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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이 기도하는 집 すべての民の祈りの家。(2026년 8월 16일 주일예배)
본문: 이사야서 56장 6절~8절
6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이방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여 주님의 종이 되어라.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이방 사람들은, 7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또한 그들이 내 제단 위에 바친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내가 기꺼이 받을 것이니, 나의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8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을 모으시는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미 나에게로 모아 들인 사람들 외에 또 더 모아 들이겠다.”
6 また、主のもとに集って来た異邦人が主に仕え、主の名を愛し、その僕となり安息日を守り、それを汚すことなくわたしの契約を固く守るなら 7 わたしは彼らを聖なるわたしの山に導きわたしの祈りの家の喜びの祝いに連なることを許す。彼らが焼き尽くす献げ物といけにえをささげるならわたしの祭壇で、わたしはそれを受け入れる。わたしの家は、すべての民の祈りの家と呼ばれる。8 追い散らされたイスラエルを集める方主なる神は言われる既に集められた者に、更に加えて集めよう、と。
지난 주일까지 9주간을 예수님과 행복한 동행을 위한 메시지로 주님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성서일과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내면에 심어 주시는 씨앗과 같은 음성과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서인 이사야서에서 선별된 구절입니다. 이사야서가 쓰여진 역사적인 배경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눠집니다. 첫번째 1장~39장은 B.C 8세기에 남유다의 예루살렘에서 쓰여졌습니다. 다음으로는 40장~55장까지는 B.C 6세기에 바벨론 포로기 때에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받은 구절이 포함된 56장~60장까지는 포로기 이후 고레스 왕의 귀환 명령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시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그들은 모세 오경을 철저하게 준수하며 선민으로서의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 옛날 고대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을 때에는 더욱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솔로몬 왕이 성전을 세웠을 때에는 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여왕이 존경을 표할 정도의 강대국을 세웠던 역사가 있지요. 역대하 9장에서 그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으니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강대국을 세웠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자만하였습니다. 특히 모세를 통해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가나안 땅에서 자유를 가진 민족으로 거듭났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아래에 살았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은 이러합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 7:9)
그리고, 이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중동 땅에 세워진 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국민이 되어 그들의 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을 받는 것일까요? 그들이 강성대국이 되고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다 그 나라의 시민이 되라는 말씀일까요?
오늘 성경본문은 놀랍지만, 당연하게도 어떤 특정한 현실국가의 시민이 되는 것이 축복의 조건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신명기 율법에 의해서 부정하다고 여겨졌던 신체장애나 육신의 결핍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얼마든지 그 축복의 언약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섬기고”, “주께서 명령하신 안식일 규례와 언약의 율법들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육신의 이스라엘이 아닌 믿음의 이스라엘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신비와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29)
여기서 말하는 “이면적 유대인”, 그리고 “마음의 할례”라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이면적 유대인이 되고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인 것이지요.
우리가 믿는 복음은 인간적인 어떤 자격조건이나 상황, 여건에 의해서 쟁취하거나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축복의 언약을 맺으실 사람들을 이스라엘 민족으로 선택하셨던 것도, 다시 이방인에게까지 그 범위를 확장하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일방적인 권세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이 권한을 침해할 수도, 혹은 제멋대로 왜곡할 수도 없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기준과 약속을 수용하고 믿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방인까지 부르시는 이 약속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믿는 것이 참된 자유와 사람됨을 지키는 축복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지요.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로서 “은혜의 수단”이 되는 예배와 말씀과 기도, 그리고 경건의 활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 더럽히지 않고 지키는 것이 곧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한 주간의 첫 날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예배하고, 찬양하며, 감사와 예물을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어떤 문자적인 날을 고수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7-28)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인자’ 곧,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 기준이 날짜나 요일에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첫 날이 곧 오늘날 우리가 주일로 지키는 일요일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이스라엘과 이면적 유대인과 마음에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을 주일(혹은 성일)로 부르며 예배하는 날로 구별하여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전통은 사도 바울의 활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사도행전을 보시면….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행 20:7)
“주간의 첫날”, 즉 “주일”에 성도들의 모여, 떡을 떼었습니다. 성찬을 나누며 예배를 지켰다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애초부터 이렇게 한 주간의 첫 날을 구별하여 예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한 주간의 첫 날을 구별하여 감사와 찬송, 그리고 주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듣는 주일예배는 매우 소중한 은혜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7절 후반절에서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불릴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기록될 때에는 이미 성전도 파괴되었고 70년간의 포로기를 마치고 이제 막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영적인 흔적들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집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불릴 것이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아 거듭난 이면적 유대인, 마음에 할례를 받은 모든 이들이 기도의 사람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에는 민족이나 혈통적인 배경만이 아니라, 장애나 결핍이 있는 것과의 여부와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이 성도의 정체성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 15:16)
그래서 우리는 모든 기도에 항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이렇게 저렇게 잘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끝내면 우리의 기도는 단순한 기원이나 소원을 비는 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기도는 합니다. 우상에게도 기도하고, 별과 달, 떠오르는 태양과 온갖 잡다한 것에 대고 기도하지요.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기원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우리가 그 어떤 소원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우상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는 것을 믿습니다. 심지어 우리 막내가 매일 비는 소원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지요.
그럼 하나님은 모든 기도와 소원을 기원할 때 무조건 들어 주실까요? 만일 그렇게 모든 기도를 기계적으로 있는 그대로 들어 주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현실에서 살게 될까요?
놀랍게도 현재 전쟁을 하고 있는 유럽의 두 나라는 종교가 같습니다. 모두 자신들의 승리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나라 사람들의 기도를 성취해 주셔야 할까요?
미국의 남북전쟁 때의 일화라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이 전세가 한참 불리했던 시기에 참으로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측근의 각료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음을 모아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그런 기도는 아예 하지 마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신실한 링컨에게 기도란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자주 만나고 그 뜻을 더욱 분명히 확인하는 은혜의 통로였던 것입니다.
물론 기도는 1차적으로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한 길이 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비하시고 예비하신 것을 취하는 그릇과도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란 하나님을 설득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입니다. 또한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께 내 뜻을 알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맞추는 시간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을 우상숭배하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바알을 함께 섬겼고, 심지어 바알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여겼던 역사가 있습니다. 바알에게 소원을 비는 것처럼 하나님을 소원성취의 방편으로 모욕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의 이스라엘은 철저히 망가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이지요. 이제는 그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복음을 믿는 것이며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그들의 영적인 실태를 보시고 분노를 표현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 21:12)
이른바 성전정화의 사건인데요. 그 때 예수님은 건물의 성전이 겉모양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지만, 회칠하여 아름다운 색으로 치장한 무덤과 다를 것이 없음을 고발하셨습니다. 성전이 우상숭배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의 상을 엎으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3)
바로 오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외침을 다시 선포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성전과 같은 존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성전”은 곧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그럼 저와 여러분은 모든 일상이 기도로 채워진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
이 말씀을 들으면 솔직히 자신없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구절 때문에 교회 다니는 것이 더더욱 부담스럽다는 분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기도로 충만한 사람, 기도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주님과 동행함으로 가능합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가능합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감으로 가능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란 몸이 떨어져 있어도 여전히 친밀함을 유지하는 관계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서울 시내에서 양복점을 하셨습니다. 그 때 건물의 주인이 건물 뒷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주인집에 초등학생 형이 있었습니다. 그 형과 너무도 친하고 재미 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집에 가서 밥도 먹고, 그 형의 방에서 자주 함께 놀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가족은 몇 년 후에 이사를 했고, 그 후에 다시 그 형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에도 그렇게 너무 아름답기도 하고 친밀했지만,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과 만남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만남들이 계속 있을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렇게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또 만나는 것의 반복이니까요.
그런 만남 가운데 인격적인 관계란 아무리 먼 거리에 떨어져 살아도 늘 기억하며, 늘 마음에 품고, 또한 종종 아무렇지 않게 연락할 수 있는 사이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의 관계가 바로 영원토록 이어지는 인격적인 관계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일 때, 기도와 하나된 사람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수시로 주님과 소통하며 그 말씀을 듣는데 거리낄 것이 없는 관계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말고 “기도”라는 특정한 행위를 반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늘 내 안에 살아 계신 성령님을 의식하고 마음에 품어 그 분의 마음에 합당한 행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소통하는 것이 곧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 그 자체가 되는 사람으로 일상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축복하시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의 주인공인 거룩한 성전의 정체성을 가진 태도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하루에 하루만큼 살아가는 순종인 것을 믿습니다. 오늘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출신성분이나 행위의 정도나, 혹은 세속적인 성공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나의 삶에 임재하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실감하게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유일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축복과 자유를 누리는 사람다운 삶의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부르십니다. 그 말씀은 건물로서의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거하시는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에 대한 계획이며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내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을 의식하며 그분과 동행하라는 초청입니다.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우리의 일상은 예배가 되고 기도가 됩니다. 이번 한 주도 주님을 바라보며 하루에 하루만큼 살아가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그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전의 삶이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순종이 될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이번 한 주간만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행복한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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