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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4-17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 / 조상호 목사
어느 한 자매가 있었는데 그 자매는 웃을 때면 언제나 환하게 웃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옆으로 살짝 빠져 나온 덧니 때문이었습니다. 그 자매는 덧니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모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치아 교정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자매가 웃을 때에도 손으로 입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그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그 자매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친구가 "' “너는 웃을 때 살짝 드러나 보이는 덧니가 최고의 매력이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한 마디가 친구의 얼굴을 환하게 만들고 생각을 바꾸어 놓은 것을 보고,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자신감을 심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여러분, 말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말이 사람을 살립니다. 이 시간 옆 사람과 인사하시겠습니다. "' "하나님의 걸작품이시군요.” “집사님, 형제님, 자매님, 만나 뵈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오늘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막은 불같이 뜨거웠으며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목이 마르고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아들은 원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입니다. 더 이상 걸을 필요가 없어요. 아버지, 우리 그냥 이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죽는 편이 낫겠어요.” 아버지는 점잖게 타이르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조금만 더 가면 틀림없이 마을이 나타날 거야. 그러면 거기에서 물을 먹을 수 있을 거야. 힘을 내렴.” 그 때, 그 두 사람 앞에 공동묘지 같은 무덤들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본 아들은 더욱 절망해 울부짖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우리처럼 이 사막에서 비참하게 죽은 거예요. 아버지, 이젠 우리는 완전히 절망이에요.”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들아, 무덤은 희망의 징조란다. 무덤은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희망의 표시란다. 조금만 더 참고 가자꾸나.” 아버지는 실망에 빠진 아들을 가까스로 설득해서 계속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공동묘지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가서 보니, 과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보였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마을에 도착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가끔 사막의 무덤과 같은 시련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련을 만날 때, 사람들은 상반된 반응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긍정적으로 보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같은 상황을 보면서도 정반대의 반응을 합니다. 이와 같이 똑같은 상황을 대하면서도 서로 다른 반응을 하는 것을 우리는 시각의 차이, 혹은 관점의 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완전히 반대 결과를 만들어줍니다.
수개월 전 금요집회에서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서른 두 살의 노처녀 K씨는 액세사리 전문점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있어서 ‘아줌마‘라는 소리 듣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동네 꼬마들이 길 가는 그녀에게 "'“아줌마, 공 좀 주워주세요”라고 말하면 "'“여기 아줌마 어딨니?”라고 하며 반대쪽으로 공을 걷어 차버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가게에 나이가 약간 들어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들어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줌마, 저 귀고리 얼마야? 이리 좀 꺼내줘봐.” 노처녀 K씨는 머리까락이 쭈뼜 섰습니다. ’아줌마라니? 게다가 초면에 웬 반말이야? 조그만 가게 한다고 무시하는 거야, 지금?‘ 이러한 말이 입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물건을 팔기 위해 꾹 참고, 그 여자손님이 가리키는 귀고리를 꺼내주었습니다. 그 여자가 또 물었습니다. "'“아줌마, 이거 얼마야?” 말끝마다 반말이었습니다. K씨는 뒤집히는 속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대답했습니다. "'“25,000원이요.” 그 여자는 "'“좀 비싼 것 같은데”하면서도 지갑에서 돈을 꺼내주었습니다. 그때 앞 손님과 비슷한 연배의 점잖아 보이는 여자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귀고리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아가씨, 이 귀고리 얼만가요? 참 예쁘네요. 우리 딸 사다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요.” K씨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말했습니다. "'“네에, 그러세요? 따님은 정말 좋겠네요. 아주머니 같은 분을 엄마로 둬서 20,000원만 주세요.” 이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처음에 들어온 여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습니다. "'“아니, 아줌마, 똑같은 물건인데 나한테는 25,000원에 팔고 이 사람한테는 20,000원에 파는 게 어딨어? 사람 차별하는 거야 뭐야?” K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분은 아가씨한테 산 거고 아주머니는 아줌마한테 산 거니까 값이 다를 수밖에요.” 여러분, 두 손님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K라는 노처녀를 ‘아가씨로 봤느냐’, ‘아줌마로 봤느냐’의 시각차이입니다. 결국 시각의 차이로 인해서 한 사람은 25,000원을 지불했고 다른 한 사람은 20,000원을 지불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각의 차이는 중요합니다. 그런데 보는 시각에 따라 5,000원의 이득만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심하면 인생의 생사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위를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러한 관점과 시각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BC845년경에 이스라엘과 아람 나라 사이에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 2세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게릴라를 보내어 기습공격을 노렸지만, 그 때마다 이스라엘 왕이 그곳에 미리 군사를 보내어 방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작전이 미리 알려져서 번번이 실패를 하였습니다. 아람 왕은 혹시 자기 심복 가운데 적과 내통하는 자가 숨어 있는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심복 중의 하나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엘리사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왕하6:12)
바로 문제는 엘리사라는 선지자 때문에 번번이 자기의 작전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잡으려고 수소문해보았습니다. 마침 엘리사가 도단 성에 있다는 정보를 얻어, 그곳에 많은 군사와 병거를 보냈습니다. 엘리사를 체포하려고 그가 잠자고 있는 그 도단 성을 에워싸도록 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이른 아침 일어난 엘리사의 사환은 말소리, 병거 소리가 들려서 성벽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엄청나게 많은 아람 군대가 성벽을 에워싼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란 사환은 급히 엘리사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하고 울부짖었습니다.
이러한 보고를 들은 엘리사는 전혀 다른 반응을 합니다.
사환은 에워싼 적군들만 보면서 두려워 떨었지만, 엘리사의 눈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하늘의 군대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려워 떠는 사환을 위로했다는 이야기가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가지 종류의 시각이 나옵니다.
1) 사환의 눈
사환은 처해진 현실만을 보았습니다. 그는 엘리사 선생님과 함께 거하고 있는 도단 성을 에워싼 아람 군대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큰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었던 것입니다.
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 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여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우리가 15절을 평범하게 읽었지만, 당시 상황에 의하면 사환은 그냥 “선생님, 아람 군대가 우리를 완전히 포위했는데요. 아람 군대 참 많이 왔네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울부짖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이제 우리는 죽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완전히 우리를 포위해서 우리는 더 이상 빠져나갈 가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끝장났습니다.”
그는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환의 시각을 육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환경을 바라보는 것이 육적인 시각입니다.
여러분, 좌절과 낙심의 이유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는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에 쉽게 절망하고 쉽게 낙심을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이 닥쳐 올 때 실망하는 대신, 오히려 깨어 기도하면서 희망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보면 절망하지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환경을 바라보십니까?
아니면 우리의 능력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니까?
이 시각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를 바라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잠15:30)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눈이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안과 두려움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똑같이 어려움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평안해 하고 어떤 사람은 불안해합니다. 시각 차이입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가나안을 정탐하러 갔던 12명은 40일 동안 똑같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꾼은 두려워 떨었던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또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가 똑같이 문제를 만났습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 막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죽었다. 몰살당하느니 도로 돌아가자”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 모세는 "'“잠잠히 우리가 여호와의 구원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10명의 정탐꾼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시각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봄으로 인해, 절망하고 낙심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가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맨날 "'“큰일났다, 야단났다. 할 수 없다. 해 보나 마나 불가능해. 안돼.”라고 하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닙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큰 일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난리가 났다고 떠들지만, 난리는 무슨 나리입니까?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이 풍랑이 일어나자 호들갑을 떱니다. "'“주여 주여” 그들은 한번만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부르면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하면서 난리를 피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하며 책망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옆에 계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출렁이는 풍랑을 바라본 것입니다.
여러분, 엘리사의 사환처럼 육적인 시각을 가지고 호들갑 떠는 성도들 보면,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집사님, 형제님, 자매님, 믿음 어디 있습니까?”
중고등부 학생여러분, 만약 부모님들이 환경으로 인하여 낙심하고 좌절하면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어머니 믿음 어디다 두셨어요?”
친구가 좌절하고 낙심 가운데 있으면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어이 친구, 믿음 어디다 팔아먹었냐?”
사환은 도단 성을 에워싼 아람 군대와 병거와 말을 보았습니다. 절박한 현실만을 본 것입니다. 결국 그로 인하여 큰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사환과 같이 인간적인 시각으로 어려운 현실만을 바라보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외부 환경으로 인하여 두려워 떠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2) 엘리사의 눈
사환은 에워싼 적군들만 보면서 두려워 떨었던 반면, 엘리사는 달랐습니다. 엘리사는 사환과 똑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사환은 아람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듣고 아람 군대의 수효를 보았지만, 엘리사는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엘리사와 같은 시각을 가리켜 영적인 시각이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이런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람 군사들이 자기를 둘러싸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사환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엘리사 선지가가 말하는 ‘저의 눈’이란 누구의 눈을 말합니까? 자신의 눈을 말하지 않습니다. NIV 성경에 보면, his eyes 즉, 그의 눈, 사환의 눈을 말합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자신이 아람 군사들에게 포위 당했기 때문에, 도움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도움을 주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사환의 눈이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 바로 엘리사와 같은 시각이 필요합니다.
엘리사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엘리사와 같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엘리사는 자기 눈에 보인 천군 천사들의 힘이 아람 군사들 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기는커녕 두려워하는 사환을 안심시킨 것입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절망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사방이 꽉 막힌 암담한 상황 가운에서도, 주님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커다란 장벽 앞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바라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어린 소년 목동 다윗은 구척 장군 골리앗을 만났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거인입니다. 그런데도 소년 다윗은 소리를 지릅니다.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17:26)고 외치며 당당하게 나아가 싸워서 결국 승리를 했습니다.
성인이 된 다윗은 시편 23:4을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시편3:6에서 불효자식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피난살이하면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다윗이 무엇 때문에 거인 골리앗 앞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천만명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천만명의 대적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에서도 방패가 되시며 목자가 되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유명한 설교가인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이 후두염에 걸려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가 필목사님에게 "'“혹시 걱정되는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필목사님은 "'“예, 계속되는 걱정이 잇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설교걱정입니다. 주일설교, 주중 여러 예배의 설교, 초청 설교 등, 무슨 내용을 설교할지 일년 내내 걱정이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의사가 오히려 필 목사님에게 설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문제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까?” 영어로 표현하면 "'“Don't focus on your problem, but on God.”이라고 필 목사님께 말하더랍니다. 필 목사님은 의사의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고, 의사의 이 말이 나중에는 필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크든지 작든지 항상 문제를 만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비단 불신자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문제의 산더미 속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면 누구나 다 절망합니다. 평신도나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목사나 누구든지 문제를 바라보면 좌절합니다. 그러나 환경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문제 가운데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알게 해주는 한 예가 있습니다.
서커스단에서 공연할 때마다 꼭 빼놓지 않는 묘기가 있습니다. 바로 동그란 링에 불을 붙인 다음, 그 안으로 사자나 호랑이 같은 동물들이 뛰어 넘어가게 하는 공연입니다. 그런데 이 묘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털이 많은 동물들은 털에 불이 붙으면, 그대로 타죽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불을 싫어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호랑이나 사자가 불을 뛰어 넘을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거듭되는 훈련으로 불길 속을 자유자재로 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련사의 말은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동물은 불을 향해 돌진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동물들을 불 속에 뛰어들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자기 주인에 대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동물은 불을 향해 뛰기 전에 자기 주인의 눈을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믿음이 가면 주인을 믿고 불 속에 뛰어든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읽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본능을 이기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초적으로 불을 싫어한다고 할지라도 믿음만 있으면 불을 향해서 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역경과 장애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뚫고 나가게 하는 능력이 바로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불 속과 같은 역경을 뛰어 넘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첩첩 에워싸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주위에 둘러 진치고 있는 악한 흑암의 세력들을 믿음으로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고민하며 좌절하며 낙심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환경의 변화보다도,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환경을 바꾸면 어느 정도까지 삶은 바뀔 수 있습니다만, 완전하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바뀌면 삶이 바뀝니다. 심령 가운데 믿음이 들어가면 좌절하던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영국에 졸 월터라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26세까지 참으로 실패된 삶이었습니다. 순간마다 낙심하고 좌절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 갔다가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그 때 설교제목이 ‘겨자씨 만한 믿음’이었습니다. "'“너희 심령 가운데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다면 산을 들어 옮긴다”는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존 윌터는 마음속에 그 말씀을 새겼습니다. ‘내 인생의 해답은 믿음이구나. 믿음을 붙들면 승리할 수 있구나.’ 그는 그 이후부터 그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주머니 속에 겨자씨를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좌절이 올 때마다 겨자씨를 보고, 낙심이 될 때마다 겨자씨를 보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결국 존 윌터는 19세기 이후에 영국 경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이 강력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우리를 능력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우리 앞에 산이 가로막고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가로막고 있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산은 더 이상 커지지 않습니다. 문제도 더 이상 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자랄 수 있습니다.
산은 커질 수 없지만, 우리의 믿음은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모든 환난 가운데에서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내 손잡아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이 시간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나의 안에 거하라” 찬양을 드리겠습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난 가운데 너를 지키시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