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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이상향 신라는 불멸의 섬
상)중국 동해의 북쪽 끝 발해해협의 묘도군도지도.
하)장도에 세워진 동해와 발해의 경계를 표시한 탑
아랍인들이 양자강 이남 지역만을 교역의 대상으로 삼았던게 아니라 그들이 이상향으로 그리워하던 동방의
이상향이라고 부르던 불멸의 섬까지 갔던 것입니다.
중국을 중심으로 <동방>이라고 하면 중국의 동쪽은 모두를 동방으로 부를수 있겠지만 기록에 나타나는
<東方>의 표준이란 등주의 맞은편에 있는 장도가 표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즉 이곳이 동이족의 근거지인 <우이>지역으로서 일출처(日出處)인 양곡(暘谷)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돛배 띄워라, 동방의 이상향 신라로 가자”
우리와 이웃하면서 한 문명권에서 살아온 중국이나 일본말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알고 찾아와서
교제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들일까? 그 동안 그 해답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서양사람들이 우리더러 세상과 동떨어진 호젓한 ‘은둔의 나라’라고 하니, 남들은
물론, 우리 마저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히 넘겨버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 정답은 중세 아랍사람들이 주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254년 경 프랑스 루이 9세가 원나라 헌종 황제에게 파견한 사신 루브루크가 돌아가
쓴 여행기에서 ‘섬의 나라 까우레’라고 한마디 한 것이 유럽에 알려진 첫 한국 소식이고,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스페인 선교사 더 세스페데스가 1593년 12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 웅천항(熊川港)
에 도착한 것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의 한국행이며, 1627년 일본 나가사키로 항행하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우연히 표착한 네덜란드 상선 오우베르케르크호가 한국 해안에 나타난 최초의 서양 배라고 알려져
있다.
9세기 지리서 “중국동쪽 위치”
그러나 루브루크보다 4~5백년, 더 세스페데스보다는 무려 7~8백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인들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귀중한 사료들이 중세의 여러 아랍문헌에 기록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요컨대, 한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람들은 다름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인들로서 그 역사는 자그만치 1천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으며, 그들은 어떻게 신라를 세계에 알리고 있었던
것일까 ? 그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화상이기도 하고, 세계 속에서 일찍이 우리 겨레가 누리던
드높은 위상이기도 하여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세 아랍인들에게 신라는 한마디로 ‘동방의 이상향’이었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세상에는 ‘행운의 섬’이나 ‘불멸의 섬’으로 알려진 이상향이 두 곳에 있는데,
그 하나는 서방의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대서양 상의 신비의 섬 아틀란티스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동방의
신라다.
그러나 같은 이상향이라도 아틀란티스는 무인도인데 반해, 신라는 사람이 사는 유인도로서 경작지와 과수
원이 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아틀란티스는 전설 속의 한낱 이상향에 불과하지면, 신라는 속세의 살아숨쉬는 이상향이라
는 것이다.
물론, 문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는 신라가 동경과 선망의 대상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동경과 선망은 신라에 대한 그들 나름의 지견이나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 쇠사슬도 금붙이인 나라”
아랍인들은 지구상에서 신라가 어디에 있는가를 일찌감치 제대로 알아냈다.
섬과 산이 많은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에 있으며 바다(태평양)로 에워싸여 있다고 9세기 중엽에
나온 한 지리서가 지적한다.
이것은 중국보다 더 동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육지의 동단을 오로지 중국으로만
보아 오던 종래의 그리스-로마의 지리관을 타파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지식을 첨가한 엄청난 발견
으로 평가된다.
신라의 지리와 관련한 아랍 학자들의 기술에서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가 자리한 사실이다.
그는 전래의 지리지식을 집대성하여 지은 <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년)이란 책 속에 한 장의 세계
지도와 70장의 지역세분도를 그려넣었다.
그는 아랍의 전통적 ‘7기후대설’에 따라 지구를 7개 지역으로 나누고, 매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다시 10
등분하여 각기 지도 한 장씩을 제작함으로써 총 70장의 지역세분도를 완성하였다.
그 제1지역도 제10세분도에 5개 섬으로 구성된 신라를 명기하고 있다.
이 지도는 이때까지 유럽의 세계지도에 처음으로 한국이 등장한 스페인의 벨호 세계지도(1562년 제작)
보다 무려 408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아랍 지도야말로 한국 이름이 적힌 세계지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원래 이드리시의 세계지도는 이라크 과학원이 1951년에 너비 2m, 폭 1m의 대형지도로 복원하였다.
필자는 1979년 바그다드박물관 전시실에서 벽에 걸려있는 이 지도를 목격한 바 있다.
그래서 지난해 취재차 이 박물관을 찾아가는 모 방송사 취재진에게 확인을 부탁했더니, 지도는커녕 박물관
전체가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반문명인들에 의해 저지러진 저주 받을 현대판 반달리즘(문명 파괴)에 그저 비분강개할 뿐이다.
중세 아랍인들은 이렇게 신라의 위치나 지형뿐만 아니라, 신라의 자연환경에 관해서도 놀라운 기록들을
남겨놓고 있다.
열사에 찌들고 풍랑에 지친 그들에게 산명수려한 자연경관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소기의 안주처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신라는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고 정착하고야 만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황금이 지천에 깔려 있는, 말 그대로의 ‘황금의 나라’다.
금이 너무나 흔해서 가옥은 금으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고 금제 식기를 쓰며, 심지어 개의 쇠사슬도 금
으로 만든다는 것이 그들이 믿고있는 신라의 황금상이다.
비단·담비가죽·계피등 풍부
이와 더불어 그들은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심정에서 신라인들의 유족한 생활상과 쾌적한 환경을 세심한
필치로 이모저모 묘사하고 있다.
지리학자 까즈위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의 나라이다.
그곳에서는 공기가 깨끗하며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해서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향유고래에서 나는 사향 못지 않은 향료)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이 이곳에 오면 곧 완치된다.
.... 알라만이 시혜자이다.”
그 환경이 얼마나 정갈했으면 물 뿌린 집에서 용연향이 풍기고, 불구자도 없으며, 외지에서 온 환자는
금새 치유되겠는가 하는 극찬의 표현이다.
그러면서 이슬람적 세계관에 훈육된 사람답게 그는 신라의 이와 같은 윤택한 생활환경을 유일신 알라의
시혜로 돌린다.
그런가 하면 신라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찬사도 아끼지 않는다.
인종학적으로 인간 외모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또한 무모한 일이지만, 그들이 지적한
‘가장 아름다운 외모’란 무구무병한 환경에서 사는 신라인들이야말로 그 외모가 준수할 수밖에 없다는 하나
의 은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신라인들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대인관계에서의 친절성이나 유화성, 신뢰성 같은 것을 의미
하는 것이다. 신라인들의 외모가 아름답다거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그들의 높은 문화수준과 윤리
도덕성에 대해 아랍인들이 품고있는 일종의 선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해 바닷길 통해 물산 교류
그밖에 신라인들의 종족적 기원이나 신라의 대외관계,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 관한 기술에서도 눈길을 끄는
여러 대목이 있다.
예컨대, 신라인들은 “중국 황제와 서로 선물을 주고 받고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들
에게 비를 내려주지 않는다”는 기록이 몇 군데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신라인들이 중국 황제와 서로 선물을 교환한다는 내용이다.
신라와 중국(당나라)간의 관계는 모화사상이나 사대주의에 바탕한 조공관계가 기본이었다는 통념에 반해,
양국간에는 상호성에 입각한 선물교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기술은 양국관계의 다른 한 측면을
음미해 보게 한다.
서로가 선물을 교환하지 않으면 천벌로 가믐이 들게 한다는 것은 천리를 빌어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동방의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신라에서 나는 물산이 아랍인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9세기 후반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신라에서 비단(하리르), 검(피린드), 사향(미스크), 말안장(수루즈),
흑담비(삿무르)가죽, 오지그릇(가돠르), 계피(다루쉰) 등 물품(그밖에 몇 가지는 확인 안됨)을 수입해
갔다.
그 통로는 주로 중세 아랍 상인들의 활동 무대였던 남해의 바닷길로서, 여기에는 아랍 특유의 돛배가
이용되었다.
비단이나 검, 오지그릇이 국제무역품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신라의 대외교류사에서 자못 의미있는 일이다.
‘은둔의 나라’는 왜곡된 시각
이렇듯 중세 아랍인들의 캔버스에는 윤색 같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신라의 넉넉하고 진취적인 자화상이
생생히 그려져있다.
이런 것을 알 바 없는 서구인들은 19세기 말 우리를 ‘은둔’의 화신으로 곡필했고, 거의나 같은 시기에
일본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신라에 관한 중세 아랍문헌의 기술은 신라가 아닌 일본에 관한 기술이라고
아전인수하는 이른바 ‘신라일본비정설’을 들고 나와 반세기 동안이나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 여파는 우리네 학계까지 던져졌다.
나라가 힘이 약하고 학문이 뒤쳐지면 참 역사가 난도질 당한다는 뼈저린 교훈이다.
무하마드 깐수 (정수일 교수)의 글 인용
계림주대도독과 신라구주 (鷄林州大都督 新羅九州)
신라구주 영역도(新羅九州領域圖)
<신라구주 분포도 편집 :필자> 저본: 1749년 프랑스 당빌 제작 경희대 혜정박물관 소장
이 지도는 ‘북방영토-대륙의 관문, 민족의 터전’.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대의 북방영토가 우리 삶의 중요한
무대였음을 보여줍니다.
18, 19세기 초반의 숱한 서양고지도들은 압록강 북쪽 봉황성 일대에서 시작해 두만강 위쪽으로 조선의
국경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신라와 발해,거란의 국경선은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이 지도의 강역 표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정도입니다.
무주와 전주,그리고 강주의 위치는 대강의 설명과 거란지리지도를 참고하였습니다.
<九州之設東至吉林西至廣寧跨海蓋而包朝鮮幅員式擴矣>
<구주는 동으로 길림에서, 서로는 광령에 이르고, 바다를 건너 조선이 안고있는 폭까지 확대한다.>
고구려: 오골성(烏骨城).책성柵城. 경주(慶州). 신라:동주 낙랑부(東州 樂浪府. 발해:동경 용원부(東京
龍原府. 책성柵城). 요:개주(開州) 고려:동경東京,개성(開城)=~송악으로 천도하여 皇都를 신축 일명
개성 또는 개경으로 부름. 명(明):봉황성보(鳳皇城堡) *** 通考 髙麗 以新羅為 東州樂浪府 號東京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이라는 관직에 대한 역활을 알기 위해서 인터넷을 검색하였더니 대체적으로
라.당 연합전 이후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주라고 명명하여 당나라의 일개주로 편입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책봉하여 신라왕을 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라는 이때부터 신라가 아니라 계림이라는 별명이 하나 더 붙은것으로 알고있는것이 상식처럼
되어버린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 모두가<<삼국사기>><신라본기>에 애매하게 기록됨으로서 독자들을 기만하고 있는것입
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천부당 만부당한 해석이지요.
왜냐면 계림주란 신라를 통틀어 말한것이 아니고 전쟁후 새롭게 편입된 요동반도의 길림에서 철령지방
이남을 말한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전 이미 신라와 백제는 동반하여 요동반도의 거의 전부를 점유한 사실과 전쟁후 백제가 점유했던
영토까지 신라로 편입시켰던 사실을 숨기려다 보니 이와같이 웃지못할 기록들이 지금 까지도 상식화되어
남아 있다고 봅니다.
중국인들의 동북공정만 원망할게 아니라 우리의 기본사서들의 오류를 먼저 확인하고 공개하여 불순세력
들의 공작을 미리 차단해야 될 것입니다.<만주원류고>에서 신라구주 참조
당나라에서 번국의 왕들에게 내리는 책봉명은 자국의 왕 이외에 점령지의 감독권을 위임하는 별정직인것
입니다.
그러니까 신라의 문무왕에게 계림주대독이라는 별도직이 책봉되었다면 신라 이외의 영토에서 수행하는
직책을 말한다는 뜻이지요.
예를 들어 신라가 요동을 점령하여 실재적인 통치권을 행사한다 하더라도 당나라는 마치 그 권한을 위임한
것처럼 책봉의 형식을 취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문무왕부터 시작되는 계림주대도독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당연히 설명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대도 역주 하나없이 입을 닫았습니다.
결과 신라를 당나라의 일개 주로 편입시키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았다는 오해를 불러오도록
유도하였던 것입니다.
다음은 백제영토 분쟁때문에 거두었던 문무대왕의 신라왕 책봉을 회복시키는 대목입니다.
[法敏 遣使入朝謝 仁問乃還辭王 詔復法敏 官爵 然多取 百濟地 遂抵髙麗南境矣(按唐會要言 盡有百濟之地
及髙麗南境 盖髙麗北境 已屬渤海 故新羅既有百濟之地 又兼有 髙麗南境 非得百濟而 始抵髙麗之南也 新書
誤 會及字之意 與髙麗傳不合 謹詳訂于從)
법민法敏이 사신을 보내 사과하였다. 인문仁問 또한 왕위를 사양하고 돌아왔다.
조칙으로 법민法敏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백제의 땅을 많이 차지하여 드디어 고구려의 남쪽 지경과 접하였다. (살피건대「당회요唐會要」
에는 “백제의 땅과 고구려의 남쪽 지경을 모두 차지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고구려의 북쪽 지경은 이미 발해가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는 이미 백제의 땅과 고구려의 남쪽 지경
을 차지하였다. 백제땅을 얻거나 처음으로 고구려의 남쪽과 접한 것이 아니다.
신당서가 당회요의 글자의 의미를 오해한 것으로서 고구려전과 합치되지 않는다.
삼가 상세히 정정하고 이에 따른다.)]
하지만 이 계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청국인들이 기록한 <만주원류고>에서 발견된것입니다.
계림은 길림에서 온 말이고 신라는 나당 전쟁이후 신라구주를 만주에 두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신라구주의 강역이 한반도를 벗어난 요동땅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독자님들 께서는 혹시<<삼국사기>>에서 신라가 한반도의 영역을 벗어났다는 기록을 보신적이 있나요.
필자의 앞글들을 참고하시면 신라의 요동 진출에 대해서 어느정도 감이 잡히실것입니다.
그러면 대도독(大都督)이란 어떤 역활을 하던 기구인지 <엠파스 백과>를 통해서 알아봅니다.
<당나라가 신라와 함께 백제를 정벌한 뒤 그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지방 최고군사행정기구.
본래 도독부는 중국 수나라의 총관부(總管府)를 계승한 당나라의 관부로, 대·중·소 도독부의 구분이 있었다.
특히, 대도독부에는 도독 1인, 장사(長史) 1인, 사마(司馬) 2인,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 2인, 녹사 2인,
전옥(典獄) 16인, 문사(問事) 10인, 일직(日直) 24인, 시령(市令) 1인, 승(丞) 1인, 좌(佐) 1인, 사(史)
12인, 창독(倉督) 2인의 관원과 경학박사(經學博士) 1인, 조교(助敎) 2인, 학생(學生) 60인,
그리고 의학박사 1인, 조교 1인, 학생 15인 등을 두고 교육에 임하게 하였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한 뒤 그 고토를 확보, 지배하기 위해 한반도에 도독부를 두었다.
660년 9월 백제를 정벌한 직후, 당나라는 백제 고토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
(德安) 등 5도독부를 두고, 그 아래 주·현을 통괄하게 하였다.
(도독부를 한반도에 둔것이 아니라 요동에 둔것입니다.
이때 웅진도독부는 개주의 건안성에 있었습니다. 필자 주)
아울러 백제 출신 추장으로 도독·자사(刺史)·현령을 삼아 다스리게 하였으며, 낭장 유인원(劉仁願)으로
도성을 지키게 하고, 좌위중낭장(左衛中郎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그러나 9월 28일 왕문도는 신라 무열왕에게 당나라의 조서를 전달하는 삼년산성(三年山城)의 식전(式典)
에서 급서하여 그의 종자가 대신 식을 마쳤다.
그 뒤 신라가 백제부흥군을 접수하고 당군에 대항하면서 노골적인 반당정책(反唐政策)을 추진하자,
당나라는 663년(문무왕 3) 신라를 계림주대도독부(鷄林州大都督府)로 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사실은 신라가 백제부흥군을 접수한 이후 당나라에 대항하자 당황제는 문무왕을 신라왕과 대도독직에서
폐하고 그의 동생 김인문에게 대신 신라왕과 대도독직을 책봉하여 신라로 보냈으나 그 도중 문무왕의
사과로 모든직은 복위되고 김인문은 다시 당나라로 돌아가 종전의 직을 수행하였습니다. 필자 주)
또한,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을 원활하게 단행하고 신라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660년에 당으로 붙들어
갔던 의자왕의 태자 부여 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삼은 뒤, 취리산(就利山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연미산)에서 백마를 희생시켜 문무왕과 화친을 맹약하게 하였다.
(이는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백제의 구토를 당나라의 영양권에 두기 위해서 당나라가 수작을 부린것입
니다. 그러나 문무왕은 이에 개의치않고 백제의 부흥세력을 접수하여 공동으로 당과 대치하였습니다.
필자 주> (출전:엠파스백과)
≪참고문헌≫ 三國史記
신라가 요동반도의 계림과 철령 남쪽에서 시작하여 백제의 구토를 모두 접수하고 신라구주를 설치하였다는
<만주원류고>의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라.당연합군과 고구려의 전쟁이 끝나고 백제의 강역이었던 요동반도의 서쪽지역을 당나라가 차지하려고
하자 신라는 당나라의 약속위반에 반발하여 이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서 7년이란 긴 세월을 싸워서 기어코
이긴것입니다.
이에 당 황제는 노발하여 문무왕을 신라왕직에서 삭탈관직하고 그의 동생인 김인문을 신라왕과 계림주대
도독으로 책봉하였으나 쾌임도중 문무왕의 사죄를 받아들여 왕직을 원상회복시킴으로서 요동반도의 신라
통치가 굳어진것입니다. 다음 기록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欽定滿洲源流考 卷9 疆域2 .
2. 신라부분
謹案新羅始附庸於百濟後兼加羅任那諸國與百濟爲隣考其疆土東南並有今朝鮮之慶尙江原二道西北直至今
吉林烏拉又西近開原鐵嶺唐顯慶以後又得百濟故地及高麗南境於是東西增九百里南北增千餘里開元以後渤
海盛强其西北諸境盡爲所倂新羅所有僅鴨淥江以南唐末高麗復起割其南境曁渤海爲契丹所侵於是新羅西與
契丹以海州巖淵縣爲界西北與契丹以鴨淥江東八里黃土嶺爲界矣雞林州之名始於唐龍朔三年以其國爲雞林
州大都督府國王世襲都督之號以音譯及地理考之卽今吉林許亢宗行程錄云自咸州至同州東望大山卽新羅山
遼之咸州今爲咸平芬州今爲銅山縣俱在今鐵嶺開原之間東至威遠堡門卽吉林界則州名取此無疑第其後地爲
渤海所得而都督之號則仍係新羅於是幷朝鮮之地亦沿雞林之稱耳七重城在朝鮮慶州北南臨發盧河舊唐書言
劉仁軌率兵絶匏盧河攻七重城卽此水也買肖城亦在其地當時用兵皆自登萊浮海往來故多在朝鮮界也至九州
之設東至吉林西至廣寧跨海蓋而包朝鮮幅員式擴矣
(주요내용개략)
- 신라는 백제의 부용국이었다가 가라와 임나등을 합병한 후 대등해졌다
- 신라의 동남은 지금 조선의 경상도/강원도이며 서북으로는 지금의 길림오랍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개원과
철령에 가깝다. 당나라 현경이후에 백제의 땅과 고구려 남쪽을 얻어 동서로 900리 남북으로는 1000여리가
더 커졌다.
개원(713년) 이후 발해가 강해져 그 서북의 땅을 발해에 빼앗겨 신라는 압록강(요하) 이남땅만 남았다.
- 당말에 고려(왕건)가 다시 일어나 그 남쪽땅을 차지하고 발해는 거란에 망해 신라는 서로는 해주 암연현
(개주)으로 거란과 경계를 삼고, 서북으로는 압록강 동쪽 8리에 있는 황토령(사고)으로 거란과 경계를
삼았다.
- 당의 용삭3년(663년)에 신라를 계림주대도독부로 삼았는데 계림은 지금의 길림이다.
주석
按是時髙麗北境已屬渤海, 新羅既有百濟之地又兼有髙麗南境, 非得百濟而始抵髙麗之南也, 尚州全州遼金皆
有之朝鮮亦有之, 遼地志云尚州屬東京路本漢襄平縣地渤海為東平寨, 金地志云全州屬北京路治安豐縣, 二史
並未詳沿革之由, 或遼金所置徒襲其名未必即其舊地也, 朝鮮慶尚道之尚州本辰韓南境為新羅故地, 全羅道之
全州本弁韓邊境為百濟要隘似為相近, 然考唐會要五代㑹要太平寰宇記皆作金州與唐書通考作全者異,
唐平髙麗嘗置金州明為金州衛即今寧海縣, 新羅既得髙麗之地其州名即沿唐舊亦未可知苐國初烏拉國有金州
城為武勲王揚古利攻克今吉林城北猶有金州山金州站實與新羅之難林州相近, 非唐以後所置其稱名當有所自也.
康州遼屬顯州去醫巫閭山不逺熊州當以熊岳為名唐儀鳯初徙熊津都督於建安城與此相近, 在葢州南六十里渤
海之杉盧郡也漢州以漢江為名本百濟地後為朝鮮王都朔州在鳯凰城東南溟州本濊地
이때 고구려의 북쪽 지경은 이미 발해에 속했고 신라는 백제 땅을 소유했으며 또한 고구려 남쪽 지경을
겸유했으므로 백제를 얻어 처음으로 고구려의 남쪽 땅을 얻은 것은 아니다.
상주 전주는 요와 금에서도 있었고 또한 조선에도 있다.
요나라 지지에서 말하기를 상주는 동경로에 속하고 漢 의 양평현이라고 하였는데 발해는 동평채를 두었다.
금나라 지지에서 말하기를 전주는 북경로에 속하고 치소는 안풍현이라 하였다.
2나라 사책에서도 연혁이 자세하지 않다.
혹 말하기를 요와 금에서 둔 것은 그냥 이름을 딴 것이고 반드시 그 옛 땅이 아니라고 하였다.
조선 경상도의 상주는 본래 진한의 남쪽 지경인데 신라의 땅이 되었고, 전라도의 전주는 본래 변한의 변경
인데 백제의 要隘가 되었으니 서로 가까울 것이다.
그리하여 당회요 오대회요 태평환우기 등에서는 모두 금주金州로 썼고 당서 통고 등에서 쓴 全자 와는
다르다.
唐國에서 고구려를 평정하고 금주金州를 둔 것을 明에서는 금주위로 삼았는데 녕해현이다.
신라는 이미 고구려의 땅을 취하였는데 그 주의 이름이 唐의 것을 따랐는지는 알 수 없다.
건국 초기에 금주성이 있었는데 무동왕 양고리가 공격하였다.
지금의 길림성 북쪽에 오히려 금주산 금주참이 있는데 여기는 신라의 계림주와 가까우며 唐 이후에 둔
것은 아니며 그 이름은 원래 있었던 것이다.
강주는 요나라 현주에 속하고 의무려산에서 멀지 않다. 웅주는 웅악에서 딴 명칭이고 唐 의봉 초에 웅진
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겨와서 서로 가까운데 개주 남쪽 60리에 있는 발해의 삼로군이다.
한주는 한강으로 인하여 얻은 이름이고 백제의 땅이다.
후에 조선의 도읍이 되었다. 삭주는 봉황성 동남에 있고 명주는 본래 예의 땅이다.
다시 <<삼국사기>><지리지>를 보시겠습니다.
다음의 기록을 <<삼국사기>> 34권-지3-지리1-01에서 옮겨봅니다.
첫머리의 문장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신라의 강계는 옛날의 기록과 같지 않다" 는 대목입니다.
* ○<新羅>疆界, 古傳記不同.
#34卷-志3-地理1-01
○<新羅>疆界, 古傳記不同. <杜佑>『通典』云: "其先本<辰韓>種, 其國在<百濟>·<&高麗{高句麗}>二國
東南, 東濱大海." <劉煦{劉 }>『唐書』云: "東南俱限大海." <宋祁>『新書』云: "東南<日本>, 西<百濟>,
北<&高麗{高句麗}>, 南濱海."
<賈耽>『四夷述』曰: "<辰韓>在<馬韓>東, 東抵海, 北與<濊>接." <新羅><崔致遠>曰: "<馬韓>則<&
高麗{高句麗}>, <卞韓>則<百濟>, < 辰韓>則<新羅>也." 此諸說, 可謂近似焉. 若『新·舊唐書』皆云: "
<卞韓>苗裔在<樂浪>之地." 『新書』又云: "東距長人, 長人者, 人長三丈, 鋸牙鉤爪, 搏人以食, <新羅>常
屯弩士數千, 守之." 此皆傳聞懸說, 非實錄也. 按兩『漢志』: "<樂浪郡>距<洛陽>東北五千里." 注曰: "屬
<幽州>, 故<朝鮮國>也." 則似與<鷄林>地分隔絶. 又相傳: 東海絶島上有大人國, 而人無見者, 豈有弩士守
之者. 今按<新羅>始祖<赫居世>, < 前漢><五鳳>元年甲子開國, 王都長三千七十五步, 廣三千一十八步,
三十五里, 六部. 國號曰<徐耶伐>, 或云<斯羅>, 或云<斯盧>, 或云<新羅>. <脫解王>九年, <始林>有
怪, 更名<鷄林>.
[삼국사기 권제34 (잡지 제3) 지리/신라/신라 강역의 경계]
*"신라 강역의 경계는 옛날의 전하는 기록이 같지 않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선조는 본래 진한(辰韓) 종족이고, 그 나라는 백제(百濟)·고구려[高麗] 두 나라의 동남쪽에 있으며,
동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었다.』
유후(劉煦)의 당서(唐書)에서는 『동쪽과 남쪽이 모두 큰 바다로 막혔다.』 하고,
송기(宋祁)의 신서(新書)에서는 『동남쪽은 일본(日本)이고, 서쪽은 백제이고, 북쪽은 고구려[高麗]이며,
남쪽은 바다에 접하였다.』고 하였다.
가탐(賈耽)의 사이술(四夷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진한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로 막혔으며, 북쪽은 예(濊)와 접하였다.』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은 “마한은 고구려[高麗]이고 변한(卞韓)은 백제이고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말하
였다.
이 여러 설이 사실에 가깝다고 하겠다.
한편 신·구당서 같은 데서는 모두 『[신라는] 변한(卞韓)의 후예로서 낙랑(樂浪) 땅에 있다.』 하였고,
신서(新書)에서는 또 이르기를 『동쪽으로 장인(長人)과 떨어져 있는데, 장인이라는 것은 사람의 키가 세
길이나 되며 톱같은 이빨과 갈고리같은 손톱으로 사람을 잡아먹기 때문에, 신라는 항상 쇠뇌 쏘는 군사
수 천으로 지키게 한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전해 들은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고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양한지(兩漢志)를 살펴 보건대 『낙랑군은 낙양(洛陽)에서 동북쪽으로 5천 리 떨어져 있다.』고 하고,
주(注)에서는 『유주(幽州)에 속하며, 옛날의 조선국(朝鮮國)이다.』라고 하였으니,
계림(林)이 있던 곳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듯하다.
또한 서로 전하는 말에 “동해의 멀리 떨어져 있는 섬 위에 대인국(大人國)이 있다.”고 하였으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어찌 쇠뇌 쏘는 군사의 지킴이 있었겠는가? 지금[고려] 살펴보건대, 신라 시조 혁거세는
전한(前漢) 오봉(五鳳) 원년 갑자(서기전 57)에 개국하였다.
서울[王都]은 길이가 3,075보(步)이고 너비가 3,018보이며, 35리(里)와 6부(部)가 있었다.
국호는 서야벌(徐耶伐) 또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 또는 신라(新羅)라고 하였다. 탈해왕 9년(서기 65)
에 시림(始林)에서 닭의 변괴가 있어서 다시 계림(鷄林)이라고 이름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기림왕 10년(307)에 다시 신라(新羅)라고 이름하였다.
기타 <만주원류고>의 다른 부분입니다.
按鷄林與今吉林音譯地里俱符是時新羅?兼有百濟高麗之地里與靺鞨故設都督府于此?王領之以重其?耳.
[滿洲源流考卷四 部族四]
按遼宋以後每以鷄林稱高麗金元時亦以鷄林郡公?高麗封號?新羅嗣王?世襲都督鷄林遂?新羅之通稱?渤海盛
而新羅偏安南境又??麗所?故高麗亦襲是稱號雖地非其舊而名仍沿之耳.
[滿洲源流考卷四 部族四]
吉林謹按吉林周以前?肅愼地漢以後屬邑婁靺鞨唐初?新羅之鷄林州尋屬渤海...
[滿洲源流考卷八 疆域一]
등등 내용이 많은 편입니다. 당에 의해 그 지역의 도독으로 신라왕이 통치권 위임을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
되는데 사실 이것만으로도 저는 상당히 흥미를 느끼는 편입니다.
현 학계의 설명에 따른다면, 신라와 당이 사이가 좋아진 다음에도 한동안 신라왕이 새로 즉위하면, 계속
계림주도독의 지위가 계승되는 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신라땅을 뺏기 위해 설치되었다는 계림주도독이
그 이후에도 계속 신라왕에게세습된다는 것은 상당히 난해해 보입니다.
더구나 신라(또는 경주)라는 같은 지역을 놓고 당에서 '왕'과 '도독'이라는 이중 칭호를 부여하는 것도
어색해보이지요.
만주원류고에서는 이후 그 지위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지만, 그 계림이라는 말은 그대로 신라에 이어져서
신라=계림이 되었다고 합니다.
[실증]거란지리지도의 신라국계(新羅國界)에 대한 오해
한반도의 압록강 서쪽 경계에 그려진 신라국계(新羅國界)라는 지명은 무슨 근거에 의한 지명일까.
당나라로 부터 인정받은 신라의 국경선은 패강 이남이라고 하여 대동강에서 원산계선을 신라의 국경
이라고 주장하면서 무슨 근거로 신라의 국경선이 압록강까지 북상하였다고 주장하는가.
신라의 본 근거지를 한반도로만 배워온 타성에 젖어 무조건 신라의 발원지를 한반도의 동남쪽으로만 생각
하고 있으니 이러한 병폐가 생기는것이다.
연구의 폭을 넓혀보면 이는 지도 제작을 잘못한게 아니라 독자들이 해석을 잘못한것이다.
여기서는 한반도의 지도가 생략되어있으니 신라의 강역은 요동반도에서 찾아야 한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있는 경주는 고려 초에 왕건이 신라의 경순왕에게 하사한곳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성덕왕 35년조에는 당으로 부터 패강 이남의 땅에 대한 경영 승락 기록이 있고,
《명일통지》등에는 패강을 개주의 대통강이라 하고 평양의 대동강은 아니라고 한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신라의 서북국경은 요동반도의 개주인것이다.
이를 스스로 포기하였으니 더이상 무슨 변명이 필요한가.
《삼국사기》<신라본기>성덕왕 35년 (기원736)
여름 6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패강 이남의 땅을 준다는 칙서를 삼가
받았습니다. 제가 바다의 한 구석에 태어나 살면서, 거룩한 당 황제의
교화를 입었으니, 비록 충성을 바칠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공적은 없었으며, 충정을 일 삼았으나 상을
받을 만한 노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가 크나큰 은혜를 베풀고, 해와 달 같이 밝은 조서를 내려 저에게 토지를 주어서, 나라를 넓혔
으니, 마침내 땅을 개간할 희망이 생기고 농사지을 터전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조서의 뜻을 받들어 큰 은총을 입었으니, 분골쇄신할지라도 황제에게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패강이남이란 어디를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명일통지》(1)는 조선대통강
패수는 고니하(古泥河)에 있는데 고니하는 해성현 서남65리에 있다고 하였고,이곳은 개평현 북50리라고
하였다.
이 물은 근원지가 성수산에서 흘러 술진산에서 갈라진다.요나라때 헌우박이라 불렀다.
지금의 헌우락은 헌우초가 많아 부쳐진 이름이다.
헌우초란 부들을
말한것이다.당시 조선의 패강이란 현재 조선경내의 패강(대동강)과는
다르다.
그리고《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卷187 洪武二十年 十二月 壬申)》(2)에 따르면 요동반도의 북쪽에 있는
철령주변에 고려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12월26일 임신일) 호부에 명하여 고려왕에게 자문을 보내도록 하였으니, (그 내용에 이르길) “철령의
북쪽과 동서의 땅은 예전에 개원(開元)에 속하였다.
그 토착 군민과 여진, 달단, 고려인 등은 요동이 다스렸었다.
철령의 남쪽은 예전에 고려에 속하였으나, 인민들은 모두 본국(명나라) 관속을 따른다.
강역이 이미 정하여졌으니(疆境旣正), 각자 그 수자리를 안정시켜 침범하여 넘는 바가 없도록 하라.”
* 위의 글, 명의 실록에서 철령을 중심으로 그 북쪽과 동서는 개원이 관활하던 땅인데 토착 군민과 여진,
달단,고려인 등이 살았었다고 하는것은 이곳이 과거에 고려의 영토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철령의 남쪽도 고려의 구지라고 하였으니 심양, 요양 등이 모두 고려의 영토였다는 기록이 아니겠는가.
고려는 철령의 동서와 북쪽을 먼저 잃고, 따라서 철령의 이남도 순차적으로 밀려나던 모습을 명사 실록이
기록하고 있다는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강역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각자 그 수자리를 안정시켜 침범하여 넘는바가 없도록 하라] 이 말은 명이
고려의 영토를 노략질하고 주인을 욱박지르는 강자의 공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신라국계가 신라의 동계라고 주장하는 근거
*지도에서 압록수는 장백산 말갈지에서 발원한다.
그 압록수의 경로는 서쪽으로 해주와 은주 사이를 지나 요동만으로 흐른다.
이곳이 신라와 발해(거란)와의 국경선이다.
이곳이 즉 당나라때 마자수인것이다. 지도를 그린 요나라 당시의 고려국은 왕건의 고려를 말한다.
<요동변도>신라의 서북계선 추정
지도:각성연해구애전도(各省沿海口隘全圖) 제작자:청(淸) 진매(陳枚)
1787~1812년 17년간. 대만국립박물원 소장
《천하연해형세도》 진윤형 <동고려.서고려.봉황성>고려의 동쪽 경계선은 놀랍게도 압록강이다.
고려는 고평양(서경)에서 건국하여 만주를 거쳐 역으로 한반도로 진출하였다고 하였다.
그 근거를 다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3)
《해국도지》<주해총론>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천하 연해 형세에 따르면 경사 천진 동쪽을 요해라 하고,좌측으로 연이어 산해관에서 영원.개평.복주.금주.
여순구.압록강 까지 고려다.그
리고 《만류원류고》(4)는 삼국이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사실을 확인하는 기록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당회요]무주 물산이 신라의 최고다.
[근안]신라는 처음 백제에 부용되었으나, 후에 가라, 임나 등을 병합하였다.
신라의 동남은 경상도, 강원도 2도이고, 서북으로 바로가면 길림오랍에 이른다.
또 서쪽으로 개원, 철령과 가깝다.
당나라 현경 이후 백제 땅과 고구려 남쪽 땅을 얻어 동서로 9백리 남북으로 1천여리가 더 커졌다.
개원(A.D 713년) 이후 발해가 강해지자 신라는 그 서북 땅을 발해에 빼앗겨 압록강(요하) 이남 땅만 남게
되었다.
당 말에 고려가 다시 일어나 그 남쪽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발해가 거란의 침략을 받게되자 신라는 서쪽
으로 거란과 이웃하게 되었고, 해주 암연현으로 경계를 삼고, 서북으로는 압록강(요하) 동쪽 8리에 있는
황토령으로 거란과의 경계로 삼았다.
당 용삭 3년(663년)에 당나라는 신라에 계림주대도독부를 두었는데, 신라의 국왕은 세습하여 계림도독이
되었다.
지리지를 고찰하면 지금의 길림은 계림 음이 변한 것이다.
허황정행정록에 말하기를 함주에서 동주까지다.
동쪽에 바라보이는 산이 신라산이다. 요의 함주는 지금의 함평이고, 분주는 지금의 동산현이다.
모두 철령과 개원 사이에 있다. 동으로 위원 보문에 이르는데 길림 경계이다. 길림 주(州)의 이름은 계림에서
취했다.
그 땅을 후에 발해가 차지하였다. 이때 당은 조선땅을 병합한 신라땅을 계림이라 불렀다.
칠중성은 경주(봉황성) 북남에 있다. 노하가 흐르는 곳이다.
구당서에서 말하기를 유인궤가 군사를 거느리고 노하를 끊고 칠중성을 공격했다는 물이 이곳이다.
매초성 역시 그곳에 있다.
당시 당군은 모두 등.래에서 바다로 해서 조선 여러 곳으로 왕래하였다.
9주를 둔 곳에 이르면 동으로는 길림에 이르고 서로는 광녕(북진)에 이른다.」 欽定滿洲源流考 卷9 疆域2
(번역문 끝)
9주를 둔 곳에 이르면 동으로는 길림에 이르고 서로는 광녕(북진)에 이른다.」
欽定滿洲源流考 卷9 疆域2
임명현(臨溟縣) 《요사》<지리지>요주(耀州)에는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초주(椒州)이며 옛 현은
초산(椒山)·초령(貂嶺)·사천(澌泉)·첨산(尖山)·암연(巖淵) 등 다섯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700이며 해주(海州)에 예속되었다. 동북쪽 200리에 해주가 있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 암연현(巖淵縣)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있다. 옛날 평양성이 현 서남쪽에 있다.
동북쪽 120리에 해주가 있다.
해주 암연현이 있어야 할 개주에는 암연(岩淵)이라 표시하고 주변으로 개현.진주.건안등이 표시되어있다.
그런데 아래 지도에는 암연을 한반도의 함경도로 옮겨놓았다.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에서 그려진 당나라 건흥 2년(820년) 당시의 발해국 강역을 표시한
지도는 신라의 동주 낙랑부는 고구려의 경주였던 봉황성이었고 고려는 이곳을 동경으로 삼았다.
따라서 압록강은 신라의 동쪽 경계다.
《성경통지》는 신라의 동주낙랑부나 고려의 동경(개주성).
남경(금주 금마군)에 대한 기록을 누락시키고 있다.
이는 《만주원류고》나 《송사》<열전>.《통고》《주해총론》등의 기록을 왜곡한것이다.
남당 박창화 선생이 저술한 《우리나라 강역고》에서 주장하는 만주 요동지역을 설명한 기록이다.
편집및 교열, 번역에 참가한 인원만도 박사급만 10여명에 이르고 발행 된 지가 이미 10여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여론화 되지 못하고 외면당한체 묻쳐 있다.
내용 자체가 전부가 옳은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배일에 쌓였던 많은 것을 밝혀 놓았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형 연구소들이 분발할 차례다.
아까운 예산만 축내고, 진실은 오히려 호도하는데 급급한다면 지켜보고 있는 밝은 눈들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명대(明代) 요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명대의 요동지역은 옛날 마한의 땅이며, 백제의 땅이며, 신라의 패강진(浿江鎭)과 한산주(漢山州)이며,
고려의 패서도(浿潟)와 서북면(西北面)이었다.
2. 북쪽에 있는 압록강을 남쪽으로 옮기었다.
3. 고려의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潟)를 빼앗고 이씨조선을 백두산 이남으로 축출
하였다.
4. 만주에 있던 전 지역을 백두산 이남으로 옮기게 하고, 흑룡강 주위의 여진족을 불러들여 만주에 있던
고구려 지역에서 자유로이 번식케 하였다.
5. 여진족은 광개토왕 비를 묻었으며, 윤관의 구성비(九城碑)를 파괴하여 고구려와 고려의 옛 유적을 없애고
지명을 변경하여 옛날의 영토를 알 수 없게 하였다.
6. 요동을 요하의 동쪽이라 정의하였다.
7. 이씨조선의 만주 통행 길은 안동현을 경유하여 요양과 영평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한가지 길만 열어놓고
그 외에는 전부 봉쇄하여, 만주의 사정을 알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 지역을 상실하게 하는 동시에 고구려의 옛 영역을 영원히 버리도록 노력하였다.
끝으로 《무경총요》는 개주성(開州城)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6)
개주는 발해의 고성이다.노주가 동쪽으로 신라국을 토벌하고 요충지에 세운 성이다.
이곳에 개원군을 세웟다.서쪽으로 내원성이 120리이고,서남쪽으로 길주가 70리이며,동남족으로 석성이
60리다.
내원성 노중 경술년에 신라를 토벌하여 요해지를 얻었다.
이곳에 성을 쌓고 지키니 즉 중국 대중상부 3년이다.
동쪽으로 신라 흥화진이 40리이고,남쪽으로 바다가 30리,서쪽으로 40리 거리에 보주가 있다.
*따라서 개주성 즉 봉황성은 신라의 동주 낙랑부였다는 《통고》의 기록이 확인된다.
(九山)
주(1)明一統志從之. 又以朝鮮大通江爲泪(浿)水. 古泥河在海城縣西南六十五里, 益(蓋?)平縣北五十里. 源出聖水山流至述眞山散漫爲遼時之蓒芋泊, 今爲蓒芋濼. 水多蓒芋之草, 與朝鮮境內之浿江不同
주(2)(壬申) 命戶部咨高麗王, 以鉄嶺北東西之地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韃靼高麗人等遼東統之. 鉄嶺之南舊屬高麗, 人民悉聽本國管屬. 疆境旣正, 各安其守, 不得有所侵越.[明太祖實錄卷187 洪武二十年 十二月 壬申]
주(3)天下沿海形勢,從京師天津東向遼海,左延山海關、寧遠、蓋平、複州、金州、旅順口、鴨綠江而抵高麗
주(4)欽定滿洲源流考 卷9 疆域2
[唐會要]武州物産爲新羅之最 謹案新羅始附庸於百濟 後兼加羅任那諸國 與百濟爲隣考其疆土 東南並有今朝鮮之慶尙江原二道 西北直至今吉林烏拉 又西近開原鐵嶺 唐顯慶(656-660년)以後又得百濟故地及高麗南境 於是東西增九百里南北增千餘里
開元(713년) 以後渤海盛强 其西北諸境盡爲所倂 新羅所有僅鴨淥江以南 唐末高麗復起割其南境曁 渤海爲契丹所侵 於是新羅西與契丹 以海州巖淵縣爲界 西北與契丹以鴨淥江東八里黃土嶺爲界矣
雞林州之名始於 唐龍朔三年以其國爲雞林州大都督府 國王世襲都督之號 以音譯及地理考之卽今吉林 許亢宗行程錄云 自咸州至同州 東望大山卽新羅山 遼之咸州今爲咸平 芬州今爲銅山縣 俱在今鐵嶺開原之間 東至威遠堡門卽吉林界 則州名取此無疑 其後地爲渤海所得 而都督之號則仍係新羅 於是幷朝鮮之地亦沿雞林之稱耳 七重城在朝鮮慶州北南 臨發盧河 舊唐書言 劉仁軌率兵絶匏盧河攻七重城卽此水也 買肖城亦在其地 當時用兵皆自登萊浮海往來 故多在朝鮮界也 至九州之設 東至吉林 西至廣寧.
주(5) 按是時髙麗北境已屬渤海, 新羅既有百濟之地又兼有髙麗南境, 非得百濟而始抵髙麗之南也, 尚州全州遼金皆有之朝鮮亦有之, 遼地志云尚州屬東京路本漢襄平縣地渤海為東平寨, 金地志云全州屬北京路治安豐縣, 二史並未詳沿革之由, 或遼金所置徒襲其名未必即其舊地也, 朝鮮慶尚道之尚州本辰韓南境為新羅故地, 全羅道之全州本弁韓邊境為百濟要隘似為相近, 然考唐會要五代㑹要太平寰宇記皆作金州與唐書通考作全者異,
唐平髙麗嘗置金州明為金州衛即今寧海縣, 新羅既得髙麗之地其州名即沿唐舊亦未可知苐國初烏拉國有金州城為武勲王揚古利攻克今吉林城北猶有金州山金州站實與新羅之難林州相近, 非唐以後所置其稱名當有所自也. 康州遼屬顯州去醫巫閭山不逺熊州當以熊岳為名唐儀鳯初徙熊津都督於建安城與此相近, 在葢州南六十里渤海之杉盧郡也漢州以漢江為名本百濟地後為朝鮮王都朔州在鳯凰城東南溟州本濊地
주(6) 開州 渤海古城也。虜主東討新羅國, 都其城要害, 建爲州, 仍曰開遠軍。西至來遠城百二十里, 西南至吉州七十里, 東南至石城六十里。來遠城, 虜中。庚戌年討新羅國, 得要害地, 築城以守之, 卽中國大中祥符三年也。東至新羅興化鎭四十里, 南至海三十里, 西至保州四十里。《무경총요》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