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사람들은 11세기로부터 동방과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일련의 군사원정, 혹은 십자군 전쟁을 시작하였다. 십자군의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다. 서방은 성지를 이슬람 세력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원하였다. 초기 십자군 중 최초의 운동은 부분적으로는 종교적인 부흥이었다. 교황이 주도권을 잡았고, 이것은 종교적인 열정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따라서 십자군은 대중의 종교적 신념만이 아니라 교황의 리더십을 입증해 보였다. 또한 십자군은 유럽에서 전반적으로 자기 인식과 자기 확신이 증대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유럽은 더 이상 외부의 적들의 공격을 불안하게 기다리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들의 군대를 성지로 파견하였다. 그러한 모험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였는데, 이러한 용기는 십자군이 궁극적으로 신의 뜻이라는 확신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십자군의 뜻하지 않은 결과는 서방 세계가 자기들의 것보다 훨씬 더 선진적인 문명의 사상과 기술을 보다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십자군 운동은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서양 문명의 진로에 영향을 미친 유럽민족들의 운동으로서, 서양 세력이 새로운 지역으로 최초로 확대된 단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3세기 이래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가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해왔다. 성 헬레나는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라고 믿었던 것을 발견하였다. 그녀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약 274-337)는 그곳에다가 성묘교회를 건축하였다. 7세기에 이슬람의 정복이 있기 이전에 비잔티움과 서방의 순례자들은 자기들의 교회를 위한 성유물을 찾아 팔레스틴 지역으로 왔다. 순례는 위험한 일이었고,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렇지만 샤를마뉴의 통치기가 될 때까지는 서방 순례자들을 위한 여건이 개선되었다. 왜냐하면 칼리프였던 하룬 알-라시드(Harun al-Rashid : 763-809)는 순례 여행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샤를마뉴가 예루살렘에 숙박소를 기증하도록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순례 여행이 안전하고 용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과 비잔틴 세계 양쪽의 상황이 안정되어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팔레스틴의 이집트 통치자로 있던 하킴(약 996-1021년)은 11세기 초에 자기 선임자들의 관용적인 정책을 포기하고 기독교인 및 유태인을 박해하기 시작함으로써 상황이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성지로의 여행이 다시 한 번 어려워졌다. 하킴은 콘스탄티누스가 세운 성묘교회를 파괴하였고, 스스로 성육신한 신이라고 선포하였다.
1050년 무렵이 되면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페르시아에 국가를 건설하였다. 그들은 1055년에 압바스 조 칼리프의 초청으로 바그다드로 들어왔고, 이집트의 시아파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수니파 이슬람의 옹호자가 되었다. 1050년대에 셀주크의 군대는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밀고 들어와 거의 에게해까지 다다랐다. 파죽지세와도 같았던 그들의 성공은 1071년에 만치케르트에서 비잔틴이 패배한 사건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이로써 거의 대부분의 소아시아가 점령되고 니케아에 새로운 술탄 국가가 수립되었다. 1071년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시리아의 새로운 셀주크 국가의 일부분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혼란과 궁중 음모가 일어나고 수도가 위기에 빠진 상황이던 1081년에는 장군이던 알렉시우스 콤네누스(Alexius I Comnenus : 1081-1118)가 비잔틴 제국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베네치아와 힘을 합하여 달마티아 해안에서 노르만의 공격을 물리친 바 있었다. 그리고 그는 투르크의 군주들이 서로 싸우도록 하여 덕을 보았고, 소아시아에 비잔틴 제국의 근거지를 서서히 재확립하였다. 그렇지만 투르크인들 사이에 내란이 발생하고 약탈자가 증가하자 순례 여행은 훨씬 더 어려워졌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로마 교황은 동방의 일에 관여하고자 하는 자극을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1073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약 1020-1085)는 콘스탄티노플에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사절의 보고로는 비잔틴의 황제가 화해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스페인으로부터 아시아까지 성전을 확대함으로써 교회를 통합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손수 지휘하던 일군의 서방 기사들을 비잔틴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2. 제 1차 십자군 운동
교황 우르바누스 2세(약 1042-1099)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알렉시우스가 파견한 공사들이 피아켄자 공의회(1095)로 왔는데, 이들은 투르크에 대항한 군사적인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당시는 투르크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공격할 수 있는 좋은 시기였을 것이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동방 기독교인들로부터 받았던 호소 내용을 강조하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명확하게 말해주었다. 그는 부자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군대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서방 내부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행위가 성전에 대한 참여로 바뀌게 될 것이다. 또한 서방 내부의 가난 문제는 동방에서 얻어오는 재물에 의하여 해결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신의 일을 하다가 살해당한다면, 그는 자동적으로 죄를 면제받고 구원을 보장받을 것이다. 우르바누스 2세의 이 연설에 대해 청중은 "신이 원한다"라는 고함소리로 응답하였다. 그리하여 제 1차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보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십자군을 가장 효과적으로 설교한 사람은 물고기와 포도주를 먹고살았던 은둔자 피터(Peter the Hermit : 약 1050-1115)였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농민 대중들을 무작위로 모집하였는데, 거기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피터가 우유와 꿀이 흐르는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자기들을 인도하고 있다고 믿었다. 피터의 추종자들은 라인강으로 와서 헝가리를 건너게 되었다. 여기서 한 켤레의 신발을 판매하는 문제를 두고 일어난 폭동에서 4,000명의 헝가리인들이 살해당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벨그라드에 있는 비잔틴 영토로 들어갔다. 잘 훈련된 군대를 기대했던 비잔틴인들은 피터의 군중을 보고 경악하였다. 그들은 군대를 가지고 피터의 군중을 계속 경호 해주었고,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온갖 주의를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강이 잡히지 않은 피터의 십자군은 가옥을 불태우고 교회 지붕에서 납 판자를 떼어내는 등 온갖 약탈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피터의 십자군은 일단 콘스탄티노플에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에 의하여 환대를 받았는데, 그는 이들을 가능한 한 빨리 해협 너머로 배로 보냈다. 그들은 소아시아에서 서로 싸웠고, 기독교 거주민들을 살해하였으며, 투르크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승리도 거두지 못하였고 결국 학살당하고 말았다.
유럽 사회 상층에서는 어떤 왕도 십자군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대 귀족이 참전했는데, 그 중에는 고드프리 드 부이용(Godfrey de Bouillon, 약 1061-1100), 그의 형제인 볼드윈(1058-1118), 툴루즈의 레이몽 백작, 블롸의 스테판 백작(약 1097-1154),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군주였던 보헤몬드(약 1057-1111)가 있었다. 이들 귀족이 이끄는 군대는 잘 무장되고 잘 훈련되었는데, 여러 경로를 통하여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였다.
알렉시우스 황제는 자신이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유럽의 십자군이 투르크의 점령된 지역에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공국을 건설하는 것을 기꺼이 허용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동시에 비잔틴 영토가 자신의 통제권으로 반드시 되돌려지며, 어떠한 새로운 국가도 자신의 영토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유럽의 주종제 및 주군에게 행하는 선서가 지닌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유럽의 군주들이 도착할 때 자기에게 충성 선서(liege homage)를 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알렉시우스는 이러한 선서를 얻어내기 위하여 뇌물에 의지해야 했다.
군대는 해협을 건너 수송되었다. 최고 명령권자는 없었으나, 군대는 협의회를 구성한 지도자들의 명령을 따라 마치 한 부대처럼 행동하였다. 1097년 6월에 셀주크의 수도인 니케아에 있던 투르크인들은 십자군의 공격을 받기 직전에 비잔틴 군대에 항복하였다. 십자군은 소아시아로 건너가서 도리라이움에서 투르크인들을 패배시키고, 셀주크 술탄의 장막과 보물을 탈취하였고, 더 이상의 진군로를 열어놓았다. 고드프리의 형제인 볼드윈은 동방에서 오는 공격으로부터 시리아를 지켜주는 전략적인 위치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 근처의 고대 제국 도시인 에뎃사로 진군해갔다. 결국 볼드윈은 에뎃사의 백작이 되었는데, 그는 최초로 세워진 십자군 국가의 주군이 되었다(1098년).
그러는 사이에 주력 부대는 대도시인 안티오크를 포위공격 하여, 마침내 7개월 후에 정복하였다. 안티오크는 보헤몬드 아래에서 두 번째 십자군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십자군은 1099년 7월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을 장악하였는데, 이 때 이슬람교도, 유태교도, 성인남녀, 아이들 할 것 없이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고드프리 드 부이용은 "성묘의 수호자"로 선출되었고, 세 번째 십자군 국가가 수립되었다. 고드프리는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는데, 그의 형제인 에뎃사의 볼드윈이 1100년에 예루살렘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베네치아, 제노아, 피사의 배들은 해안 도시를 점차로 정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로써 동쪽 지역과 서쪽 지역 사이에 교통 이동이 가능해져서 지원병이 공급될 수 있었다. 1109년에는 툴루즈의 레이몽드의 아들이 트리폴리 해안 근처에다가 네 번째이자 마지막 십자군 국가를 건설하였다.
3. 그 이후의 십자군 운동의 주요 양상
십자군은 일찍이 지중해 동부를 장악하여 기사단을 창설하였다. 이 중 첫 번째 것은 기독교 순례자들의 어려움에 공감한 부르군디 지방의 어떤 기사에 의하여 1119년 무렵에 창설된 성전기사단(Templars)이었다. 성전기사단은 순례길에 있는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힘을 합하였다. 성전기사단은 빈곤, 순결, 순명에 대한 선서를 했고, 솔로몬 성전의 폐허 가까이에 숙소를 잡았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1090-1153)는 그 자신이 속한 시토파(Cistericians)의 규칙서에 기초하여 기사단의 규칙서 제정에 영감을 주었는데, 이 규칙서는 1128년에 교황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두 번째 기사단인 병원기사단은 성전기사단이 생긴 직후에 창립되었는데, 예루살렘의 성 존 병원에 소속되었다.
한 사람의 지도자 밑에서 기사들, 군종신부들, 형제들로 구성되어 동방과 유럽에 지부를 두고 있던 이 두 기사단은 성지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활약하던 무장 세력이었다. 각 기사단은 특별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성전기사단은 하얀색 바탕에 붉은 십자가, 성전 기사단은 검은 색 바탕에 하얀 십자가 모양의 복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세 번째로는 순수한 독일인 집단으로서 아크레에 본부를 둔 튜톤 기사단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하얀 색 바탕에 검은 십자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기사단은 빠른 속도로 부를 축적하였다. 그들은 필요한 물품을 얻었던 마을만이 아니라, 성지에다가 자기들의 교회와 요새를 두고 있었다. 서방의 군주들은 기사들에게 유럽 내의 땅을 풍부하게 증여해주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 기사단이 서로 분쟁을 벌이는 가운데 원래의 설립 의도가 퇴색되었다. 결국 기사단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종종 이슬람교도들과 결탁하기도 하였고, 원래 청빈하겠다는 선서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은행 업무와 대규모 이익 사업에 개입하였다. 신전기사단은 14세기 초에 프랑스의 필립 4세(1268-1314)에 의하여 해체되었다. 병원기사단은 14세기 초 들어 키프로스로 갔다가 나중에 로데스로 이동해갔다. 그들은 1522년에 투르크인들에 의하여 말타로까지 내몰렸다가 1798년에 그 섬이 나폴레옹에 의하여 장악될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십자군 국가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군사적인 규율이 있었다거나 그들의 성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슬람교도들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슬람교도들이 연합하자, 십자군 국가들은 함락되기 시작하였다. 1120년대 후반에 티그리스의 모술의 지배자였던 장기(Zangi)는 그 지역의 이슬람 통치자들을 결속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그는 1144년에 에뎃사를 정복하였다. 2년 후에 장기는 암살되었지만, 이슬람의 재수복 추세는 계속 되었다.
에뎃사 정복에 대한 반응으로서 성 베르나르는 소위 제2차 십자군을 주장하였다. 그가 불러일으킨 엄청난 열기 덕분에 프랑스의 루이 7세(1120-1180)와 독일의 콘라드 3세(1093-1152)가 동방으로 갔다. 그러나 제2차 십자군은 실패로 돌아갔다. 비잔틴과의 관계는 이전보다 더욱 악화되었고, 서방 군대는 소아시아에서 거의 전멸 당하다시피 하였다. 이 군대 중 살아남은 사람들이 성지에 도착하였을 때, 이들이 자기 왕국을 차지할까 두려워하던 지방의 영주들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십자군은 1149년에 다마스커스를 차지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슬람 세력의 재정복의 다음 단계는 카이로에 있는 파당 중의 하나를 돕기 위하여 파견된 한 장군에 의하여 이집트에서 수행되었다. 이 장군은 이집트 장관이 되었고, 자신의 직책을 조카인 살라딘(1137-1193)에게 넘겨주었다. 이 사람은 십자군 시기 동안에 위대한 이슬람 지도자가 되었던 용기 있고 인정 많은 사람이었다. 살라딘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이슬람 도시들을 자기 통제 하에 두었고, 그 도시들을 자기 가족의 충성스러운 일원들에게 분배하였다. 1183년까지는 그의 형제가 이집트를 통치하였고, 그의 아들들은 다마스커스와 알레포를 통치하였다. 예루살렘은 1187년에 함락되었고, 곧 투르 항구와 몇몇 성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제 3차 십자군(1189-1192)을 일으킬 필요성이 생겨났다. 신성로마황제인 프레데릭 바르바롯사(약 1123-1190)는 비잔티움을 가로질러 독일 군대를 이끌고 가다가 성지에 도달하기 전에 익사하였다(1190년). 그렇지만 그의 군대 중 일부는 계속해서 팔레스틴 지방으로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이전에 서방에서 경쟁자 관계에 있던 프랑스의 필립 아우구스투스와 잉글랜드의 리처드 사자심 왕(1157-1199)과 합류하였다. 제 3차 십자군의 주요 공격 방향은 아크레의 포위공격이었는데, 이 도시는 결국 1191년에 함락되었다. 예루살렘은 탈취될 수 없었으나, 살라딘은 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그곳을 방문할 수 있도록 리처드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인노센트 3세(1160-1216)는 1198년에 교황이 된 다음에 제 4차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였다. 수많은 유력 군주들이 이 호소에 응답하였고, 뱃길로 진군하기로 결정하였다. 베네치아 인들은 자기들의 향후의 모든 정복에서 동등한 몫을 배당 받는다는 조건으로 수송수단과 음식물을 제공하는 데 동의하였고, 50척의 전함을 기증하였다. 엔리코 단돌로(약 1108-1205)는 십자군이 자라(Zara)를 점령한다면 임시적으로 채무를 변제해줄 것을 동의하였다. 자라라는 도시는 아드리아해 동쪽에 있는 도시로서 베네치아의 지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바 있었다. 그리하여 제 4차 십자군은 1202년에 이 로마 카톨릭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격노한 인노센트 3세는 이 십자군을 파문에 처하였다.
그렇지만 제 4차 십자군은 새로운 목표인 콘스탄티노플을 향하여 눈을 돌렸다. 독일 왕인 슈바비아의 필립은 왕위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알렉시우스를 군대로써 콘스탄티노플까지 호위해주고 그를 왕위에 앉히자고 제안하였다. 이 일이 성공을 거둔다면, 알렉시우스는 이집트를 대상으로 한 그 다음의 원정에 대한 자금을 지원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1203년 봄에 제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였다. 수 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찬탈자인 알렉시우스 3세는 도시를 방어하기 위하여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도시가 수비되고 있기는 했지만, 최초의 공격에서 십자군은 해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육지와 해상에서 행해진 두 번째 공격으로 방어망이 뚫렸고, 알렉시우스 3세는 도시를 탈출하였다.
1204년 3월에 십자군과 베네치아 인들은 그 도시를 두 번째로 장악하는 데 합의하고는 라틴 계통의 인물을 황제로 선출하기로 하였다. 이 포위 공격은 성공을 거두었고, 콘스탄티노플은 3일 동안 약탈되었다. 교황은 이 때 자행된 불법 행위를 비난하였다. 모든 도서관과 예술소장품이 파괴되었으나, 베니스 인들이 가능한 만큼 건져서 그것을 베니스로 운반하였다. 그 중에서도 십자가 실물 및 세례(침례) 요한의 머리 일부라고 여겨지던 조각 등의 성유물은 특히 중요하였다.
순수하고 맹목적인 신앙은 소위 1212년의 "어린이 십자군"이라는 가장 끔찍스럽고 파국적인 에피소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여기 참가한 어린이들은 군사력으로 안 되는 곳에서는 신앙심, 사랑, 희망을 가지고 이교도들을 파멸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동기는 아주 단순하고, 아주 원시적이었으며, 순박하였다. 그들의 신앙과 사랑은 앞 부분에서 말한 갱신 및 영적인 각성을 향한 전반적인 흐름의 일부분이었다.
1212년에 시작된 "어린이 십자군"은 두 차례 있었는데, 하나는 라인란트에서, 다른 하나는 르와르 계곡에서 시작되었다. 열 살 짜리 소년인 니콜라스는 쾰른에서 어린이 십자군을 일으키자고 설교하였는데, 그의 주장에 대해 2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동참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순례자들이 이탈리아에 도착하였을 때, 많은 소녀들은 매음굴로 끌려 들어갔고, 어떤 소녀들은 노예로 고용되었다. 또 동방에 도착한 소년들은 결국 노예로 팔려나갔다.
1212년 5월에는 스테판이라는 이름을 가진 12살의 소년이 생 드니에 나타났다. 그는 3만 명의 어린이를 모집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마르세유에서 도둑들의 수중에 들어가 알렉산드리아로 노예로 팔려나갔다. 그들이 탄 배가 지중해에 침몰되었을 때에는 2천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익사하였다. "어린이 십자군"은 단지 간단한 에피소드였다기보다는, 대중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일종의 뿌리깊은 불안감의 부분적인 표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스테판과 연관된 기적들(동물들, 새들, 물고기, 나비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고 한다)은 다른 두 인물인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코 및 잔다르크와 연관된 사건들과 유사하였다.
제 5차 십자군 운동(1218-1221)에서 기독교인들은 이집트가 이슬람 세력의 중심지라는 생각에서 이집트 정복을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이 십자군은 참패로 끝이 났다. 황제인 프레데릭 2세(1194-1250)는 직접 6차 십자군(1228-1229)을 지휘하였다. 프레데릭은 아랍어를 말할 수 있었고 시칠리아에서 살았던 경험을 통하여 이슬람교도들을 오랫동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십자군 이래로 무력으로 십자군이 확보한 것 이상의 것을 협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는 1229년에 살라딘의 조카와 조약을 맺었는데, 그 결과 예루살렘이 라틴 세계로 반환되었다. 베들레헴과 나사렛도 양도되었고, 10년 간의 휴전이 조인되었다.
마지막 두 십자군 운동은 프랑스의 성왕(聖王)인 루이 9세(1215-1270)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루이는 1248년에 팔레스틴을 회복하려는 생각에서 이집트를 공격하였다. 전략가 자질을 전혀 갖추지 못한 루이와 그의 군대는 패하여 포로가 되어 엄청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루이는 1270년에 또 다시 북부 아프리카의 튀니지로 원정 군대를 끌고 갔다. 루이와 많은 그의 군인들이 페스트로 희생되었기 때문에 이 원정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성지에 있던 기독교인들의 영지는 서서히 탈취되었다. 십자군의 마지막 요새였던 아크레는 1291년에 항복하고 말았다.
4. 십자군 운동의 결과
십자군 운동이 유럽사에 미친 궁극적인 결과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분명한 것은 십자군이 그들의 정복 활동의 가시적인 유물인 성(城)들이 위치한 동방 지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별로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문화 사이에 교류와 충돌이 일어남으로써 양측 사람들의 시야가 좀더 확대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이 서로에 대해 보다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친 곳은 성지라기보다는 스페인과 시칠리아에서였다.
하지만 십자군 운동으로 인하여 유럽 내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말썽 많은 기사들의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십자군은 전쟁을 벌이려는 그들의 취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출구를 제공해주었다. 또한 유럽의 군주들은 전사 계급이 수적으로 감소되었기 때문에 보다 용이하게 그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십자군은 또한 제노아, 피사, 베니스 같은 이탈리아 항구도시들의 경제적인 성장에 기여하였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11세기에 유럽의 부가 축적되었고 인구가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 운동이 가능하였다. 십자군은 교역을 활성화시켰을 것이지만, 교역 부흥의 원인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십자군 운동의 발생여부와는 상관없이 동쪽 지역과 교역을 추진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1차 십자군 운동의 믿기 어려운 성공으로 인하여 중세 서방의 자신감이 증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수세기 동안 유럽은 이슬람 세력에 대하여 수세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제 서방 군대는 이슬람 세력의 중심으로 행군해 들어갈 수 있었고, 그들이 탐내던 전리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12세기는 낙관의 시대이자 부흥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서방 기독교인들에게는 마치 신이 자기들 편에 있고 자기들이 무언가를 이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십자군 운동의 대차대조표에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있었다. 십자군이 서방 내에서 유대인들을, 해외에서 이슬람교도들을 야만적으로 살해한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십자군은 확실히 비잔틴 제국과 서방의 관계를 더욱 빠른 속도로 악화시켰고, 비잔틴 지역의 파괴에 기여함으로써 나중에 파국적인 결말이 초래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