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일터, 달밤의 힙지로… 당신의 을지로는 ‘몇 시’인가요
[아무튼, 주말]
아침부터 밤까지 12시간
을지로의 네 가지 얼굴
김은경 기자
입력 2023.06.03. 03:00
업데이트 2023.06.03. 03:10
누구는 “1980년대가 박제된 곳”이라고 했고 누구는 “못 만들어내는 게 없는 마법 같은 곳”이라고 했다. 20대인 동생은 “힙지로?” 하고 되물었다. 서울 을지로에 간다고 하니 한마디씩 거드는 말은 이렇게 제각각이다. 가서 먹어 보란 것도 꼽다 보니 열 손가락이 모자랐다.
연휴 마지막 날이던 지난달 29일 을지로를 걸었다. 1930년대 어느 날 대낮부터 새벽까지 경성 거리를 돌아다닌 소설가 구보씨처럼 온종일 발길 가는 대로 을지로 3~4가의 꼬불꼬불한 골목을 배회했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동안 을지로는 몇 번이고 얼굴을 바꿨다.
◇오전, 인쇄기와 삼발이가 굴러간다
오전 10시. 을지로4가 동양인쇄사 황창섭 대표가 인쇄기에서 나오는 종이를 살펴보고 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김은경 기자
오전 10시. 을지로4가 동양인쇄사 황창섭 대표가 인쇄기에서 나오는 종이를 살펴보고 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김은경 기자
오전 10시, 비 그친 을지로 인쇄 골목의 아침은 저마다 점포 앞 방수 천막을 걷어내고 파지 가득한 마대를 꺼내놓는 일로 시작됐다.
“거 봐, 빈병 짝을 밖에다 그냥 두더니 소주병에 빗물 찼잖어.”
인쇄소는 우천 대비에 더 철저한 것일까. 어느 인쇄소 사장이 옆집 식당 주인장에게 핀잔을 준다.
눅눅한 공기를 뚫고 진한 잉크 냄새가 풍기는 문으로 들어섰다. 두 평 남짓한 내부를 꽉 채운 인쇄기가 “철커덕 철커덕” 소리를 내며 얇은 습자지에 유아복 브랜드 로고를 찍어내고 있었다. 같이 일한 세월이 30년을 넘었다는 75세 동갑내기 두 노공이 말없이 합을 맞췄다. 한 명이 종이를 인쇄기에 넣기 전 한 장씩 잘 들어가도록 살짝 구기고, 한 명은 결과물을 검수한 뒤 착착 쌓아 올렸다.
골목을 가득 채우던 기계 소리는 예전만큼 요란하지 않다. 연하장이나 전단 광고는 해마다 줄어들고 대학이나 학원에서는 디지털 기기로 공부하는 ‘페이퍼리스(paperless)’가 대세다. 이날 인쇄 골목의 절반 정도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인쇄기를 청소하러 나왔다는 사장은 “1990년대엔 수요를 맞추느라 밤낮도 일요일도 없었지만, 요즘에는 휴일이면 많이들 쉰다”고 했다.
서울 중구 을지로3가 인쇄 골목 전경. /김은경 기자
서울 중구 을지로3가 인쇄 골목 전경. /김은경 기자
한낮의 을지로는 그래도 아직 일터였다. 방산시장 인근 인쇄 골목 어느 가게에서는 커다란 기계가 ‘우르르르’ 소리를 냈다. 종이를 일정한 모양으로 자르고, 접을 수 있게 누름 자국을 내주는 ‘도무송(톰슨 인쇄기의 일본식 발음)’이라고 했다. 도무송에서 나오는 종이에는 ‘강릉세계합창대회’라고 적혀 있었다. 김오장(59) 대표는 “기념품 포장 상자를 만드는 것”이라며 “이거 하나 만들려면 종이가 이 일대 가게를 다섯 군데는 거쳐야 한다”고 했다.
작은 업체들이 올망졸망 모인 인쇄 골목은 확실한 분업 체계를 갖추고 있다. ‘지업사’에서 종이를 떼고 ‘인쇄소’에서 글씨와 그림을 인쇄한다. ‘금박집’에서 금이나 홀로그램 무늬를 입히고 ‘도무송’으로 가져와 원하는 모양으로 잘라낸다. 그러고 나면 ‘접착집’으로 배달해 손으로 접고 손잡이를 끼워 완성품을 만든다. 여기서 저기로, 화물칸을 단 삼발이(삼륜 오토바이)가 종이를 실어 나른다. 수십 년 손발을 맞춰 온 이 골목은 한 덩어리 커다란 공장이다.
식당 갈 틈도 없이 인쇄기를 돌릴 때의 관습일까. 머리에 얹은 점심 한 상도, 양은 쟁반 위 아이스 커피도 흔들림 없이 잰걸음으로 옮기는 신속 배달 서비스의 원형도 이곳에 박제돼 있었다.
◇오후, 공구 거리는 삼겹살 야장으로
오후 4시. 세운대림상가 옆 공구거리 골목에 줄줄이 삼겹살 야장이 들어선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김은경 기자
오후 4시. 세운대림상가 옆 공구거리 골목에 줄줄이 삼겹살 야장이 들어선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김은경 기자
오후 4시쯤이 되자 세운대림상가 옆 공구거리가 부산해졌다. ‘금강정밀’ ‘신일판금’ ‘원일기어’ 등 오래된 간판들 사이 네모난 플라스틱 테이블이 조밀하게 늘어섰다.
을지로 ‘야장 삼겹살’ 삼대장인 대원식당, 삼미정, 향촌식당은 작은 공업사들 사이에서 20여 년간 기공들의 허기를 채우고 있는 노포 백반집이다. 공업사가 문을 닫는 저녁, 골목에 간이 테이블을 몇 개 두고 삼겹살을 팔던 것이 최근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힙하다’고 소문을 탔다.
테이블이 차기 시작했다. 해가 떨어지면 한 시간씩 줄 서서 먹는다기에 재빨리 한 자리 차지해 앉았다. 삼겹살은 1인분에 1만5000원. 불판에 고기와 김치를 올리고 주변 테이블을 돌아보니 너도나도 색이 바랜 셔터문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느라 바쁘다. 고소한 삼겹살과 잘 익은 갓김치의 조합은 그 무섭다는 ‘아는 맛’이다. “이모, 맥주 한 병 추가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자 날아든 호령. “술은 갖다 드셔!”
을지로 공구 거리에서 맛보는 야장 삼겹살. /김은경 기자
을지로 공구 거리에서 맛보는 야장 삼겹살. /김은경 기자
‘야장은 9시까지’. 벽에 적힌 안내문을 보고 싱거운 궁금증이 일었다. 아직은 해가 중천인데, 야장은 ‘夜場’인가 아니면 ‘野場’인가. 테이블 사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이모한테 물어봤다간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았다. 하긴 한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인스타그램에 ‘#을지로야장’이라고 해시태그를 단 어느 게시물이 더 중요한 걸 말해준다. ‘요즘 날씨에 안 가면 유죄’.
◇저녁, 노가리 골목 달리는 도심 러너
오후 8시 반. 러닝 크루 ‘CVS’ 회원들이 노가리 골목 만선호프 앞을 달리고 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김은경 기자
오후 8시 반. 러닝 크루 ‘CVS’ 회원들이 노가리 골목 만선호프 앞을 달리고 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김은경 기자
을지로 골목마다 본격적으로 야장이 펼쳐진 오후 8시 반쯤, 왁자지껄한 노가리 골목 한복판을 운동복 차림의 남녀 열댓 명이 뛰어 들어왔다. 러닝 크루 ‘CVS’가 청계천, 광화문, 창경궁을 달리고 짐을 맡겨둔 을지로3가 단골 호프집으로 돌아오는 길. 단숨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저녁 시간 을지로 일대에선 도심 러너(runner·달리는 사람)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저녁이면 알알이 조명이 불을 밝히는 세운대림상가 공중 보행교나 불 꺼진 인쇄 골목도 러너들 사이 이름난 코스다. CVS 리더 김혁진(38)씨는 “을지로는 방산시장이나 공업사 주변에서 특유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고, 최근 보행로도 달리기 좋게 정비되면서 주요 러닝 코스가 됐다”고 했다.
서울 강남구에서 온 성정민(38)씨는 “강변이나 운동장 트랙을 달릴 때와 달리 퇴근하는 직장인들, 노상에서 맥주 마시는 사람들, 골목 곳곳을 눈에 담을 수 있어 심심할 틈이 없다”며 “달리다 보면 야장에서 술을 마시는 분들이 ‘멋있다’며 응원하거나 하이파이브를 해주기도 한다”고 했다.
서울대로 한 달짜리 교류 프로그램을 온 미국 유학생 샘(23)씨도 을지로 러닝에 빠졌다. 그는 “뉴욕에선 공원이나 산책로에서 달리는 게 일반적이어서 도시를 달리는 것은 새롭다”며 “짧은 구간을 달리는데도 풍경이 정말 다양하다”고 말했다.
러닝이 끝나고 짐을 맡아 준 호프집에서 뒤풀이하는 건 ‘국룰(일반적 규칙)’. 한껏 땀 흘리고 시원하게 들이켜는 맥주가 달콤해 보였다.
◇밤, 슬레이트 지붕도 뷰가 된다
오후 10시 을지로3가 루프톱 바에서 본 도심의 두 표정. 원경에는 오피스 빌딩들이, 근경에는 다른 루프톱 바와 공사장 가림막이 보인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김은경 기자
오후 10시 을지로3가 루프톱 바에서 본 도심의 두 표정. 원경에는 오피스 빌딩들이, 근경에는 다른 루프톱 바와 공사장 가림막이 보인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김은경 기자
밤 10시, 을지로 하늘에 달이 떴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골뱅이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옥상에서 유독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건물들이 나온다. 그중 한 곳인 ‘어나더레벨’ 5층으로 올라갔다. 노란 알전구와 인조잔디로 꾸며 놓은 옥상은 노상과 퍽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주변을 돌아보니 낡은 슬레이트 지붕들을 고층 오피스 빌딩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나 반짝이는 청계천 야경을 기대하면 실망할 수도 있다. 대학 동기들과 루프톱 바를 찾은 임유림(21)씨는 “엉킨 전깃줄과 허름한 건물들, 어떤 데는 공사판만 보이는 곳도 있는데 그게 을지로 루프톱만의 감성”이라며 깔깔 웃었다.
근방에는 옥상에 포장마차 천막을 치고 가맥집(가게맥줏집)처럼 꾸며 놓은 ‘을지상회’나, 야장 삼겹살집을 옥탑에 올려 놓은 ‘베타서비스 오오옥’ 등 을지로의 정체성을 즐길 수 있는 루프톱도 있다. 빼어난 전망은 없어도 가성비만큼은 다른 루프톱 뒤지지 않는다.
만보기 앱을 켜보니 1만8932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2만보를 채울까 말까 실없는 고민이 시작됐다. 일단 딱 한 잔만 더 하고.
김은경 기자
김은경 기자 편집국 주말뉴스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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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ong
2023.06.03 07:04:01
젊은이들이 단지 요즘 힙한곳이어서 을지로쪽에 가서 놀고 먹고만 오지말고 윗세대 분들이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고생하시면서 가정과 나라를 일궈 가셨나를 느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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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단배돛
2023.06.03 08:23:21
영특한 젊은이들인데 놀고만 오겠습니까? 그런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될듯합니다.
참죽
2023.06.03 06:52:47
인쇄기 앞에 앉아 있는 분의 척추가 유난히 굽어 있다. 수십년간의 노동의 흔적.....
답글작성
22
1
술퍼맨
2023.06.03 06:52:10
과거와 같이 들어서 짐 옮기던 시대가 아닙니다 그 시장 그 전통 그 기술 계속 이어가려면 주차나 차량이동과 화물운송 구조를 변경해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적어도 시대에 필요하지 않은 제품이 생겨도 다른 상품로 전환하여 시장과 전통은 존속되겠지요..
답글작성
17
1
천마필승
2023.06.03 07:17:24
역시 서울이 좋네. 지방은 한적한데
답글작성
5
0
보수우파 개딸
2023.06.03 07:54:21
인간의 본성은 시대가 아무리 현대화 한다해도 변하지 않는 법. 그래서 재벌 회장도 비행기에서 라면을 찾는 것
답글작성
4
1
조2
2023.06.03 10:03:39
아아, 글이 정겹다. 학교 다니던 시절, 그래도 대량 인쇄할 것이 있으면 학교앞보다 저렴하니 이 곳으로 들고와 맡겼고, 칼라 인쇄기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도 한 장 뽑으려 이곳으로 왔고, 입사 후 결혼 때 청첩장 찍으러 회사 거래업체가 있던 이곳에 찾아와 값싸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세월이 지나 칼라 복합기가 많아지고, 페퍼리스 되다보니 갈 일도 없어지고, 있다해도 이멜로 화일 보내 우편으로 받았지. 직접가서 기다리다 근처 국밥집에서 한 그릇 요기하며 기다리던 을지로 인쇄골목 그립다
답글작성
1
0
문잡자
2023.06.03 10:06:36
많은 사람으로 북쩍이던 70년 때의 을지로, 그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한가롭고 썰랑한 지역. 초등학교 그리고 극장이 몇개가 사라졌는지?? 폐업하고 임대게시물을 붙인 점포들이 ...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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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다정종고
2023.06.03 09:28:35
이제 을지로는 도심이고 교통도 좋고 하니 땅값에 어울리는 업종으로 전환이 불가피하다. 보다 수익성이 좋은 부동산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도심에는 높은 주거용, 상업용 빌딩이 적합하다. 아마도 을지로 청계천 일대에 있는 이런 업종은 외곽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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