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 / 박미숙
딸, 사위와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기다려진다. 5월 첫 주 연휴에 가족이 다 모였다. 보통 3, 4일은 지내다 가니, 며칠 전부터 목록을 작성하여 장을 본다. 이것저것 계절에 맞게 많이 준비하지만, 만약 시간이 없어 음식을 한 가지만 해야 한다면 그건 망설임 없이 ‘도토리묵’이다.
긴 시간을 함께 지내면 한두 끼는 외식 하게 된다. 더욱이 남편은 ‘술은 밖에서 마셔야 제맛’이라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위와 한잔하고 싶은 것을 말릴 수 없다. 육식을 좋아하는 남편과 사위, 철저한 채식주의자인 큰딸이 함께 만족할 수 있는 메뉴를 고르기는 어렵다. 고기 구워 먹으러 가게 되면 큰딸을 위해 도토리묵을 쑤어서 들고 간다. 몸에도 좋을뿐더러 음식점에 꺼내 놓기에도 번잡하지 않아 덜 미안하다.
해마다 큰시누이가 도토리 가루를 만들어 주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조카를 안타깝게 생각해, 우리 집만 늘 챙겼다. 하지만 재작년부터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셔서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산에도 도토리가 많으니 이제 내가 만들어서 형님께 드려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우리 반 아이들과 수업 시간에 ‘도토리 쟁탈전’ 다큐(사람들이 산에서 도토리를 많이 주워 가서 먹을 것이 부족하니 짐승들이 마을로 내려와 농작물을 먹는데 농사를 망쳤다고 짐승들을 때려잡는다는 내용)를 본 뒤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나뭇잎으로 덮여 있는 것까지 줍다 땅벌에 쏘였다. 금방 손이 퉁퉁 부어오르고 구부려지지도 않아 응급실로 쫓아갔다. 주사를 맞고 약도 먹었는데 쉽게 가라앉지 않아 이튿날도 병원에 갔다. ‘벌을 받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통 주워 놓았지만, 막상 가루를 만들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짝 말려 껍질을 까고 떫은맛이 없어질 때까지 물을 갈아 가며 며칠간 우려내야 한다. 그다음에 곱게 갈아 체에 밭쳐 앙금을 가라앉혀서 도토리 녹말을 만들어야 하니 내가 하기엔 너무 고난도다. 포기했다. 통에 모아 두었던 도토리는 다시 산에 다 부었다. ‘형님은 해마다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서 주셨구나.’라고 생각하니 새삼 더 고마웠다.
설날이 다가왔다. 딸들이 오는데 도토리 가루가 없다. 한 살림에 사러 갔는데 만들어진 묵이 있었다. ‘명절이라 준비해야 할 것도 많으니, 이번에는 저것으로 하자.’ 싶어 두 통을 샀다. 집에서 한 것과 맛이 달랐다. 평소와 다른 식감에 식구들이 잘 먹지 않아 한 통은 그대로 남았다. 힘들어도 이것만큼은 꼭 집에서 해야겠다 싶었다.
도토리묵은 적어도 30분 이상 저어야 맛있게 된다. 팔도 아프고 지겨워 유튜브 강의를 틀어놓고 시작한다. 이번에는 작은딸과 함께 만들어 힘이 덜 들었다. 가루와 물의 비율도 중요하다. 가루 한 컵에 겨울엔 물 여섯, 여름엔 다섯 배인데 아직 한여름이 아니라 그것보다 조금 더 많이 붓고 소금을 반 숟가락 넣었다. 둘이 서로 번갈아 젓고 얘기도 나누니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마지막에 들기름을 두른 뒤 네모난 유리그릇에 부어 몇 시간 식힌다. 실력이 부족해서인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누룽지가 생기는데, 불을 약하게 하여 뚜껑을 덮어두면 냄비 바닥에서 살짝 일어나 잘 긁어진다. 묵 누룽지도 맛있다.
아주 잘 만들어졌다. 진한 갈색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며 탱탱하다. 한 입 먹어보니 쫀득쫀득하다. 물결 무늬 칼로 썰어서 접시에 예쁘게 담고 양념장도 맛깔스럽게 만든다. 그다음 끼니때는 상치, 쑥갓 넣어 묵무침을 만들어서 먹는다. 백년손님인 사위 위주로 음식을 준비하다 보면 큰딸이 마음 편히 먹을 것이 없을까 걱정되는데, 도토리묵은 모두가 잘 먹으니, 가족이 모일 때마다 빠뜨리지 않을 수밖에.
특음식을 먹으면 함께했던 시간과 공간이 떠오른다. 어릴 때 연탄불에 코다리를 구워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던 기억이 많다. 부모님이 드시던 막걸리도 한 모금씩 얻어먹으면서. 딸들에겐 도토리묵이 그런 추억의 음식이 될 것 같다. 오월의 푸르름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연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