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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얻는 믿음(12) - 죽음 그 이후
성경본문 :계시록 20:1-15
○ 사탄의 결박과 천년 왕국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사24:22, 벧후2:4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단6:17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눅14:14, 빌3:11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살전4:16, 계2:11, 계21:8
7.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계12:9, 겔38:2, 계16:14
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19:20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단2:35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단7:10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오늘 설교 제목은 “죽음 그 이후”입니다.
죽음이 주제입니다. 무더운 날씨에 다룰 수 있는 내용은 아닐 수 있겠지만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저런 사건들이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습니다. 이번 주에는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안타까움을 주는 것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그와 관련된 몇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생명을 갖고 태어나서 어떤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뿐 아니라 죽어서까지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끌고 칭송을 듣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경우 뉴욕 타임즈는 기사에서 미국 팝 음악 가수들을 마이클 잭슨가 나머지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그리고 마이클 잭슨은 팝 뮤직의 세개의 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마이클 잭슨의 음반을 산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7억 5000만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바꾼 것이 마이클 잭슨입니다. 수많은 후배 가수들, 댄스 가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가 벌어들인 돈도 어마어마합니다. 그가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그가 진 빚도 엄청나다고 하지만 그가 죽기 전에 살았던 임대주택은 한 달 렌트가 10만 불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는 이 땅에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도 각 방송사에서 그의 관한 특집 방송을 하고, 인터넷을 비롯한 수많은 방송 매체에서는 그에 대한 추모의 글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남들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쓸쓸하게 죽은 사람과 마이클 잭슨과 같이 전 세계사람들로부터 칭송과 안타까움을 한 몸에 받고 죽은 사람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땅에 살면서 큰 일을 하고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 마틴 루터 킹 목사나 간디와 같은 사람들, 아니면 히틀러나 연쇄 살인범과 같이 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의 칭송과 비난, 역사적 심판이라는 거창한 단어 조차도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해서 마이클 잭슨이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이 삶의 끝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는 것을 마이클 잭슨은 알고 있을까요? 그가 살았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과연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죽음 너머의 세계로 간 마이클 잭슨의 영혼과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서 내가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내용과 목표가 결정됩니다.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의 첫 머리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의 이 말이 옳으나 그르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알베르 까뮈의 문제의식은 과연 우리들이 지금 사는 삶이 의미가 있는 삶이냐? 이 땅에서의 삶이 가장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의식은 이 세상이 모순되고 부조리한 세상이라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달에 10만 불씩 지불하며서 살고 있고, 어떤 사람은 평생 뼈빠지게 고생해 보아야 자기 집 하나도 제대로 장만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교 다닐 때 빈둥빈둥거리면서 공부도 못했던 친구가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어떤 친구는 밤잠 못자고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강사자리 하나 못얻고, 간신히 얻었다고 하더라도 온갖 멸시를 받아가면서 경제적으로는 제대로 생활할 수 없는 돈을 받아가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무능력하다고 무시를 당하고, 잔머리를 굴려가면서 이렇게 저렇게 아부도 하고, 배신도 하고, 남을 짓밟기도 하면서 자기 자리와 이익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능력있는 사람들이라고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과연 이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만약 이 세상의 삶이 부조리하고 모순되었다면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없다면 참으로 허무한 것입니다. 살만한 가치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삶이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 바로 자살입니다. 부조리하고 모순 투성이인 세상, 그 부조리와 모순과 악과 부도덕함을 치고 나갈 능력도 없고,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자살입니다.
그렇다면 자살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일종의 도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피가 아니라면 자기를 압박해오는 세상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한 가지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역사 가운데 불의를 향해서 자기 생명을 던져서 저항했던 사람들, 복음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던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흘림으로 세상이 달라지고, 교회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를 죽은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사람의 죽음이 그대로 죽음 너머의 세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방식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안락하게 사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한 즐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돌아보는 것은 사치요 낭비입니다. 한 푼이라도 긁어모아서 나를 위해서, 내 자식들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갖고 있는 재화를 최대한 이용해서 즐겨야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자신의 쾌락과 마음의 평안을 주는 일이라면 거기에도 돈을 써야지요. 어쨋든 나의 평안과 만족과 쾌락을 주는 것이라면 거기에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것을 바꾸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몸을 던져야 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김훈이 쓴 <<칼의 노래>>라는 책에 보면, 조정에서 전쟁의 성과에 대한 증거물로 외적들의 머리를 잘라서 바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정에 바쳐지는 적병의 머리가 사실은 조선 수군들의 머리입니다. 나라가 지켜줘야 할 자기 백성들의 머리를 오히려 그 나라에게 바쳐야 하는 그 부조리한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조정에서 요구하니 적병인지 자기 백성인지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머리를 잘라서 바치면 된다는 사람도 있겠고, 이순신처럼 그러한 부조리를 몸으로 저항하면서 그 저항으로 인해서 자기 앞에 죽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몸을 던진다고 하더라도 죽음 너머의 세계가 없다면 과연 이 땅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그렇게 살지 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또한 그렇게 산다는 것도 너무 힘들고 어렵고 무겁습니다. 만약 죽음 너머에 세계에서는 이 땅에서 사는 삶에 대한 평가와 판단을 다른 기준을 갖고 한다면 이 땅에서의 삶은 참으로 허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십니까? 쾌락을 위해서?, 만족을 위해서?, 아니면 여러분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삶과 죽음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죽음과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과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오늘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삶에 대한 생각과 믿음은 미래 어느 시점에 정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확실하게 붙잡고 있어야만 합니다.
죽음은 예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사(死)자라는 것도 저녁 석자에 비수할 때 비자가 합성된 자라고 합니다. 저녁에 갑작스럽게 칼처럼 떨어지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지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는 죽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그 죽음 너머의 세계를 믿는다면 과연 지금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를 모르고 악행했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책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책에 기록한 내용은 이 땅에 살면서 행했던 모든 행위입니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큰 것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저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과 저 세상은 건널 수 없는 큰 간격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완전한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저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서 평가를 받을 날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평가는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저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삶이 저 세상에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저 세상에 대해서 모호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확연하게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저 세상에서 하나님께 올바른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내 중심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이목과 칭찬과 비난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내 만족과 평안과 내 쾌락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마음을 쏟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요 책임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각성하고 깨닫고 그 뜻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 뜻에 반대되는 모든 대상에 대해서 저항을 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이라면 나를 부인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요, 집단이라면 이해하고, 용서하고, 용납합니다. 그것의 불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묵인하지 않고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말도 하고, 행동으로도 움직입니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있다는 것은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경거망동하지 않게 만듭니다. 동시에 소망을 갖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시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면서 흘렸던 수많은 눈물들, 가슴 아픈 기억들,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요구하는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에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립니다. 때로는 타협이요, 비굴이요, 굴복이라고 평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비난과 모욕을 달게 받겠다는 자세로 인내하고 견딥니다. 내가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충부하게 알기에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바라고 회개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얻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재림과 공의로운 심판을 믿는 사람의 삶의 과정이요, 목표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갈등하고, 흔들리고, 허우적거리면서도 삶과 죽음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온전하게 붙잡고, 그 예수만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 삶만이 영원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절 말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결단해야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는 다른 문제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음 저 너머의 세계를 본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완전하신 공의로운 판단을 받을 그 날이 있음을 믿는다면, 내가 사는 동안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맛본 자로 사는 것입니다. 느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의 충동적인 감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평가와 내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신념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을 사실로 인정하고 지금 이곳에서 몸을 움직여서 사는 것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책임있게 사는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죄악과 부조리와 무의미하고 타락한 삶은 거부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는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쓰러지고 무너진다고 하여도, 그 삶만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울 것이며, 그 삶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삶이라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요,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