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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성령의 상관관계 연구1) - 유 해 룡(장신대, 영성신학)
1. 영성의 회자 배경
영성(spirituality)이란 말을
단순히 영적(spiritual)이란 단어의 명사형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영성’이란 말과 ‘영적’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전적인 정의 이전에 정서적으로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신학적으로나 대중적으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영적’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래로 ‘영성’이라는 말이 활발하게 회자되면서
그 말의 정의나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적’이라는 말이 기독교적 환경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영성이라는 말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전해주기 때문에 전통적인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정서적인 느낌만은 아니다.
영성이라는 말에 대한 또 다른 논쟁의 여지는
학문적인 영역에서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만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영성이라는 말의 회자 배경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기독교 신학이 그 말에 대해서 의혹을 품는 것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영성사적인 차원에서 이 말의 의미를 추구해 보면서
그 의미가 어떻게 변천되면서 확대되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5세기까지 라틴어 ‘spiritualitas(영성)'이라는 말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한 때 제롬(St. Jerome)의 것으로 보이는 서신에서 ‘영적’으로 진보하기 위하여‘(ut in spiritualitate proficias) 행동할 것을 권고하는 글이 있다.
여기서 영적이란 말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산다"라는 의미와 별 차이가 없다.
근본적으로 바울 신학의 반영이며 그 연속선상에 있는 의미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영'(πνεύμα)이나 '영적인'(πνευματικός)라는 말의 상대개념으로 육적이다(σάρξ 혹은 ϕυχικός)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것은 비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과의 비교적인 의미에서 '영과 육'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육적인 삶'이란 말은 죄악된 속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반면에 죄악된 속성을 지닌 육체가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죄악된 속성을 극복할 때의 삶의 형태를 ’영적‘이라 하였다.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그 의미를 단순화 시키면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 지배를 벗어난 자연적인 인간이 될 때 그는 '육적인 사람'이 된다.
이러한 용법이 "영적이다"라는 말의 전통적으로 교회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의미이다.
그 이후에 스콜라주의를 거쳐서 그 의미가 조금씩 변천되고 확대되어 오다가
18세기 초기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에서는 '
영성'이라는 말이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용어로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이 종교적인 열광주의나 정적주의와 상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서 '영성'이라는 말은 주로 제도권에 속한 교회에서 보다는
자유로운 신앙그룹에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하였다.
이것이 프랑스 저서들의 번역물을 통하여 영어권으로 전해졌다.
금세기에 들어서 영성이란 말은
일상적인 생활(ordinary)과 비상하고 신비한 신앙생활(extraordinary)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더욱 즐겨 사용하였다.
1912-15년 사이에 출판된 [가톨릭 백과사전](The Catholic Encyclopedia)과
그 개정판인 1970년판 [새 가톨릭 백과사전](New Catholic Encyclopedia)을 비교해 보면
19세기의 영성에 관한 관심과 20세기의 영성에 관한 관심 정도를 비교할 수 있다.
전자의 판에는 '영성'이라는 항목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 반면에
후자의 판에는 8개의 항목에 걸쳐서 '영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넓은 의미로 '영성'이라는 말이 사용되자
교리적인 측면의 신학과 경험적이고 종교적인 의식을 강조하는 영성적인 삶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1920년의 [수덕과 신비신학에 대한 잡지](Revue d'Ascetique et de Mystique)와 1932년부터 계속해서 발간되어온 [영성사전](Dictionnaire de Spiritualite)이라는 대작이 ‘영성’이라는 말의 독특한 지위를 세워주었다.
이러한 노력은 가속화되어서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발간되어 가장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는 [Sacramentum Mundi]라는 신학적인 사전에서도
영성이라는 종합적인 논문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외에 루이 부이에(Louis Bouyer)의 [기독교 영성사 I, II, III](A History of Christian Spirituality I, II, III)와 크로스로드사(Crossroad)의 대기획물인 [기독교 영성 I, II, III] (Christian Spirituality I, II, III), 그리고 단행본으로 기획된 [새 가톨릭 영성의 사전](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과 웨스트민스트(Westminster)의 기획물인 [웨스트민스트 영성사전](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Spirituality)등이 '영성'의 고유한 영역과 위치를 찾아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60년대 이래로 서구 신학은 종교다원주의와 심리학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왔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이후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 영역을 제도권적인 교회밖으로 확대시키는 분위기가 일어나면서 영성의 의미가 보다 폭넓게 부각되어 사용되었다.
개인의 믿음생활이 교회법적인 테두리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와지면서 믿음과 경험이 자연스럽게 연결을 짓기 시작했다.
비로소 믿음과 교회의 권위로부터 믿음과 개인의 경험이라는 관계의 변화가 영성이라는 말을 더욱 활발하게 회자하도록 해주었다.
20세기 후반이 시작되는 60년대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세계는 매우 급진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특별히 종교와 문화가 밀접하게 조우하면서 ‘영성’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었다.
미국의 60년대를 살펴보면 영성이 말하고자 하는 오늘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전해준다.
종교, 문화, 경험 이 세 영역이 서로 굳게 손을 잡으면서 나타난 합성된 산물이 뉴에이지(New Age)운동이다.
이전부터 있어왔던 운동이기는 하나 그것이 대중들 가슴 속으로 깊이 파고 들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즈음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유일하게 산업기반을 보존한 나라는 미국 뿐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유래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전후시대에 늘 일어나는 현상으로 많은 아이들이 이 때에 태어났다.
이때를 소위 베이비 붐머(baby boomer)시대라고 일컫는다.
이들이 바로 60년대의 미국 사회에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냈다.
물질적인 풍요함, 과학 기술의 발달, 그리고 높은 교육수준을 받은 이 배이비 붐머 세대는 엄청난 지식욕과 자유에 대한 갈구가 있었다.
물질의 부유와 문화적 자유의 물결을 따라 미국 사회는 물론 교회나 신학적인 흐름에도 크게 변화를 겪었다.
세계적인 석학이나 모든 분야의 학문이 풍요와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 사회를 향하여 몰려왔다.
무엇이든지 제한받지 않고 쏟아져 낼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자유와 지식욕이 넘치는 베이비 붐머 세대들은 그들의 훌륭한 고객이 되었다.
신학에서도 학문은 자유롭게 열려져 있었다.
유럽대륙을 거쳐 미국의 60년대는 가히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60년대 미국은 젊은 세대를 분노케 하고 회의케 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1963년의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곧 이어 벌어진 마틴 루터 킹목사의 암살, 그리고 베트남전쟁의 본격적인 개입, 극단적인 냉전의 분위기는 젊은이들을 분노케 하고 절망케 했다.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었던 당시의 문화, 종교, 사회를 향하여 저항하는 일단의 반문화 운동 (counter culture)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반문화 운동은 60-70년대에 미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비트족이나 히피(Hippie)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틀에 박힌 생기없는 물질문명과 기술문명 사회로부터의 탈출과 자유를 선언했다.
그들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객관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가치관에 더 이상 의미를 두려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경험주의적인 종교문화를 탐닉하였다.
뉴에이지 운동 등이 그들의 내면의 갈망에 어느정도 응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양의 신비종교 특히 인도의 힌두교가 이 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흐름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상대성과 종교다원주의는 자연스럽게 퍼져나갔다.
이 세대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영성이란 전통적인 권위나 교리보다는 자기 내면과의 만남이요.
주관적 의미에서의 초월적인 만남을 가능케 하는 그 무엇이다.
이러한 운동에 일조를 한 또 하나의 요소는 심층심리학의 발달이다.
그 동안 전통적으로 오직 종교적 영역이라고 믿어왔던 영혼의 문제,
자아의 탐구 문제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추상적인 영역이었던 내면의 문제나 영혼의 문제가 구체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막연한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라 경험적인 실체가 되었다.
이러한 심리학자들의 노력은
내면의 갈망으로 헐떡이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가히 구원의 메시지가 되었다.
심리학자 디모데 리어리(Timothy Leary,1920 --)나 철학자 알렌 와츠(Allen Watts, 1915-1973), 시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 1926 --)등이 LSD와 같은 환각제 등을 신비적인 내면세계의 체험 내지 종교체험의 정당한 매개체로 인정해 주는데 기여한 인물들이다.
디모데 리어리는 LSD 사용을 종교적 순례요 성례라고까지 주장하였다.
약물을 통한 하나님의 추구는 결국 환상으로 끝나는 것이 분명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만연하고 있는 물질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물음에 어떤 기회를 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약물의 문화로부터 그 약물의 경험을 뛰어넘는 새로운 영성운동이 자라났다.
이 운동은 대부분 전통적인 교회의 밖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던 공동체적 종교의 시대로부터 개인적인 종교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증거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추구가 개인에게 속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시대적 사조와 문화적 흐름으로부터 회자된 영성이라는 말이 오늘 우리의 신학적 주제로 넘어왔기 때문에 매우 비판적 시각으로 볼수 밖에 없다.
이러한 다양한 흐름이나 운동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초월적 세계를 향한 주관적 체험이다.
그러한 주관적 체험들의 출처가 무엇인가?
그러한 체험들이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성령의 역사와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가?
즉 영성과 성령은 어떠한 상관관계를 맺고는 있는가
라는 물음으로부터 기독교 영성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2. 영성과 영
심리학적 신학을 언급하려 할 때에 어거스틴의 고백록 첫권 첫장을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의 세속적 욕망(세속적 성취와 성공욕), 육체적 욕망, 종교적 타락(마니교에의 귀의), 철학적 갈망 등은 결국 내면에 심겨진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에 대한 왜곡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왜곡들을 알아차렸기에 비로소 제 자리로 돌아갈 수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어거스틴은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초월을 향한 살아있는 내면의 실존을 경험하고 이론화시킨 어거스틴의 영성을 엿볼 수 있다.
야위스트 전통의 창조론에 의하면 야웨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그 진흙 속에 호흡을 불어넣음으로서 살아있는 영혼 즉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창 2: 7).
이 말은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말을 보다 상징적으로 영(πνεύμα)라고 한다.
그 말의 문자적 뜻은 바람, 호흡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신학적 의미는 훨씬 더 상징화 되고 있다.
바울이 이 말을 육적이라는 말과 상반된 의미로 사용함으로서 영이란 선에 대한 인간능력, 하나님을 향한 개방적 능력, 자유로운 선택적 능력 등을 암시하고 있다.
즉 전인적 자아를 형성해 갈 수 있는 인간존재를 포괄적으로 영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말의 보완적인 설명으로서 창 1장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말은 신약의 영과 더불어서 하나님과의 보다 구체적인 관계성을 더욱 상징적으로 설명해 주는데, 그것은 곧 포괄적인 의미로서 자아초월적인 인간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 자아초월적인 능력은 어거스틴의 내면의 갈망과 매우 일치되는 의미이다.
인문주의 심리학자들은
사실 도덕적인 충동이나, 행동에 대한 탁월한 영감, 고양된 도덕적인 행위나 정신적인 삶은 인간 본성의 심리적 동기로부터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에게는 자연스럽게 자아실현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칼 로저스(Rogers)는 자아실현 경향을 “모든 유기체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본질적인 경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보존하는 데 유익하도록 반전시키고자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인간 자신 안에 자신의 삶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가치기준과 내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성숙은 근본적으로 인간자신에게 달려있으며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의 가치가 이미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빅터 프랑클(V. Frankl)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특징은 초월이요. 자신 밖에 있는 자신과 다른 그 무엇을 향해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인간은 자신 밖에 있는 가치들과 목표들을 향해서 정진할 때, 자아를 실현해 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 자아초월이란 자신을 뛰어넘는 “최상의 의미”를 향해서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내어주는 능력을 의미한다.
전자는 내재주의적인 경향을, 후자는 초월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문주의적 심리학의 관점은 인간의 성숙은 근본적으로 인간 심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역동적인 힘에 달려 있고, 그 힘은 각 개인이 자아실현쪽으로 방향지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에서 제기하고 있는 물음들 중에 존재하는 사물에 있어서 ‘그것이 무엇에 유용한가’라는 물음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모든 피조물은 목적인(目的因)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존재는 사물이 지향하는 목표(telos)가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존재한다는 사실 속에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유용하다는 의미가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갖가기 과일나무는 과일을 맺음으로 그 존재의 유용성을 입증한다.
젖소는 양질의 젖을 공급해 줌으로 그 목적인을 실현한다.
이성을 지닌 인간은 내재되어 있는 그 목적인을 탐구하면서 자기실현을 통한 자기완성에 이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인 주장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들 동가적인 가치를 지닌 영성적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은 주어진 목적인을 거의 완벽하게 실현해 가지만 자기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본능적이고 수동적인 활동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목적을 실현해가는 동안 많은 투쟁과 갈등을 겪는다. 인간이 자기실현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자각적인 행위이며, 그 실현과정을 통해서 자기성숙을 이루어 간다.
바울의 영과 육의 이해는 결코 이분법적인 의미는 아니다. 전인적 자아를 향하여 자아를 통합해 가는 과정의 사람들을 영의 사람이라고 일컫는다.
영을 또한 인간존재의 구성요소의 한 부분으로 생각해서 ‘나는 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프로이드는 인간은 오랫동안 영을 소유해 왔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모든 인격이나 행동이나 종교적 행위가 “보다 낮은” 본능적 충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규명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울의 인간의 영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 영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은 영이다. 그 영은 본질적으로 전인을 향하여 통합하는 능력을 지닌다. 즉 물질적인과 비물질적인것, 몸과 영혼, 한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통합하는 능력을 지닌다
3. 바울서신에서의 영성과 성령
인간의 영성이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논의될 때 보다 구체적인 기독교 영성이 된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창세기에서 보여준 존재론적인 인간의 영성은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자아 초월적인 능력을 의미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본능적인 갈망과 그 갈망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님과의 교제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학적인 인간론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본성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자연적 영성의 능력은 매우 제한적이며,
활동태라기보다는 가능태로 존재할 뿐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가능태적인 영성의 잠재성을 역동성이 있는 현실태의 모습으로 바꾸어 나갈 수 없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기독교 영성의 핵심에 이른다.
타락된 본성적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개혁되어지고 활성화 될 때, 인간의 자연적 영성은 활동태로의 변화를 겪으며 자유롭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역동성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 사람이 되어라’(엡 4: 23-24)고 말한다.
우리의 영이 개혁되어져 하나님의 자녀로 눈이 뜨여지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에 의해서 취해지는 어떠한 조치도 유용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오직 성령만이 파괴되어진 영성을 치유하며 자유롭게 활동케 하신다(고전 1: 18-25)고 말한다.
성령으로 치유되어진 인간의 영성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게 되며, 성령의 요구를 인지하고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다.
인간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의 본성을 탐지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실존적 경험에 기인한다. 인간에게 남겨진 자아 초월적인 실존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성찰능력과 자기객관화 능력에 있어서 뚜렷한 변화를 겪는다.
여기서 인간의 영성은 주관적인 자기의식과,
인간 자신의 감성을 통하여 자아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신장된다(고전 2:10-11).
동시에 절대타자로의 하나님 인식이 분명해지며,
자기인식과 자기초월의 능력을 갖춘 인간은 현저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고후 3: 17).
바울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롬 8: 15-16)”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간이 최고의 자의식에 도달하며 책임적인 자아가 되라는 요구를 받는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5: 16)고 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한다(갈 5: 22).
이 말씀에서 성령의 열매란 이와같은 은사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 바울은 굳이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자의적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야 할 것처럼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명령하는가?
이 둘 사이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말씀 속에서 선물이라는 의미와 이러한 덕목들은 지켜 행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를 조화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전제해야 한다.
첫째는 이미 갈라디아 사람들은 성령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성령의 요구에 대해서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책임적이고도 선택적인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령의 사람들은 현저히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개입한다는 것은
결코 강압적이거나 불가항력적이거나 비인격적인 힘으로의 흡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간에게 개입하시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적 수행능력을 약화시키거나 인간의 윤리적 결단 능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의 개입으로 인하여 영적인 존재가 된 인간은 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스스로의 분별력으로 자유롭게 응답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인하여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성령으로 인한 은사를 분별하는 능력을 말하며, 그 결과 성령을 따라 행할 능력도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거부할 수 있는 능력도 있음을 시사한다.
적어도 인간을 향한 성령의 개입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온전성을 회복하기 시작한 영의 사람은. 성령의 요구와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타락된 인간 본성 사이에서 강력하고 심각한 투쟁과 갈등을 자발적으로 감내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자유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요구를 향하여 인간이 지속적으로 반응할 때 성화의 과정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성화되기 위해서는 책임적인 존재로서 성령의 요구에 지속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성령은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분이기에 그 분은 인내 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신다. 결코 강압하시지 않으신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 할지라도 인격적으로 응답하기를 거절한다면 성령은 아무일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 30)”고 권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사람들이지만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고 오히려 육신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격앙된 어조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라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요청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옛 습성과 성령의 요청 사이에서의 투쟁결과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된 영성적인 존재의 실체이다.
이와같이 성령과 영의 관계를 고려할 때 성령으로 인하여 회복된 영성은
선택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영성이란 결코 성령의 기계적인 작용에 의존하지 않는다.
인간이 영성적인 존재라 함은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을 향하여 자발적이고 인격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전의 육신의 욕구들을 통제하고 성령의 뜻을 인격적으로 수용해 감으로서 구원받은 백성으로의 자기실현을 이루어간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인격적인 성숙과 삶의 목적인 행복감을 성취해 간다는 의미에서 인간을 영성적인 존재라 한다.
구원과 성숙은 거시적으로는 연속선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미시적으로 볼 때 독립적인 영역일 수 있다.
성숙은 순간 순간의 인격적인 결단의 결집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령은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권한다(엡 4: 30).
성령의 근심이란 우리와의 인격적인 교류를 갈망하는 성령의 기다림이요 인내의 표현이다.
동시에 그것은 자기초월과 자기의식이 열려진 영적인 사람에게 경험적으로 겪는 내면의 갈등과 투쟁이다.
따라서 성령의 근심은 곧 우리의 근심이요 고통이며, 성령의 만족과 기쁨은 또한 우리 영혼의 기쁨과 행복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에서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인 삶과 성령의 요구와 갈등과 투쟁에서 얻는 일치의 삶을 의미한다.
4. 칼 라너의 초월적 존재로서의 영성과 성령
현대 영성신학의 기초를 놓아준 칼 라너(Karl Rahner)는
초월적인 실존으로서의 인간이해를 그의 신학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라너의 인간이해를 보면서 인간의 내적 갈망에 대한 기원을 살펴볼 수 있다.
칼 라너에게 영성이란
인간이 자기를 초월하여 무한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는 초월적 실존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그 본성이 초월적 실존을 지향하도록 창조하셨다.
구체적으로 윤리적 선행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한
그런 인간은 초월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로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갖고 의롭다 함을 얻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초자연적 은혜에 기인한다고 믿고 있다.
그 초자연적 은혜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혜를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의롭다함을 얻었다 하는 개념은 인간의 의식적 영역에서는 경험될 수 있는 실존은 아니다.
혹자는 건강한 삶 즉 정신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성숙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요 의롭게 된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보다 성숙되고 고양된 정신적(윤리적) 삶은
과연 오직 성령의 은혜로서만 가능한 일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한 삶은 순전히 자연적인 삶으로는 얻을 수 없는 일인가?
그런데 인간의 본성적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믿고 있는 성령의 은혜는 경험이전의 신학적 가르침이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고백적 차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적인 입장에서
고상한 윤리적 삶이나 자기완성의 길이 오직 본성적 자아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초월적인 성령의 은혜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 모두가
이론적 논쟁거리일 뿐, 경험적으로는 명확성을 제시할 수는 없다.
중세이래로 자연적 윤리적 행동과 초자연적 윤리적 행동간의 차이점을 구분할 수 있는 명백한 기준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신학적 논쟁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하나의 신학적 표현일 뿐이지 인간 의식적 차원에서는,
본성적 행위에서 나온 행동이든지,
성령의 은혜의 영향을 받은 행위이든지 외향적인 모습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동일하다.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은
이론적으로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자연과 은혜 즉 본성적인 일과 초자연적인 은혜의 일로 나눈다.
그러나 칼 라너는 이 둘의 관계의 조화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본성적 차원과 성령의 은혜 아래에 있는 차원 사이의 연속성과 조화점을 제시한다.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지닌다면 영성과 성령은
분명 동반자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로 받아들일 수 있다.
칼 라너는 본성과 은혜 사이를 구분하려는 시도를 하면서도 동시에 그 연속성을 꾀하고 있다.
신학은 그 근본적인 전제로서 철학을 깔고 있는데,
즉 두 종류의 신지식 즉 이성과 계시를 통한 신지식에 그 근거를 둔다.
인간의 자기이해로서의 철학적인 지식은 은혜의 가능성과 선조건으로서의 본성에 해당한다.
은혜의 인지적인 요소인 계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이해와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개방성을 조명하고 완성시키는 요소로서 주어진다
은혜로 주어지는 이러한 계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지식이나 자기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물론 은혜이전의 선지식으로서의 자아인식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순수한 본성(창조시에 부여된 본성)과는 다르지만 본성 안에 하나님을 향한 선지식이 전혀 주어지지 않은 상태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입장이다.
즉 “옷벗김을 당한 사람은 본래부터 옷을 입지 않고 있던 나체의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
이것은 은혜의 결핍의 상태에 있어서 순수한 본성적 결핍과 타락한 본성의 결핍과는 차이가 있다는 의미이다.
타락한 본성에 있어서 은혜의 결핍이란
아담의 타락으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박탈당한 상태이지만
또 다시 은총의 회복을 요청하고 있는 상태이다.
여기서부터 라너는
성령에 의한 성화은혜 이전의 은혜의 상태로서 인간의 실존을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성령이전의 인간의 영성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중세 신학적 전통에 의하면 인간이 부여받고 있는 은혜는 ‘
창조되지 않은 은혜’(uncreated grace)와
‘창조적인 은혜‘(created grace)로 구분된다.
성령의 내재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 위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은혜와 하나님의 창조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 속에 이미 내포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적 은혜는 서로 다른 두 층으로 이해하려 한다.
라너는 이러한 은총의 개념이 루터를 중심으로 한 프로테스탄트적 주장인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절대로 구원에 도움이 되는 선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이 창조적 은혜를 전제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성령의 내재와는 현저히 구분됨으로서 구원에 유용한 은총은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 칼 라너는
이러한 중세적 신학전통과 루터적 프로테스탄트적 은혜의 개념을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두 은혜 사이의 완전한 단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리는 온 세계의 중심이며, 구원의 섭리적 경륜으로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은혜의 초자연적 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창조적 은혜를 입고 있는 인간의 본성적 속성을 완전히 봉쇄해 버려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다.
라너는 창조되지 않은 은혜인 초자연적 은혜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됨으로부터
이미 부여받은 창조적 은혜를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양여(God's absolute self-communication) 의 사건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 존재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서 인간 정신으로 하여금 자신을 초월하도록 지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초월적인 속성을 분여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를 초월하여 부재하시는 듯한 하나님을 향하여 근접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현존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아 초월적 경험은
미래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자기양여를 자기의 것으로 하려고 지향함으로부터 비롯된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기양여는 그 수락이 가능하기 위한 선행조건이며,
그것은 인격적으로 수락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자기양여는 자아의 초월론적 경험 속에서 자기 자신을 묻는 존재로서 그리고 존재를 얻어입는 존재로서 자각한다.
이 경험 속에서 ”인간은 자기를 유한하고 범주적 차원에서 사는 존재로서 경험하며 또한 자기를 절대적 존재에 의해서 그와는 서로 다르게 만들어진 존재자로서 그리고 그 절대적 존재로부터 비롯된 신비에 뿌리를 둔 존재자로서 경험한다.
이런 의미에서 칼 라너는 인간을 “초월적 실존”(supernatural existential)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인간이 죄성 이전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의 초대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칼 라너의 이러한 인간이해는
갖가지 종교성이나 내적인 갈망의 근원을 설명해 주고 있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볼 때 영성은
인간이 자기 초월을 통하여 자기한계성을 인식하고 또 다른 절대타자를 향한 인간의 개방성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부여된 이러한 영성이 갖가지 종교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며, 현실적 자아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로의 갈망을 추구하는 뉴에이지 운동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칼 라너는 인간의 초월적 실존이란 인간의 본성이 곧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중세 스콜라주의적인 개념인 순명의 가능태(potentia obedientialis)라는 말을 빌려 대답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 안에 당신이 인간과 인격적으로 그리고 지성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초월적 실존을 제공함으로서 그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러한 창조적 은혜는 결코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성화은혜(sanctifying grace)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본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에의 초대일 뿐이다.
칼 라너에게 있어서 이러한 순명적 가능성이란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에의 초청에 대한 단순한 수동적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책임적 결단에 의해서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을 ‘주관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 하여야 한다
칼 라너의 철학과 신학을 논하면서 초월적 계시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선험적인 지식을 전제한다고 하면서 철학을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바로 창조적 은혜로 주어진 인간의 초월적 실존이 개인적으로 경험되어지는 성화적 은혜 차원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초자연적 개입이 요청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의 초월적 실존은 성령의 개입 없이는 충만할 수도 절대완성에 이를 수도 없다.
라너는 분명히 가능성과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은혜를 혼합하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죄성 이전에 부여된 하나님의 창조적 은혜가 현실적으로 충만하고 완성케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인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양여가 완성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 결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라너는 하나님이 자기자신을 내어주시는 세 가지 양식을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실존의 완성과정을 말하고 있다.
즉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그리고 아들 또는 로고스로서 그리고 성령으로 주어진다.”
아버지는 절대적 자기양여 속에서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주신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유로운 은총으로부터 초자연적 은총에로의 자기양여를 통해서 구원의 경륜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존의 가장 깊은 중심으로 오실 때 우리는 이 하나님을 참으로 “거룩한 숨결”, “성령”이라고 부르게 된다
라너에게 있어서 창조적 은혜로서의 인간의 초월적인 실존은 주제적인 경험은 아닐지(unthematic experience)라도 초월을 향한 자기 개방이라는 명목으로 경험되어질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특별한 은혜로 여기는 성령의 은혜는 신학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대한 인지요 확신이다.
인간의 초월론적 경험이 신학적이고 교리적으로 해석을 해줌으로서 그 해석 속에서 자기 자신의 경험을 신뢰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실존의 선험적인 경험과 기독교 신학적인 후험적인 가르침이 통합되어짐으로서 비로소 실존적 결단에 이르면서 기독교적 영성에 이르게 된다
라너의 신학의 핵심인 인간에게 부여되는 “초월적인 실존(supernatural existential)”은 오늘 모든 종교를 포함하여 기타 보다 깊은 내면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는 영성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라너는 결국 그러한 영성이 수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혜의 개입과 더불어 자유로운 자기결단으로 말미암아 충만하게 되고 완성케 된다고 주장함으로 영성과 성령이 보완적이고 동반자적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5. 맺음말
급변하는 문화와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의 인간 자신의 경험에 대한 진지한 반추의 영향으로 오늘날 신학이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다.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에 있어서 정체적인 접근 방식이 동적인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그 방식이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이고 자기 반추적이면서 경험적이 되어가고 있다.
이 모든 경험들을 소위 ‘영성(spirituality)'이라는 포괄적인 개념 안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영성이란 특정한 전통이나 특정한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하나님 경험을 표현하고자 하는 양식이다.
초월적인 인간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적인 삶을 통합하려는 몸부림이 영성이다.
칼 라너나 인문주의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몸부림을 초월적인 은혜를 향한 가능성으로 평가한다.
인간은 타락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지만 여전히 인간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의 가능성은 또한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갖가지 영성운동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 초청에 대한 불완전한 몸짓이거나 왜곡된 표현일 수 있다.
그러한 영성운동을 성령운동과 평행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성령운동을 향한 개방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순절 성령운동이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소위 ‘경배와 찬양’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목말라 하는 인간에게 부여된 선조건으로서의 본성적 영성과의 접촉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고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창조를 하는 분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이미 부여하신 그 본성을 치유하고 완성케 하고 충만케 하시는 분이다.
오늘 이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기독교적인 갖가지 영성운동은 또 다른 실체에 의해서 주도된 운동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기독교 영성과는 어떠한 연속성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성령과 영성운동은 전적으로 적대적 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비기독교적인 다양한 영성운동이 하나님이 이미 부여한 인간의 초월적 실존으로부터 비롯된 또 다른 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기독교적 영성과의 연속성을 모색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영성적인 표현방식은 매우 불완전하고 왜곡된 것이라 할지라도 초월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의 가능성을 본다면 성령의 역사와 본성에 기초한 영성은 보완적이고 완성케 하는 동반자일 수 있다.
인문주의 심리학자들이나 칼 라너의 영성신학적 입장은 영성과 성령과의 관계를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영성과 성령과의 동반자적인 관계를 인정한다면
미래 기독교적 영성은 권위에 의존하여 가르치고 판단하는 부성적인 경향으로부터 수용하고 치유하고 온전케 하는 모성적인 영성으로 변모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