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온이 거룩한 城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어제 장신대 구약학 교수인 하경택 교수의 논문 <세계 어머니로서의 시온 - 시편87편에 대한 주석적 연구>를 읽어 보았다.
이런 말이 있다.
“결론의 眞僞는 전제의 정확성에 달려 있다”
옳은 말이 아닌가. 전제에 오류가 있다면 당연히 결론도 오류로 나타난다. 그래서 나는 글이나 논문을 읽을 때 반드시 “전제”부터 꼼꼼히 살펴본다.
하 교수는 서론에서 “시편 87편은 포로기 이전 ‘시온 신학’에 대한 포로 후기의 새로운 이해다”라고 전제했다. 포로기 이전에 “시온 신학”이란 것이 있었나? 나는 처음 들어본다.
만일 “신온 신학”에 대해 논하려면 먼저 “시온”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한다. 그런데 그의 논문 어디에도 시온에 대한 정의가 없다. 정의가 없는 “신온 신학?” 정말 황당하다.
시온(שִׂיאֹן)이란 단어는 신4:48에 처음 등장하는데 “헤르몬山”의 다른 명칭이다. 두 번째로 수19:19에 나오는 시온은 시온이 아니라 쉬온(שִׁיאוֹן)이다. 잇사갈 지파의 경계에 있는 한 성읍의 이름이다. 시편이나 이사야에 많이 나오는 시온은 시온이 아니라 찌온(צִיּוֹן)이다. 찌온이란 단어는 삼하5:7에서 처음 등장한다.
“다윗이 시온(찌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삼하5:6을 보면 찌온 山城은 여부스족이 살던 예루살렘의 한 山城일 뿐이었다. 즉 “거룩한 城”과는 거리가 먼 城이었다. 그런데 왜 찌온 城을 거룩한 城이라고 칭송하게 되었을까?
그곳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궤가 없는 城은 그냥 인간의 城일 뿐이다.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기 때문에 “거룩한 城”이 될 수 있었고, 시편 87편과 같은 詩도 나올 수 있었다. 하 교수는 이런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시87:7을 이렇게 설명했다.
“여기에서 ‘샘’이라고 번역된 <마으얀>은 시편 46편5절에서와 같이 ‘거주지’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마으얀? 마야나이(מַעְיָנַי)겠지... “샘”은 “근원, 생명의 젖줄”이란 의미는 있어도 “거주지”라는 뜻은 없다.
하 교수가 편집인으로 있는 신학춘추 114호에 <무지개가 있는 풍경>과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 ‘무당’ 정순덕을 만나다>를 3면에 걸쳐 실어주었다. 구약학 교수라면 히브리어 연구에 더 매진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