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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 : 15. 등불 5 : 16.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 : 15. 등불 -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
우리의 삶은 세상 앞에 예(例)가 된다. 그것은 좋은 예나 나쁜 예가 된다. 그것은 주로 인간관계, 대인관계에서 나타난다.
물론, 사상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인 자들이 있다. 또 기독교를 오해해서 기독교를 비방하는 자들도 있다. 또 진리의 지식의 차이 때문에, 기본적인 혹은 중요한 생각의 차이 때문에 부득이 헤어지는 일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범사에 정당하게,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사랑이 없다든지 악하다든지 거짓되다든지 하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1] 사람이 등불을 켜서 ... 비치느니라.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 다 나온다.막 4: 21과 눅 11: 33에 이 기사가 나타난다.
* 막 4: 21 -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 눅 11: 33 -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이 기사는 문자적으로 유사해서 그 중 어느 것도 독립성을 인정할 수 없다. 누가의 구절(눅 8: 16)은 서로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눅 11: 33은 마태의 것을 닮았고, 막 4: 21의 기사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일치성은 본문의 확신성을 더해준다. 굳이 선택한다면 다른 구절에 비해 눅 11: 33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 눅 8: 16 -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본문에 언급된 '말'(*, 모디오스)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을 수 있는 용기로 알려졌다. 혹자는 이 말의 용도에 대해 등을 마루에 두고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려고 곡식을 재는 용기로 그것을 덮어두면 얼마동안은 효과가 있다(Tholuck)고 한다.
'등경(燈檠)'은 복음서에 4회, 그 외에 8회 정도 등장하는데, 대부분은 촛대가 아니라 '등불 받침대'를 뜻한다.
이스라엘 가옥 구조상 등경은 방 하나에 한 개가 설치되었다. 등경이 빛을 멀리 비치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형식주의, 금욕주의, 전통주의의 제한성에 연결된다(Lange). 그리고 등경은 성도와 교회의 개방적 특성과 연결된다.
* 계 1: 20 -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복음사역자 들은 산꼭대기에 선(사 2: 2) 자처럼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행실과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널리 전해야 한다.
* 사 2: 2 -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마 5 : 16.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주께서는 특히 우리의 착한 행실을 강조하셨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선한 행실이 사람들 앞에 증거가 되게 해야 한다.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교훈한다(레 19: 18).
기본적으로, 우리는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한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특히 가난한 자나 외로운 자나 병든 자를 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구제 행위를 강조한다.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1] 이같이 너희 빛이 ...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 한다.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다.
* 고후 4: 6 -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 벧전 2: 12 -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소금'(13절)이 제자들이 세상을 따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너희'는 누구인가? 주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따랐다. 이들과 대조하여, '세상'은 하나님 없이 사는 불경건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치도 않은 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치 않고 거부한 자들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성경에서 빛은 지식과 도덕성을 가리킨다. 반면에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이다. 정신적, 사상적 무지와 혼란이 어두움이며 불의와 사악과 거짓이 어두움이다. 세상은 이렇게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둡다. 이런 어두움의 세상에서 성도들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으로 오셨고 그 빛, 곧 구원의 빛이 우리의 어두운 심령에도 비취었다. 이 빛은 물질적 빛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종교적 참 지식을 주는 빛, 곧 구원의 빛이요 부도덕한 상태로부터 건져 도덕적 삶을 가능케 하는 능력의 빛이다. 참된 경건과 의와 선과 진실의 삶이 곧 빛이다.
사람들은 육신적 물질적 차원의 것들만을 중시한다. 때때로 일어나는 대지진으로 인해 사람들은 참담한 마음을 가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육을 장차 지옥 불못에 던지실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정신적, 사상적, 종교적, 도덕적 문제가 육신적, 물질적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심각하다.
구원받은 성도는 세상의 빛이다. 주께서 성도를 '산 위에 있는 동네'로 비교하셨다. 이 동네는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 있다.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다. 주께서는 성도를, 등경 위에 두어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등불에 비유하셨다. 그렇다. 전등을 천장에 달지, 의자 밑에 달지 않는다.
빛은 위에서 비취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려는 것인가? 성도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눈앞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에게 부적합한 어두움의 모습을 보이지 말고 빛을 보이라는 권면과 격려의 말씀이다. 이것이 주의 강조점이다.
이 세상에서 성도만이 참 하나님과 그의 뜻을 증거할 수 있다. 성도는 위선적으로가 아니고 양심적으로 그리고 진실하게 선과 의를 행할 수 있다. 성도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은 성도를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성도를 통하여 의와 선을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요즘 교인에게 빛이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 그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 구원 받지 못한 자에게는 빛이 없다. 빛이 없는데 비출 수 있겠는가? 난방기에 작은 불이 꺼져버리면 더운 바람을 낼 수 없다. 우리가 빛을 가진 자라면,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빛을 발해야 한다. 가물가물 대는 빛 말고, 밝은 빛을 발해야 한다.
우리는 지식 충만, 의 충만, 선 충만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 우리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의 때에 그들도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산 위에 있는 동네’와 ‘등경 위에 둔 등불’에 비교하셨다. 산 위에 있는 동네나 등경 위에 둔 등불은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 볼 수 있고 다 보고 있다. 성도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눈 앞에 다 드러나 있다. 세상은 성도를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성도를 통하여 경건과 의와 선을 배울 수 있다.
어떤 교인에게 빛이 없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 즉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는 빛이 없다. 빛이 없는데 무엇을 비출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빛을 가진 자 곧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빛을 발해야 한다. 우리의 선행으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듯이,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면 그들도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자. 우리는 무지하고 죄악 되고 허무한 이 세상에서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그런 삶을 살자. 경건한 삶이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삶이고, 도덕적 삶이란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가리킨다. 경건하고 도덕적인 인격과 삶은 인생의 참된 맛이며 또 인생의 참된 빛이다. 우리는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으로 인생의 참된 맛과 참된 빛을 이 세상에 널리 전파하며 본을 보이자.
2] 소금과 빛 ( 마 5: 13-16 )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밟히느냐? 아니면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 하는 것은 누구에게 달렸을까? 답은 우리에게 달렸다.입니다. 속담에 예쁜 정도 자기에게서 나오고 미운 정도 자기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꼭 맞는 것 같다. 그러므로 문제를 외부에서도 찾아야 하나 그보다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세상의 빛과 소금은 세상에서 성도의 선행을 말씀한 것이다. 성도의 선행이란 그 영향 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도, 사람들이 회개하여 예수를 믿게 되는 것도, 우리가 받을 상도 우리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욕을 돌리지 않고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면 세상은 벌써 복음화되었을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1)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한 가지 묻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이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우리가 보통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말하는데 맞는 말일까요?
소금도 되고 빛도 되어야지요.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너희는 소금이라. 빛이라 하셨지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이미 소금이고 빛이어야 한다. 소금이니까 소금이지 소금이 아닌데 소금이 되려고 해서 소금이 되는 것 아니라는 말이다. 먼저 내가 소금인가가 더 중요하다.
주님은 성도의 신앙 본질을 말씀하신 것이다. 본질만 찾으면 하지 말라 해도 모두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선행의 사람이 되어 사람에게 밟히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돈은 새 돈이어도 돈이고 구겨져도 돈이고 짓밟아도 돈이다.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 이처럼 성도가 신앙의 본질만 회복하면 누가 핍박하든 말든 상을 주든 말든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행복의 여신이 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남긴 아름다운 자취들을 보면서 그가 지나갔음을 안다. 산불로 타죽은 나무들도 행복의 여신이 지나가면 살아나고 죽었던 나뭇가지에서는 싱싱한 새 잎이 돋아난다. 가뭄에 바짝 말라버린 들판도 행복의 여신이 지나갈 때 풀들이 자라며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난다. 웅덩이에 고여 썩어가던 물도 여신의 옷자락만 닫으면 맑은 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없는 그런 행복의 신이 아니라 성도는 세상에 행복을 주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성도가 있는 곳에 행복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참 성도냐는 것이다. 마음에 성령이 계시냐 하는 것이다. 이 정체성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다. 참 성령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아버지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고 아버지의 사랑하심처럼 우리도 사랑하며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2) 신분을 감추지 않는 것.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여기 등불을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이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빛의 속성 가운데 으뜸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드러내는 것이다.
사회에 선한 일을 많이 하는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있다. 그런데 단체를이 너무 숨겨서 기독교 단체인지 아닌지 도무지 모를 때가 있다. 몇 해 전에 기독교 복지단체들이 모였는데 그때야 기독교 단체인 줄 알게 된 단체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수고는 많이 하면서도 기독교가 핍박만 받게 된 것이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했다고 숨겨 왔던 것이다. 이 말씀은 자기 자랑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지 신분마저 숨기라는 것은 아니다.
많은 교인이 방송사에서 그 선행을 알리기 위해서 취재하러 오면 천국의 상이 사라질까봐 거절한다. 물론 자기를 자랑하면 안 되지만, 자기가 했나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대로 드러내면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위해 성도를 높이시려고 권고하시는 일을 왜 막으려고 합니까?
벧전 2: 12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했다. 무식한 자들에게 말은 통하지 않아도 선행은 좋은 메시지가 된다. 그래서 벧전 2: 15에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고 했다.
성경을 아무리 봐도 개인 신분은 감추어도 믿는 신분을 감추라는 말은 보지 못했다. 눅 12: 8-9에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분을 감추지 말라고 했다. 사람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라 하셨다. 최소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자임은 알게 해야 한다. 너무 감추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구 삼아 역사하실 수 없고 또 선행을 하여도 누가 한지 몰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좌초 위기 가운데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바람을 잔잔케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응답은 없고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었다. 바람과 파도 앞에 무력한 자신의 믿음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때 마음 속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기의 신분을 밝히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전지전능하시며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고 말한 다음 함께 기도하자고 한 후 담대히 기도했다. 놀라운 사실은 기도가 끝난 후 5분도 채 되지 않아 파도는 잔잔해졌다.
빙점이라는 소설로 알려진 일본의 여류 소설가인 미우라 아야꼬 여사의 이야기다. 그는 한때 척추병으로 병상에 누워 지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는 병상에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척추가 아파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데, 이 기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때 멋진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밝은 웃음을 선사하기로 하자.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결코 낙심하지 않고 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자!" 그리고 그때부터 보는 사람마다 웃어주기로 했다. 의사를 보아도 환하게 웃고, 간호사를 보아도 환하게 웃고, 옆에 있는 환자를 보아도 밝게 웃었다. 사람들이 놀라 "아니 허리를 다쳐서 꼼짝도 못하면서 무엇이 그렇게 기쁘고 즐겁습니까?" 그때마다 미우라 아야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저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만 생각하면 너무도 행복하답니다." 그는 뒤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 내가 건강할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 준 예이다. 그리고 신분을 숨기지 않은 등경 위에 등불을 둔 결과였다. 사람들 앞에 예수를 믿는 자라는 것을 숨기지 않을 때 사람들이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3) 그 일을 구체적으로 하는 것.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다. 본문에 "너는" 이렇게 단수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이라는 복수를 사용하셨다. 나 혼자도 해야 하지만 모두가 손을 잡고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좀 더 계획 속에서, 조직이 필요하면 조직을 갖추어서 해야 한다.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교회가 선한 단체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교회는 제자 훈련하는 교회로 유명하지만 그보다 이름 그대로 사랑하는 교회로도 유명하다. 이 교회는 개척 초기부터 설립 이념대로 선교 구제 봉사 등 교회 밖으로 60%씩 투자하고, 해마다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 교인들을 나누고, 건축비 10%까지도 지역을 위해 사용하지만, 성도는 늘어나고 더 많은 주의 일로 넘쳐난다. 그렇게 주고 또 주어도 왜 넘치는 것일까? 사랑의 실천 때문이다. 너희가 사랑할 때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했던 것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제자가 아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일군들도 실망하여 떠나가고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셨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 어떤 영광을 나타낼 것인가 그것을 고심해야 한다. 교회나 노회나 총회나 내부의 자리다툼을 위해 에너지를 소진하지 말고 밖에서 빛과 소금을 위해 일해야 한다. 사랑으로 기도로 복음으로 일을 해야 한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산다는 말씀이 진리다. 그러지 않아도 주님의 명령이라면 해야 합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소금과 빛의 사명은 우리와 우리 기독교의 존폐 문제가 달린 중요한 사명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리라 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소금이시고 빛이셨다. 이처럼 세상의 소금이요 빛인 우리 본질을 회복합시다. 참 예수의 사람이 됩시다. 참 성령의 사람이 됩시다. 사랑의 실천자가 됩시다. 믿는 자임을 감추지 맙시다. 우리 모두 함께 선행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들이 돌이켜 예수 믿게 되는 전도의 역사가 함께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