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지나고 청보리밭 이랑 사이로 산들바람이 분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까까중머리에 아이 하나가 부산에서 산바람을 몰고 온다. 60여 년 전 붐을 일으켰던 무전여행 바람. 돈 없이 가는 여행이라고 했더니 소꼽친구들이 호밋자루 내던지고 따라나선다.
희미한 호롱불 등잔 아래에 네 명이 모여 앉아 작당 모의를 했다. 비상금 조달이 문제였다. 고심 끝에 농부는 굶어 죽어도 먹지 않는다는 씨 나락을 팔기로 했다. 부모님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고방 문을 열고 목표물을 훔치는 순간, 우리 집 씨 나락이었는데도 왜 그렇게 겁이 났는지 진땀이 났다. 도적질은 도덕질 이었나 보다.
거사 날 새벽, 4인조 결사대는 괴나리봇짐을 울러 메고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비탈진 산자락 언덕길로 줄행랑을 쳤다. 면사무소를 지나 들길로 접어들 때는 호밋자루에서 해방된 기쁨에 젖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뗏목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도착한 함안 군북 플래트홈, 경전선 완행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역 구내로, 들어왔다. 기차를 생전 처음 보는 촌놈 일행은 연신 싱글벙글이다. 무임승차를 했다. 그들은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신바람이 났지만 나는 마산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어떻게 하면 기차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궁리 끝에 중리 고갯마루에서 뛰어내리기로 작심을 했다. 하나둘 셋, 겁도 없이 뛰어내렸다. 기차 탈출 성공,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털 털고 유유히 멀어져 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하하하 웃는다. 통쾌하다. 쇼생크 감옥을 탈출한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 게다.
가고파의 고향 마산항을 들렸다. 파도소리에 흠뻑 젖고 마산의 수호신 용마산에 올라 전경을 감상한 후에 진해로 넘어갔다. 이른 봄이었지만, 마진고개 너머 벚꽃 망울은 군항제를 앞두고 봉긋봉긋하다. 진해에는 큰 형님이 살고 계셨지만, 그냥 지나쳤다. 풀빵으로 가볍게 저녁을 때우고 경화역 구내 벤치에서 새우잠을 잤다. 새벽녘이었다. 누군가가 구둣발로 툭툭 차면서 잠을 깨웠다. 등빨 좋은 깡패 형들이 소지품을 샅샅이 뒤진다. 양말 조각 소금 봉지 등등을 보고는 실망하는 눈치다. 그 시절에는 소금이 치약이고 손가락이 칫솔이었다. 사정없이 따귀를 때리고 비상금마저 몽땅 뺏어가 버렸다.
무섭고 분하고 아팠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경화역에서 부산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를 타면 그렇게 신나하던 친구들이 말이 없다. 풀빵으로 저녁을 때우고 아침도 못 먹었으니 말할 힘도 없었다. 부산진역에 내렸다. 완전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우리가 갈 곳이라고는 전포동 삼촌 집뿐이었다. 갑작스런 방문에 숙모님은 깜짝 놀라신다. “숙모님, 배가 고파 죽겠어요. 밥 좀 주이소.”고봉밥과 따끈한 돼지국을 금방 끓였다고 했다. 천하에 그렇게 맛있는 성찬이 또 있을까. 그러나 기쁨도 잠시, 삼촌이 퇴근하여 우리들을 보고는 호통을 치신다. “보리밭은 우짜고 도망 왔냐고, 당장 내려가라고.” 다음 날 아침, 숙모님이 오천 환을 내 손에 꼭 쥐어주시며 “국수라도 사 먹어라.”고 하실 때는 가슴이 울컥했다.
삼촌 집에서 나와 길 잃은 철새처럼 방향타를 찾지 못해 한참을 서성인다. 아무래도 기찻길이 지름길일 것 같아 경전선 철로 위를 걷기로 했다. 심심풀이 강냉이 박상을 두봉지 샀다. 박상을 쪼개어 먹으며 철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노라니 어느새 물금역이다. 철로길 언덕에는 파릇파릇 풀잎이 돋아나고 할미꽃도 올기종기 꽃술을 머금고 있었지만, 목이 마르고 다리가 아팠다. 밥 얻어먹을 시간이다.
초가집 돌담 너머로 이쁜 누나가 마당을 서성거린다. “물좀 주이소.” 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물 한 사발을 꿀꺽 삼키며 “배고파 죽겠어요, 밥 좀 주이소.” 하고 통사정을 했다. “밥은 없고 죽 뿌이다.”하며 시어빠진 희멀건 보리 풀대죽을 내어왔다. 감지덕지 단숨에 먹어치웠다. 물금 누이와 오누이 같은 바이바이를 하고 삼랑진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어본 그 보리 풀대 죽의 새콤한 맛은 지금도 침샘을 자극한다.
어둑어둑 논두렁에 산 그림자가 내린다. 노을이 지고 밤바람에 쌀쌀한데 오늘은 어디서 잠을 잘까 걱정이 태산이다. 그때 마침 마을 어귀에 높다랗게 쌓아놓은 보릿대가 눈에 쏙 들어왔다. “그래 저기야. 저기가 우리 숙소야.” 보릿대 가운데를 동굴처럼 파내고 깔고 덥고 누웠다. 보릿대 호텔이다.
이른 아침 보릿대를 털털 털고 일어나 낙동강 역에서 마산행 통근 열차에 몸을 실었다. 무임승차다. 이제는 이력이 붙어 두려움도 불안함도 사라졌다. 돈 없이 타는 기차여행. 그것이 무전여행의 묘미가 아니던가. 마산역 역무원 아저씨의 호된 꾸지람을 뒤로하고 처녀 뱃사공의 발원지인 함안 악양루를 향해 걸어서 갔다. 노 젖는 뱃사공을 바라보며 먼 길에 지친 몸과 마음을 노래로 씻어 내린다. “낙동강 강바람에 치마폭을 스치며…….”
떠날 때의 설렘과 감격은 간 곳이 없고 돌아올 때는 심신이 방전되어 무전여행이 고생바가지가 된다. 까까중머리 아이 네 명이 논두렁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간다. 지은 죄가 있어서 벌건 대낮에는 차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뒷산에 숨어 있다. 해 질 무렵 어둠을 타고 살며시 집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내 새끼 어디 갔다 인자오노.” 울 엄마 목소리, 육십 년이 흘렀건만 지금도 귓전에 찡하게 맴돈다.
삼박 사일간의 무전여행, 배고프고 힘든 고행 길이였지만 뒤돌아보면 옛 친구들과 함께했던 정겨운 추억으로 파노라마 친다. 걸쭉한 돼지 국물의 숙모님도, 새콤한 보리 풀대 죽의 물금 누나도, 호텔같이 포근했던 낙동강 변의 보릿대 숙소도, 무임승차를 용서해 주신 역무원 아저씨도 모두가 큰 사랑으로 가슴에 안긴다. 경화역 깡패 형들도 개과천선하였으리라.
무전여행, 전(錢)을 초월하여 호밋자루 내 던질 만큼 신바람 나는 여행은 아닐지라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라 하면 난 그 길을 또다시 걷고 싶다. 일 년에 한두 번 고향길 나설 때면 그때를 함께 했던 옛 친구들이 한없이 보고 싶어진다.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제 겨울로 접어드나 봅니다. 건강 유의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