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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8) 생명에 대한 음모 담긴 '죽음의 문화'
낙태확산 · 피임 사고방식 확대 등 생명권 거스르는 죄의구조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시작하며
"네가 감옥에 갈 수도 있다. 너를 잘못 교육한 부모가 맞아야 한다." 얻어 맞은 중학교 2학년 학생의 어머니가 가해 학생과 그 부모를 불러놓고 한 말이랍니다. 지난해 11월 보도에 의하면, 가해 학생으로 하여금 정말로 자기 아버지 얼굴을 2차례, 그리고 자기 어머니 얼굴을 1차례씩 각각 때리게 했다가 결국 그 피해 학생 어머니는 부모를 때리도록 패륜을 강요한 혐의로 사법처리될 처지가 됐답니다. 세상 참 황당하지요?
♂♀생명봉사자 : 그런 패륜적 발상도 '생명에 대한 공격들'에서 나올까요?
통상적 범주(10항 참조)에서도 그렇겠지만 '다른 범주의 공격들' 즉, '생명의 초기와 마지막 단계에 대한 위협'에서도 그렇겠지요. 특히 "가정 한가운데에서, 가족들의 공모로 이루어지는" 공격들, 가장 약한 시기에 방어할 수단이 없을 때 가해지는 "범죄"를 "권리"로 이해하는 경우에서(11항 §1) 말입니다. "인간됨의 의미와 인권과 의무의 의미 파악을 어렵게 만들고"(11항 §2) 생명권을 거스르는 "의학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범죄들을 은폐"하려는 경우에는(11항 §3) 생명의 가치를 수호하거나 패륜을 반대할 용기를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생명봉사자 : 구체적으로 "죽음의 문화"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개인적 책임보다는 사회 속에서의 "죄의 구조"를 지칭하는 것이며, "생명에 대한 음모"로 드러나는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경향들"인데 "병이나 장애 때문에 더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들의 복지나 생활양식을 위협하는 사람을 거부하거나 없애버려야 할 적으로 여기는 그런 경향" 말입니다(12항).
구체적으로 보자면, 첫째 경향은 "낙태 확산"을 쉽게 하고자 의료적 개입 없이 모태 안에서 태아를 죽일 약품 개발에 엄청난 금액을 투자하는 것이고(13항 §1), 둘째는 "책임있는 부모 역할"을 왜곡시키는 "피임 사고방식"을 확대시키는 것입니다(13항 §2). 사실 임신 초기에 낙태시키는 "화학약품, 자궁 내 피임기구, 백신의 개발"은 피임의 마음과 낙태의 마음이 서로 밀접함을 드러냅니다(13항 §4).
셋째는 생명을 위해 봉사한다는 미명 하에 "인공생식 기술들"이 실제로는 출산과 부부행위를 '분리'시키고, 수정란을 '죽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예비 수정란"을 과도하게 생산, 실험 및 조작함으로써 "생물학적 재료"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14항 §1). 넷째는 "태아진단"이란 긍정적 기술이 장애를 가진 태아의 '우생학적 낙태'를 "치료적 개입"이라고 합리화시키는 부정적 기술로 둔갑시키는 것입니다(14항 §2).
다섯째는 '고통의 신비'에 대한 인간학적 성찰이 없어지고(15항 §2) 사회적 비용을 줄이려는 '실용주의적 동기'로 '이식용 장기' 확보를 위해 "안락사의 확산"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15항 §3). 여섯째는 지구상의 "권력자들"이 왜곡되고 과장된 출산억제 정책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16항). 일곱째는 "생명에 대한 음모"에 있어서 '국제기구들'까지 동원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여덟째는 '매스미디어'가 피임, 불임시술, 낙태, 심지어 안락사까지도 '진보의 표지'와 '자유의 승리'로 묘사하는 경향입니다(17항).
마치며
앞에 언급된 '어머니의 분노'는 가해 학생을 10차례나 때리고도 용서하지 못해서 자기 아이에게 얼굴을 3차례나 더 얻어맞게 하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카인의 분노"를 깨달았을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수준을 몇 배 넘어서는 보복을 해야 직성이 풀리게 하는 "악마의 속임수"를 감지했을까요? 필자는 이제라도, 자신도 자신의 아이에게 얻어맞을 수 있는 '또 다른 패륜'을 가르치게 한 "죄의 구조"를 알아챘기를 그저 바라고 바랄 뿐입니다.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9) 생명 범죄, 개인 자유로 해석해선 안 돼
생명권 침해되는 인권의 모순, 하느님 의식 실종이 결정적 원인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생명봉사자 : 좋은 원고 보내주심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신부님 글에서 「생명의 복음」 본문을 인용한 부분과 신부님 말씀이 섞여 혼용되는 것 같아 자칫 독자들에게 혼선을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어디까지가 인용이고, 어디까지가 신부님 해설인지가 구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랬군요! 느끼신 불편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익숙하지 않지만, 앞으로 회칙의 본문 내용을 인용할 때는 '<< >>'를 꼭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자의 목표는 이 글이 봉사자 분들께서 교회문헌을 읽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인간 생명의 소중함'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만큼 '인간 생활의 즐거움'도 희망하고 있고 매번 기도하고 있다는 것도 아울러 고백합니다.
♂♀생명봉사자 : "그릇된 자유 사용"은 어떤 상황일까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개인의 탓 없이 생명을 거스르는 '불가피한 결정' 즉, <<심한 고통, 고독, 경제 전망의 총체적인 결핍, 좌절과 미래에 대한 근심 등의 상황>>에서 내린 결정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는 <<주관적 책임과 결과적인 범죄성을 상당한 정도까지 감면>>될 수 있다고 명백히 밝히십니다. 교황님께서 깊이 우려하시는 상황은 <<생명에 대한 범죄들을 개인적 자유의 정당한 표현들로 해석하고, 그리고 실제적인 권리로서 인정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사악하고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18항 §2).
교황님께서는 그런 사악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의 원인을 '인권'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찾으십니다. <<모든 개인들이 본래적으로 지닌 권리이며 어떤 헌법과 국가의 법령보다 앞서는 권리인 "인권"…의 시대에 생명의 권리 자체가… 탄생과 죽음의 순간에 부정되거나 짓밟히는>>(18항 §3) '모순'이 생겨났고 그래서 <<인권에 관한 문화 전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도 발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주체성'에 대한 모순된 사고인데, <<적어도 초보적인 자율성이나… 전적인 의존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만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사고방식>>과 <<인간의 존엄성을 언어적이고 명시적인, 또는 적어도 인지할 수 있는 의사소통 능력과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인 것입니다(19항 §1).
결정적으로는 '자유'는 <<자신을 내어주고 타인에게 개방함으로써 자아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선물>>이기에 이런 진리를 무시하고 자유를 개인주의적으로 절대화할 때 <<자유의 의미와 존엄성은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는 것입니다(19항 §3). 그런 모순의 절정은 <<민주주의의 법칙들의 투표결과에 의해 낙태와 안락사에 대한 법률적 허용이 이루어질 때>> 그때입니다(20항 §2). 낙태, 유아살해, 안락사의 권리 주장이야말로 <<참된 자유의 죽음>>인 것입니다(20항 §4).
♂♀생명봉사자 : "민주주의의 이상"은 왜 변질되는 것일까요?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겠지만 요약하자면, 교황님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하느님 의식의 실종"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지목합니다. <<하느님 의식이 사라지면 인간 의식도 위협받고 훼손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천명합니다. "창조주 없이 피조물이란 허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느님을 잊어버린다면 피조물 자체의 정체도 어두워지고 만다.">>(22항 §1). 하느님 의식이 사라진 뒤에는 <<자연 자체가 어머니(mater)인 존재에서 "물질(matter)"인 존재로 격하되었으며 모든 종류의 조작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22항 §3).
본문의 맥락으로 볼 때, <<"자유 없는 법"에 대한 반대 입장>>(22항 §3)이라고 우리말로 번역하기보다는 <<"자유 없는 법이라는 반대 입장 ">>(to the opposite position of a "law without freedom")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해보입니다.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10) 속죄의 피로 얻어진 생명의 표징들
생명 옹호에 대한 자발적 운동 · 전쟁 반대 · 생명윤리학 등 탄생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생명봉사자 : 회칙은 "과학기술"과 "자연보존"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나요?
회칙이 전면에서 언급하는 것은 '유물론적 입장'에 대한 반대입니다. 인간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소유"하거나 "거부"해야할 대상>> 또는 <<조작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자연을 "신성화"하는 것>>도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자연도 <<창조계획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2항 §3). 게다가 인간 생명의 보다 깊은 영적 차원을 무시한 채 물질적 안락의 차원만을 편협하게 표현하는 '삶의 질'(quality of life)이란 개념도 거부합니다. <<이른바 "삶의 질"이라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경제적 효율성, 무제한적 소비주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쾌락으로 해석되며, 인간 상호간의 영적, 종교적 차원과 같은 실존의 더 심오한 차원들은 무시되기>> 때문입니다.
♂♀생명봉사자 : 유물론적 육체관에 따른 다른 부작용은 없을까요?
왜 없겠습니까! 육체를 단순한 물질로 격하-축소시킴으로써 성(sexuality)이 지닌 본연의 의미도 훼손됩니다. <<성은… 자아를 주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사랑의 표징이며 장소이고 언어였던 위치에서 점차로 격하되어, 자기 주장과 개인적 욕망과 본능의 이기적 만족을 위한 기회와 도구로 전락>>했고, <<부부행위에 내포된 합일과 출산이라는 두 의미는 인위적으로 분리되었습니다.>> 그 결과, 결정적으로 <<출산은 성행위에 있어서 피해야 할 "적"이 되었습니다.>>(23항 §3).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이는 물론 개인 양심의 문제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사회 윤리의 문제라고 지적하십니다. <<사회가… 생명을 거스르는 실제적인 "죄의 구조들"을 만들어내고 강화하는 "죽음의 문화"를 고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 윤리의 문제에는 <<침투력이 강한 매스 미디어의 영향력>>도 한몫을 한다는 것입니다(24항 §1).
♂♀생명봉사자 : 그러면 "죽음의 문화" 속에서 희망은 아예 없나요? "죄의 구조들" 속에서 긍정적 표징은 우리에게 없는 것인가요?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거저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생명을 필요로 합니다. 인류 최초로 흘린 '아벨의 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죄의 피가 필요했습니다(히브 12,24 참조).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신약의 중재자의 피>> 말입니다(25항 §2).
그 속죄의 효과는 <<의사 전달 매체들의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해>> 발견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자발적인 "긍정적 표징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부부들은 관대한 책임감으로 자녀를 "혼인의 가장 뛰어난 선물"로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었고>>, <<버려진 아기들과 어려움에 빠진 소년소녀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가정들도 없지 않습니다.>> <<생명후원센터들과 유사 기구들>>이 후원을 받고 있고, <<자원봉사자 단체들이 점차로 생겨나고 있습니다.>>(26항 §3). 아울러 <<의학은… 태아와 고통 받는 사람들… 질병의 말기 단계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치료법들>>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고통 받는 민족들을 돕기 위해 <<국가와 국제 차원의 의사협회들이… 조직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흐뭇하게 보시는 또 다른 면모는 '낙태 허용법'에 대항해 '생명 옹호에 대한 자발적 운동'이 세계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전쟁을 반대하며 <<"정당방위"라고 하는 경우에서조차도, 사형제도에 대한 공적인 반대가 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27항 §3). 더욱 흐뭇하게 보시는 것은 바로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한 윤리적 반성>> 즉, <<생명윤리학(bioethics)이 탄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11) 생명의 복음, 예수님 인격 선포하는 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가 생명의 복음임을 입증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생명봉사자 : '생명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그 핵심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앞선 호(7월 7일자, 1223호)에서 이미 소개한 <<죽음의 문화>>의 경향들을 기억해내야 하겠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처럼 그 경향들은 우리가 무력감을 고백해야 할 만큼 거대한 위협이기에(29항 §1 참조) 그래서 <<생명의 복음>>이 요청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로 그 경향들은 엄청난 낙태약 개발비 투입, 무차별적 피임으로 인한 성과 출산의 의도적 분리, 인공수정과 태아진단 기술의 왜곡된 사용, 소위 '앞서 가는 국가'라는 일부 선진국에서의 안락사 도입 등인데, 더 심각하게는 <<생명에 대한 음모>>에 있어서 호소력 있는 <<국제기구들>>과 <<매스미디어>>가 소위 <<진보>>라는 이름으로 이런 경향들의 <<정당화>>를 부추긴다는 것입니다. 책임감 있으시고 그래서 낙태하지 않으신 마리아와 요셉의 모범에서, 그리고 그 가정에서 탄생하신 예수님 생애 전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원천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가르치듯이 "예수께서는 자신의 전 현존과 출현으로 말씀과 업적, 표시와 기적으로, 특별히 당신의 죽음과 죽은 이들 가운데로부터의 영광스러운 부활로, 마침내는 진리의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를 죄악과 죽음의 암흑에서 구원하시며 영원한 삶으로 부활시키시기">> 때문입니다(29항 §3).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단언하십니다. <<생명의 복음은… 예수님의 인격 그 자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29항 §2).
♂♀생명봉사자 : 지구상에 다녀간 수십억만 명 중에 왜 하필 나자렛 예수님의 인격에만 집중해야 할까요?
그분의 <<말씀과 업적>> 특히 <<당신의 죽음과 죽은 이들 가운데로부터의 영광스러운 부활>> 그리고 <<진리의 성령을 보내심>>이 그 이유입니다. 이 모두는 나자렛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만 가능한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말할 수 있고, 또 동서고금을 통해서 그렇게 흉내를 낸 인류의 많은 스승과 교사가 있었지만, 그분의 <<업적>>까지 흉내 낼 수는 없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신 분은 오직 나자렛 예수님 그 인격뿐이십니다.
♂♀생명봉사자 : 그런데 왜 예배당-교회에 가면 '경직'되고 사찰에 가면 '평안'을 느끼곤 할까요? 일부는 뉴에이지 운동에서도 위안을 얻는데요?
우선 공격적 예배당 설교와 경쟁적 이단 논쟁이 주는 '이질감' 때문이겠지요. 반면 사찰-암자는 도시와 떨어진 자연 속에서 그 혜택을 누립니다. 자연의 숲과 맑은 공기가 일단은 편안하게 하지요. 게다가 내적으로는 자기의 이해(利害)와 무관함이 주는 평화도 있습니다. 비록 일시적이겠지만요. 사찰을 방문해 스님께 "왜 절밥은 이렇게 맛있을까요? 천연 양념의 맛이겠지요?" 했더니, 그 스님 왈 "중에게는 절밥이 모래밥입니다!"
'썰렁 개그' 같지요? 수도생활 30년의 성과가 없다는 자책감이 주는 스트레스로 자살한 '고참' 승려도 있고, 뉴에이지 계열인 '단월드'(단학선원) 조직을 떠나는 어느 '최우수' 단사의 양심고백은 차마 애절합니다.
오랜 만에 시골에 가면 평화와 위로를 느낍니다. 그러나 그곳도 소득을 더 올리기 위한 농부들의 '이웃과의 전쟁터'랍니다. 전통 있는 자연종교나 뉴에이지 계열의 새로운 영성 운동들도 나-살아 있음, 나-부부됨, 나-부모됨, 나-자녀됨의 '거룩한 소명'을 대신(代身)해 주지도 면제해 주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십자가상에서의 인격적인 죽음'이라는 승부수를 띄우셨고 그 결과 당신이 '생명의 복음'이심을 입증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계시를 독점적으로 간직해온 유다교인들조차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12) 생명의 선(善)함, 하느님 영광의 표징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는 인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영광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시작하며
"엄마는 어디 갔어?" 아들(4살)과 마트에 갈 때 미혼부 이씨(28세)가 자주 듣는 말이랍니다. 최근 주간 언론들이 미혼부에 대한 특집을 앞다퉈 냈는데, 미혼모를 포함한 모자(母子)시설은 전국 99곳인데 반해 부자(父子)시설은 달랑 3곳, 그나마 이혼과 사별인 경우에만 입소가 된답니다. 게다가 아기 엄마가 그냥 사라지면 아빠는 자기 아기를 입적조차 시킬 수 없고, 일단 아기의 '성본창설'(성과 본을 새로 만드는 일)을 한 다음 '고아 확인'을 거쳐 입양해야 한다니, '나 홀로' 미혼모의 처지보다 더 불쌍한 것이 미혼부의 처지랍니다.
더 딱한 것은 아이가 어른들 생각보다도 더 빨리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아챈다는 것입니다. 보다 더 우울한 소식은 마무리 부분에 전하겠습니다.
♂♀생명 봉사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의 생명은 언제나 선(善)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최고선(最高善)은 아닐 수 있지만, 기본선(基本善)인 것은 명확하지요. 최소한 목숨(존재)은 있어야 뭐가 어떻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현실이 딱하다고 고통을 겪는 모습이 불쌍하다고 "차라리 안 태어난 것만 못하다"고들 쉽게 말하지만, 그것은 무개념(無槪念), 무논리(無論理), 무책임의 극치이거나, 아니면, 정말 아니라면 이미 생긴 태아를 '제거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속뜻이겠지요.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시는"(지혜 11, 26)>>과 <<나자렛 예수님을 만난 "가난한 사람들"의 체험>> 속에서 우리는 <<위협과 장애를 느끼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 역시 좋은 것임>>을 압니다(32항 §1). 안 태어난 것만 못한 이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게" (루카 7, 22) >> 됩니다(32항 §2).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 안에서 인간 생명의 불안전성에 대한 체험과 생명의 가치에 대한 긍정 사이의 독특한 "변증법"을 발견하게 됩니다.>>(33항 §1).
♂♀생명봉사자 : 고통으로 일그러진 '인간의 얼굴'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은 가능할까요?
<<생명은 언제나 선한 것>>(34항 §1)이라는 명제는 <<인간은 비록 진흙으로 빚어졌지만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존재하신다는 표징이며, 그분 영광의 흔적임>>을 전제로 합니다(34항 §2). 게다가 인간의 <<진리와 자유에 도달하는 능력은 인간의 특권>>입니다(34항 §5). 인간, "그를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기"(시편 8,6)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이 인간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35항 §4).
우리는 거지 소녀를 사랑한 왕자의 거지 복장을 보고 있지만, 동시에 왕자의 몸에 밴 귀골의 자태도 알아보게 되듯이, 고통과 치료로 찌그러진 말기암 '환자의 얼굴'을 보고 있지만 동시에 그 환자 복장 속에서 의연한 <<하느님의 영광>>의 흔적도 알아내곤 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말입니다(37항 §3).
마무리하며
몇 년 전 외신에 의하면, 미국의 '남성들을 위한 전국 센터'가 양성평등을 주장하면서 낙태에 대해 여성의 선택권만이 아니라 남성의 이해관계도 고려해야 한다고 소송을 냈다고 합니다. 일종의 미혼부들의 반란인 셈인데, 겉보기와는 달리 내용은 치사합니다. 출산한 여자 친구가 양육비로 매월 오백달러를 청구했는데 자신은 임신도 출산도 동의한 적이 없으니 사회가 대신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당한 수입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보다 더 우울한 소식은 바로 아이가 '버려졌다'는 사실에다 '양육비를 지불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까지도 곧 알게 된다는 점입니다.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13) 인간과 모든 생명체 존중 · 봉사할 책임
인간, 모든 생명 주도하시는 하느님께 응답할 의무 지녀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시작하며
자료검색을 하다가 TV 의료 드라마 '골든타임' 누리방에서 의미심장한 댓글 하나를 읽었습니다. "요즘은 자기 자신을 책임지기도 힘든 시대입니다. 한 몸을 책임진다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아 힘겨워하고 한 가족을 책임지는 일이 버거워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책임'이 필요한 일들은 많아졌지만 '책임진다'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책임진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을 두고 '허세가 심하다'고 평가할 정도니 시대가 사람들을 겁쟁이로 만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또 '책임'이라는 말의 의미가 다양해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내 책임이고 어떤 부분이 남의 책임인지 알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생명봉사자 : 사실 '생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말씀하실 때마다 부담스럽습니다. 내 한 몸도 버거운데 어디까지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걸까요?
그렇지요. <<인간 생명의 시작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그 신성한 가치>>(2항 §2)와 그 엄중함 때문이겠지요. 나이가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면 질수록 높아지는 그 책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중요한 문제이지요.
사전적 의미를 보면 '책임'은 꾸짖을 책(責)에 맡길 임(任)자를 쓰며, 첫째, 도맡아 해야 할 임무나 의무를 뜻하고, 둘째,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制裁)를 뜻합니다. 통상 둘째에 더 마음이 가지요. 연대책임을 지다, 경영실패에 따른 책임을 묻다,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다 등의 예문으로 보건대 '부정적' 의미가 더 강합니다. 물어내고 파산하고 사퇴해야 하는 '책임'을 맨 정신으로 자청하기는 누구나 어렵고 두렵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어로 보면 제법 달라집니다. 영어 'responsible'(책임있는) 'responsibility'(책임성)는 라틴어 동사 'respondere'(응답하다)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조건에 인간이 'respond'(응답하기)를 하는 것이 'responsible'(책임지는) 것입니다. 생명에 있어서 하느님의 주도하심에 대한 부응(副應)일 것이기에 '책임지는'이란 의미는 그래서 '긍정적' 의미이기도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 생명의 유일한 주인>>이시기에 <<인간은 이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39항 §1)고 명백하게 선언하십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책임'의 정도와 그 한계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후대 입법에서 드러났고 산상설교에서 완전하게 제시된 것처럼 <<육체적 생명의 불가침성에 대한 존중>>(40항 §2)을 하면 '책임지는' 것입니다.
생명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이니, 우리는 '갑'이신 하느님의 권능에 '응답'하는 '을'이면 충분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능력도 없는 '무책임한 책임', 권한도 없는 '무늬만의 책임'을 스스로 주장하면 안되겠습니다. 과장된 책임감은 '진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속임수'에서 나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윤리적으로 합당한' 도움을 주고 죽어가는 사람은 '최소한의 품위'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 'responsible'한 선택, 그리고 참으로 '응답하는' 태도입니다.
더 나아가 교황님께서는 <<온 세상과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해주시면서 동시에 '도덕적인 생태학적 책임'도 강조하십니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하느님께서 인간의 인격적 존엄성과 생명을 위해 봉사하도록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한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42항 §2). 그리고 인간이 오직 인간만을 위해 창조되었음도 빠뜨리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 하느님의 주권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 생명 그 자체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특별한 의무 안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43항 §1).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14) 인간 생명은 시작부터 하느님 계획
교회는 태아 생명 존중, 노년을 위엄있고 존경받는 시기로 바라봐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시작하며
'로열 베이비', 영국 왕실의 아기가 지난 7월 22일 최고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온 집안과 영국시민, 심지어는 미국인들도 기뻐했답니다. 이미 입덧 때부터, 그리고 임신 6개월 때 산 파란색 유모차를 통한 아기 성별 추측 기사에다 합성된 아기 얼굴 예측 사진까지 나돌아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네 처지에서 참 반가웠습니다. 잘 자라나 세상 공동선에 크게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봉사자 : 태중 아기의 법적 지위는 어떻게 되나요?
삶의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 생활을 지배하기에 중요한 것임에도, 안타깝게도 법은 이중적 태도를 취합니다. 기본법인 형법은 '모든 낙태'를 '범죄'로, 특별법인 모자보건법은 '거의 무제한적 낙태'를 '합법'으로 규정합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사람'이려면 임부의 진통이 있어야 하고 태아의 신체 일부가 노출되어야 하기에 태아는 '사람'이 아니지만 민법상으로는 엄연히 '상속권'도 보장받고 있습니다. 결국 태아에 대한 피해보상은, 거칠게 말하자면 변호사의 능력에 좌우된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은 그렇지만,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에게 <<모든 사람들의 생명은 시작되는 순간부터 하느님 계획의 한 부분입니다>>(44항 §3). 신약의 계시는 더 극적입니다. <<동정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과 그들의 태중에 있던 두 아기들의 만남에서 잉태되는 순간부터 지니고 있는 인격적 가치가 찬미됩니다>>(45항 §1).
♂♀생명봉사자 : 노년의 생명과 고통은 어떻게 평가되는지요?
성경의 계시가 노년의 처지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훌렁' 내다버리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성서가 놓여 있는 문화적, 종교적 배경은 그러한 유혹들에 물들지 않은 것입니다>>(46항 §1). 오히려 <<노년은 위엄을 지닌 시기이며 주위의 존경을 받는 시기입니다(2마카 6,23 참조)>>(46항 §2).
병자들의 치유이적을 봤을 때 예수님은 육체의 병과 고통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육체적 생명이 절대적 선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더 큰 선을 위해서 그 생명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47항 §2). 요한 세례자도, 스테파노 부제도 그랬지만 특히 예수님께서는 기어이 당신 자신을 성부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개인적 이익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통해 "살인하지 못한다"(탈출 20,13; 신명 5,17)고 하지만, 동시에 "새 마음"(에제 36,25-26; 예레 31,34 참조)을 언급합니다. <<이 "새 마음"은 생명의 가장 심오하고 가장 참된 의미, 말하자면 생명은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온전히 실현되는 선물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고 성취하게 해줄 것>>(49항 §2)입니다. 그것은 신약에 있어서 예수님의 "새로운 법"이고, "성령의 법"이며 <<벗을 위해 당신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의 모범을 따라(요한 15,13 참조)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49항 §3)인 것입니다. 그것의 가장 결정적 행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인데, 교황님은 '숨 거두신 것'이기보다는 '성령을 주신 것'이라고도 해석해주십니다. <<숨을 "거둔다"는 것은… 또한 "성령(숨)을 내어주심"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51항 §2).
마무리하며
한 사람의 여성으로 살고 싶다는 제멋대로의 결단에 의해 지난 4월에 아기를 무사히 출산했고 엄마가 됐다."
임박한 '로열 베이비 탄생'으로 세상이 떠들썩했을 때, 외신이 일본의 피겨 스케이트 선수 안도 미키의 '조용한 출산'을 전하며 한 말입니다.
"제멋대로의 결단"이란 표현은 현역 운동선수로서 아버지를 밝힐 수 없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의미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제멋대로의 결단"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책임있는 부모의식'(responsible parenthood)를 통해 세상에 나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