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청년(靑年), 그들의 세상을 말하다’입니다. - 편집자 주
청년이란 실제로는 없는 존재이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그러하다. 누군가 청년이란 세대가 있지 않냐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청년이 정말 특정 연령 세대를 뜻하는 말인지 확인을 해보기 위해 다른 세대 구분 호칭부터 살펴보자. 먼저 만 5세까지의 영유아가 있고 그 위의 아동은 일반적으로 만 5세에서 12세, 청소년은 어떤 법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만 13세에서 청소년보호법상 19세, 청소년기본법상 24세, 노년은 65세 이상으로 별다른 이견 없이 인식되고 있다. 그에 반해 청년은 어떠한가? 청년고용촉진특별법에 의하면 15세 이상 29세 이하라고 한다. 음... 이 정의대로라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청년은 아닌 셈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민주평화당, 자유한국당에선 45세까지 청년당원의 자격을 준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전라남도의 곡성군과 장흥군의 청년발전 기본조례에 의하면 49세까지 청년이라고 하니 이 청년의 규정을 따른다면 나는 앞으로도 10년 이상은 청년이라는 뜻일 테다.
19세기 말 동경 유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 청년이라는 말은 본디 명확하게 세대를 구분하는 용도로 쓰이지 않고 진취적, 도전적 젊은이를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되어왔다. (이 가운데 진취적, 도전적 젊은이 어느 것 하나도 정의되기 어려운 단어이다.) 전대협 진군가의 가사처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어서는 이들을 자처하고, 한총련 진군가의 가사처럼 불패의 한길을 달려오고 자신의 눈빛이 곧 민중의 등불이라고 믿는 이들이 자신을 청년이라 명명했다. 교회에서도 그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들은 새벽이슬 같은 존재,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 구원의 환상도 보고. 한 손엔 복음을, 또 한 손엔 사랑을 들고 온 땅 구석구석 누비는 존재가 되기를 희망했다. 읽기만 해도 진취성과 도전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왜 요즘은 이런 청년이 없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운동의 추동을 위한 자기 집단 정체성 강화의 말이 실체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또 그러한 자세를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 구글 검색창 갈무리
컴퓨터는 청년을 뭐라고 생각하나 궁금해 구글과 네이버 검색어에 청년 관련 키워드를 넣어보았다. 이 가운데 특히 ‘청년들이’라는 문장 뒤에 교회와 관련된 키워드들이 자동완성 추천되었다. 역시 청년 생각해주는 곳이라곤 교회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교회가 그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생각해보자.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에 가도 청년은 명확히 구분되는 정체성과 선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일단 의지와 상관없이 스무 살이 되면 ‘청년’으로 명명되며, 좀 큰 교회에선 대학교에 못 가면 붙여지는 낙인이고, 아직 결혼하지 못했다는 일종의 잔소리로 기능하는 것이 ‘청년’이라는 이름이다. 그들은 교회에서도 진취적이고 도전적이기를 요구받아서 진취적으로 교회학교 교사를 맡기를, 도전적으로 성가대에 서기를 요구받는데 이 일 가운데 진취성과 도전성이 요구되는 일은 없다. 누군가는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본인들은 자기의 영역을 만들며 공동체를 구성해왔노라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노라고, 198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의 조사에 의하면 40세 이하 교인이 79%를 구성하였다고 한다. 약 30년 뒤 실시된 2017년 말 조사에서는 40세 이하 교인은 비율이 41%라고 나타났다. 수치만으로도 약 절반 정도로 떨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토양 자체가 달라진 셈이다.
이렇게 살펴볼 때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청년”이라는 단어는 루카치의 말대로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는’ 사람들에게나 허락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디 그럴 수 있는 시대인가. 지금 대한민국은 스스로 소멸하는 과정 가운데 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을 더욱 갈급하게 찾고 있다. 하지만 잔치가 끝나 이제 음식은 없고 설거지거리만 많은데 거기 가서 앉아있을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청년을 이야기하고 청년의 기치를 든 사람들이 있다. 나는 오히려 이들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선한 의지가 이 사회에, 교회에, 열정적인 붉은 피를 제공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교회는, 여러분은 청년이라는 말로 누군가의 진취성과 도전성을 끌어다 쓰려는 사람들을 경계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그런 그대들을 경계할 테니. 그리고 교회와 청년이라는 주제로 이런 글을 쓴 나는 고료로 치킨을 시켜 먹을 테다. 청년의 일은 그저 그렇게 진행된다.
오세요(한백교회/옥바라지선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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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사건과 신학은 따로 주제를 정하기 보다는, 청년세대를 대표하는 여덟 사람의 글을 모아 보았다. 주제는 여덟 명이 모두 제 각각이다.
미래의 소득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점점 더 어두워만 가는데, 학자금과 주거비용으로 무거운 부채를 안고 시작하는 청년들의 사회 생활에 ‘희년’이 필요하다는 외침이 있는가 하면, 청년 실업의 문제가 비민주적이고 위계적인 직장문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고발하면서, 사업장의 민주화 없이는 청년실업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
사실은 취지문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사족 같은 이야기를 널어놓고 싶지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 읽어 보라고 말하고 싶다. 현실에 대한 분석이 정확해서도 아니고, 글이 아름답고 좋아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메시지가 명확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문장이나 수사로 말하기 힘든 무엇, 내용이나 메시지로도 가릴 수 없는 무엇이 보이기 때문에 함께 읽어 보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떤 이는 냉소와 비관으로 가득한 글이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오히려 깊게 도사린 희망과 신념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 사건과 신학 취지문 중에서, 양권석(성공회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