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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3: 16-31
요셉이
모세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 나타날 때에 요셉이 그들과 함께 식사하기 위하여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오게 한 일(15-17). 그들이 요셉의 집으로 불리워 갈 때에 도리어 염려하며 두려워한 일(18-23). 그들이 요셉의 집에 인도 된 때에 된 일들(24-25).
그들이 요셉을 만남과 및 요셉의 문안(26-28).
요셉이 베냐민을 만난 후에 은밀한 자리에서 울었던 일들을(29-30) 기록합니다.
1. 본문 16-22절은 "
(16) 요셉이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그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려 이 사람들이 오정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17) 그 사람이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18) 그 사람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일 우리 자루에 넣여 있던 돈 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를 삼고 우 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19) 그들이 요셉의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고하여
(20) 가로되 내 주여 우리가 전일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 가지고
(21) 객점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인의 돈이 본수대로 자루 아구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입니다.
1) 여기에 이르면 요셉이 형제들을 마음속으로 완전히 용서했는지 안 했는지는 나중에 밝히겠지만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 대한 우애의 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형제들이 자기에게 행했던 좋지 못한 일을 생각한다면 옛날과 똑같이 형제들을 사랑할 수 없었겠지만 요셉이 형제들을 대하는 마음은 그들에게 보복을 한다든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요, 그야말로 사랑의 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들은 정체가 의심스러운 외국 천한 사람들인 자기들을 애굽 최고 관리가 잘 아는 사람을 접대하듯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만찬에 초대해 주자 새로운 공포심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다가 자기들 자루 속에 교묘히 숨어들어 왔던 돈 때문에 자기들이 고발되고 모두들 한 쇠사슬에 덜커덕 묶여지는 것은 아닐까? 염려한 것입니다.
어쩌면 요셉에 대하여 자기들이 행한 범죄가 이제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양심으로부터 가책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런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왕국 최고 권위자에게 초대받는 것이 그들로서는 납득되지 않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애굽 최고 권력자가 자기들 열한 형제를 한 상에 둘러 앉히어 자기 친구들에게 새로운 흥미 거리로 보여 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죄 없는 착한 사람에게나 타당할 일입니다. 요셉의 형제들 마음 가운데 심한 근심과 걱정의 파도가 일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자기 형제를 몰인정하게 다룬 그들의 양심이 자기 자신들을 고발한 것이 됩니다.
또 자기들이 형제를 다루었듯이 혹독하게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둑이나 첩자로 몰리기 직전에 자신들을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 자루 속에서 영문도 모르게 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돈을 돌려 주기 위하여 다시 갖고 왔다는 것을 자발적으로 말해 버림으로써 자기들의 양심이 아무 감출 것이 없고 떳떳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것도 이제 막 자기들에게 퍼부어질 도둑으로 심문 당할 그 순간에 그런 기회를 잡습니다.
2) 이 부분을 다시 요약해 보아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들이 참으로 기묘합니다.
(1) 그들은 부친 지시를 따라 준비한 것을 가지고 애굽에 가서 요셉을 대면하게 됩니다.
요셉은 그들과 함께 식사하기 위해 청지기에게 식사 준비를 시켰습니다.
요셉은 아직도 그들에게 실토는 하지 않고 조금씩 자기 친절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하나님도 범죄자들을 먼저 괴롭혀 반성시킨 다음에 그들과 광명한 화해(和解)를 하십니다. 이 때에도 요셉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입니다.
(2)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었을 때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전에 자루에서 발견된 돈 때문에 이제 트집잡히는 줄 알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청지기에게 그 돈 문제에 대하여 낱낱이 변명하였습니다.
(3) 그들은 전 번에 왔을 때에 정탐이란, 혐의를 받았으니 만큼 그 시대 일대 강국이었던 애굽 땅에서 저희 마음은 초조하였을 것입니다.
옛날에 했던 일과 관련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일찍이 자루에서 발견된 돈 때문에도 이렇게 걱정할 만합니다.
(4) 여기서 또 한가지 주목하는 것은 요셉의 꿈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꿈에 그의 형들이 모두 다 굴복하였기 때문입니다(37:7-9).
2. 본문 23-24절은
"(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 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 았으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 내어
(24)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입니다.
히브리어 (솰롬-)이라는 것은 평안이나 평화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즐겁고 바람직한 처지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문장은 두 가지 뜻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집을 관할하는 청지기가 그들에게 조용하고 평정된 마음을 찾으라고 명령한 것일 수 있습니다. 또는 청지기가 그들을 축복하는 의미로 이 말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 대답은 일이 좋은 방향으로 해결될 것이니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관례를 따르면 곡식을 위해서 지불한 돈이 도로 자루 속에 들어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그 사람은 자루 속에 돈이 들어 있었던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립니다.
당시에는 참된 신앙이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게 된 때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때에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을 사람 속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신자인 청지기, 곧 그들을 인도하는 자의 입에서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이상한 축복을 하나님의 뜻에 돌리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그 당시는 타락이 극도에 달했기 때문에 모든 나라들이 서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또 요셉 집안 청지기도 요셉이 섬기는 하나님을 애굽의 다른 신들과는 구별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인도하던 이 청지기는 종교적인 어떤 식견을 갖고 있었다고 추측합니다.
우리는 그 당시 애굽의 위용이 얼마나 당당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섬기는 신들을 얼마나 다 우스꽝스런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 배경에 살던 청지기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굉장하고 훌륭한 신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다면 자기 조국 신이 아닌 다른 나라 신에 대한 존중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야곱의 아들들에게 일어난 기적을 가나안의 신에 의해서 일어난 것으로 돌리지 않고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독특한 이름에 그 기적의 탓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셉은 미신 신앙사회에 살면서 공개적으로 공공연하게 그 사회 종교를 고쳐 나아가도록 허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자기 집안에서만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진실 된 예배를 드리는 풍토를 이룩했으며 그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들어왔던 기억을 더듬어서 거룩한 약속을 기억하고 항상 지켜왔었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거룩한 인침을 받은 사람은 개인 일상 생활에서나 공적인 일을 수행해 나가는데 빗나감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한 나라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손상시키는 잘못도 또한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의 미덕이 개인적으로 자기 하인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자기 집안에서 참 하나님께 진실되고 자유롭게 경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또 요셉은 시므온이 감옥에서 고생이 심할 것을 짐작하고 시므온을 혹독하게 다루지 못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시므온이 불모로 남아 있을 때 그를 간수들이 염탐꾼이라고 생각했으면 아마도 심하게 다루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시므온을 인도적으로 대한 것과 친절하게 취급할 것을 감옥에 명령했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생각해보면 요셉은 자기 보좌관인 그 청지기에게 이 모든 되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알려 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이런 사람도 하나님께서 내시는 것입니다.
3. 본문 25-31절은
"(25) 그들이 여기서 먹겠다 함을 들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오정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그 집으로 들어가서 그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니
(27)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가로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지금까지 생존하셨느냐
(28)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가로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냐 그가 또 가로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 하노라
(30)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 듯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31)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입니다.
1) 오정 시간이 당시 애굽인들이 보통 점심을 먹는 시간인지 요셉이 손님들 때문에 늘 점심 먹던 시간보다 일찍 상을 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일반적인 풍습으로 점심을 먹었던 것으로 간주됩니다.
동방 사람들은 서로 생활 방법이 다르지만 애굽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대 지방이나 그 주위 지경에서도 점심을 잘 먹는 풍습은 똑같습니다.
아마도 지금 언급되는 점심은 만찬을 먹는 자리에서 행하여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인이 점심을 짧은 시간 안에 대강 먹어 치우는 것은 애굽과 같은 더운 기후에 속한 지방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상 앞에 길게 앉아서 점심을 들었을 것입니다.
손님이 왔을 때는 특히 호화로운 음식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식사하기 전에 발을 닦게 하는 것이 손님을 대접하는 예의 중에 하나였습니다.
또 피로를 푸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이 지경에서는 어디나 어느 때나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에 발이 쉬 피로해지고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당시 풍습으로 보면 요셉이 음식을 조금씩 조금씩 차례로 나눠 주는 것이 요리사가 분배해 주는 것보다 예절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설명하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데는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이고 신앙의 내용과 별반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은총을 입히셔서 원수 같은 형들에게 하게 된 일의 구체적인 정황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 몇 가지 요점이 정리되고 또 교훈을 받습니다.
(1) 이 구절들을 보면 그 형들이 요셉에게 "예물을...... 드리고 땅에 엎드리어 절" 하였고, 또 그들이 요셉의 묻는 말에 대답한 뒤에도 다시 "머리 숙여 절"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래 전에 있었던 요셉의 꿈(37:7-9)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2) 또 요셉은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진실한 신자의 행동원리입니다.
그는 범사를 하나님에게서 해결 받고자 합니다.
(3) 또 요셉은 베냐민으로 인하여 정서(情緖)의 움직임을 금할 수 없어서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지도자 자격입니다. 지도자는 정서가 없는 목석도 아니거니와 정서의 지배를 받고 마는 나약한 자도 아닙니다. 그는 필요치 않은 때에 정서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이신 대로 멀리 목표를 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서 의지적(意志的)으로 달음질합니다.
3) 이렇게 모세가 기록한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입니다.
그것이 요셉을 통해서 드러난 형제 사랑이든지, 요셉의 형들이 염려하고 자기들의 죄악을 돌아보는 일이든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을 향해서 복을 비는 일이라든지, 또 요셉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서 원수 같은 형들에게 행한 구체적인 일들이든지, 또 하나님께서 보이신 목표를 향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서 달려가는 일들 모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일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정하심 아래 하나님의 섭리가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