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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11)】 "바라만 보는 십자가 안 돼!"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11
성서는 하나의 심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러니까 이때까지 난 생각에 도마는 자기도 죽지 않을 확신이 있은 건 아닐 겁니다. 선생님이 예루살렘에 가면 꼭 맞아 죽을 것만 같은데, 선생님이 가신다고 그러긴 하고 “야 우리도 죽으러 가자.” 그랬지만 하여간 그래도 그 도마도 모를 땐 “내가 옆구리 만져보지 않고는 안 믿는다.” 도마의 성격이 잘 나와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데가 좋지 않아요? 완전하기까지 체험해 가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선생님은 우리를 인도할 거야. 선생님도 모르면서도 이 믿는 태도가 우리도 죽을 각오하고 가자. 말은 그러한 그 말인지? 꼭 그때 도마가 아니니까 모르겠습니다만 좌우간 좋은 게 그렇지, “우리도 주와 같이 죽자”, 어느 길도 주와 같이 죽으러 가는 길 아니겠어요? 주와 같이 죽으러 가는 길 가면 주와 같이 사는 길일 겁니다.
그만 두겠습니다.
질문자; 기독자의 사명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의 사명, 기독자의 사명에 대해서 단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함석헌; 이제 거기 있는 말, 그건 너무 다 아는 말입니다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한 마디도 그러지 않아요. 한 마디로 그렇게 말해서, 얼마든지 뭐. 그 대답 못하는 겁니다. 자기가 그야말로 속으로 어느 정도 다 돼 있는 대답인데, 어느 때 그걸 다시 이렇게 집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질문자; 종교란 길 같은 것이다 그랬는데, 길은 그 사용하는 사람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도 내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그랬는데, 그 내 길에 들어가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종교 아니겠습니까?
함석헌; 물론 그렇지요. 그러니까 가다가도 마지막 그 자릴 못 얻으면 99까지 가도 마지막 소용이 없어진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길을 가면서도 길을 왜 가냐? 집에 집에 집에, 걸음마다 집이지. 길이 아니거든. 길을 잃어버리고 그건 뭐예요? 그건 길이 아니지. 헤맨 거지. 그러니까 이게 생각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질문자; 성서도 하나의 심볼로 보신다고 그러셨는데 말이죠.
함석헌; 책으로서의 성서는 그렇죠.
질문자; 성서를 하나의 심볼로 볼 적에는 기독교 전체가 와해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함석헌; 아니 그것은 프로테스탄트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렇지. 가톨릭은 안 그럴 거에요. 퀘이커도 안 그렇고. 다른 사람도 안 그렇고. 성경에 권위가 있는 거지.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 이게 다 그런 거 깊이 생각해 봐야 돼.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우리 어떻게 어려서 날 때 신교를 만났으니까 신교도가 됐지. 나 어떻게 돼서 가톨릭 만나면 가톨릭 신자 됐을 거거든. 그런데 신교는 덮어놓고 거기서부터 성경이라고 자꾸 가르쳐서 우리가 그렇게 됐지. 이제 알고 보면 그렇게 말 안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 좀 알아야 한다 그 말이야. 우리는 그런 안목으로만 자꾸 생각을 하면, 가톨릭 사람들의 처지를 알아보지를 못하게 돼. 모르게 돼. 요새 가톨릭도 많이 달라지고 있나 봅디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의미가 없다는 것 아니라 성경공부 안하면 안 돼. 그러니까 나도 우리 퀘이커에서도 안 돼. 다른 나라는 또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성경공부 안하면 안 된다, 아무리 속의 빛이라고 그러지만 말이야. 성경공부 하나도 안 해. 이럭하고 와서 10년을 가만 앉아 봐도 뭣이, 그러니까 컴퓨터를 만들어도 처음에 넣어주는 거 뭐 넣어줬나 하는 것 따라서 그게 컴퓨터 크게 관계된다 합디다만, 그런 모양으로 성경공부 안하고는 될 수가 없지. 사람이란 또 어려서는 발달이 다르잖아?
어려선 모방을 해가지고 생명의 첫 단계는 모방이야. 모방을 안 하고는 자득(自得)하는데 가지를 못해요. 그것만 하고 마지막까지 모방을 하니까 자득할 때 갈 생각을 안 하니까 그래 그 폐단이지. 그래 자꾸 이렇게 말하는 거지. 어디 뭐 선생 없이 책 없이 돼요? 더구나 전통보다도 그래도 말 중에, 생각 중에서 고른 것이 말이고, 말 중에서 또 정리된 것이 글인데, 글로 돼있다 하는데, 그러니까 이건 거저 단순한 사람, 물론 사람들이 노력해 된 거지만 이렇게 선택이 되고, 이래서 역사가 이렇게 있다 하는데, 우리가 믿고 생활표준으로 따라 갈만한 거 있는 데가 있어요. 그렇지만 그걸 내 이 생각이 깨 가지고 하지 않고는 그게 한 우상처럼 이렇게, 확실히 신교 안에는 그런 폐단이 있게 됐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신이 뭐 요새는 차차 적은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사람 열심히 믿는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무슨 일 있겠나? 책 이렇게 들고 나오는 구절 봐. 아, 그렇게 되면 그건 미신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미신이야. 그것도 안하는 사람보다는 그것도 하는 사람이 조금 나은 점도 있어요. 하지만 그래 해독이 크게 있는 데가 있어요.
전체 사람의 공덕에 의해 구원
질문자; 그러나 믿음을 얻는 건축으로 보자면 바닥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어디다 두던지.
함석헌; 글쎄 그 바닥이 뭐냐 하면 이거가 바닥이다 그 말이야. 야, 그거는 어째서 역사적으로 아마 우리가 기독교를 받을 수 있었더냐? 바닥이 공통 바닥이 있기에 우리가 받아들였거든. 수천 년 후에 여기 와서도 그러니까 그걸 보면 바울도 그렇게 복음을 말하는 사람 하면서도, 예수 십자가를 강조하면서도 뭔고 하니 이방사람이 자기에 타고난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들어가면 그것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었는데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나타나 있다. 그러는 게 여기 진리의 근본 기초가 이속에 있는 걸 인정하고 강조하는 그게 더 중요한 거거든. 그거 있으니까 거기서 성경이 나왔지. 그러니까 이건 성경이 소용없다는 거 아니에요. 중요한데 그 대신에 어떻게 하면 성경을 살려볼 수 있냐. 이건 나도 프로테스탄트에 있었던 반동으로 아마 자꾸 이렇게 말이 되는지 몰라요.
질문자; 그러면 직관이나 직감을 말씀하셨는데. 매개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직관이나 직감이라는 것도 역시 살면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떤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와지는 그 직관이라든지 직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역시 그걸로 자기 자신을 의식할 수 없는 그런 지경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함석헌; 이거 보시오. 이제 그런데 그건 쉽게만 일조일석에는 안 됩니다. 그건 공부가 있어야 돼. 이 불교에서 참선하는 거 또 기독교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거. 그거 다 그 때문이에요. 이제 그 자릴 가자하는 것. 그러니까 이 지식이 소위 말하는 지식이라 하는 거 이거는 아주 건제해. 지구로 말하면 지각에 있는 건초에 속한 것 같은 이런 거지만 종교적인 이런 건 뭐 지식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하면 그보다는 훨씬 깊은 거 아니에요? 그건 소위 이런 따위의 정도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건 상당한 공부를 해야 돼.
그리고 또 한 가지 알건 말이야. 공부를 하되 이제 그거 그 얘기가 나왔으니까 직관도 거저 되진 않고 그래. 살아온 무슨 정도에 따라 이제 그러지. 거기 이 사람의 역사적 사회적 살림이라고 하는 게 중대한 역할을,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직관이라고 그래도 내 마음에 무슨 테두리라 할까, 이런 것은 한국적으로 뭣이 되어있는 데가 있어. 그렇지 않소? 그건 뭐냐 그러면, 수천 년 두고 그것이 아주 영원 고정한 것은 아니겠지만, 수천 년 두고 한국적인 살림을 해오는 동안에 무슨 된 이거 있어. 그러니까 그 점을 우리가 무시할 수가 없다고. 그런데 프로테스탄트라는 사람들은 그 점을 아주 무시하고 순전히 개인주의야. 개인이 잘만하면 되는 것처럼 그래서 그건 또 그 얘기 나왔으니까 그전에 여기 다른 분들한테 한 얘깁니다만, 가톨릭이라든지 불교라는데 있으면서 프로테스탄트 한데 있는 부족한 것에 하나는 전체의 공덕이라는 생각이 없어.
이제 가톨릭이라든지 불교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내가 부족해 육체적으로 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부족하게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이 전체 사람들의 공덕에 의해서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거야. 말하자면 우리 집에 어떤 애는 불구자로 났더라도 가족 전체가 번 그 돈을 그 가산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는 것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물론 그래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물질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렇다고. 정신적으로 불구자로 태어난 가정이 있다, 저 사람 어떻게 할까? 할 수 없지. 프로테스탄트들은 대답을 하면 할 대답 없으니까 뭐라 분명한 대답하기 어려울 겁니다. 왜? 사람은 제가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제가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그러니까 가톨릭에서는 분명히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기도 하고 불교에서는 죽은 자의 명복을 빈다고 그러는데, 나는 근래까지도 불교에서 죽은 자의 명복 빈다고 하는데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그건 불교식의 죽은 자의 명복이 뭐냐? 이건 내가 이 프로테스탄트로 머리가 굳어졌기 때문에 그랬거든. 그런데 만일 그런다고 그래 보세요. 다행히 요만큼이라도 타고 났으니까 그렇지. 이렇게 못 타고나면 그럼 어떻게 하지? 알 수가 없지 않아요?
아까 병 얘기했으니 병명이 중해서 알 수 없는 인간에게는 어떻게 선천적인 불구자가 있냐? 그 하나님이 어째 이런대? 그 의미를 설명을 해야 돼요. 그렇다면 거기도 우리의 국가살림에서 그런 모양으로 전체가 책임져야 되거든. 지금 이 정치에서 한다면 어떤 사회보장제도에 나온 것이 최고 아니에요. 나이 많이 되면 옛날에는 가족단위로 되니까 누구 말대로 저 친척 없나, 자식들이 없나? 없다면 조카 없나? 조카 없으면, 삼촌도 없다, 당숙도 없다, 오촌도 없다, 칠촌도 없다, 그럼 처가도 없다, 외가도 없다. 어쩌냐?
친척 중에 따라가면 가족주의 버릇에서 나온 건데, 지금은 그거 무너졌으니까 사람이 누가 일단 병이 난다든지, 재해를 당하면 그런 경우엔 사회가 책임을 져야 돼. 그 사람 살림이 개인으로 들어온 거 아니거든. 옛날 살림에 개인 단위 경제로 되던 땐 또 모르지만 지금은 더구나 전체로 됐으니까 그 사람이 실지로 무슨 한 일이 있던 지 없던 지, 이 앞으로도 할 능력이 있던 지 없던 지간에 사람인 다음엔 그 사람이 이 알림으로써 이 책임을 전체가 질 의무가 있어.
그런 모양으로 또 가능성도 있고 말이야. 그런 모양으로 이 정신에 있어서도 말이야. 그런 일이 있기 전에 타고나기를 본래 도둑질 잘하는 버릇을 타고나면 어떻겠나? 또 뭐 간질병으로 타고나면 어떻겠다, 정신질환은 어떻게 한다, 그걸 그 사람 저더러 해결하라면 어떻게 해결하겠어요? 프로테스탄트가 한다면 제가 해결해야 된다고 그래야 될 거예요. 그런데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럴 경우엔 전체에 쌓아둔 어느 그 공덕 때문에 그걸 입어서 살 수 있다 …….
세계가 내 안에 내가 세계 안에
질문자; 전체와 개인에서 전체가 개인을 보는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개인이 전체를 구하는 입장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된다고 그럴 것 아닙니까?
함석헌; 그건 마찬가지 서로 상관 돼. 그러니까 개인과 전체가 이게 서로 떨어진 게 아니다 그 말입니다. 겉에 나타나는 동적으로 보니까 떨어진 거지. 그게 서로가 내가 너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다 하는 데는,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이 지상적인 말로 번역을 하면 세계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세계 안에 있다, 그렇게 번역돼야 되거든.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공경하라 하는데, 동시에 네 이웃을 사랑해라 네 아버지를 구원해라, 그러지도 않고 네 친구라 하지도 않고, 선생이라 하지도 않고, 이웃이라 단순히 그랬거든. 이웃이라 하는 데는 한 사람도 두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 이웃이라 하는 속에 전체가 들어가.
난 오늘 아침 바로 그 생각을 했어요. 이웃이 뭐냐? 왜 이웃이냐? 왜? 구약에서도 부모한테 효도해라 한다든지, 네 몸을 존경하라 한다든지, 예수님 그런 말씀 별로 없고 말이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해라. 그게 나 옆에 있는 저 사람이 사람 한 사람인지 몰라도 이것이 곧 전체를 표시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모일 때는 나 혼자 앉아서 하나님한테 기도하는 것 아니라 전체가 앉아서 기도하는 거, 사람은 몇 사람이었든지 간에 우리 전체의 전체로서의 내가 기도해야 돼. 물론 개인의 기도도 있어야지요. 나는 나대로의 또 문제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동시에 그건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소승불교는 도리어 물 걱정을 하는데 많이 힘쓰고 그러지만, 대승불교에서 생각을 한다면 안 돼. 일체중생을 구원하자고 하는 그 생각이 없이는 성도 못한다고 그 조건을 크게 대승, 소승의 차이로 보지 않아요?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자리만을 이타할 셈이냐? 자기를 전체 속에서 곧 보고 전체를 자기 속에서 보는, 그런 거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그 생각, 난 서로 통하는 건지 압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은 우리가 프로테스탄트에서 난 사람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건 이제 구약에도 옛날엔 개인이 깨기 전에 전통적으로 있는 사회에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이 이가 나쁘다, 그건 개인이 발견 못되던 시대에 그래서 개인이 그 다음에 발견이 되니까 뭔고 하니, 이젠 그 사람의 죄는 그 사람이 담당하지 말이야.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담당시키지 않는다, 예레미야에 처음으로 나왔어.
그 말 첨으로 나온 거지. 아이, 그거 선지자의 그 말이고. 신약시대에 오면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만 거기서 일단 또 한 번은 더해가지고 말이야. 내 속에서 전체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간다고 하는 거, 대속한다는 거, 거기까지 갈 거 없이 요단강에 나와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데, 나갈 땐 개인예수가 나가 받은 거 아니거든. 자기가 곧 전체로써 의식 속에 전체로서의 의식에 들었으니까 하늘이 열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랬지. 만일 그것이 마리아 아들 요셉의 한 개인으로서의 죄를 회개를 하고 그런다면 하늘이 열리고 그렇게 안됐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가 우리는 도저히 지금은 쉽게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거지만, 우리도 거기를 가도록 노력을…, 확실히 그 실감에 들어가도록 그렇게 해서만 내가 너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고, 우리가 다 아버지 안에 있고 그런 자리에 가게 될 거에요.
질문자; 그럼 개인 신앙을 부정한다면 어떡해요?
함석헌; 부정을 하는 건 아닙니다. 부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라고 할 때에
질문자;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신앙으로 인해서 갈 수 있다면 전도가 필요 없게 되지 않겠어요?
함석헌; 그렇지 않아요. 그 사람 내 사람이 따로 갈라놓은 그런 게 있을 수가 없다고. 인생관에서는.
질문자; 그러니까 죄를 짓지 않게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으니까 죄를 짓는 것을 보면 우리가 죄를 못 짓게 구원해 준다, 인도해야 됩니까?
함석헌; 물론 인도는 인도지요. 그렇지만 나와 이 사람이 순전히 나는 나고 너는 너라 하는 이런 인생관 속에 사는 게 이게 개인주의란 그 말이야. 그거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몰라. 이 사람이 누구냐? 이 사람이 이것을 곧 우리나라 전체를, 우리나라 역사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보게끔. 나를 이 나라에, 이 한국에 구체적인 분, 인류에 구체적인 분, 하나님의 일에 구체적인 표현으로, 이 세계의 구체적인 한 표현으로 보게끔 돼야. 그런 점은 인도에는 바가바드 기타에 사실 하나님이 있습니다.
모든 만물 속에 나를 보고, 나 속에 만물을 보는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이것은 크리슈나가 한 말인데 같이 공통 되는 사상.
질문자; 그럼 예수님 당시도 예수님이 직접 죽은 사람의 하나라서 그런지, 축복을 빌어주지 않았다는 사실 아니에요?
함석헌; 죽은 사람에게?
질문자; 그러니까 가톨릭이나 불교 같은데서 말씀입니다. 죽은 사람이 명복을 빌어주는 경우를 빌어서 천당으로 가고……
예수님 부활은 역사적 사실
함석헌; 아니 여보시오. 죽은 사람이 어느 누구? 이제 오늘 채 나오지 않았는데, 나사로에게 가서 분명히 살려냈는데 죽은 사람한테?
질문자; 그런데 천당에 간다든지 말이죠. 이런 걸 가지고는 축복을 빌어주고 영생하고 …
함석헌; 그럼 천당이 무엇이냐? 그러는 문제가 또 딴 얘기가 되는데…
질문자; 선생님 말씀하신 것은 심오한 것으로서 아주 미비한 것이 있지 않아요? 역사적 사실일 수도 있는 것인지, 거기에 말씀해 주십시오.
함석헌;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죠. 역사적 사실인데, 역사적 사실에 이 겉에 나타나는 면에 관해서는 누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증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 안에 있는 것은 역사적인, 나타난 겉에 사실보다는 믿는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체험한 데서 근거를 하고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이 역사적 사실은 어쨌든지 우리가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로 미루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생각을 하면 그때 33살 때 있던 그 몸이 도로 살아나서 어디든, 난 그렇게 안 믿습니다. 그건 해 뭘 해?
질문자; 그거야 그렇지요. 거기 33살로 살아나서 어디 가 있을 거라고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죠.
함석헌; 그러나 육체의 부활이라고 그러고. 그걸 생각을 하게 되면 참 난 문제가 많아. 해결이 참 어렵습니다. 육체가 부활한다고 정말 육체의 부활이라고 그래야 맘에 좋거든. 아주 듣기가 좋은데 말이야. 육체의 부활이라면 그럼 어린애 간난 애 때 몸으로 부활합니까? 10살 때입니까? 장가가기 전 입니까? 후입니까? 죽을 때의 몸입니까? 어느 몸으로 구체적인 몸이냐? 어느 시간 공간의 나이가 어느 걸로 난 단말입니까? 이것도 저것도 안 난다, 어디 그러니까 예수님 “야 너희가 성경을 잘못 읽었다, 부활할 때에는 시집도 안가고 장가도 안 간다.” 그거 뭐야? 남성도 여성도 없다, 그 말이야.
질문자; 그러면 한 마디 더 질문을 하겠는데요.
함석헌; 그런데 이런 말, 이거 보시오. 그 말 상관이 없어요. 육체가 이 몸대로 난다? 난 죽을 때 몸인데 그래도 괜찮아요. 그건 요컨대 심볼인데 그걸 통해서 어떤 생명을 가지게 되나 그게 문제지 말이야. 그거는 그 사람의 지식정도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거니까 말이야. 지식이 대학지식을 가졌는데, 이제 그걸 그다음에 그것은 안 돼. 그러니까 무식해도 상관이 없어서 말이야. 죽은 다음에 난 요대로 있다가 이제 천당에 가면 말이야. 하나님이 이런 금관을 두었다 나를 줄 거야. 그대로 믿으면 좋아요.
그 할머니 그대로 간직해. 그거가 아니라, 그다음에 그 따위 면류관 금관 받겠는지 안 받겠는지 그게 아니라, 그걸 믿고 있는 동안에 여기 저도 모르는 이 생명이 정말 영원한 생명이 있어? 거기가 문젠데. 그게 이제 그만한 믿음이면 지금 분명이 몰라도 어느 때가서 그게 이제 될 거를 나중 믿어. 그것도 믿고 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구태여 건드려 주려고 그러지 말아. 하나 이 뭐 받은 과학 때문에 말이야. 의문이 되는 거야.
과학은 실지 실험을 해가지고 돼. 이 사람이 해도 그 결과, 저 사람이 해도 그 결과, 부인 할 수 없는 건데, 그걸 가지고 자꾸 네가 난 믿지를 않아 그렇지. 믿는데 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든지, 그러면 종교하고 과학하고 반대 되는 것 같아서, 믿기 위해선 과학은 내버린다 해도 되는데, 그건 소위 안 돼. 난 소위 충돌이 되거든. 지금까지 있던 교리를 내버리고 과학을 인정하고 그 과학하고, 성립이 될 수 있는 그 과학하고, 서서히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리를 찾도록 노력하라는 거예요. 그건 반드시 있다는 거예요.
과학은 무시해서 안 되고 그건 왜 그런가 하니, 실험해 보는 건데, 그건 아니라고 해. 저건 고집쟁이, 저 사람은 딴 목적 때문에 스스로 속이고 그러기 때문에 말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과학은 다 증명이 된 이 사실, 그걸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 이 세상에 관한 거니까, 예수님에 관해서도 나타내 보이는, 우리대로 우리 몸 있고 또 자기가 말하는 것 같으면, 그거 아니고 생명이라고 할 때는 저기 보다 깊은 지역을 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걸 우리가 말하는 거지.
그러니까 부활했다고 하는데 몰라. 시체도 검증 안 해서 알 수 없습니다. 죽어서 시체, 그때 로마사람들이 가져다 어떻게 했는지. 제자들이 어디다가 감춰놓건, 그건 말이 안 된 소리고. 그렇게 하고 있었다면 그 예수가 그대로 어디 남은 생을 숨어 다니다 죽었겠나? 그건 말이 안 된 소리고. 그렇지도 않아?
그러면 그때 육체가 살았다면 어디가 있을까? 그럼 거기서 살아났는데 제자들 하고 “야. 아침에 생선 가져오라 좀 먹자.” 그러면 지금도 생선을 먹고 있을까? 안 먹고도 살아가는 걸까? 안 먹고도 살아간다면 그걸 육체라고 그러겠나? 문제를 생각하면 해결을 못합니다. 그거 못합니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생명의 세계에 이걸 가지고 여기 우리는 말을 하려면 이 자료 이걸 빌어 가지고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믿는다고 그러는 거지. 말로 설명을 다하면 다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런 소리 이렇게 하냐? 그러면 나는 주로 이런 말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냐? 그러면 지식인 때문에 그럽니다.
문제는 지금 어디에 있냐하면, 무식한 사람은 도리어 그대로 신앙에 들어가기가 괜찮은데, 지식인, 현대 젊은 사람이야말로 맘이 헤매고 있는데, 이 사람들 어떻게든지 신앙으로 끌려면 나는 끌 가능성이 있고, 그 사람들 들어가면 일단 더 높은 자리를 개척을 할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왜 신앙 받기 어려운 면은, 예수님 처녀가 낳았다는데 그런 법이 어디 있냐? 과학은 어디 있냐?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그런 게 어디 있냐? 죽은 사람 도로 살아났다는 나사로 지금 어디에 있냐? 그러는데 대답을 한 마디로 못하면서 너는 믿지 않아 그렇지. 그건 고집에 소리지.
그렇게만 생각해 가지고는 그 청년을 교회 안에 들어오게 할 수 없다, 그러니까 교회 문에 가까이 가면 어마어마한, 이렇게 들어갈 수가 없어. 어떡하면 이 사람이 들어올 수 있게. 그러니까 내말은 그런 문제 괜찮아. 그거 중심문제가 아니니까. 처녀에게 낳다든 지. 뭐 어디 그건 네가 신앙에 들어가면 그걸 깨닫는 자리에 갈 거니까. 왠가 하니 그때 그 사람들도 믿음으로만 그걸 봤지. 믿는 마음이 없었으면 몰라. 그러게 로마사람은 보고도 못보고 군인들은 보고도 못 봤는데, 막달라 마리아 만이 볼 수 있었다, 맨 처음에 그런데 믿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고 믿는 마음이 있지 않은 다음엔 놓고도 못 본다. 그러니까 이것이 이 종교세계의 체험 아니요? 그렇게 돼서 나온 예수의 부활이여야지. 그걸 누가 보고 객관적인 예수의 일지를 써 두었다 한 소리가 아니니까. 그건 바꿔 생각해서 그런데 그런 말이 다 어디에 있냐하면, 그거 욕심에, 이거 죽고 싶지 않는 욕심이 우리 마음속에 잠재해 있어 그렇지. 그래서 이거 자꾸. 가서 우리 잃어버린 아내 거기 가 꼭 만나봐야겠는데, 나는 그래 안 만나 보면 어때? 만나보긴 뭘 만나보냐?
바라만 보는 십자가 안 돼!
질문자; 그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제 생각에는 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을 닮아야 되고, 예수님을 닮아야 되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예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거든요. 그러니까 저희들도 이 세상사람 소자 하나를 대접한 것이 곧 나를 대접 한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세상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된다, 그러면 이웃 사랑의 도를 찾아냈던 이 세상의 이치가 분명히 들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뭐냐 하면 200만 신도가 있다고 예수님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장사 속으로다가 자기네들 고대광실 높은 집에서 호의호식하고 말이에요. 처음엔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뭐를 하냐하면…
성토를 하고 해서 불을 받았지요. 받았지마는 점점 살다보니까 자기네 가족이 너무너무 나를 따르라는 자비를 구현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는, 그러면 우리들이 결국에 예수와 같이 십자가를 지지 않는데 문제가 있지 않느냐? 그러면 전체 한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체가 기독교인들 책임이 아닐까요?
함석헌; 참 그렇죠, 옳은 말, 그건 옳은 말이에요.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데, 그 말이 내가 나도 동감이 돼서 그러는데, 십자가 바라본다고 하는 것, 바라보는 것도 있겠지만, 바라본다는 소리는 좀 들하고, 십자가 진다는 말만 자주 좀, 그런 생각을 좀 더 많이 하시면 돼요. 그래야 되는데 다 우리가 바라보는 생각만 자꾸 하지, 질 생각은 안하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게 아까 체험은 아니 하고 남이 한 걸 빌어서 사는 종교라 그 말이에요. 내 종교가 아니고…(녹음 중단)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 어떤 분은 요한복음에 이 기사를 이렇게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거를 설명한 학자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의 서술하는 방법이 우선 그렇고, 또 전체를 봐서도 주로 어떻게 충돌이 돼서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데까지 가게 되느냐? 그 점을 주로 밝히자. 그래야 그렇게 보려고 그걸 반드시 그대로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건 별개 문제겠지만, 그런 생각을 한 번 두고 이렇게 봐보면 과연 그렇게 보이는 점도 있어.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지금까지 온 걸 보면 이렇게 나선형이라고 해도 좋고, 또 이렇게 커브가 자꾸 높아가는 걸, 대체로 높아 가는데, 거기 이렇게 이렇게 기복이 일어났다, 한번 그렇게 봐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2장에서 요한복음 처음에 있는 거는 신학적인 철학적인 그리스도의 생애, 예수님의 생애, 전체에 대한 서론이라고 할까? 총론이라고 할까? 그런 걸로 보아져. 그 다음 실제 하신 일과 가르치신 말씀 그것을 서술하는데, 2장에서 가나 혼인집에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그 얘기가 있잖아요? 이제 오늘 읽어 가면 거기 자연이 그런 말이 나옵니다마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그 일 내용을 전연 무시 할 수는 물론 없지만, 그걸 전연 생각 안 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대체로 봐선 예수님의 하신 일은 어떤 뭣을, 뜻을 드러내기 위해 하신 걸로 오늘 이런 말씀이 나와요.
기도하실 때에 이제 말씀이 있습니다. 그건 이따가 봅시다만 그래야만 옳을 겁니다. 병인을 고쳐주는데 그 사람의 그 아픈 거를 동정한다든지, 또 병을 고치기 위해 물론 그것도 전연 목적이 없는 건 아니지마는, 그러나 그보다는 더 큰 의미는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게 하잖아? 무엇을 드러내시나 그 점에 있는 거를 봐야 옳아. 그러니까 성경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그 해석이 구구합니다마는, 그래 극단으로 나가면 심지어는 어떤가 하니 또 그거는 연극처럼 드라마처럼 그렇게 일부러 그런 뜻을 드러내기 위해 그런 거라고. 그렇게 극단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또 온당치 않을 겁니다. (녹음11, 3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