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통신사 파견 요청, 일본의 외교사절 대차왜(大差倭) 접대 보고서>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편에는 조선 후기 조선통신사 일본 파견 준비와 접대 규정 및, 조선통신사를 요청하기 위해 부산을 방문한 청래(請來) 대차왜(大差倭)의 접대와 환영을 행한 보고서 3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 에도 막부나 쓰시마섬(대마도)에서 조선에 파견한 임시 외교 사절 중 가장 격식이 높은 사절인 대차왜(大差倭)가 부산으로 건너와, 일본 에도 막부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한다는 외교 문서를 건네면, 조선은 비변사에서 이를 심의하여 파견을 결정했다. 그리고 대차왜가 조선에 머무는 동안 외교 관례에 따라 그들을 대접하고 향응을 베풀었다.
조선후기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중단된 국교를 재개하고, 일본 막부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파견한 공식 외교사절단이다. 조선 후기 통신사 파견 준비와 접대 규정은 주로 비변사의 논의와 통신사행 강정 절목(通信使行講定節目)에 따라 정례화되어 엄격하게 운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조선통신사의 파견 요청과 통신사행의 호위 및 구체적인 절차를 사전에 논의하는 역할을 한 일본의 외교 사절은 대차왜(大差倭)였다. 물론 통신사 외에도 여러 외교적인 중대한 일 때문에 조선에 종종 방문하기도 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외교사절 대차왜를 맞이하기 위해 중앙 관리인 경접위관(京接慰官)을 부산 동래로 파견하여 국빈급으로 정중히 대접했다. 공식 연회인 하선연, 별연, 상선연(떠날 때의 잔치) 등 여러 차례의 화려한 연회가 열렸고 약 2달간 머무는 동안 음식도 모두 조선 정부가 부담했을 정도였다. 대차왜가 중대한 업무를 띤 사절인 만큼 일반적인 차왜와는 달리 공무역 등의 특권을 부여하여 경제적인 편의를 제공한 것이다. 대차왜는 단순한 지방 사절을 넘어 양국 간의 고위급 현안을 다루는 핵심 창구였으며, 이들의 왕래와 접대 규정은 조선 후기 조일 관계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다.
○ 다음 3건의 문서는 이러한 조선통신사 파견에 관한 준비와 더불어 일본 사절 대차왜(大差倭) 방문에 관한 접대와 향응에 관한 일종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①「1681년 8월6일 통신사 파견 준비와 접대 규정을 보고한 회계관(回啓關)」은 일본 측의 요청에 따라 1682년 임술 통신사 파견을 앞두고 조선과 일본이 수행 인원과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조율하고 또 통신사 파견 준비와 접대 규정에 관한 지시사항 등을 예조(禮曹)에서 동래부에 보낸 회계관(回啓關, 공문서)다. 내용은 통신사 수행 인원수와 요청 물품 종류, 그리고 여러 재능 있는 기능인들의 초청에 관한 협의 및 절충을 한 문서다.
두 번째로 ②「1841년 3월22일 통신사 청래(請來) 대차왜(大差倭) 선박 도착보고 장계(狀啓)」는 조선통신사 요청으로 방문한 일본 사절 ‘청래 대차왜(通信使 請來 大差倭)’의 선박이 왜관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또 후속 조치로 이들 외교 사절을 접대하기 위한 여러 사항을 건의한 장계다. 내용은 접대관을 미리 임명하여 파견하고 대차왜에게 줄 연회 예물과 잡물 등을 예조에서 전례에 따라 마련해 내려보내 줄 것을 건의한 보고서다.
세 번째로 ③「1841년 9월11일 통신사 사절 대차왜(大差倭) 귤질신(橘質信) 환영 장계(狀啓)」는 동래부에서 조정에 올린 장계로, 일본에서 건너온 통신사 관련 사절단인 대차왜(大差倭) 귤질신(橘質信)과 그 일행을 관례에 따라 공식 연횔르 베풀고 그들이 가져온 문서(書契)를 접수 했다는 문서다. 정기적인 외교 절차에 따라 ‘하선 다례(下船 茶禮, 배에서 내린 것을 환영하는 잔치)'를 치루고, 외교 문서와 별폭(선물 목록) 등을 받아 예조에 보냈다는 보고서다.
1) 「1681년 8월6일 통신사 파견 준비와 접대 규정을 보고한 회계관(回啓關)」
이 문건은 1681년(숙종 7년, 강희 20년) 8월 6일, 예조(禮曹)에서 동래부에 보낸 회계관(回啓關)이다. 회계관은 왕이 특정 장계나 보고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해당 관서에서 논의를 거쳐 다시 올리는 공문서다. 주요 내용은 일본 측의 요청에 따른 통신사 파견 준비와 접대 규정에 관한 보고 및 지시다. 이 문서는 1682년 임술 통신사 파견을 앞두고 조선과 일본이 수행 인원과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조율하는 긴박한 외교 현장을 보여준다. 당시 일본 측이 조선의 예술가와 마상재(전통 마상 무예)를 매우 강력하게 원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내용인즉, 일본 측에서 조선통신사 파견을 요청한다. 내년(1682년) 3월에 출발하여 7~8월경 에도(江戶)에 도착할 것. 글씨를 잘 쓰는 사람(善寫者),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사람(善騎·善射), 마상재(馬上才) 등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해 올 것. 권현당(權現堂,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 제사에 쓸 향로와 촛대를 특별히 정교하게 만들어 올 것 등이다. 그리고 외교관 파견 및 인원 조정에 대해 언급한다. 접위관 및 문위역관을 기한 내에 동래로 내려보내 일본 사절을 맞이하게 한다. 그런데 수행 인원(원역)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일본 차왜(差倭)가 데려온 인원 중 '도선주'는 전례는 없으나 교린의 도리를 다해 접대하기로 하였고, 동행 인원 16명 중 6명을 줄이려 하자 일본 측이 화를 냈다는 보고가 있어, 최종적으로 14명까지 허용하기로 절충함 (전년도 고부사례 준용).
*향후 조치 : 통신사 선발 및 물품(향로, 촛대) 제작 여부는 묘당(비변사)에서 의논하여 처리할 것. 이 모든 사항을 동래부에 전달하니 지체없이 시행하고 보고할 것 등이다.
*요약하건대, 1682년 임술통신사(숙종 7년~8년) 파견을 앞두고, 일본 측의 구체적인 요구 사항(기능인 동행, 제기 제작 등)에 대해 조선 조정이 접대 인원을 확정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는 단계의 문서다. 이 통신사 파견은 도쿠가와 이츠나의 죽음과 이츠나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 참고로 이번 문건 ‘회계관(回啓關)’은 조선시대에 왕의 명령이나 질문에 대해 관청(주로 비변사나 예조 등)에서 논의한 후 보고하는 문서인 '회계(回啓)'와 관련된 '관문(關文, 공문서)'을 의미한다. 문서 [관(關)]은 관문(關文)이다. 동급 관청 상호간이나 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으로 보내는 문서[관(關)]에는 ‘관(關)’자 인을 찍어 사용하였다. 법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사용된 핵심 관문서로는 계(啓) · 관(關) · 첩정(牒呈) · 첩(帖) 등이 있다.
* 덧붙여 이번 「1681년 8월6일 통신사 파견 준비와 접대 규정을 보고한 회계관(回啓關)」은 발신자가 예조(禮曹)이고 수신자는 동래부사(東萊府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부접대등록(東萊府接待謄錄)』이다. [康熙二十年八月初六日]
**「1681년 8월6일 통신사 파견 준비와 접대 규정을 보고한 회계관(回啓關)」**
강희 20년(1681년, 숙종 7년) 8월 6일, 예조에서 회답하여 올린 계목에 관한 관문. 예조에서 참고할 일로 알립니다. 지난번 임금님의 전교를 받들어, 본 고을(동래부)의 서장(書狀)에 근거하여 예조에서 올린 계목(보고서)이 승인되어 내려왔습니다. 이번 동래부사(남구만)의 장계를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사신 파견을 요청하러 온 일본 사절(차왜)이 말하기를, ‘통신사가 내년 3월 사이에 내려와 7~8월 사이에 에도(江戶)에 도착하게 하되, 글씨를 잘 쓰는 자와 말타기·활쏘기에 능한 자, 마상재(말 위에서 재주 부리는 사람) 등을 각별히 선발해 데려오고, 권현당(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 제사에 쓸 향로와 촛대 등도 특별히 정교하게 만들어 가져오라’고 하며, 접위관을 재촉하여 내려보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재판차왜(裁判差倭, 실무 전문 외교관)가 말하기를, “문위역관을 이번 달 말 이전에 호송해 오라”고 하여 기한 내에 내려보내기로 하였습니다. 해당 차왜가 거느리고 온 인원수가 전보다 늘어난 점을 다시 조정하여 보고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습니다. ① 관원 파견 : 접위관과 문위역관은 장계 내용대로 재촉하여 내려보낼 것입니다. ② 통신사 파견 절차 : 통신사를 선발하여 보내는 일은 묘당(비변사)에서 논의하여 처리하게 할 것입니다. ③ 인원 접대 문제 : 차왜가 데려온 인원 중 ‘도선주’는 비록 전례는 없으나 외교적 도리를 생각하여 이미 데려온 이상 접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④ 수행원 수 조정 : 수행원 16명 중 6명을 줄이도록 여러 번 타일렀으나, 차왜가 몹시 노한 기색을 보였습니다. 여러 차례 다툰 뒤에 다시 늘려주는 것은 처음부터 허락해 주는 것만 못하나, 16명을 모두 허용하는 것은 과해 보입니다. 따라서 작년 관백의 죽음을 알리러 온 사절의 사례에 따라 14명까지 허용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대로 회답을 보내겠습니다. ⑤ 일본 측 요청 사항 : 일본이 요청한 서예·기사·마상재 인원 선발 및 향로·촛대 제작 여부는 통신사 일행이 확정된 뒤에 논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희 20년 8월 5일, 동부승지 이유(李濡)가 담당하여 아뢰니, 임금께서 “윤허한다”고 전교하셨습니다. 내려온 지시 사항을 참고하여 이대로 시행하고, 문건이 도착한 날짜와 시간을 보고하십시오. 강희 20년 8월 6일, 우관(右關) 동래부 앞.
[康熙二十年八月初六日. 禮曹回啓關. 禮曹爲相考事, 節啓下敎, 本府書狀據, 曹啓目粘連啓下是白有亦. 觀此東萊府使南 狀啓, 則信使請來差倭出來言內, 通信使明年三月間下來, 七八月間到江戶, 而各樣書法善寫者及善騎·善射·馬上才等, 極擇率來, 權現堂祭用香爐·燭臺等, 各別精造以來, 接慰官催促下送亦爲白有旀. 裁判差倭言內, 問慰譯官, 今月晦前護來云, 及期下送亦爲白有旀。同差倭, 所率員役, 與前加數, 更爲停當啓聞是如爲白有置. 接慰官及問慰譯官, 依狀啓催促下送爲白乎旀。通信使差送事段, 令廟堂稟處爲白乎旀. 通信使差倭送事段, 令廟堂稟處爲白乎旀. 差倭所率員役中。都船主, 雖非前例, 待交隣之道, 旣已率來, 則不可不接待是白乎旀. 其伴從十六名內, 六名減去事, 多般開諭, 則差倭頗有怒色是如爲白有臥乎所. 屢爭而後, 還許加數, 不如直爲許副之爲當, 而十六名准許, 則似爲太過, 依上年關白告訃差倭接待例, 伴從十六名內, 十四名許待似當, 以此回移爲白乎旀. 其所請善寫·善騎·善射·馬上才等擇送事及權現堂祭用香爐·燭臺等造送當否, 信使停當後稟處, 何如? 康熙八月初五日, 同副承旨臣李濡次知啓, 依允敎事是去有等以, 啓下內辭緣相考, 依此施行爲乎矣, 到付日時牒報向事. 康熙二十年八月初六日, 右關東萊府]
2) 「1841년 3월22일 통신사 청래(請來) 대차왜(大差倭) 선박 도착보고 장계(狀啓)」
이 문서는 1841년(헌종 7년, 도광 21년) 윤3월 22일, 동래부에서 작성된 기록으로 통신사 청래 대차왜(通信使 請來 大差倭)의 선박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후속 조치를 요청하는 보고서다.
*내용인즉, 윤3월 19일에 상황 발생 및 보고를 하였다. 처음 황령산 봉군 김달원이 물종도(水宗渡) 쪽에서 정체불명의 왜선 1척이 오는 것을 발견해 보고했다. 부산 첨사 이현직이 개운포 만호 신광호를 보내 정탐하게 했으며, 유시(오후 5~7시)경 해당 배가 왜비선(倭飛船, 빠른 연락선)임을 확인하고 왜관에 도착시켰다. 왜측의 선문(先文, 미리 통지하는 공문) 내용에 의하면, 머리왜(頭倭) 1명, 격왜(노 젓는 왜인) 5명, 그리고 대차왜의 선문을 지닌 머리왜 1명이 타고 왔다. 어제(18일) 오전 사시에 대마도에서 출발했으나 풍세가 좋지 않아 바다에서 밤을 지새우고 오늘(19일) 낮에 도착했다고 진술했다. 일본의 관백(쇼군)이 은퇴하고 후계자가 승계했으므로 관례에 따라 조선 통신사를 청하기 위해 '대차왜'가 곧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요청하길, 관례에 따라 경접위관(京接慰官)과 차비역관(당상·당하 각 1원) 등 접대관을 미리 임명하여 대차왜가 도착할 때 바로 접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대차왜에게 줄 연회 예물과 잡물 등을 예조에서 전례에 따라 마련해 내려보내 줄 것을 건의했다.
*요약하건대, 일본 쇼군의 세대교체로 인해 통신사를 요청하는 사절단이 올 예정이니, 조정에서 접대관을 임명하고 선물을 준비해달라는 급보다.
* 덧붙여 이번 「1841년 3월22일 통신사 청래(請來) 대차왜(大差倭) 선박 도착보고 장계(狀啓)」은 발신자가 동래부사(東萊府使)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부접대등록(東萊府接待謄錄)』이다.[辛丑閏三月二十二日]
**「1841년 3월22일 통신사 청래(請來) 대차왜(大差倭) 선박 도착보고 장계(狀啓)」**
각사등록 제33책 (동래부접대등록). 도광 21년 신축(헌종 7년) 윤3월 22일.
도광 21년 10월 일, 통신사를 청하러 오는 대차왜(大差倭) 귤질신(橘質信)을 접대하기 위해 상경한 접위관의 등록이다.
이달 19일 미시(오후 1~3시)에 황령산의 봉군(烽軍) 김달원(金達元)이 보고하기를, "오늘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왜선 한 척이 수종도(水宗渡)로부터 건너오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도착한 부산첨사 이현직(李顯稷)의 보고 내용도 이와 같았으며, 사정을 탐지하기 위해 개운포 만호 신광호(申光浩)를 정하여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날 유시(오후 5~7시)에 도착한 동 첨사의 보고에 따르면, "즉시 정탐장(哨探將)을 보내 보고하게 한즉, 정체를 알 수 없던 배 한 척은 '왜비선(倭飛船, 빠른 연락선)'으로, 당일 미시에 왜관(館所)에 도착하여 인계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훈도 현학로(玄學魯)와 별차 변의규(卞義圭) 등이 올린 보고서(手本)에 따르면, "왜비선 한 척이 왜관에 도착하여 즉시 사정을 물으니, 비선 안에는 우두머리 왜인(頭倭) 1명과 격왜(格倭, 노 젓는 왜인) 5명이 타고 있었으며, 통신사를 청하러 오는 대차왜의 선문(先文, 미리 보내는 통지문)을 지닌 머리왜 1명이 동승하여 노인(路引, 여행 증명서) 및 왜관 수문대관(館守代官) 등의 사사로운 편지를 소지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왜인들이 말하기를, "우리 비선 한 척은 어제 사시(오전 9~11시)에 대마도 대풍소(待風所)에서 출항하였으나, 수지(水旨)에 이르러 풍세가 불리하여 바다 위에서 밤을 지새우고 오늘 오전에 전진하여 미시에 왜관에 도착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수왜(館守倭)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관백(關白, 쇼군)께서 은퇴하시고 후계자가 승계하신 후에는 관례적으로 통신사가 있었는데, 이제 선문을 보니 통신사를 청하러 오는 대차왜가 머지않아 당도할 것입니다. 그러니 경접위관(京接慰官) 및 차비역관(差備譯官) 당상과 당하 각 1명을 미리 임명하여, 대차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접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해당 비선이 지참한 노인 1도를 받아 올려보낸다는 보고서에 근거하여, 해당 노인을 수송하고 그 사유를 보고합니다. 아울러 비선이 가져온 노인 1도를 봉인하여 해당 조(예조)에 올립니다.
통신사를 청하러 오는 차왜의 선문 머리왜가 이미 왜관에 도착하였고, 경접위관이 접대하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습니다. 그러니 접위관과 차비역관 등을 미리 차출하는 일을 묘당(廟堂, 비변사)에서 임금께 여쭈어 처리하도록 지시해 주십시오. 또한 해당 차왜에게 줄 연회 예물과 잡물 등은 예조에서 관례에 따라 마련하여 내려보내 주실 것을 정리하여 보고 드립니다. 도광 21년 윤3월 22일. [各司謄錄第 冊 (東萊府接待謄錄). 道光二十一年辛丑(憲宗七年)閏三月二十二日. 道光二十一年十月 日 通信使請來大差倭橘質信接待京接慰官謄錄
本月十九日未時, 荒嶺山烽軍金達元進告內, 當日午時朝倭未辨船一隻, 自水宗渡來是如爲白有如乎。追到釜山僉使李顯稷馳通內辭緣一樣, 而哨探次開雲浦萬戶申光浩定送是如爲白齊。同日酉時到付同僉使馳通內, 卽接哨探將馳報, 則未辨船一隻, 以倭飛船, 當日未時, 領付館所是如爲有旀。追後訓導玄學魯, 別差卞義圭等手本內, 倭飛船一隻到館, 卽爲問情, 則飛船良中, 頭倭一人, 格倭五名, 通信使請來大差倭先文頭倭一人, 等同騎, 持路引及館守代官倭等了私書爲有矣。同倭等言內, 俺等飛船一隻, 昨日巳時, 自馬島待風所發船, 及到水旨, 風勢不利, 洋中經夜, 今日午時前進, 未時到館是如爲乎旀。館守倭言內, 弊邦關白, 退休承襲後, 例有通信, 而今見先文, 則通信使請來大差使, 匪久當爲出來, 京接慰官及差備譯官堂上堂下各一員, 豫爲差出, 待大差使出來, 卽爲接待之地亦爲乎等以, 同飛船所持路引一度, 捧上上送事手本據, 同路引輸送, 緣由馳通爲白有等以, 同飛船所持路引一度, 監封上送于該曹爲白乎旀。通信使請來差倭先文頭倭, 今已到館, 而京接慰官接待, 已有其例是白如乎。接慰官及差備譯官等, 豫爲差出事, 令廟堂稟旨分付是白遣。同差倭所贈宴禮單雜物, 令該曹照例磨鍊下送爲白只爲, 詮次善啓向敎是事. 道光二十一年閏三月二十二日]
3) 「1841년 9월11일 통신사 사절 대차왜(大差倭) 귤질신(橘質信) 환영 장계(狀啓)」
이번 문건은 도광 21년(1841년, 헌종 7년) 9월 11일, 동래부에서 조정에 올린 장계의 일부다. 주요 내용은, 일본에서 온 통신사 관련 사절단인 대차왜(大差倭) 귤질신(橘質信, 다치바나 사네노부)과 그 일행이 배에서 내린 것을 기념하여, 관례에 따라 차례(茶禮, 일종의 공식 연회)를 베풀고 그들이 가져온 외교 문서(書契)를 접수했다는 보고다.
*구체적 내용인즉, 차례(茶禮)를 원래 이번 달(9월) 10일에 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에 보고자들이 연청(宴廳, 잔치를 베푸는 청사)에 가서 관례대로 '하선 차례(배에서 내린 것을 환영하는 잔치)'를 치렀다. 이어 행사를 마친 후, 일본 사절 측이 제출한 다음 문서들을 받았다. 예조(禮曹) 앞으로 서계(편지)와 별폭(선물 목록) 각 2부와, 동래부·부산 앞으로 서계 1부와 별폭 2부를 접수했고 또한 후속 조치로, 받은 문서들은 봉인하여 해당 관청(예조)으로 보냈으며, 이러한 경위를 정리하여 보고(치계)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조선과 일본(쓰시마 번) 사이의 정기적인 외교 절차가 매끄럽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 덧붙여 이번 「1841년 9월11일 통신사 사절 대차왜(大差倭) 귤질신(橘質信) 환영 장계(狀啓)」은 발신자가 접위관과 동래부사(接慰官·東萊府使)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부접대등록(東萊府接待謄錄)』이다.
**「1841년 9월11일 통신사 사절 대차왜(大差倭) 귤질신(橘質信) 환영 장계(狀啓)」**
도광 21년(1841년) 9월 11일. 하나, 차례(茶禮)에 관한 연명 보고의 건.
통신사로 오기를 청하여 온 대차왜(大差倭) 귤질신(橘質信) 및 수행원 등의 하선(下船) 차례를 이번 달 10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들이 함께 연청(宴廳)에 가서 배에서 내리는 차례를 관례에 따라 거행한 뒤, 해당 차왜가 제출한 예조(禮曹) 앞 서계(외교 문서)와 별폭(예물 목록) 각 2도(본), 동래부와 부산 앞 서계 1도와 별폭 2도를 받아서 봉인한 뒤 해당 조(예조)에 보냈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정리하여 보고(馳啓)하오니 살펴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도광 21년 9월 11일. [道光二十一年九月十一日. 一, 茶禮聯啓. 通信使請來大差倭橘質信·員役等下船茶禮, 定於本月初十日, 故臣等偕往宴廳, 下船茶禮, 依例設行後, 同差倭所呈禮曹了書契·別幅各二度, 東萊釜山了書契一度, 別幅二度, 捧上監封上送于該曹爲白乎旀. 緣由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向敎是事. 道光二十一年九月十一日][辛丑九月十一日]
[주1] 대차왜(大差倭) : 일본 쓰시마 번에서 조선에 보낸 중앙정부의 정식 사절.
[주2] 다례(茶禮) : 오늘날의 제사가 아니라, 외교 사절을 맞이하여 대접하는 공식적인 다과회나 잔치를 뜻함.
[주3] 서계(書契)·별폭(別幅) : 서계는 공식 외교 편지이며, 별폭은 그와 함께 보내는 선물 명세서다.
[주4] 하사오며(爲白乎旀) : 이두어- ─하오며. ─하사오며. ─하옵시며.
[주5] 하삽누온이아곰(爲白臥乎是良厼) : 이두어- ─하옵는이만큼. ─하옵시는이만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