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고종 21년. 갑신정변의 회오리가 나라 안을 휩쓸고 지나갈 무렵, 먼 나라 미국에서 우리나라를 향한 선교의 훈풍이 일고 있었어요. 그 얘기를 하려고 해요.
하늘과 땅, 동물과 식물을 사랑하며 나는 밝고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내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성경을 사랑하며 화목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요. 하지만 그때까지 나의 사랑은 짝사랑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죠. 대상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은 막연한 것이었습니다. 1876년 10월 1일. 열여섯의 내가 내 생애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기 그 이전까지. 그날 이후 평생 동안 나는 그 설교를 듣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해마다 10월 1일을 내 영혼의 생일로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생일. 나보다 먼저 나를 사랑하고 계셨던 그분. 내 영혼의 주인으로 오신 주님! 그날은 그분을 향해 감겼던 내 눈이 조용히 떠진 날이었습니다. 내 영혼이 그분을 보게 되었어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나면서부터 소경되었던(요한9장) 나의 눈이 그분을 보게 됨으로써 참 생명을 얻은 날이었습니다.
아마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다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어떤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내겐 정신과 육체가 모두 건강하고 경건하신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펜실베니아 주 수더튼에서 1858년 2월 6일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농부였고, 어머니는 어질고 슬기로운 루터교 신자였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성경공부를 시키는 것을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여기는 현명하고 다정하고 엄격한 주부였어요.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사는 동안 나는 자연히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의 경이로움에 이끌리면서 어머니로부터는 이스라엘민족의 역사와 예수의 행적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이런 환경으로 인해 나는 어려서부터 설교자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삶의 목표가 정해졌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독일로 된 성경책을 갖고 나를 가르치셨어요. 덕분에 나는 독일어에도 능숙하게 되어 어학에 대한 소질도 기를 수 있었고, 일찍부터 설교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인간이 되고자 애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웨스체스터 스테이트 사범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날은 웨스체스터 지역의 한 장로교회에서 복음 주의자 풀턴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풀턴의 설교를 듣던 중에 나는 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성경 이야기는 단순한 지식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는 아주 미묘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시간 이후 나의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처럼 예수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뜨게 된 경험 하나만으로도 예수를 증거 할 수 있게 되는 거였습니다. 기독교의 힘은 죄에서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힘에 대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각자의 증거에 있었으니까요. 이 구원의 증거는 100가지를 의심하는 것보다 훨씬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특권이었어요.
우리들의 머리는 현명하거나 현명하지 못한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의 마음은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해가 구름을 헤치고 빛나는 것처럼 명확한 사실에 대한 증인인 것입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삶의 목표가 확실해짐을 느꼈습니다. 설교자가 되겠다던 나의 꿈은 선교사가 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건 주님께 봉사하는 데 완전히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심을 경험한 나는 하나님 사랑하는 삶을 꾸미는데 온 정신을 집중시켰습니다. 학교에서는 기도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는데 후에 이 모임은 웨스트체스터의 YMCA로 성장했습니다. 나의 영혼은 영적 상태를 향한 갈구로 점점 가득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의 예정론은 나의 마음에 어떤 문제를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감리교의 기도모임과 조모임에 매력을 느끼고 1879년에 감리교의 일원이 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나의 마음은 해외 선교에 대한 쪽으로 관심의 폭이 커져갔습니다. 어디로 향발할 것인가? 처음에 나는 일본으로 가길 원했었습니다. 그러나 1883년 10월 미국에서 전국 신학교 동맹의 집회가 열렸는데 이 집회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문호개방을 하고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는 일본보다는 문을 꼭꼭 잠그고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려 하는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 선교를 하는 일이 더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떠나기 전에 나는 나의 선교사업의 반려자를 찾아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드디어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나의 아내 어여쁜 엘리와 한국에서 의사로 활동하게 될 나의 러닝메이트 스크랜튼 목사와 함께 나는 한국을 향해 배를 탔습니다. 1885년 2월 3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는 아라빅 호에 몸을 실은 우리는 4월 5일 두 달 만에 드디어 한국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서양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리고 서양인을 사람 잡아먹는 도깨비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진정한 고요를 전해주기 위해 발을 내딛었습니다.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정이 아닌 성령의 바람을 타고 온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 후의 정치적 불안이 너무 심해 서울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본으로 갔다가 그해 7월 29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지 거의 5개월 만에 겨우 서울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길고 긴 여정이었습니다. 이제 가슴에 품고 있던 보물을 한국인들에게 나누어 줄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르고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나왔습니다. 나는 나의 평생이 한국에 바쳐질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8월부터 나는 한국학생 4명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정부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은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으므로 학교와 병원은 지을 수 있었습니다. 선교가 목적이었지만 우선 교육과 의료사업으로 일을 시작해야 했던 것이죠. 1886년에는 공식적으로 개강을 하였는데 고종이 ‘배제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주었습니다. 그때 학생 수는 40여명 정도였는데, 중요한 것은 한국학생 중 두 명, 박중상과 한용경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구원받은 후 두 사람은 바로 기독교로 개종을 했고, 이 두 학생은 선교를 위한 교육의 성공을 알리는 첫 신호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1887년, 서울에 있던 4명의 선교사인 언더우드, 알렌, 스크랜튼, 헤론 등과 한국어 바이블 번역위원회를 발족하여 본격적으로 성경번역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학교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가자 나는 장로교 선교사로 있던 언더우드와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의 도덕 상태는 절망적인 듯했습니다. 그들의 심령에 쏟아 부으신 그리스도의 피만이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숙소에서는 이나 벼룩, 길에서는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 때문에 전도 여행은 심히 곤역스러웠지만 이만 고통쯤은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기도하였습니다. “.....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만 알도록 도와주소서.....악마는 자신이 세워 놓은 조상숭배, 관습, 방탕 등으로 열심히 우리를 침범하나, 우리는 그를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 대사관으로부터 여행을 중지하라는 편지를 받고는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기독교 전파는 불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나는 병원이나 학교가 아닌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교회 건물을 지었습니다. 1898년. 서울 정동에 벧엘예배당을 갖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나 나의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1902년 6월 11일. 마흔 네 살의 나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가기 위해 목포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나의 한국어 선생인 조한규와 학교를 다니다가 고향 목포로 돌아가는 소녀와 함께요. 배가 어청도 부근을 지나고 있을 때 배는 갑자기 짙은 안개와 부딪쳤고, 이로 인해 마주오던 키소가와라고 이름 붙여진 선박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는 나의 한국어선생 조한규가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선실로 다시 뛰어 들어갔어요. 배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23명의 사람들과 함께. 한국과 함께 한 나의 일생이 막을 내리고 나는 주님 곁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 항상 명랑하고 상냥했으며 입에서 찬송이 그칠 날이 없었던 아펜젤러는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는 갔지만 그가 뿌려놓은 복음의 씨앗이 지금도 어디선가 생명의 싹을 틔우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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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 미국. 한국 최초의 감리교 목사, 교육가>
1858. 2. 6 미국 펜실베이니아 손더튼에서 출생. 1882년 펜실베이니아 주 프랭클린앤드마샬대학을 거쳐 그해 뉴저지 주 드류 신학교를 졸업.
1885년 4월 2일 한국에 입국하여 한국선교회 및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1887년 서울에 있던 5명의 선교사인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크랜튼, 헤론등과 한국어 바이블
번역위원회를 발족. 서울에 벧엘 예배당(지금의 정동제일교회)을 설립.
1890년 한국성교서회(韓國聖敎書會)를 창설하여 성서번역사업에 큰 기여를 했다.
1902년(광무 6)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익사.
큰아들은 배재학교 교장을, 큰딸은 이화전문학교 교장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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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가 활동할 당시 세상은...> 1838 키에르케고르 구원받음 1858. 미국 펜실베니아 주 수더튼에서 아펜젤러 탄생. 1861 미국 남북전쟁(~1865).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1863). 1876년 10월 1일. 아펜젤러 거듭남을 경험. 1879 톨스토이 구원받음 1881~1921년까지 약 30년간 러시아에서의 유태인 박해. (러시아 포그럼) 1882 임오군란 (고종19)................................... 청 1884 갑신정변 (고종21) ...................................청 1885.4. 2. 아펜젤러 한국에 입국. 1894 *동학혁명. 갑오경장(개화) *청일전쟁(고종31~32)......일본승리. 민비살해. 갑오경장으로 이어짐. *드뤠피스(1859~1935.유대계 포병 대위)사건. 에밀졸라(1898년)가 밝힘. (프랑스에서 일어난 군사기밀 누설 사건으로 프랑스의 에스테라지소령이 저지른 일에 혐의를 씀.) 1896 제 1회 올림픽 대회. 헤르즐이 ‘유태국가(Der judenstat)저술. 1870~1914까지 .... 제국주의 시대 (19세기 말까지 영국은 세계무역금융의 중심지로서 세계 경제 체제의 기축 국 역할을 함.) 1897-스위스 제네바에서 전세계 유대인들이모여 세계유대인대회를 창설. 1898 시오니즘운동 시작....(데오도르 헤르츨) 1902. 한국에서 아펜젤러 사망. 1904 러일전쟁 1905 시온의정서 발표.(원명:시온 장로 의정서. Protocols of the Learned Elders of Zion. 러.일 전쟁시 러시아인 수도사 세르게이닐루스에 의해 최초로 세상에 알려짐) 1910 한일 병합.........(1945년까지 36년간) 1912 중화민국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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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위에서 부는 바람 원문보기 글쓴이: 빗쏠이
첫댓글 27세에 해외선교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먼 나라 한국까지 와 주신 아펜젤러 선교사 덕분에 이땅에도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자신과는 관계없던 먼 나라에서 죽음을 맞게된 그의 간증을 보면서 어렵다는 이야기와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생소하고 위험이 가득한 미지의 땅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청년 아펜젤러의 맘속에 일어난 불길은 누가 가져다 준 것일까요? 종교적인 義만 가지고는 그런 결심이 가능했을까요?
어렵지 않은 간증 아이들이게 읽게 해야 문제 되지 않을거 같습니다 퍼가요
'아펜젤러'..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 이 분도 구원 받기전.. 저 처럼 하나님을 '짝사랑' 했었군요. 나중에 만나뵐 때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면 얼마나 반가울까요?^^
명확한 사실에 대한 증인이라는 것... 하나님 사랑하는 삶을 꾸미는데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는 귀절을 적어 봅니다...
아펜젤러 기억 하고 싶어요
아펜젤러가 한국에 선교를 하러 왔다는 것은 바로 저에게 한국어 성경을 읽게 해준 공로자며 그 말씀으로 복음을 알게 해준 정말 귀하고 귀한 믿음의 선배님이시군요. 귀한 생명을 이 땅에 바친 열매가 바로 저를 비롯한 많은 거듭난 성도님들 이시니 주님 다음으로 아펜젤러 형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품 안에서 안식하소서 만나는 날까지 ^-^ 글 올려 준 님께도 감사드려요. 정말 귀한 사실을 알려 주셔서 ......
18세때 구원 (요한9장 내 영혼이 눈을 뜬날,,, 해마다 이날을 영혼의
날로 기념했다 

나도 그렇게한다 
) 27세에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 (17년간 한국서 선교 언더우드,알렌,등과함께) 44세때 성경번역자 모임 참석차 선박편으로 목포로 가다 어청도 부근에서 선박 충돌로 순교,,, 한참 일 할 나이에 순교하셨네요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반갑게 거듭난 사실이있었군요 ^^ 담아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