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에도 없는 배려, 얄미운 3초의 시간
솔향 남상선/수필가
우리는 살면서‘배려’란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이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으로 나와 있다. 실상 많이 쓰는 좋은 말이면서도 실천을 못해서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도 종종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남의 잘못에 대해 관용하라! 오늘 저지른 남의 잘못은 어제 내 잘못이었던 것을 생각하라.”
남의 잘못을 관용으로 대해 주는 것이‘배려’라 할 수 있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 완전하지 못한 게 사람이라면 잘못이 있을 때에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해 주는 것이 진정한‘배려’라 하겠다.
사람은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살아야 한다.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배려는 진정한 배려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며, 행복의 기쁨을 얻으려 안간 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행복의 기쁨은 마음먹은 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선뜻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배려하고 살면 왠지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기쁨을 얻고자 노력할 때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 할 때 더 큰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배려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라 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의 더 큰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배려의 요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하겠다. 사람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배려하는 것은, 그것이 최선을 다한 거라도 상대방에게는 최악이 될 수도 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오히려 서로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되겠다.
배려에 관련된 일화 몇 개를 통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 보겠다.
며칠 전에 갈마동 나진요양병원 앞으로 지나는 613번 버스를 탔다. 마침 내가 탄 버스는 K.T연수원 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우회전하여 내동으로 가는 거였다. 우회전하자마자 차도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가 있었다. 마침 행인들이 파란 신호를 받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우회전하는 영업용 택시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들 때문에 멈춰 있었다. 멈춰 있는 영업용 택시가 두 대나 되었다. 내가 타고 있는 버스기사가 앞에 멈춰 있는 영업용 택시를 향해 자극적인 클랙슨을 연거푸 눌러대고 있었다. 3초만 더 느긋하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면 될 것을 그걸 못하고 있었다. 횡단보도 건너는 행인들 때문에 멈춰 서 있는 택시들인데, 교통신호 무시하고 가라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요즈음 세상은 모든 걸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배려’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이 클랙슨만 눌러대는 버스기사가 야속하고도 얄밉게 보였다. 3초만 배려하는 생각을 가졌어도 함량 미달의 사람이란 간주를 받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또 한 번은 출근시간이 바빠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한참 가다 보니 핸드폰을 집에 두고 온 거였다. 부랴부랴 핸드폰을 가져오려고 뛰고 있었다. 마침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 있고, 한 사람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 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내가 헐레벌떡 뛰는 걸 보고서도 그대로 버튼을 눌러 올라가는 거였다. 3초만 기다려 주는 아량과 배려를 베풀면 되는데도 그걸 못하는 거였다. 못 본 체 그냥 올라가는 모습이 영 아름답게 보이질 않았다. 안중에도 없는 배려, 얄미운 3초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수일 전엔 지인을 만나 탄방동,‘명태 마을’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맛집 음식점으로 알려진 식당이라 그런지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아, 그런데 이 어찌 된 일인가! 내 맞은 편 2m 전방엔 고희 정도 돼 보이는 노파와 40전후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 가족인 것 같았다. 젊은 부인과 노파는 고부지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 같은 노파의 얼굴 표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이 쓰이게 했다.
우리 속담에 <아침 굶은 시어머니 상이다.> 라는 말이 있다. 바로 노파의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 으등거리고 앉아 있는 상이 어쩌면 화가 났거나 기분이 나빠 일그러진 표정임에 틀림없었다. 거기다 한 마디씩 내던지는 갈고리 같은 말이 상대방의 심경을 북북 긁어 놓는 말투였다. 좋은 음식 먹는 자리에서 정감어린 얘기나 상대를 배려하는 얘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가시 박힌 말이 연거푸 나올 때마다 긴장이요, 밥 먹는 사람이 체할 정도 분위기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바라보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도 신경이 쓰여 그 쪽으로만 시선이 집중되게 하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이 제 맛을 내지 못하고, 노파로 인해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 배려’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노파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밥맛 떨어지는 노파의 우거지상에 입만 벌리면 핀잔이요, 탓이었다.
모처럼만에 외식 나온 자리인데, 격려와 칭찬은 아예 약에 쓸려도 없었다. 배려라는 단어는 있을 곳이 못되는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말 한 마디 못하고 시달리는 며느리의 모습에 식은땀까지 나게 하는 거였다.
그 자리가 온정적이고 배려까지 묻어나는 시어머니였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안중에도 없는 배려, 얄미운 3초의 시간’
나도 혹시 그런 삶은 살고 있지는 않은지!
칭찬, 격려, 배려에 인색해서
노파처럼 함량미달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마음의 청진기를 한 번 들어 볼 일이로다.
첫댓글 요즘도 간이큰 시어머니가 있군요.
좋은얼굴로 살기에도 짧은세상.
나쁨 인상을 쓰며 살 필요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