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이야기] 산파술(産婆術 maieutic)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ia Sōkratēs)
"무지를 인정하는 내가 가장 지혜로워" 사형되기 전 소크라테스의 변론 담아
입력 : 2023.07.04 03:00 조선일보
▲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착각하는 반면,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착각하지는 않는 것을 보니, 내가 그 사람보다 지혜롭기는 하구나."
기원전 399년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섭니다. 국가의 신들을 부정했다는 불경죄와 아테네 청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였어요.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의 철학이 왜 죄가 되지 않는지 변호해요.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세 번에 걸친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그의 생애, 인격, 가르침을 제자인 플라톤이 기록한 책이에요. 서양 철학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이 응축돼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선 것은 주변의 시샘과 모함 때문이었어요.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궤변을 정설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였어요. 이 비난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을 받았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만나 보니 실제로 그렇더라"고 해명해요.
이유는 간단해요.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언가를 잘 안다고 착각한다는 거예요. 반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무엇인가를 안다고 착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보면 철학의 시작은 결국 '무언가를 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청년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논리정연하게 반박해요. 소크라테스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청년들과 대화하며 '너 자신을 알라'고 해요. 즉 '나를 아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한 거죠.
나를 아는 것은 곧 이성(理性)의 회복을 의미하는데, 당대 권력자들은 이 가르침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의 이성이 회복되면 권력자들의 지위가 위태롭기 때문이에요.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직감하면서도,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테네 시민에게 해악이 될 것이라고 주장해요. 델포이 신전의 신탁에 따르면 자신은 시민을 설득하고 책망해 이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사형되면 그 역할을 맡을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 구형됐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해요. 죽음은 편안한 잠과도 같고, 저승에 먼저 간 신과 영웅, 역사적 인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고 하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와, 심지어 죽음이 새로운 세계로 옮겨 가는 것이라는 통찰은 소크라테스 시대부터 철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가르침인 셈이에요.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탐구할 뿐 아니라 정의로움까지 겸비한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잘 보여주고 있어요.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ia Sōkratēs]
저자 : 플라톤(Platon)
이 책은 플라톤(Platon)의 초기 대화편의 하나이며 소크라테스 처형 후 몇 년에 걸쳐 씌어진 책으로 보여진다.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론의 재현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3부로 되어 있다. 제1부에서 소크라테스는 먼저 자기의 고발자들에는 두 부류가 있음을 진술한다. 즉 예전부터의 고발자는 불특정 다수인데,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하늘과 땅속의 것을 추구하고 근거 박약한 논리를 고집하는 등 필요없는 짓을 하며,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치고 있다고 중상한다. 그리고 새 고발자는 아뉴토스 일파에게 교사받은 멜레토스인데, 그는 소크라테스가 청년에게 해로운 영향을 주며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예전부터의 고발자에 대해선 자기는 허황된 자연학(自然學)을 연구한 적도 없으며, 다른 궤변론자들과 같이 많은 보수를 받고 교육한 적도 없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미움받은 이유로서 델피의 신탁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무지의 자각'을 확실히 하는 것이 '신의 뜻에 따르는 것'임을 믿게 된 경위를 말한다. 그리고 새 고발자 멜레토스에 대해서는 대화를 통해 그의 무지와 모순을 지적한 후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피력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에게 복종할 것이다. 즉 나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결코 지(知)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30표라는 근소한 차로 유죄로 결정된다. 유죄 결정 후 형량을 결정하기 위해서 다시 피고인 소크라테스의 진술이 전개된다. 제2부에서 소크라테스는 애걸하기는커녕 자기는 국가적 귀인으로 대접 받아야 마땅하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형량을 표결에 부친 결과 그에게 사형이 언도된다. 여기부터 제3부에 들어가는데, 소크라테스는 유죄 투표를 한 사람들을 향하여 “여러분은 나의 죽음을 결정했지만, 내가 죽은 후 곧 당신들에게 징벌이 내릴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러고서 무죄 투표를 한 사람들을 향해 자기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반성하면서, 죽음의 의미에 관해 “선한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이나 죽은 후에나 악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확신을 이야기한다. 본서는 단편이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의 치열하고도 경건한 철학 정신이 잘 묘사되어 있는 대화편으로서 객관적 삶의 태도와 정신의 일치가 철학함의 진정한 전형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크라테스의 변명 [Apologia Sōkratēs] (철학사전, 2009., 임석진, 윤용택, 황태연, 이성백, 이정우, 양운덕, 강영계, 우기동, 임재진, 김용정, 박철주, 김호균, 김영태, 강대석, 장병길, 김택현, 최동희, 김승균, 이을호, 김종규, 조일민, 윤두병)
-------------------------------------------------------------------------------------------------------------------------------------------------------
플라톤(Plato)과 소크라테스(Socrates)의 만남
플라톤의 철학적 발제 01
출생 - 사망 : B.C. 428/427 ~ B.C. 348/347
쪽빛 바다가 한 눈에 가득 들어온다. 지중해 세계에서 빛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빛은 모든 은폐된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스 사람들은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빛이 있어야 사물을 볼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도 그 어원은 본다는 것이다. 이데아의 빛이 비칠 때 세계는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는 믿었다.
이데아의 빛이 비칠 때 세계는 완전하다
플라톤 철학의 시작
잘 알려져 있듯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었을 때 그는 스물 여덟의 청년이었다. 그때 그는 심한 혼돈과 현기증을 느꼈다고 한 편지에서 기록했다. 그리고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의 근원은 철학”이며, “참된 철학을 열심히 연구하기까지에는 인류는 고민에서 풀려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플라톤 철학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출발한 셈이다. 그래서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할 때는 보통 소크라테스 철학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우리는 난감한 사실에 봉착한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의 철학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가 그대로 반복했다는 뜻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조각상 앞에서 불멸에 대한 사색에 잠긴 플라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동일체를 이룬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이 동일한 소스에 담겨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 철학을 플라톤이 쓴 기록을 통해서 읽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라고 부르는 35편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철학에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역사적 인물로서의 소크라테스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인가 하는 점이 항상 문제가 된다. 그것을 철학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러한 사례는 어찌 소크라테스뿐일까? 공자의 가르침을 기록한 [논어]도 그렇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기록한 불교 경전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공자와 석가모니 역시 자신들이 직접 책을 쓰지 않았다.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
시대를 더 내려오면 신약성경과 코란도 그렇다. 예수도, 무함마드도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기독교와 이슬람 경전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국한해서 보더라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도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고대 철인들의 말씀을 기록한 많은 책에서는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위서 논란이 심심하면 터져 나온다. 그들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 문제도 뜨거운 감자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대 철인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크게 부각되는 법은 거의 없다. 예외가 있다. 바로 플라톤이다. 그는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모아서 집대성한 단순 기록자로 취급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대화편은 플라톤이 30대에서 70대까지 쓴 책들이다.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호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제외하면 모두 대화체 형식이다. 플라톤이 쓴 일련의 책들을 대화편이라고 통칭해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통점이 또 있다. 한 편을 제외하면 모든 대화편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주도하는 주인공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대화편을 통해서 하나의 철학적 동일체가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잠깐! 플라톤의 대화편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초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와 후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래서 고대 철학사를 연구하는 사가들은 플라톤이 젊었을 때 쓴 초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원숙한 나이에 쓴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서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의 손 노릇을 했지만, 나중에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철학의 입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다. 서두가 좀 길어졌지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가지치기 작업이기도 하다. 앞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구분하는 난제를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불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대화체 형식의 책을 썼는가 하는 점을 ‘플라톤의 퍼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양 철학은 왜 플라톤 철학의 각주인가?
플라톤의 철학적 발제가 가진 중요성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그는 아테네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대화를 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조용한 사색의 장에서 토론과 대화의 장으로 옮긴 인물이다. 그는 대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아테네 시민들이 즐겨 찾는 아고라 광장에서, 때로는 푸른 지중해가 한 눈에 보이는 아테네 근처의 바닷가에서, 때로는 지인들과 밤늦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토론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식 철학을 문자로 생중계한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토론 철학이 가진 강점과 약점이 동시에 드러난다. 대화편은 마치 한 편의 희곡을 보는 듯한 재미가 있다. 대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토론을 하는 그때 그곳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잡힌다. 마치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일어나는 일이 마치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하다. 그러나 때로는 대화편이 철학 책으로서는 체계적이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런 결론 없이 대화를 마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당연하다. 대화편은 어떤 특정한 주제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는 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철학의 역사에서 대화편과 같이 고전적 지위에 우뚝 오른 다른 철학서적,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35권의 대화편은 과제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다양한 여러 주제들이 하나의 책에 뒤섞여 함께 논의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거리에서 철학을 했을까? 그리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아테네 거리 철학을 왜 문자로 생중계했을까? 그 단서는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나온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역설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그림으로 기록할 때 그 그림은 죽어있듯이, 살아 있는 말을 문자로 쓸 때 문자로 기록된 말은 죽어있다고 말한다. 문자로 된 말은 질문을 던지지도 질문을 받지도 못한다. 그렇다. 플라톤이 대화 형식으로 글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봐야 한다.
아테네 아카데미에 있는 플라톤 조각상.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는 말처럼 플라톤은 서양철학의 기본을 완성했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는 말이 있다. 20세기 전반에 영국 캠브리지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가르친 화이트헤드가 만년에 한 강연에서 한 이야기다. 많은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플라톤 철학의 요체를 이처럼 적절하게 설명한 말도 드물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이 말을 플라톤 철학의 체계가 뛰어나다는 칭송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뛰어난 것은 그의 답안에 있지 않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서 끝없이 던지는 질문 방식에 있다. 서양 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가 된 이유는 그의 철학 체계보다는 그가 쓴 철학적 발제에 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세심하게 읽은 독자라면 이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좋은 질문을 던진 사람은 플라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아닌가?
맞다. 굳이 저작권 개념으로 따진다면, 문자 중계한 플라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 발언자인 소크라테스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왜 플라톤이 서양 철학의 전통을 기본 포맷한 철학자로 인정받는가? 이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소크라테스로 돌아가야 한다. 좀 지겹겠지만 할 수 없다. 철학적 동일체를 이룬 스승과 제자의 몸통을 분리하는 수술이 아닌가?
해결되지 않고 끝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기준과 해답이 없다면 진리의 길은 어디에?
소크라테스 철학의 요체는 대화법 또는 산파술(産婆術 maieutic) 로 요약되는 질문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답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아는 게 없다. 그래서 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가실 정도로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주로 상대방 이야기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 든다. 상대방은 자신의 주장이 모순에 빠졌음을 깨닫고 우물쭈물한다. 큰 당혹감과 혼돈에 빠져든다. 상대방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주시한다. 옳은 답을 듣기 위해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대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종료된다. 해결되지 못하고 끝난 문제 – 이것을 철학 용어로는 아포리아(aporia)라고 부른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이다. 출구가 막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길도 진리의 길이 아니고, 저 길도 우리를 진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우리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원리를 규명하는 작업은 잠시 숨을 고른다고 하더라도 매일매일 우리가 숨 가쁘게 살아야 하는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어떤 기준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가?
소크라테스 시대의 아테네로 돌아가자. 고대 그리스 문명의 중심이었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는 이미 철학의 관심이 피시스(자연세계)에서 노모스(인간세계)로 옮겨가고 있었다. 노모스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철학의 화두로 떠올랐다.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관심도 다르지 않았다. 그 점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재판 법정에서 한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했다고 고소장에 씌어있지만 자신은 자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자연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언급한 사실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말해달라고도 주문한다. 그렇다고 자연철학자를 경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아포리아의 종착점에서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거쳐 이데아로 가는 길
그러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는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다른가? 철학사에서는 그 양자의 차이를 보편주의와 상대주의의 격돌로 정리한다. 소피스트는 인간사회의 규범은 상대적이라고 이야기한 반면,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규범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보편적 진리를 수호한 순교자로 소크라테스를 자리 매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가?나는 소크라테스를 보편 철학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답안을 내놓기보다는 상대 답안의 논리적 허점을 등에처럼 성가시게 물고 늘어져 철학적 대화를 아포리아 상태로 몰고 간 소크라테스 철학이 어떻게 보편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논리적 연결고리만큼은 분명히 설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철학의 정신이 아닌가? 만약 그 연결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소크라테스 대화법(엘렌쿠스)은 보편적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보편주의가 아니라 그러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회의주의, 또는 진리는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대주의와 더 가깝게 된다.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의 막다른 길에서 이데아의 빛을 향한 플라톤의 사상이 시작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 이론이 빛을 발한다. 플라톤 철학이 스승의 몸통에서 분리되는 대목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포리아가 출구가 막힌 종착점이 아니라 새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서 대화를 막장에까지 다다르게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 아닐까?
스승이 즐겨 사용한 엘렌쿠스로서의 철학은 제자의 이데아 철학의 뒷받침을 얻어 출구에서 탈출한다. 아니, 이 말이 소크라테스에게 큰 모욕이 된다면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통해서야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제대로 독해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제관계에서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손 노릇을 했지만, 점차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입 노릇을 한다고 지적했다. 그 분기점이 바로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 개념이 등장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또 그 때를 기점으로 토론이 아포리아에서 벗어난다. 아포리아가 해결불능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이 점을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철학은 아포리아의 놀라움에서 시작한다.”철학적 사유는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철학은 항상 상식적인 사고를 요청하지만 아무도 그 상식에 이의를 달지 않을 때 철학적 사유는 멈춘다.
* 플라톤 편은 다음 주 <철학의 숲>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만남 [Plato] - 플라톤의 철학적 발제 01 (생활 속의 철학, 정재영)
---------------------------------------------------------------------------------------------------------------------------------
산파술(産婆術 maieutic) -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
(소크라테스의) 산파술(産婆術 maieutic) : 마음속의 막연한 생각을 문답으로 명확히 인식시키는 방법)
여기에는 소극적 측면인 소크라테스적 반어(反語:eirōneia)와 적극적 측면으로서의 산파술을 생각할 수 있다. 전자는 대화의 상대자로부터 로고스(論說)를 끌어내어 무지(無知)의 자각, 아포리아에로 유도하는 소크라테스의 독특한 무지를 가장(假裝)하는 태도이고, 후자는 상대방이 제출한 논설이나 질문을 거듭함으로써 개념규정을 음미하고 당사자가 의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을 낳게 하는 문답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스스로 이제 새로운 지혜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은 없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낳는 것을 도와 그 지혜의 진위(眞僞)는 식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의 활동을 어머니의 직업인 산파에 비유, 산파술이라고 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파술 [産婆術]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건장한 추남, 세계 4대 성인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BC 399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1)는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와 산파(産婆)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얼굴은 크고 둥근 데다 이마는 벗겨지고 눈은 툭 불거졌으며, 코는 뭉툭하고 입술은 두툼한 데다 키는 땅딸막했다. 게다가 배가 불룩하여 걸을 때에는 오리처럼 뒤뚱거렸다.
누가 봐도 추남이라고 부를 만했지만, 신체만은 건강한 편이어서 추위나 더위에도 대단한 인내력을 발휘했고, 밤새워 술을 마시고도 끄떡없었다고 한다. 그가 전쟁에 참가했을 때, 혹독한 겨울날씨에도 그는 맨발로 얼음 위를 걸어갔다.
한여름철에는 이른 아침부터 꼬박 밤을 새우기까지 연병장 한가운데에 서서 깊은 사색을 했고, 해가 떠오르자 태양을 향해 기도를 드린 후에 비로소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는 세 번이나 전쟁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모든 동료가 도망칠 때에도 장군과 함께 아군과 적군을 돌아보며 태연하게 걸어갔다고 한다.
그는 부친의 직업을 이어받는 일이나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 무관심했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다. 가난했기 때문에 누추한 옷차림으로 아테네 거리에서 아무에게나 말을 걸었다. 그의 뒤에는 항상 많은 제자들이 따랐으며, 그 가운데는 상류사회 출신도 많이 끼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보수로 제자들을 가르쳤고 대개 저녁 한 끼로 만족했는데, 소피스트들이 수업을 제공하는 대가로 적지 않은 보수를 받아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소크라테스에 못지않게 유명한 인물이 그의 아내 크산티페( Xanthippe)다. 그녀는 남편이 철학자라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으며, 집에서는 마치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남편을 못살게 굴었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서둘러 집을 나와 거리에서 그의 제자들과 철학적 담론에 빠져들었고, 소크라테스는 비로소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제자가 “선생님,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까, 안 하는 것이 좋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결혼하게,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하튼 가장의 의무를 소홀히 한 소크라테스를 볼 때, 악처의 대명사인 크산티페에게 오히려 동정의 눈길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아내 크산티페
어느 날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앞에서 그에게 호통치며 물벼락을 안기자, 그는 “저것 봐, 천둥 뒤에는 항상 소나기가 쏟아지는 법이야” 하면서 시치미를 떼었다고 한다. 그러나 악처의 대명사로 알려진 그녀가 소크라테스에게는 결과적으로 철학에 몰두하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아이는 산모가 낳는다, 산파술(産婆術 maieutic - 마음속의 막연한 생각을 문답으로 명확히 인식시키는 방법)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법은 질문과 응답을 통한 대화로 진행되었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문제부터 시작해서 점점 심오한 문제로 파고들어 갔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경우다.
“덕(德)이란 무엇인가?” “예, 덕(德)이란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것에는 건강도 있고, 명예도 있고, 권력도 있을 텐데, 이런 것들이 과연 덕(德)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지요.” “그럼 덕(德)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감으로써 결국 상대방이 자기의 무지를 인정하고 더 깊은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방법인데, 이를 두고 우리는 ‘소크라테스적 반어법’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러한 식의 문답법을 산파술(産婆術 maieutic - 마음속의 막연한 생각을 문답으로 명확히 인식시키는 방법))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의 어머니의 직업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산파는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지, 출산이 더디다고 해서 산모 대신에 아이를 낳아줄 수는 없다. 아무리 고통이 크더라도 아이는 산모 자신의 힘으로 낳아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진리라고 하는 옥동자(玉童子)는 배우는 사람 스스로에 의해서 산출되는 것이지, 스승이 대신해서 낳아줄 수는 없다.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주면 되고, 또 그래야만 한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으나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렇듯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를 통해 진리를 추구해 가는 광경이야말로 교육의 아름다운 이상이다. 오늘날 중 · 고등학교는 물론 초등학교나 유치원마저 일류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기관으로 전락해 버리고 공교육보다는 사교육에 더 열심을 내다 보니, 교사와 학생의 인격적인 대화는 기대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사회 지도층이 이러한 병폐를 고치기보다는 오히려 앞장서 부추기는 형국이니,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무지(無知)함을 깨닫는 사람이 현명하다
아폴론 신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델포이 신전
소크라테스가 마흔 살 되던 무렵,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카이레폰이 델포이 신전에 가서 아폴론 신에게 물었다.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굽니까?”
그러자 신전의 무녀는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유리피데스는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라고 대답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소크라테스는 즉각 이름난 현자들을 찾아다니며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들이 참된 지혜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자만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왜 신이 자기를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지목했는지 깨달았다.
신전의 양쪽 기둥 밑의 비명(碑銘)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를 평소 외치고 다녔을 만큼 그는 스스로 무지하다고 생각했던 데 비해, 이름난 현자들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른바 현자들보다 적어도 한 가지는 더 알고 있었던 셈이고, 바로 이것이 ‘무지(無知)의 지(知)’2)인 것이다.
많이 안다고 자랑하는 사람에게 진리가 나타날 수 없다. 모든 진리는 무지를 자각하는 사람에게만 파악된다. 즉 진리는 겸손한 자에게만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만이 지혜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고, 그런 애지자(愛智者)만이 영혼을 잘 가꿔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행동은 일치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식은 다만 지식을 위한(죽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아는 만큼 반드시 행하는(살아 있는) 지식이었다. 선(善)을 알고 나서도 그 선(善)을 힘써 행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가령 선(善)이 이쪽인데도 정반대의 길로 달려가서 일부러 악(惡)을 행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악(惡)은 인간이 선(善)을 잘 모르는 데서, 즉 무지(無知)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선악(善惡)을 잘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는 모르고 악(惡)을 행하는 자보다 알고도 악(惡)을 행하는 자가 더 많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보자.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세금을 빼먹고 눈치껏 부동산 투기를 하며 서민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다. 온갖 기술을 다 동원해서 돈세탁을 하고 자녀들의 명문학교 진학을 위해 위장 전입을 감행하며, 병역을 회피하거나 외국 국적을 취득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생각이 욕망이나 무지(無知)에 의해 흐려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장관의 물망에 오른 사람이 미리 그 사실을 알았다면 감히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인데, 이는 긴 인생의 과정에서 부도덕한 행위가 언젠가는 손해로 다가올 것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에게는 욕심을 절제하며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하고, 또한 바르게 사는 습관이 몸에 배도록 스스로 훈련하게 해줘야 한다.
이렇게 보자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식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다. 가령 “잘 아는(知) 목수가 좋은(善) 목수다”라는 말처럼 앎과 좋음이 일치하는 것이다.3) 좋은 목수, 즉 기술이 좋은 목수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많이 알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그 선에 대해 우선 많이 알아야 한다.
철학논술 Q.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대화를 즐겼으며, 절대적 진리와 보편적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즉 절대적 진리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냈고, 누구라도 이성적 사유를 바탕으로 대화를 하다 보면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프랑스의 여배우인 브리짓 바르도가 한국의 개고기를 먹는 풍습을 야만적이라고 비난했다. 소크라테스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그녀의 말에 과연 어떻게 반응했을까? |
악법(惡法)도 법(法)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년들을 부패하게 했다. 둘째, 국가가 지정한 신 대신에 이상한 신(神)을 믿는다. 청년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깨닫고자 사색에 잠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보고 고소인들은 그것을 마치 타락하여 흐느적거리는 것으로 간주했다. 물론 이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자기가 옳지 않은 일을 할 때는 그것을 반대해온 내면적인 양심의 소리(Daimon)4)를 듣곤 했는데, 이것을 두고 아테네 시민들은 그가 새로운 신을 믿는다고 매도했던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이유 외에 실제로는 소크라테스의 정치적 기반이 허물어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상업 지향적인 문화도시 아테네와 군국주의적 농업국가인 스파르타 사이에 동족상잔의 비극인 펠로폰네소스 전쟁5)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 결국 스파르타가 승리하게 되자 아테네에는 스파르타 방식의 귀족정치와 과두정치6)가 수립되었다.
서른 명으로 구성된 과두체제는 공포정치를 실시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 위원회에 끌려가 “당신의 교육을 그만두라”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명령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교육을 계속했다. 주위에서는 그가 처형될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그는 태연했다. 위정자들의 잘못된 요구에 대한 그의 태도는 너무나 분명했는데, 여기에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즉 과두파 인물 중에 그의 제자와 플라톤의 큰아버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두체제가 8개월 만에 무너지고 다시 민주주의자들이 권좌에 올라서게 되자 소크라테스는 정치적 기반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결국 앞서 말한 누명을 쓴 채 고소를 당하게 되었다. 또한 서른 명의 참주들이 어떤 사람에게 부당한 누명을 씌워 정치적으로 살인하려는 데 대해 소크라테스는 동조하지 않았고, 이것이 그들에게 증오감을 심어 주었다. 당시 아테네를 지배했던 부정한 야심가들에게 ‘모든 진리의 기초를 도덕에 둔’ 소크라테스는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재판 당시의 배심원은 500명이었는데 신에 대한 불경죄의 경우 일단 유죄냐 무죄냐만 판결을 내렸다.7) 결과는 280대 220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유죄였다. 다음에 형량을 놓고 다시 판결을 내리는데, 원고 측이 요구한 형량은 사형이었고 소크라테스 측에서 요구한 형량은 벌금형으로, 그것도 처음에는 단 1므나를 제시했다. 결국 플라톤 등이 그를 설득하여 30므나로 정해지긴 했지만,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믿었던 소크라테스는 벌금 1므나를 내는 것도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내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서 누구에게 사과하거나 애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민들과 배심원들을 꾸짖으며 정의와 진리의 길을 설파했다.
“당신들은 자신들의 지갑을 가능한 한 많이 채우고, 명성과 존경을 받으려고만 노심초사하고 있구려. 더구나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도덕적인 판단과 진리, 그리고 당신들의 영혼을 개선하는 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며, 또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8)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죽음을 재앙이라고 생각하지만, 죽음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첫째로 죽음이 완전히 무(無)로 돌아가는 것일 경우, 모든 감각이 없어지고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은 잠을 자는 것과 같을 것인데, 그보다 더 즐거운 밤이 어디 있겠습니까? 둘째로 죽음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여행길과 같은 것이라면, 생전에 만났던 훌륭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나는 죽음을 통해 귀찮은 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깁니다.
따라서 나를 고소하거나 유죄로 투표한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사형을 받기 위해, 여러분들은 살기 위해······. 그러나 우리 가운데 어느 쪽 앞에 더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신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의 제청과 마지막 변론은 결국 그에게 무죄를 판결한 배심원들의 비위까지 거슬려 360대 140이라고 하는 큰 표 차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 죽음이란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즉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혜를 추구하는 참된 철학자라면 육체로부터 마땅히 해방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영혼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의 영혼이 육체적 욕망이나 감각에 사로잡혔을 때에는 진리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육체를 먹여 살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비진리를 말해야 할 때도 있다.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괴로움도 크거니와, 더구나 육체에서 파생된 자녀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는가 말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회피하는 사람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愛智者), 즉 진정한 철학자가 아닌, 고통과 죄악의 덩어리인 육체를 사랑하는 자가 되고 만다.
이러한 주장을 듣고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살이라도 해서 죽음을 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살은 죄악이라고 말한다. 인간과 신의 관계는 짐승(가축)과 인간의 관계처럼 주종(主從) 관계인데, 종이 주인의 허락도 없이 자살해 버린다면 주인이 무척 노여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나 돼지가 자기들 멋대로 골짜기에 투신자살해 버렸을 때 그 주인이 속상해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神)의 허락도 없이 자살해 버린다면 신 역시 속상해할 것이다. 자살은 신(神)에 대한 반역이고, 범죄 행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신(神)이 부를 때가 있다.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허락이 떨어졌을 때 기꺼이 떠나야 한다. 만일 그때에도 삶에 집착해서 살려고 발버둥을 친다면, 그 역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아테네 법률에 의하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24시간 안에 처형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神)에게 감사의 제물을 바치러 떠난 배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집행이 연기되었다. 마침내 배가 들어온 날 아침, 감옥에서 친구들은 “돈이 얼마나 들든지 간에 간수를 매수할 테니 도망쳐라”라고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이때 그는 “내가 지금까지 아테네 법률을 지키며 잘 살아왔는데, 나에게 불리해졌다고 해서 법을 어기는 것은 비겁한 일이지 않는가”라며 탈출을 거절한다.
바로 이것이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것만 보면, 재판정에 섰을 때 이미 소크라테스는 신(神)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최후를 맞이했던 감옥
사형집행 시간은 해가 지는 때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해가 진 다음에도 음식을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신 후 독배(毒杯)를 마셨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게 약을 빨리 가져오도록 재촉한다. 독(毒)이 든 잔을 간수에게서 받아들고, 그는 태연하게 기도를 올린다. 그런 다음 조용히 마셔 버린다.9)
크산티페를 비롯한 여자들을 이미 밖으로 내보낸 후였는데, 왜냐하면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죽는 순간은 사람에게 대단히 중요하고, 그래서 사람은 조용히 죽어야 하는데, 사람이 있으면 방해가 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감옥 안을 거닐다가 다리가 무겁다고 하면서 반듯이 누웠고, 간수는 종종 그의 손과 발을 살펴보다가 발을 꼭꼭 누르면서 감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대답하자 간수는 몸이 점점 식어간다고 말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캔버스에 유채, 1787
독배를 드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하반신이 거의 다 식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얼굴에 가렸던 천을 제치면서 “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꼭 갚아 주게”라고 부탁했고, 이에 대해 크리톤은 “잘 알았습니다. 그 밖에 할 말은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하지만 이 물음에는 더 이상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일을 반성했다고 말하지만, 여기에서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약(醫藥)의 신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병이 들었다가 나을 경우, 감사의 뜻으로 닭 한 마리를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인생의 모든 병에서 벗어났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비극이 아니었다. 그는 죽음을 초월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듯이, 진리와 정의를 향한 그의 철학 정신 앞에 죽음은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물론 저서를 한 권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핵심 사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인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것은 살아생전의 독보적인 인품과 더불어 죽음의 순간에 보여준 위대하고 장엄한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소피스트들이 상대적이고 회의적인 태도에 머물렀던 데 반해,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와 객관적인 도덕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이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열심히 설파했다. 그는 현실 생활에서 직접 써먹을 수 있는 처세술 대신에 인간의 본질과 정의로운 행위를 밝히는 데 노력을 다했다. 윤리학에서도 천박한 행복주의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도달해야 할 순수한 이상을 추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또 우리에게 기꺼이 철인(哲人)10)으로 부르도록 만든 것은 진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삶에 대한 그의 진지한 자세 때문이 아닐까 한다.
소(小)소크라테스학파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그의 정신을 온전히 계승하여 발전시킨 사람은 물론 플라톤이다. 그러나 그 사상의 어느 한쪽만을 발전시킨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틀어 우리는 소(小)소크라테스학파라고 부른다. 키니코스학파는 덕을, 키레네학파는 행복을, 메가라학파는 지식을 강조했다.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BC 445?~BC 365?
먼저, 키니코스학파는 안티스테네스11)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인간에게 덕(德)이 가장 중요하며 덕(德)이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 덕(德)이란 모든 욕심을 버리는 무욕(無慾)한 생활로만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사상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 바로 그의 제자인 디오게네스12)다.
디오게네스가 삶의 목표로 삼은 것은 무욕과 자족, 그리고 무치(無恥)다. 아무런 욕심 없이 현재의 처지에 스스로 만족하며,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생활이 그가 꿈꾸는 삶이었다. 그리고 항상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동물로 개를 꼽았다. 개는 아무것도 갖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는 일도 없으며, 주는 대로 먹고 아무데서나 잠을 잔다. 이러한 생활이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이었다.
그는 큰 통 속이나 개집에서 개와 함께 살았는데, 가진 재산이라고는 물을 떠먹기 위해 필요한 그릇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어린아이가 손으로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고 이 그릇마저 내동댕이치고 말았다고 한다. 키니코스(Kynikos)라는 말은 ‘Kyon(개)’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며, 또 그들을 견유학파(犬儒學派)라고 부르는 것도 개와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그는 무치와 관련해서,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본능적 욕망을 간단하고 편리하게 채우면 된다고 주장했다. 가령 배고플 때 먹는 행위를 탓할 수 없듯이, 남녀가 사랑하는 일 또한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타고난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은 떳떳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괜스레 부끄러워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노숙하는 디오게네스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무욕과 자족, 그리고 무치를 행복의 목표로 삼고 생활했다.
그것은 자연에 거슬러 인간의 본능을 짓누르려는 우리의 잘못된 풍습이나 문명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반(反)자연적인 것에 맞서서 그것들을 없애려 노력해야 한다. 디오게네스에 의하면, 원래 자연은 인간이 아무것도 갖지 않아도 살아가도록 창조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를 지나치게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 원시 상태의 단순함과 순수함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사회의 관습이나 풍속뿐만 아니라 국가의 법률까지도 귀찮은 것으로 봤다.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이성이 있으며, 이에 따라 누구나 보편적인 법을 좇을 것이기 때문에 굳이 개별적인 국가의 테두리 같은 것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어느 날,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현자를 찾기 위해 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니는’ 기인(奇人) 디오게네스를 방문하고자 그의 집을 찾았다. 대왕은 “그대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었고, 디오게네스는 “다른 것보다 햇볕이나 가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대왕이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기꺼이 디오게네스가 되겠다”라고 말하면서 돌아갔다는 에피소드는 너무나 유명하다.
물론 디오게네스의 행동을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그대로 흉내를 낸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스스로 만들어낸 물질문명에 압도당하고 자기들이 창조해낸 문화에 오히려 얽매여 가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문명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과 자연으로 복귀하자는 정신만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다. 특히, 자원고갈과 환경오염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 등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사상은 “과연 문명의 발달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었는가”라고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 주고 있다.
아리스티포스(Aristippos), BC 435?~BC 355?
다음으로, 키레네학파는 키레네에서 태어난 아리스티포스13)가 그 창시자이며, 쾌락주의를 주장한다. 아리스티포스는 “덕(德)이 행복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로부터 “쾌락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이라는 주장을 이끌어냈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정신적 쾌락뿐만 아니라 물질적 · 육체적 쾌락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이 학파의 학자들은 점차 그 쾌락을 얻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고, 특히 극단적인 육체적 쾌락은 반드시 고통과 후유증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초기의 쾌락주의는 후기에 들어와 염세주의(厭世主義 perssimist)로 바뀌었다.
마치 처음에는 적은 양으로도 만족하다가 차츰차츰 그 양을 늘려가야 똑같은 쾌락을 느끼게 되는 마약중독자처럼, 쾌락이란 항상 더 강하고 큰 자극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의 클라이맥스를 경험한 사람에게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끝내는 자살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가난한 나라보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는 북유럽의 선진국에서 자살률이 높고, 쾌락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부유층에서 오히려 자살이 많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메가라학파는 메가라 지방 출신인 에우클레이데스14)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덕(德)은 지(知)다”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으로부터 지식을 중요하게 보고 또 그것을 선(善)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주지주의(主知主義)를 고집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건장한 추남, 세계 4대 성인 소크라테스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2008. 7. 15., 강성률, 반석)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 ㈜ 파우스트 칼리지
전 화 : (02)386-4802 / (02)384-3348
이메일 : faustcollege@naver.com / ceta211@naver.com
Blog : http://blog.naver.com/ceta21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Cafe : http://cafe.daum.net/21ceta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Web-site : www.faustcollege.com (주)파우스트 칼리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