿐이다.
각자가 言語와 法律 및 風習을 다르게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민족으로서의 구별이 생기게 된 것이다." 맞는 말이다.
國家와 民族이라는 全體集合이 먼저 존재해서 사회가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을 가지고 움직이는 自然人이 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누구든 국가와 민족을 앞세운 말을 들으면 일단 의심할 필요가 있다.
또 호주머니 속에 있을 때의 만원의 쓰임새와 이것이 稅金으로 정부에 들어 가서의 쓰임새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 지금 시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느 누구도 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 기초 교육의 기준이 될 교과서들이 지금처럼 詩人들과 小說家들을 양성하는 데 집중해서는 나라가 健全할 수 없다.
朝鮮 5백년의 詩人政治, 空理空論의 政治를 그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 세종이 만든 언문은1446년 반포된 후에 1894년 갑오경장 이전 450여 년동안 그 구실도 못하였다.
“이는 바로 세종도 한글을 편민주의 운운하면서 창제를 하였지만
실제 사용하는 것은 한자음의 표기를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1920년 조선 총독부에서 조선어 사전을 펴냈다는 것도
지금의 한글 학자들은 창피한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1450(세종32). 음력 2월 17일(양력 4월 8일) 당대에 ´해동의 요순´이라 일컬음 받던 세종 큰 임금이 돌아감.
“1504(연산군10) 연산군의 잘못들을 지적하는 한글 문서 사건이 나서, 한글 가르치기를 금하고 한글로 된 책들을 불사르게 함.”
“1890(고종27) 주시경이 국어 공부와 연구를 시작함.”
- 1894(고종31) 갑오경장. 7월 8일 외국의 나라, 땅, 사람의 이름들을 한글로 적도록 하는 법령이 공포됨.
“1910(순종4) 일본이 조선 삼킴. 주시경이 "국어 문법" 펴냄.”
-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시고 국문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약 448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모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천(ㆍ) 지(ㅡ) 인(ㅣ)의 세 기본 문자로 다른 모음들을 조합하고 있다.
ㅏ, ㅑ, ㅗ, ㅛ 등이 음소문자라고 한다면,
이들을 구성하고 있는 천지인의 세 글자는 음소문자보다 더 근원적인 문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이동 전화에서 천지인의 세 글자만으로 모음을 조합해서 문자를 보내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의 원리도 되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핸드폰의 몇 개 되지 않는 자판으로도 신속하게 글자들을 조합할 수 있다.
“가나는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합쳐서 1백자를 넘으므로 12개에 불과한 핸드폰의 자판에 배열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몇 단계의 선택을 거쳐서 한 자의 가나를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통상적으로는 영어 알파벳을 이용해서 일본어를 표현하곤 한다.
‘か’를 ‘ka’로 입력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들의 문자를 버리고 알파벳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밖에도 한글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많다.
음소 문자이면서도 음절문자처럼 운용하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도 적지 않으나,
음절 단위로 조합함으로써 문법적인 요소들이 한눈에 들어오게 하는 장점이 있다.
단어나 형태소, 어간과 어미 등이 한눈에 구분되기 때문이다.”
- 알파벳이나 한자와 같은 경우는 자연발생적이라고 할 만큼 시대적인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서서히 형성된 것이다.
훈민정음처럼 몇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다.
- 우리의 문자는 1443년에 창안되어서 1446년에 반포되었다고 한다.
일본과 비교해도 5백년 이상 뒤진다. 한자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한글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징인 과학성, 편의성 등은 한글이 만들어진 시기와 결부시켜 생각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어떻게 훈민정음은 발성 기관의 모양을 본 따서 글자를 만들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소리내는 기관이 어금니, 혀, 입술, 이, 목구멍이라는 사실이 이미 음운학적인 지식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음과 모음으로 나눈 것도, 중국 음운학에서 성모와 운모로 나눈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육조시대란 “모두 난징(南京)을 국도(國都)로 하고,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양저우(揚州)를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삼았으며,
중류의 징저우(荊州)를 군사상의 요지로 삼아 화북(華北)의 정권과 대항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그 시대는 후한이 멸망하고 중국이 분열된 다음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거의 4백년에 이르는 시기인 셈이다.
수나라가 중국을 다시 통일한 것이 589년. 우리나라로 따지면,
삼한시대의 후반부터 시작해서 삼국시대 후반에 이르는 긴 기간이라고 하겠다.”
“이 시대에 중국어 사전을 만든 목적은 시를 지을 때 압운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압운이란 영어로 라임(rhyme)이다.
예를 들어 “More rhymes with door”라고 하며 more의 ‘오어’와 door의 ‘오어’가 같다.
그리고 그렇게 압운을 맞추어 시를 지으면, 재미있다고 할까, 글 같지 않고 노래 같다고 할 수 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중국의 한시는 보다 엄격하게 압운을 맞추도록 정해져 있다.”
- 광운에 이르면 평상거입성이라고 하는 성조에 따라서 한자들을 구분하여 배열하고 있다.
심지어는 도표를 만들어 성모와 운모를 구별하여 정리했다고 한다.
“크게는 음절을 성모(聲母)와 운모(韻母)로 나누었는데, 성모는 첫 자음이고 운모는 그 나머지 부분을 말한다.
다시 운모는 개음(介音) + 정운(正韻) + 운미(韻尾)로 나누어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훈민정음의 운용체계 즉 자음 + 모음 + (모음) + 받침의 구조와 같다.”
“중국의 음운학의 또 다른 중요한 성과는 소리를 어떻게 내는지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훈민정음의 자음은 어금닛 소리, 혓 소리, 입술 소리, 잇 소리, 목구멍 소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는 바로 중국 음운학에서 아(牙) 설(舌) 순(脣) 치(齒) 후(喉)에서 각각 소리를 만든다고 한 이론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결국 훈민정음은 중국의 음운학적인 지식을 수용함으로써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음운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문자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1444년부터 1447년까지 힘을 쏟았던 부분은
중국의 운서를 언해하고 그 음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또한 훈민정음이 문자 생활이 불편한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서 세종대왕이 창제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주의적인 의식의 발로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하다.
훈민정음은 철저하게 음양오행설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문자이다.”
“최만리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에서 이러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최만리는 자신의 작업이 우리의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한자음을 통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중국의 반절법(半切法)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표현방법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뿐이다.”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4성 7음의 자모가 몇 개냐? 만약 내가 운서(韻書)를 고치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 잡겠느냐?”
“한자음을 내가 바로잡고자 하는데, 음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너희가 뭘 반대하냐는 논조이다.”
“훈민정음의 초성 체계는 의외로 국어의 음운 체계에 의한 것이 아니고
‘동국정운’의 자모 체계를 그대로 이식한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동국정운’의 자모체계는 23자모 체계인데 이는 현실적인 음이 아니라 당위의 명령이다.
이는 가공적이며 이상적인 것이었다.”
“결국 훈민정음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음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의 명대의 한자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최초에 한자음을 표기하는 부호 즉 한자에 대한 ‘발음기호’였던 것이다.
발음기호의 단계에서는 훈민정음이라고 하지 않고 언문(諺文)이라고 하였다.”
“다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 중에서는 가장 늦게 만들어진 문자.
중국의 음운학적인 지식들과 중국적인 음양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자.
애초에는 중국 한자음이 야기하는 혼란을 막고 이를 통일할 목적으로 한자에 대한 주음부호 즉 반절(反切)과 같은 성격을 가진 문자.
이러한 부분은 훈민정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굳이 들추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아닐까?”
● 최만리(崔萬理)
조선 초 문신·학자.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본관은 해주(海州).
고려시대 충(沖)의 12대손이다. (최충- 문헌공도. 해동 공자)
1419년(세종 1) 증광문시에 급제, 이듬해 집현전박사로 임명되었다.
그 뒤 1438년 집현전부제학이 되었고 1444년(세종 26)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한글창제의 불필요성, 한글의 무용론을 주장하여 사대주의적 성향이 짙은 것으로 파악되나
그 진의는 세종의 한자음개혁에 대한 반대라고 볼 수 있다.
이 상소로 세종의 친국을 받았고 다음날 석방·복직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 정창손(鄭昌孫)
1402<태종 2>~1487(성종 18). 자는 효중(孝中), 중추원사(中樞院使) 흠지(欽之)의 아들.
1423년 (세종 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이어 집현전 저작랑(集賢殿著作郞).교리(校理)를 역임,
1441년 사섬서령(司贍署令)으로 전임하였다.
1446년 (세종 26)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재직 중에
최만리(崔萬理). 신석조(辛碩祖)와 함께 한글의 제정을 반대하다가 파직,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와 응교 로 복직,
1446년 집의(執義)로 왕실의 불료 숭상을 반대했다가 다시 파직되었다.
다음해 용서되어 직예문관(直藝文館)에 등용되고, 이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이 되고,
1449년 부제학(副提學)으로 춘추관 현수관(春秋館編修官).수사관(修史官)을 겸직,
「고려사 (古麗史)」「세종실록(世宗實錄) 「치 평요람(治平要覽)」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년(문종1) 동부승지(同副承旨),이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대사헌. 대제학.병조판서를 지냈다.
1453년(단종1) 이조판서를 거쳐 1455년(세조1) 우찬성(右贊成)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이 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위 김질(金質)에게서 들은 성삼문(成三問) 등의 단종 복위 음모를 고변(告變)한 공으로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 대사성(大司成). 대제학 등을 겸직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1457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
1462년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도록 상소했다가 삭직(削職), 여산(勵山)에 부처(府處)되었으나
곧 용서받고 부원군에 복작(復爵)되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 남이(南怡).강순(康純).옥사(獄事)를 다스리어 익대공신 (翊隊功臣) 3등공신에 오르고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고
1471년 (성종 2년)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공신이 되었으며 70세에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机杖)을 하사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했다가 1485년 (성종16년) 사직했다.
문장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1504년(연산군 10) 감자사화(甲子士禍)에 부관참시(剖官斬屍)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伸寃),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성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 김문(金汶)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윤보(潤甫), 호는 서헌(西軒). 본관은 언양(彦陽).
1420년(세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으며
주부(注簿)를 거쳐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에 뽑히었고 이듬해 집현전부교리, 그 이듬해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정음청(正音廳)의 국문자보급방침을 최만리(崔萬理)와 더불어 반대했다.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모든 분야에 밝았고, 특히 사학(史學)에 정통했다.
집현전 동료들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여, 집현전이 항소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할 때와,
정창손(鄭昌孫) 등이 언사(言事)로 투옥되어 집현전의 모든 관원이 대궐에 들어가 그 용서를 빌 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해 세종은 사서(四書)를 번역시킨 뒤 품계(品階)를 높여 등용하려 했으나 중풍으로 기거(起居)를 못하다가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