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폭설의 반대편 폭우의 건너편 /김중일 시인 - 제2회 시산맥 작품 상 후보작

[김철환]

폭설의 반대편 폭우의 건너편

― 이야기의 끝

                                       김중일

아름답게 찢어진 커튼처럼 폭우가 내리고

일만이천사십오번째로 간이 진료실을 방문했을 때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수련의의 피곤한 눈꺼풀을 열고 손 흔들었건만

내 손에 만져지고, 내 손을 붙잡고 흔드는 건

단지 비바람뿐이었습니다

피가 침에 섞이듯

자다 깨 겸연쩍은 그의 웃음에 달빛이 뒤섞였습니다

어젯밤의 토사물이 말라붙은 변기 같은 창문에는

인류가 동시에 뱉어놓은 가래침처럼,

추접스러운 구름이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가 반복 재생되는 레코드의 노이즈 같았습니다

기적이군요! 이제 괜찮습니다

수련의가 내게 일만이천사십오번째 똑같은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저랑 이야기하는 걸 멈춰도 된다는 뜻입니다

삭신이 쑤시네요 저는 아직도 이렇게 아픕니다

수련의는 만지작거리던 호두를 망치로 내려쳤습니다

당신의 뇌는 여기 이 녀석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는데

이제는 충분히 기름지고 윤기가 흐릅니다

그게 다 그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효과입니다

무중력 속에서의 가벼운 핑퐁처럼 무한정 반복되는

비가 눈으로 바뀝니다 농담같이 슬그머니

세계는 조금 느려집니다

단 오분 간의 폭설로

시커먼 적설이 병원 옥상까지 쌓였습니다

수련의와 제가 있는 진료실은

심해 속의 기포처럼

우주 속의 작은 공기주머니처럼

한 점 공기보다 작은 소형 우주선처럼

어둑어둑하고 희박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진료실의 두꺼운 전공서들이

우리가 흡입해야할 공기를 다 들이켜고 있습니다

활자들이 배고픈 병정처럼 식판을 들고 도열해 있습니다

우리는 폭설의 한가운데 있었고

폭설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침묵과 이야기는 세팅된 일정 비율로 혼합되었습니다

축축한 손아귀처럼 비바람이 우리의 머리와 사지를 깍지 끼듯 붙잡고

그리고 수억년 전부터 계속되었던 합창 연습 시간에 따라

단조로운 리듬에 맞춰 일정하고 힘차게 손을 흔듭니다

우리는 속절없이 흔들립니다

이곳에선

물구나무를 선다면 당장이라도 하늘의 적설을 밟을 수 있습니다

여긴 희박하고 어둑하고 아늑하고 어지럽습니다

그리고 정전.

추천사유

나는 최근 아주 경쾌한 시집을 받았다. 그 시집을 읽으면 머리가 가벼워진다. 그래서 나는 그 시집을 침실 머리맡에 두고 하루에도 여러 번 읽는다. 하지만 ｢김중일의 폭설의 반대편 폭우의 건너편-그 이야기의 끝｣을 읽으면 내 뇌는 더욱 무거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돋보여 추천하는 이유는 이 시의 연극적 카타르시스에 있다.

- 이 가설무대 위의 상황을 딱딱하고 장황하게 불편한 산문 투로 말하고 있는 등장인물인 <나>가 간이 진료소에 누워 불안정한 의식 상태를 주절거린다. 그가 진료실 이전에 어떤 상황에 있었건 그는 수련의에게 받은 응급 처치로 그는 명료해졌다. 하지만 곧 이어 기적적으로 소생했다고 진단이 내려졌음에도 불구 이 시나리오는 <나>를 다시 <암전> 시킨다. 명쾌해야 할 종결 부분에서 <정전>은 다시 비극을 상기시키는 방식이 다분히 극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비논리적 주절거림을 통하여 그는 관객과 주인공과의 의식 공간을 확장시킨다. 이 시에서 나는 주인공의 정전과 가끔 완전히 방전되곤 했던 나 자신이 오버랩overlap되는 것을 느낀다.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다.

그는 진료실의 두꺼운 전공서의 활자들을 배고픈 병정이 식판을 들고 도열해 있다고 보았다. 생각해보건 데 그는 어려운 공부를 많이 한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해온 그 지식의 무게와 폭설 같은 시적 공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침묵으로 무대를 세팅하고 있다. 이 시에서의 상징들은 대체적으로 어둡고 다분히 기계적이고 그의 시의 외관은 hard하지만 그의 시각은 따뜻하다. 시인은 <아름답게 찢어진 커튼처럼 폭우가 내리고>라고 말한다. 이만큼 그의 시선은 열려 있다.

연극적이면서도 영화적 프레임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시인은 연출자이면서 주인공이다. 이 연출가는 연극적 막장에 암전을 투입한다. (누구도 선뜻 일어나 무대 밖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호흡을 멈추고.) 여기에서 나는 에밀 보아락Emile Boirac의 데자뷰(deja vu) 현상을 생각한다. 과거에 나도 이와 같은 경험을 경험한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아니다. 자메뷰(jamais vu) 현상이다. 내가 늘 누워 있던 그 병실이다. 그가 간이 진료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누워 있었던 그 응급실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그의 시적 상상력이 나의 사적인 경험과 맞닿아 있지만 그의 시의 중력은 뭉툭하고 거친 내 우주와 다르게 소우주의 세밀한 공간에 배치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나는 이 시인을 본적도 없지만 괜히 성격이 까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퉁명스럽고 사회 적응력이 없는 사람이 좋다. 또한 그런 시가 좋다. 그의 추상적 상처에는 먼지처럼 가벼운 불편함이 있을 뿐일 것이라는 불편한 선입견을 가져 본다. 우주적 불편함과 필연적 환상성에 기댄 그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이 시는 관객에게 기억의 회로를 더듬어 보게 하는 힘이 있으며 무거운 카타르시스가 있다.

추천인 서영미

2003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 『주변인과시󰡕 편집위원

추천사유

<좋은 시>에 대한 기준은 시 자체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다루기 어려운 개념일 것이다. 어차피 문학이나 예술에 계량적인 잣대를 댈 수는 없으므로, 그 평가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좋은 시를 선정하는 근거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며, 일정한 수준을 넘어선 시들의 우열을 가르는 데에 있어서는 평자의 취향에 크게 의존할 것이다. 물론, 이에는 개인뿐 아니라, 주어진 시대와 공간의 전반적인 문화도 작용할 것이다. 가령 조선시대의 화가들이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을지 궁금하지 아니한가.

시를 시인의 고백으로 이해할 때, 필연적으로 그 언술의 형식이 중요할 것이다. 이것은 김춘수 시인이 <시는 내용이 아닌 형식>이라고 단언한 이유이며, 시에 대한 실험이 부단히 이뤄져야 하는 당위를 제공한다. 시의 새로움에는 물론 삶과 세계에 대한 시인의 감각이 결정적으로 참여한다. 극단적으로 감각을 앞세운 시의 존립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한편, 시가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 또한 매우 바람직하다.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의 에피파니를 동반할 때 시의 위의는 한층 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시인의 삶에 대한 시선과 관련될 것이며, 보다 직접적으로는 시인의 <체험>이 자리 잡을 층위일 것이다. 이는 거칠게 말하자면 시에 있어서의 감각과 사유의 문제이다. 어느 편에 더 중점을 두는지에 따라 시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전개되겠지만, 사실상 분리될 수 없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심화될 때 상투성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시인은 비로소 시를 쓴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김중일의 시는 세계에 대한 깊고 조심스러운 관찰 끝에 쓰인 것이다. 그는 시의 무대를 진료실로 설정하여, 이 세계가 건강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진료실의 수련의는 늘 동일한 진단을 내린다. 이 황량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기적임을.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의식과 항변을 불식하듯, 폭우가 폭설로 바뀌면서 세계는 어느덧 환각 상태로 바뀌는데, 지구는 작은 소형 우주선으로 어둑하고 희박하게 떠돌고 있다. 누구도 폭설의 중심에 있지만, <폭설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이 세계의 모순을 시인은 정교한 시선으로 기술한다. 김중일은 과장스럽거나 경망스럽지 않은, 시종 신중하고 담담한, 그러나 서정적인 어법으로 전개해나가는데, 이것은 시인이 새로운 치료법의 실험보다는 진단을 중요시한다는 증거이다. 기상과 소리, 자세와 침묵을 세기말적인 우울한 장면들 안에 적절히 배치하는 시인의 느린 저음의 말투에 묻어나오는 고뇌는 오랫동안 무거운 여운을 드리운다. 세계에 대한 시인의 깊은 사유와 감각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추천 이성렬

2002년『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비밀요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