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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대장
기쁨이 되어 함께 즐거워하라 사12:5
오늘 주신 말씀 사12:5을 중심으로[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땅에서 함께 즐거워하며 살라]는 제목으로 말씀이 선포될 때 큰 은혜 받기 원합니다.
지난 한 주 동안도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평안 하셨는지요?
성도 여러분이 기도하시고 마음 써 주셔서 교회와 목사는 건강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여행을 잘 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얼굴을 뵙는 분들이 더 반갑습니다.
날마다 새벽마다 뵈는 분들은 더 정이 들고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다 같이 인사하시죠. 참 좋은 날입니다. 주안에서 다 잘 될 것입니다.
나는 이기고 풍성하며 강건하여 짐을 선포합니다.
주신 말씀 시13편은 하나님의 종이자 하나님께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원수들의 득세와 횡행으로 말미암아 영육간에 극심한 곤고함을 겪고 있는 상황 속에서 압제당하고 신음하는 가련한 자와 궁핍한 자의 구원을 호소하는 이미지를 가득 담고 있는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말년에 거짓이 만연하고 경건하자와 충실한 자가 드문 세태를 한탄하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땅에서 성도들이 함께 즐거워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쁨(נֽ לֽ )이란 뜻은 빙빙돌며 기뻐 뛰며 춤추는 모습을 말합니다.
기쁨, 즐거움, 기쁨의 환성, 즐거운 연회, 즐겨하는 뜻을 가진 말들이 있으며 특히 נָעֲם (naem)은 유쾌하다, 즐겁다, 사랑스럽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슬퍼하며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이 땅에서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지만, 저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 것을 기대하며 살므로 오늘도 이웃과 더불어 즐겁고 기쁘게 유쾌 상쾌 통쾌하게 살아가야합니다.
그래서 요즘 웃음치료사가 뜨고 tv에서도 예능프로가 인기가 높습니다.
가수나 탤런트 배우 중에서 심지어 아나운서까지도 더 웃기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어떤 때는 억지 행동들이 짠할 정도입니다.
연속극도 중간에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적 요소를 잘하는 빵빵 터뜨리는 조연이 있고 눈물을 울궈내는 주연이 있어야 합니다.
웃겨야 삽니다. 웃기기 위해 아이디어를 쥐어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러 웃기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리해서 웃음을 유발하려고 우스꽝스런 행동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주신 세상에서 기쁨으로 즐겁게 살며 주와 동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땅에서 함께 즐거워하며 유쾌 상쾌 통쾌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로 마음으로 주의 구원을 기뻐하라.
다윗은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확신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 후 궤계로 그를 죽게하였습니다.
스트로스 칸 IMF 총재가 호텔에서 청소부를 강제 성폭행하다 미수에 그치고 체포당했습니다. 이런 일이 몇 년 전에도 있었다 합니다.
그가 10억 보석금을 낸다고 해도 미경찰에서 도주 우려가 있다고 풀어주지 않습니다. 차기 프랑스 대통령 후보로 유력했던 그가 이제 정치생명이 끝났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웃기는 일은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칸에 비하면 자기의 염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결국 프랑스는 범죄국가, 음란 국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지도자의 도덕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국가 지도자의 도덕성은 그 나라의 도덕성을 대표하며 청렴성은 그 나라의 청렴도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칭찬받는 다윗이 간음과 청부살인의 엄청난 죄를 지은 일로 인해 선지자 나단에게 큰 책망을 받습니다.
이때 그는 죄로 인하여 구원의 기쁨과 의미를 상실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죄가 아흔 아홉 마리 가진 자가 한 마리 가진 자의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하는 그 비열하고 못난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기를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 회개기도 합니다.
시12장에서 주변의 의로운 자들이 삶을 오래도록 누리지 못하고 죽어가는 현실일지라도 ,경건하며 충실한 자가 고통을 당하는 부조리한 현실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를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 합니다.
성도는 환난이 임했을 때 하나님을 등지고 돌아서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깊으신 뜻이 있음을 믿고 더욱 더 하나님을 향하여 가까이 다가가 귀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환난을 주심은 환난을 꿋꿋하게 이기고 고통을 극복하고 모진 풍파를 참고 견디어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도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짓과 아첨을 말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다윗은 그의 심령 가운데 항상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아무리 거룩한 성도라 하여도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완벽한 삶이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죄를 솔직히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 공로로 구원에 이르려 하지 않고 오직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여 주님 주신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눅2:10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25:9에서 ‘그가 우리를 구원 하시리로다...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한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며 구원해 주시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보시고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마13:44에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은 산 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소유한 것은 세상적인 잡다한 것들로 별것 아닙니다.
그러나 감추인 보화는 그 고을을 다 사고도 남을 만한 넉넉하고 풍성한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이제 내 모든 것보다 말씀이 우선이요 무엇보다 예수님이 최고요 예수님만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시므로 믿고 경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땅에서 함께 즐거워하며 살기 위해 어떻게 할까요?
둘째로 회개로 하나님 앞에 즐거워하라.
눅15:3-7에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 보다 나으리라 합니다.
행8:4-8에서 빌립이 흩어진 사람들과 같이 사마라아성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파합니다. 말도 듣고 표적도 보고 귀신들이 나가며 중풍병자들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합니다.
성경은 성도를 양으로 하나님을 양을 기르시는 목자로 비유하곤 합니다.
주님은 당시 유대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는 양들로 보셨습니다. 세리와 창기와 같은 사람들을 일반 사람들이 혐오하고 하시 여기는 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당시 종교 종교지도자인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조차 사람들 앞에서 공개재판을 통해 더 창피를 주고 죄인으로 낙인찍었습니다.
세리나 창기 같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이스라엘 양무리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이들이 곧 목자 잃은 양 같은 사람들입니다.
양은 목자를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목자의 손에 들린 지팡이로 양들을 길을 잃지 않고 따라오라고 쿵쿵 땅을 치며 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양들이 따라 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야수들이 이빨을 감추고 꼬리를 내리고 슬금 슬픔 꽁무니를 뺍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홀로 무리에서 떨어진 양, 길을 잃고 헤매는 양에게는 유일한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길잃은 양, 병들어 본대와 함께 이동하지 못한 약한 양은 온갖 위기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이리가 틈을 노리고 있고 곰이 채가려고 숨어 있고 사자가 살금살금 양무리를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목자 잃은 양은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아파트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갑니다. 전셋값은 일 년이 지나면 일 년 연봉보다 더 많이 올라버립니다. 계속해서 수도권은 더욱 확장됩니다.
대한민국은 전쟁이 일어나면 적의 장사정포의 사거리에 모든 것을 집중시켜 스스로 취약점을 크게 만들어 더 큰 타켓을 제공합니다.
취업의 문은 점점 더 좁아져 가고 있습니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라인에서 같은 물건을 생산하며 어떤 사람은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하고 연봉 5천 만원을 받는데 하청업체 비정규직은 하루 12시간 주60시간을 근무해야 겨우 연봉 3천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뙤약볕에 나가 땀 흘리고 파김치가 되도록 일해야 겨우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들은 수천억씩 부정한 대출을 통해 부당한 이익을 챙깁니다.
이제 영호남간에 GNP의 차이가 갑절이나 되고 인구도 호남이 영남의 45% 수준입니다. 그래도 토지주택공사는 영남으로 가야 국가정책에 부합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나라입니다.
영호남간의 갈등은 이제 문제가 아닙니다. 수도권만이 있고 이제 지방정부는 모두 데모중이고 삭발 투쟁중이고 불평불만으로 부글부글 끓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나 창기 같은 사람들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목자 없는 양되어 항시 버림받고 손가락질 당했던 것처럼 저소득층은 점점 더 비참한 생활을 하고 호남은 더욱 못살게 됩니다.
피해의식 때문에 점점 더 불만세력이 되어 폭력화 되고 좌경화되어 갑니다.
균형감각을 상실하지 않고 좌우 빈부 노사 군관민이 모두 잘사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손잡고 웃으며 살아가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백성들의 마음에는 희망대신 절망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대신 무서운 심판에 대한 공포심만 극대화 되어 가는 사회가 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렇듯 희망을 상실하고 꿈을 잃고 비전을 찾아볼 수 없어 침체된 사람들을 찾아 구해 주시려고 영광스런 천국의 보좌를 떠나 누추하고 죄악이 가득한 이 땅에 오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스스로 믿는 자들에게 소외당한 채 절망과 정죄감의 포로가 된 자들을 구해주시고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죄인들을 찾아가 사랑으로 회개시키고, 회개한 그들에게 사죄와 영생의 축복을 주셔서 새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성도는 절망이 없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환난을 당할 때도 있고, 사단의 지독한 시험으로 고난을 당할 때도 있고, 실족하여 세상 법을 어겨 정죄 받을 때가 있을지라도,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며, 회개하면 우리 죄를 사해주시기 때문에 하늘의 산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기에 우리는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복음을 전했을 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듯이 우리 삶이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만족하고 즐겁게 해야 합니다. 상실감 소외감을 갖지 않도록 배려하고 돕고 협력하고 함께 해야 합니다.
과연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이 있을까요? 의인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해주신 칭의 받은 자만 있는 것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 서기관 같은 형식적 종교인들은 진정한 의인이 아닙니다.
다윗처럼 스스로 가슴을 찢고 회개하며 자복하며 예수 믿는 성도들로 인해 크게 기뻐하며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지만 병들어 고통이 극심할수록 의사의 손길과 약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통회 자복하는 자에게 주님 기쁨으로 찾아와 만나 주시고 치료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땅에서 함께 즐거워하며 살기 위해 어떻게 할까요?
셋째로 부활의 주님을 보고 기뻐하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밤에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손가 발 그리고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 주되 특별히 옆구리 창 자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군병이 예수의 죽은 것을 보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니 물과 피가 나왔다는 사실을 요19;34에서 기록한 후 이곳에서 다시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확실히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혼절하여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난 것이 아니라, 몸에 피와 물이 하나도 없이 다 쏟아 버린 상태로 확실히 100% 죽었다고 증언합니다.
육이 없는 영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이전에 약속하신 것처럼 육신까지도 확실히 부활하셨다는 것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뻐한 것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접하고 눅24: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없느냐 하시니”제자들이 생선을 드리니 생선을 받아 잡수십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영적지식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얻고자 예수를 포기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서울여의도집회에 왔을 때 한국대중가요 가수 중에 조 oo씨가 찬송을 불렀습니다. 미국 음악목사들이 그 실력을 인정하고 김장한 목사님과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유학을 주선해서 신학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채 목사자격증을 가지고 귀국했지요. 세상과 복음 중에서 갈등하던 그는 결국 세상을 택했고, 그리고 [조 oo예수 샅바를 잡다]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잘못된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대중가수로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결국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이방인이 되고 만 것이죠. 그 영혼이 핍폐해지고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를 노래 잘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많은 성도들 앞에 구원의 확신이나 예수님 영접 없는 사람을 큰 집회에 세운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각 지 교회에서 노래를 잘하고 교회 출석을 잘하면 성가대나 교사등으로 사역을 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교회에서 성가대 찬양대원등으로 활동하는 젊은 성도들이 저녁에는 그 악기를 가지고 술집이나 음란 한 곳에서 연주하고 노래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면 신앙의 기초가 잘 닦여 있어야 합니다. 기본이 잘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은 정말 예수님이 영육으로 온전히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참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할 때 그 성에 큰 기쁨이 임한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제 제자들이 거듭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이 변합니다.
벧전1:5-6“..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한 것이니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두렵고 바리새인과 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무서워 꽁꽁 숨었던 제자들이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 그 주님이 다시 오실 재림신앙을 가지고 오늘도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타나 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재림 신앙으로 믿음이 확실히 연단을 받아 주님 재림하시는 그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땅에서 즐거움의 삶을 살기 위해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마음으로 주의 구원을 기뻐하라.
둘째로 회개로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려라.
셋째로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기뻐하라.
성도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주님께서 나를 택하여 구원하여 주시고 구별하여 천국백성 삼아주신 것을 기쁨으로 받아둘이고 주님을 찬양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죄없는 백성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다만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자기가 스스로 죄인임을 회개로 자복한자마다 그 회개의 자복을 통해 의롭다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백성을 즐거워 받으시고 사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성도의 힘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무엇보다 악한 마귀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당백의 성도의 전투력은 바로 부활신앙 재림신앙에서 유래합니다.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살면서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언제나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웃으며 살아야 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참 기쁨의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