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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 고조의 유언
한 고조는 백등산 패배의 후유증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장안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름시름 몸져누웠다.
3년간을 그렇게 병석에 몸져 누워있다 별세한다.
임종 직전, 한 고조는 유언으로 “차후로 흉노와는 전쟁하지 말아라”라고 가족들과 대신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
흉노에게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으며, 그 충격이 컸으면 유언까지 그렇게 했을까?
이후,
60여 년간 한은 흉노의 복속 국가로서 선우가 바뀌면 황실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내며, 매년 공물을 꼬박꼬박 바치며 큰 소리 한번 못 내고 지낸다.
그러나 흉노 측은 매년 ‘공물이 적다. 품질이 떨어진다. 약속 일자를 어겼다.’라는 등의 트집을 잡아 수시로 만리장성을 넘어 약탈을 일삼았다.
이 무렵 흉노족에게는 특출한 인물 두 명이 나타난다.
남녀 男女로서 남자는 중항열 中行說이며, 여인은 왕소군 王昭君이다.
이들은 흉노족에게 새로운 문물과 생활방식을 개선 改善시켜주고, 흉노인 들의 자존심을 높여준다.
먼저 중항열에 대하여,
중항열 (中行說)은 중국 전한 전기의 환관으로, 연나라 사람이다.
훗날 흉노의 노상 선우의 측근이 되었다.
당시 한 왕조는 황제의 자리를 노리던 여태후 呂太后 일족이 멸망한 뒤에도 한 조정을 위협하는 많은 불평 분자들이 여전히 존재했고, 그들을 진정시키는 동안, 외부 항쟁은 피해야 했다. 한의 문제 文帝는 흉노와 화친을 맺고는 선우에게 한의 황족의 딸을 시집보내면서, 중항열을 시종으로 함께 보냈다.
중항열은 흉노의 나라에 가기를 거부했지만 한 조정은 그를 강제로 한에 보냈고, 이에 한 조정에 큰 원한을 품게 된 중항열은
“내 반드시, 한의 재앙이 되리라”라는 말을 남겼다.
흉노에 도착한 중항열은 그대로 흉노에 귀순 歸順해 버렸다.
당시의 선우였던 노상선우에게 청원해 그의 측근이 되었고, 한에서 보내오는 비단이나 음식 같은 물품을 받는 것이 흉노에게 오히려 불리한 일임을 노상선우에게 설파하면서 “흉노가 원하는 것은 한을 쳐서 약탈해 오면 된다”고 선우에게 한 漢 영토 침공을 부추겼다.
또한 선우의 측근에게 글자와 셈법을 가르쳐 사람과 가축의 수를 파악하게 했으며, 흉노가 한에 보내는 문서의 양식과 문체 文體도 흉노가 더 상위 上位에 있도록 바꾸었다.
이후,
흉노로 온 한의 사신에게도 한 조정에 대한 쓴소리를 늘어놓으며, 사신이 무엇을 말하든 듣지 않는다는 자세를 관철하였다. 이에 따라 흉노의 한나라 침공은 다시 심화되었고, 과연 이것은 중항열이 말했던 “한의 재앙”이 되었다.
중항열은 노상선우가 죽은 뒤에도 그 후계자 군신선우를 섬겼다.
* 춘추필법
춘추필법(春秋筆法)이란 공자(孔子)가 본국(本國)인 노(魯)나라의 역사를 정리하여 편년체(編年體)로 편찬한 서책이 ‘춘추(春秋)’인데, 그 춘추의 서술 방식의 문제점을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께서 지적하였다.
1. 존화양이(尊華攘夷) : 중국을 높이고 주위의 다른 나라들은 오랑캐로 비하해 서술한다.
2. 상내야외(祥內野外) : 중국의 일은 자세히, 상대국의 일은 간략히 서술한다.
3. 위국휘치(爲國諱恥) : 중국의 국익을 위해 수치스러운 일은 과감하게 숨긴다.
이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의 원류(源流)다.
이 중화사상을 집대성(集大成)한 서책 書冊이 그 유명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다.
사기(史記)가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중국 최초의 역사서(歷史書)라는 것이다.
사기 이전에는 역사라는 개념이 없었다.
당연히 역사에 관한 별도의 서책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 죽간 저 서적에 조금씩 기술되어 있던 단편적인 역사와 전래되어 오던 구전(口傳)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 ‘사기’다.
물론 방대한 자료들을 체계를 갖추어 편년체로 서술한 대단한 서책으로 아주 중요한 자료인 것은 확실하다.
특히 동양 사학자들에겐 크나큰 영향을 끼치는 필독서이다.
단, 문제는 객관성이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중국 외 주위 다른 국가의 측면에서 볼 땐 상당히 불편하다.
확실히 문제가 있다.
우리의 '환단고기'가 강단 사학자들에게 외면당하는 이유와 엇비슷하다.
그러니,
주변국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춘추필법
사기
동북공정 (서북, 서남 공정포함)
어둡고 수치스러운 사실은 숨기고, 자랑스러운 사실은 침소봉대하는 객관성이 결여된 역사 서술 기법….
이처럼 모든 역사를 춘추필법으로 작성하고, 그 내용대로 자국 학생들을 교육하다 보니, 그렇게 보고 배운 것이 어디 가겠냐?
근래 들어 유커( Youk. 遊客)들이 한국에 관광 觀光와서 갈 때는 많이들 실망하고 돌아간다고 한다.
그 이유가,
역사서에서 배운 대로
“한국은 역대로 중국에 조공을 바친 속국이다, 그러니 그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을 상전 上典 떠받들듯이 대할 것이다”라는 우쭐한 생각으로 한국에 오는데,
실상은 “버릇없는 되놈들”이라는 식으로 무시해 버리니, 저들은 “역사도 모르고 대국인 大國人을 무시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한국인들”이라는 씁쓸한 인상을 받고 돌아간단다.
역사를 올바르게 기술 記述하지 않고, 왜곡시켜 가르치면 후대에는 이러한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예 禮가 없다.
이웃에 대한 배려 配慮가 전혀 없다.
인 仁과 덕 德을 금과옥조 金科玉條로 여기고 후학들을 가르쳐 인성 人性을 깨우치고 개발시켜, 극기복례 克己復禮를 주장하는 유교 儒敎의 창시자 공자 孔子.
물론 유교의 이론은 훌륭하다. 흠잡을 곳도 별로 없다.
전제주의 專制主義에서 백성을 통솔하는데있어, 이보다 더 좋은 이론은 없다.
유교 儒敎의 요지 要旨는 충 忠 과 효 孝다.
목숨 바쳐 나라에 충성하고, 도리를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라는데, 그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인본 人本은 어쩔 수 없는지 공자와 사마천의 춘추필법 덕에 후손들은 이웃 나라와 또 다른 갈등을 겪게 만드는 이중성 二重性이 드러난다.
‘네 생각 내 생각’의 아전인수 我田引水식 사고다.
각자 내면 內面의 정리절차를 어떻게 정화 淨化시키는가에 따라, 겉으로 표출 表出되는 차이는 180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유교 사상에 조선왕조 500여 년간 뼛속까지 젖은, 우리도 그 여파 餘波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가까운 우리 주변에도 춘추필법에 따라 작성된 서적이 많다.
우리의 족보 族譜가 그렇다. 집집마다 대부분 소지하고 있다.
특히, 종손 宗孫 집안이면 필수적으로 대동보 大同譜까지 보유해야 한다. 없으면 ‘상놈’이란 비난을 면할 길 없다.
우리의 족보가 춘추필법으로 작성된 대표적인 서책이다.
도둑질, 산적, 사기, 강도, 살인, 방화 이러한 범죄와 흉악범은 인류 역사 어디에서나 존재하였으며, 반드시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의 흔적은 그 어느 족보에도 기술된 것이 없다.
분명, 우리의 선배나 선조 중에 존재했던 범죄자 임은 분명한데 누구의 자식이며, 또 누구의 어버이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또한, 자신의 2세나, 후손을 둔 악당 惡黨들도 적지 않았을 텐데…. 기록은 전혀 없다.
벼슬 명칭만 두드러져 보이게끔 작성되어있다.
어둡고 수치스러운 과거는 묻고 넘어간다.
인간적으로 이해는 간다.
그러나 역사는 엄연하다.
이것이 바로 춘추필법의 명암 明暗이다.
-- * 연나라 燕의 위치.
연소왕 이전 연나라의 위치
한국사를 날조하기 위해 가장 심하게 날조된 것은 연나라 위치이다. 연나라를 날조해야 조선의 영역을 축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나라를 날조해서 대륙 조선을 지우고 평양의 유물이 중국식이라고 하면서 낙랑군이 평양이라 날조한다. 대륙은 진 辰 조선의 영역이고, 평양은 말 조선의 영역이어서 대륙과 평양 모두 조선이므로 강단 유사사학이 말하는 중국식 유물이 평양에서도 나올 것이다.
연나라 위치가 왜곡되어 조선에 관한 모든 연구는 엉뚱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제 유사사학은 과거에 천진이 계라고 주장하였으나, 당시에 천진의 상당 부분이 바닷속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후, 지금은 북경이 계라 주장한다. 연나라의 위치만 바로잡아도 모든 고대 역사 날조는 근거를 잃게 된다.
연나라 위치는 『사기』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연은 약소국이었다. 연의 전성기는 연소왕 시기뿐이다. 연 전성기 직전의 연의 영역은 조나라 무령왕과 소진의 말로 확인된다.
『사기』 「조세가」에 의하면, 무령왕 19년(서기전 307년경) 무령왕이 조의 국경을 말하면서 누완에게는 “북으로는 연이 있고, 동으로는 호가 있으며, 서쪽은 임호, 누번, 진, 한의 변경이다”라고 했고, 『사기』 「조세가」 北有燕,東有胡,西有林胡、樓煩、秦、韓之邊
공자 성에게는 “우리나라는 동으로 황하와 박락수가 있어 제 중산과 그것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나 배와 노의 사용은 없다. 상산에서 대 상당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연과 동호의 변경이 있고, 서쪽으로 누번과 진, 한의 변경이 있다”라 말했다. 『사기』 「조세가」 吾國東有河、薄洛之水,與齊、中山同之,無舟楫之用。自常山以至代、上黨,東有燕、東胡之境,而西有樓煩、秦、韓之邊
한편, 『사기』 「소진열전」에 의하면, 소진은 서기전 334년 연문후에게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북쪽으로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남쪽으로는 호타하(嘑沱河)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라고 하고, “남으로 갈석(碣石)과 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라 하며, “조나라가 연을 공격한다면 출병의 명령을 발한 지 열흘이 안 되어 수십 만 대군이 동쪽 성벽쪽에 진을 치게 될 것입니다. 호타하와 역수를 건너 4, 5일 안에 도성에 이를 것입니다”라 한다. 『사기』 「소진열전」 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嘑沱、易水. --- 南有碣石、鴈門之饒 --- 今趙之攻燕也,發號出令,不至十日而數十萬之軍軍於東垣矣。渡嘑沱,涉易水,不至四五日而距國都矣.
소진이 말하는 갈석은 『사기색은』이 인용하는 『전국책』에 의하면 상산에 있는 산이다. 【索隱】(戰國策) 碣石 山在常山九門縣。
갈석이 상산에 있고 안문이 대 옆에 있으므로 무령왕이 말하는 국경과 소진이 말하는 국경이 일치한다. 즉 연의 남쪽과 서쪽 경계는 호타하이다. 소진은 서쪽으로 조나라가 아니라 먼 지역인 운중 구원을 말했는데 운중 구원은 조나라의 서쪽 변경이다. 『사기』 「조세가」는 무령왕 26년(서기전 301년) 조나라의 서쪽 변경은 운중 구원이라 한다(復攻中山,攘地北至燕、代,西至雲中、九原).
소진은 북으로 임호 누번을 말했는데 「조세가」에선 무령왕이 임호 누번이 조나라의 서쪽 변경이라고 말하므로 임호 누번 역시 연에 접하지 않는 먼 나라를 가리키는 표현에 불과하다. 소진이 연의 경계도 아닌, 운중 구원, 임호 누번을 언급하는 것은 주변 강대국을 언급하는 것을 피하면서 연이 그곳에까지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측면도 있을 수 있다고 암시하거나 막연한 기대감을 주어 문후의 기분을 좋게 하려는 의도의 행위이고, 연의 실제 국경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연의 실질적 서쪽 경계는 태행산맥이다. 태행산맥 너머 안문까지 산악지역은 연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 불과하다.
연의 북쪽 경계는 갈석산과 나중에 한 漢이 수리하여 지킨 요동 고새이다. 연의 수도는 소진의 말에 의하면 조나라가 침략시 호타와와 역수를 넘어야 수도에 온다고 했으므로 남역수 현재 구글지도에서 중역수와 북역수는 볼 수 있지만 남역수는 보이지 않는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남역수가 서수 徐水에 들어간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서수구 부근으로 흘렀던 강으로 추정된다. [南易水。源出易縣西南。東流入徐水]
북쪽 요동고새 남쪽으로 추정되고 이는 호타하와 역수를 넘어 4-5일도 되지 않아 조나라가 수도에 올 수 있다는 소진의 말과 일치한다. 구글 지도에 의하면 석가장 근처의 호타하에서 요동 고새까지의 직선거리를 측정하면 130km에 불과하다.
연의 동쪽 경계는 고대 황하이다.
소진이 말하였듯이 황하 동쪽은 조선이다. 연의 요동고새 북쪽도 조선이다. 여기의 조선은 진번 조선이다. 사마천이 「조선열전」에서 “전 연의 시기에 진정 처음으로 진번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킴을 경험하였다.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으려 하였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연의 북쪽이 요동고새를 넘어가지 못하는 것은 『한비자』 「유도편」과 『시경』 「대아」 한혁편으로 입증된다. 물론 한혁편의 내용은 서주시기의 일이지만, 연은 연소왕 이전까지 제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유지하는데 급급했으므로, 서주 이후 연소왕 이전에 북쪽 경계를 확대시켰을 가능성은 없으며, 『한비자』 「유도편」이 직접 언급하는 경계와 일치한다. 고고학적으로도 연나라의 중심지역이라 날조되어 온 북경과 보정을 잇는 선 일대로부터 천진을 포함하는 지역에서조차 연나라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궈다순·장싱더(郭大順·張星德) 지음. 김정열 옮김.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하』 동북아역사재단. 2008. 1059쪽. --
* - 이상 ‘연나라의 위치’는 [실증상고사] 블로그를 인용함.
첫댓글 춘추필법을 제대로 알게 되었네요. 감사...
인간의 본성이 수치스러운 것은 숨기고 자랑하고 싶은 것은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네요.
역사적인 사실이나 현재 일어나는 일을 판단할 때 참고할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항상 기억하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감동적인 글입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