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사이에는 바람이 있지-영농일기(28)
트럭을 몰다가 가던 중 무심코 바라본 길가에 노란 개나리가 피어 있습니다.
땅에 붙어 온기를 붙들었던 풀들도 꽃대가 올라오고 개불알풀꽃이 가득했던
3월은 그래도 밀려드는 봄에 밀려나가지 않으려는 겨울의 잔형들은 바람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3월의 기운과 4월의 기운, 어김없이 찾아오는 절기들을
체감합니다.
지난 3월에는 자재창고와 생활동부터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팀장님 이거 보시유"
원두막을 새로 지을 때 데모도 역할을 누구보다 잘 했던 현순이가 자재창고에 들어서던
나에게 자신이 만들어 놓은 농기구 걸이대를 자랑스럽게 보였습니다.
"어머,,,예뻐라"
나는 현순이를 왈칵 껴안고 기쁨의 표시를 전달합니다.
폐스치로폴을 이용하여 호미걸이대를 만들어 놓은 그녀가 예쁘기 그지 없었습니다.
"역시, 현순이구나."
겨울을 지나오면서 고장 난 냉장고를 버리고 또 중고 냉장고를 얻어 왔습니다.
냉장고를 내다 버리는데 현순이가 쇠를 자재창고에서 가져오더니 냉장고 모터를
떼어내기 시작합니다.
"이게 비싸유. 여기다 이렇게 놓으면 사람들이 모터만 떼어가니께 내가 얼른 떼어서
가져가야겠어유."
건강이 좋지 않아 약으로 지내는 그녀의 남편은 간간히 이런 고물을 수집하여 내다
팔고 있습니다. 무심코 버리곤 했던 쇠조각들은 이제 현순이를 위해 팀원들이 챙겨
주기도 합니다. 현순이가 냉장고 모터를 떼어내는데 해란이가 망치를 들고 와 분리
작업을 같이 합니다. 하나 둘 셋 하면서 모터를 떼어내자 해란이와 현순이 미자 그리고
나는 일제히 함성을 지릅니다.
"요즘엔 고물도 중국에서 쏟아져 들어와 고물값이 무척 싸니까 수입도 별루 없시유"
몸이 아픈 남편이 일감도 없지만 그래도 간헐적으로 나가서 30만원 정도의 고물 수입을
한다고 합니다.
1년 전에 보길도에서 얻어 타고 온 고물트럭 아저씨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보길도에 들어와 고물을 한 차 가득 실고 전주까지 가는데 예전에는 수입이 좋았지만
요즘엔 매일 그렇게 해야 겨우 150만원 정도를 맞춘다고 합니다.
빗나간 얘기지만 떠오르는 얘기가 있습니다.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들은 1kg 700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폐휴지 수집상들은 또
폐지 공장에 넘기는데 무게를 더 나가게 하기 위해 물을 먹인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폐지수집상이 있는 곳에 물이 오염이 되어 물어보니 물을 먹인 폐지로부터
나온 인쇄오염물질이라고 하더군요. 먹고 사는 힘든 일이지만 환경을 생각하여 나온
폐지 재활용은 중간 유통의 변질로 인해 또 다른 수질 오염의 원인자가 되고 있는 셈입니다.
자본주의 유통구조는 하나부터 열까지 폐해만을 남깁니다.
지금은 정기적으로 한의원으로부터 한약찌꺼기를 얻어 옵니다.
수거해 온 한약찌꺼기를 쌀겨와 미생물 덩어리를 넣어 발효시켜 퇴비를 만듭니다.
하얗게 피어오른 호기성 미생물을 보면 마치 김이 오르는 떡시루를 열어본 마냥
모두 즐거워 합니다.
찌꺼기들이 우리에게는 퇴비를 만드는 재료가 되기에 소중하게 다루어집니다.
똥이든 찌꺼기든 발효과정을 거친 것들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고 식물들의 밥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올해는 미생물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 볼 생각입니다.
미생물이야말로 우리의 토양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이며 찌꺼기들을 소중하게
다루어지게 할 수 있는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똥은 정말 식물도 싫어하는 똥이야"
이런 제 말에 똥지론을 펼치던 평소의 말을 뒤엎는 것이라 모두 의아해합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뭐야. 먹는 것이 개판인데 그 똥이 어떻겠어? 피똥 안싸봤니?"
"소주를 많이 먹고 난 다음 날에 까만 똥을 싸는데 그게 피똥이야. 모세혈관이 파괴되어
검게 된 것이지."
우리 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식물이 좋아하는 똥을 내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제 주장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파종 일주일이 지나자 열무싹이 나왔습니다.
연두색의 싹들이 지금은 많이 커 있습니다. 4월 중순에는 열무와 얼갈이 배추를 수확할 수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나가는 것이 간혹 보는 어린 조카가 키가 쑥쑥 커가는 것을
보는 듯 했습니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무탈하게 커나는 것을 보는 것처럼 기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더위가 일찍 올 것이라는 친구의 귀뜸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쑤욱 자라고 있던 잎사귀에 벼룩벌레들의 먹은 흔적들이 보입니다.
날파리들이 보이고 심지어 나방들도 보입니다.
충방제를 위해서 역시 매일의 세심한 관찰에 필요합니다.
지난해에 이어 아침마다 밭을 세심하게 둘러봐야 할 시기가 되었나봅니다.
지난 22일에는 감자를 심었습니다.
지난해에는 4월 초에 감자를 심어서 수확시기가 늦추어져 첫장마에 가슴 졸이던 것을
겪었기에 올해는 파종 시기를 앞당겼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비닐 멀칭을 하지 않기에
22일 즈음이 적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농사는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계획이 세워지지 않으면 시기는 언제나 늦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강원도감자종자 보급소에서 구입한 수미와 친구로부터 얻은 선농, 두 종류의 종자를
지난해 보다 두 배의 면적으로 심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개인 직거래 외에도 지역 생협에 출하하기로 했으니까요.
감자눈을 중심으로 잘라서 한방찌꺼기가 포함된 미생물액비와 약간의 목초액으로
종자처리액을 만들어서 30분 정도 담가 두었다가 꺼내 참깨대,들깨대, 콩대를 태워 만든
재와 가져온 숯재에 감자를 묻혀 심습니다.
이번에는 감자를 고랑에 심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고랑을 타면서 경운해 준 아저씨가 자기는 고랑에 심는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듣고 보니 그 아저씨의 말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지요.
게다가 나의 생각은 두둑을 두는 것은 멀칭을 위해서 두둑을 하는 것이지 우리처럼
멀칭을 하지 않는다면 굳이 두둑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왕 이렇게 타진 고랑이라면 고랑에 심고 두둑은 2차례 정도 북을 주는 과정에서
두둑이 고랑이 되고 고랑이 두둑이 되겠지요.
이것의 전제는 많은 비가 오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5월경에 장마비처럼 비가 온다면 배수로가 채 확보되기 전에 감자는 썩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됩니다.
2차례 북을 주기 전에 많은 량의 장대비가 오지 않길 바래야겠지요.
허기사 땅주인이 여기는 사토라 괜찮다고 했지만 윗밭에는 점질이 더 강하기에 약간의
근심은 되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입니다.
실험 정신은 좋긴 하지만 낙관적인 것도 탈이기도 합니다.
오전에는 아랫밭에 심고 오후에는 윗밭에 심었습니다.
감자를 심으면서 약간의 실강이가 있었습니다. 여럿이 일을 하다보면 의견 충돌이 빚어집니다.
미리 생산부장과 함께 어떻게 할 것을 정하지만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발생합니다.
30센티 간격으로 감자를 놓고 나가면 뒷사람은 발로 툭툭 치면서 5-6센티 높이로 흙을
덮습니다. 하다보면 30센티가 아니라 20센티도 됩니다.
"간격이 너무 좁잖아. 넓혀" 큰소리가 나면 "아냐 그 정도면 괜찮아" 라고 감자를 놓는
친구가 응답하거나 때로는 아예 무시하고 해나갑니다.
그 때부터 궁시렁 궁시렁이 오가지요.
여럿이 함께 일한다는 것이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원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팀장님은 팀장이 되어서 왜 그래. 이렇게 짤라야 하잖아"
감자 종자를 만들 때 생산부장이 제게 한 소리를 합니다.
"이렇게 짤랐잖아. 자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이렇게 잘라지는데 그럴 수도 있지,
왜 그리 신경질적이노?"
생산부장의 신경이 날카로와져 나에게 화풀이를 합니다.
이전에 모든 것을 결정하기에 같이 일 할 때는 생산부장의 말에 복종을 합니다.
하지만 계속된 신경질적인 잔소리에 저도 맡대걸을 하지요.
생산부장의 힘겨움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응석을 받아줘야 하는데 그 날은
잔소리에 저도 발끈합니다.
"오늘은 팀장님이 타겟이다."
옆에 있던 해란이가 웃으면서 우리의 대화를 재밌게 받아들입니다.
"팀장님 얼굴 빨개진 것 봐"
잠시의 궁시렁 거림도 역시 순간으로 끝이 납니다.
제가 5박 6일의 출장을 다녀오는 동안 팀원들이 토마토를 심었습니다.
처음에는 토마토 정식을 하고 나서 출장 가라는 부장들의 말에 그냥 나 없이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녀들이 그런 이유를 저도 짐작했습니다. 파종이나 정식이 있을 때는
결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하다 보면 결정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더우기 이번에는 두 번째 토마토를 심게 되고,
관련 정보를 충분히 보면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저는 출장을 강행했습니다.
출장을 다녀온 뒤 본 토마토 밭은 그럭저럭 잘 심겨져 있었습니다.
두 편이 약간 차이가 있었지만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지요.
그 에피소드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이런 간격으로 이렇게 심어야 한다'. '아니다. 이렇게 심어야 한다.'
설전을 하다가 결국 '그럼 넌 그렇게 심어라, 이 쪽은 이렇게 심을께'라고 하면서
두 편으로 나뉘어져 심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전체 들어가는 숫자와 수확을 생각하면서 심었고 지난해 너무 좁게 심었던
경험으로 넓게 심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다고 합니다.
집단적으로 일하는 것은 여럿이 함께 의견을 맞추어 행해야 하므로
의견 충돌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설혹 의견이 맞추어져도 실제 진행할 때는 또 다른 것이기도 하지요.
한 해 농사를 해보았으니 이 정도의 의견 충돌은 그리 문제시 되지 않지만 의견 충돌로
인해서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들이 간혹 발생합니다.
같이 맞추어 일을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의견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도 그만 저렇게 해도 그만인 사람은 그냥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지요.
아니면 의견을 내지 않고 뒤에서 궁시렁대면 그것도 좋지 않은 버릇이구요.
하지만 일을 하다보면 일머리가 작동되니 자기 소견을 밝히고 하는 것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 지난 해보다 발전된 것은 분명하지요.
이제 밭에는 토마토, 감자,열무가 심겨져 있고 앞으로도 계속 파종이 진행됩니다.
4월 중순부터 수확도 시작되고, 바야흐로 주말에도 밭에 나가야 합니다.
우리 농장에서 팀원들이 일을 해나가면서 자연의 질서를 배우고 체득되면 역시
팀원들간의 의견충돌도 그리 많지 않게 되겠지요.
가장 우선적인 고려를 자연에 두게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