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비밀 노트 / 곽 주 현
때로는 오랜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새김질할 때가 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금방 했던 일도 잊곤 하는데 오히려 수십 년 전의 어떤 일은 방금 본 인상 깊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펼쳐 보인다. 기억의 마술이다. 나는 지금 그런 마술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50여 년 전 일이다. 첫 발령을 진도 본섬으로 받았다. 갓 스물두 살의 풋풋한 청년이었을 때 교단에 섰다. 6 개월 근무했는데 갑자기 다른 학교로 전출이 되었다. 풋내기 교사였던 때라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 옮겨 다니는 행정 절차를 전혀 몰라서 이유도 묻지 못하고 교육청에서 가라는 곳으로 갔다. 처음 듣는 섬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전입이나 전출이라는 용어조차도 잘 모르던 애송이었다.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이 아주 아주 먼 곳이라며 걱정했지만, 그곳으로 가려고 문화호라는 배에 몸을 실었다. 새로 부임한 그 섬에서의 이야기다.
멀리서 확성기 소리가 들린다. 여객선이 들어오나 보다. 배가 섬에 가까이 오면 유행가를 크게 틀었다. 조용하던 섬마을이 활기를 띤다. 정기 여객선이 이틀 만에 한 번씩 닿지만, 계속 강풍주의보가 내려 이번에는 일주일 만에 왔다. 노랫소리가 들리면 섬마을 사람들이 모두 선창으로 나온다. 그들 무리에 섞여 나도 자연스럽게 같이 따라 나갔다. 손님을 맞거나 가져갈 물건이 없어도 무슨 의식을 치르듯 그렇게 주민 모두가 우르르 몰려나왔다. 가족과 함께 있어도 자연이 주는 외로움은 어찌하지 못해서 였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5월의 맑은 햇살이 벌써 서쪽 수평선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다. 썰물 때라 여객선이 선창에 닿지 못하고 이백여 미터 떨어진 바다 위에 멈춘다. 여행객들이 큰 배에서 내려 작은 전마선에 옮겨 탄다. 노을 저어 오는 작은 배를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일어서서 손을 흔든다. 벌써 사방이 어스름해져 누구인지 분간이 안 된다. 오랜만에 들어오는 마을 사람인가 보다 하고 무심하게 서 있었다. 그가 또 무어라 큰 소리로 외친다. 파도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뒤섞여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다시 들으니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누가 나를 찾아올 리 만무해서 ‘잘못 들었겠지.’ 하면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배가 가까이 왔다. 친구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손을 내젓고 있지 않은가! 어찌나 반갑던지 엉겁결에 갯가로 뛰어내렸다. 방파제 아래 자갈밭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웬일인가 싶어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마을 사람들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친구가 이곳까지 왔으니 그럴 수밖에.
너무 먼 곳이었다. 목포에서 여객선을 타면 장장 12시간이 넘게 걸렸다. 진도 팽목항에서 26km, 목포에서 96Km였지만 진도 관내의 섬(지금도 32개 섬을 거쳐 간다고 한다.)을 다 돌아와야 해서 그랬다. 접안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 여객선이 섬에 닿지 못하고 멀찌감치 정박해 있으면 종선이 와서 연결했다. 성어기에는 여행객을 데리러 올 사람이 없어 한 곳에서 30분을 기다리는 적도 많았다. 만주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서남해의 끝 섬 중의 하나였다. 진도군 조도면에 있는 서거차도이다.
이런 곳이니 절친이어도 쉽게 찾아올 수 없었다. 그 섬의 유일한 통신 수단인 며칠 전 편지로 한번 와보고 싶다는 내용이 있어서 그저 마음이겠지 했다. 그런데 그가 여기까지 왔다. 소지품이라고는 달랑 칫솔 한 개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다가 입영 통지서를 받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내게로 왔다 한다. 대학을 다니기에는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한 면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진학할 생각을 아예 안 했다. 그렇게 많이 배워서 무엇하냐며 그냥 육체 노동해서 벌어먹고 살겠단다. 양복에 넥타이 매고 펜대 잡고 실내에 갇혀 일하는 것보다 작업복 입고 몸을 부대끼며 돈을 버는 것이 더 적성에 맞는다고 했다. 소위 말하는 블루칼라로 지내고 싶다는 거다.
친구는 중학교 동창생이다. 반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운동도 잘했다. 글쓰기 실력도 뛰어나 학교 백일장대회가 열리면 장원은 거의 그의 차지였다. 그러나 나는 입선도 한 번 하지 못했다. 거기에 상처를 받아서 그랬는지 나는 글쓰기에 전혀 소질이 없다고 여겨 그것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바둑도 잘 두어 그를 이기는 친구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연애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 여자 친구도 잘 사귀었다. 그래서 능력 있는 그가 늘 부러웠다. 고등학교도 세간에서 말하는 일류학교에 붙었고 나는 떨어졌다. 학교가 달라졌지만, 우리는 다달이 한두 번은 만났다. 영화관에도 가고 별 볼일 없이 시내를 싸다녔다.
그런 친구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저 고맙기만 했다. 오 갈데없는 절해의 고도에서 그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갑워겠는가! 통지서를 보여 주며 두 달 후에 입대한다고 말한다. 하숙집에서 그와 숙식을 같이했다. 두 주쯤 지나 내가 육지로 나 갈 일이 생겼다. 서울에서 둘째 누나 결혼식이 있어서다. 전날 밤 친구가 무슨 말을 하려다 머뭇거렸다. 사귀던 여자 친구와 싸우고 헤어졌는데 서울 언니 집에 있는 것 같다며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어렵게 내민다. 꼭 만나고 오라는 부탁이다. 친구는 다른 것들은 시시콜콜 다 이야기했지만, 여자 친구에 대해서는 여태껏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나도 물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고등학생 때부터 죽자 살자 하는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다른 친구에게 들어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것도 1학년이 2학년 선배 여학생과 사귄다는 이유로 소문이 더 커졌다.
그녀를 만났다. 긴 생머리에 아직도 소녀티가 나는 앳된 얼굴이다. 친구가 걱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 참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끝내 눈물을 보인다.
*다음 주에 다하지 못한 이야기 계속하겠습니다.
첫댓글 오, 밀당의 고수시네요.
어느 세월에 일주일을 기다린데요.
어머나
가장 궁금할 때 <계속>을 써 버리네요.
오메. 오래 전 신문에 연재하던 소설같아요.
결정적인 장면에서 끊어버리셨네요?
하하하. 다음 주를 기다리겠습니다. 곽주현 선생님은 이번 학기 방학이 없겠네요.(10부작은 쓰셔야죠.)
아, 참말로.
'내 청춘의 비밀노트' 제목이 독자를 흡입하네요.
재미있는 소설 읽는 줄 알았습니다. 선생님 글솜씨 맛깔납니다.
비밀이라는 말에 무슨 일이 이어질 지 너무 궁금해요. 이거 막장은 아니겠지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