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적 미학(美學)
예술은 집요하게 죽음을 사유하고,
그것을 통해 집요하게 삶을 창조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지바고》
*《닥터 지바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이영의 옮김/새움출판사 2022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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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에서 직업이 의사이자 작가였던 지바고(유리 안드레예비치)가 20세기 격변기였던 시절, 러시아의 역사적 현장 곳곳을 전전하며 불꽃같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운명처럼 두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말년에는 비극적이게도 모스크바의 어느 조그만 거리에서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쓸쓸하고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는 슬프고도 허망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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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작품 속 주인공처럼 격변기 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맹의 급격한 정치와 사회체제 변화를 거치면서도, 젊어서 시작한 시와 소설 창작 작업을 꾸준히 하며 국내외 잡지에 발표하는 등으로 자국 러시아뿐만 아니라 인근의 서유럽까지 그 영향력을 키워감으로서 1958년에는 이 작품으로 권위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었다. 하지만 국내 정치적 문제로 자의반 타의반 수상거부를 결정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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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나에게 재미있었던 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 첫 번째로 주인공 유리 안드레예비치의 역사와 종교, 예술 그리고 격변기 시대 등 여러 방면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해박한 지식 때문이었다. 물론 주인공을 통해 작가가 드러내는 지성의 총체일 것이지만, 모두가 잘 아는 러시아가 낳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위대한 문인들의 예술에서 영향을 받고 토양이 된 이 작품을 읽다보면 다분히 러시아적인 혼과 정신이 깊숙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한다.
두 번째로 이 작품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숭고한 희생과 같은 기독교적인 근본정신이 작품 밑바닥 곳곳에 깔려있음을 보게 되는데, 좀 더 세심한 시각으로 들추어본다면 서구 유럽의 기독교 정신과는 조금 다른 결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원초적이고도 러시아적인, 러시아에서 역사를 처음 열며 대대로 살아 온 슬라브 민족 특유의 민속신앙에 근거한 정신과 감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부분에서는 서구 유럽의 기독교가 가톨릭과 개신교로 대별된다면, 러시아에서는 독자적인 종교체계인 러시아정교의 영향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세 번째로는 유리 안드레예비치가 만나 비련의 운명적 사랑을 나누게 되는 두 여인, 라라와 토냐와의 애틋하면서도 절박한 삼각관계다. 작가가 작품 속에서도 밝혔듯이 셋은 ‘성적 열망’이라는 본능에 입각한 사랑보다는 역사의 격변에 따른 우연이 자아낸 필연적 결과라는 점에서 독자로 하여금 애통과 허망함을 불러일으키게 하며,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대개 나타나는 보편적이고도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유감스럽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다는 공감을 얻어낸다. 그럼에도 우리는 라라가 사랑에 있어서 유리 안드레예비치에게 더욱 영감을 주고 관능적이며 예술적으로 이상적인 여인이었음을 주인공의 작품 말미에 털어놓는 독백을 통해서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제정 말기부터 공산주의 정부인 소비에트 연방이 들어서기까지 러시아 역사상 최대 격변기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그리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발생 현장별로 작가의 섬세한 필치가 작용하여 아름답고도 낭만적인 러시아적 미학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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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도 보석같이 아름다운 빛을 내는 의미에서 고전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은 시간적으로나 환경적으로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와 가치 속으로 녹아들게 만들어 언제, 어디서 누가 읽더라도 공감할 수밖에 없고, 독자가 동일하게 인식하는 미학적 공간의 어느 지정된 좌표에서 시대가 지나도록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202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