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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일(사순절 첫 번째 주일/성청주일)
본 문: 요한복음 11:17-35
제 목: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설교자: 김규태 목사(하늘사랑교회)
when?
오늘은 교회절기상으로는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四旬節)은 40일 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기독교 절기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도와 금식으로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더불어 오늘은 국가적으로 삼일절 101주년이기도 합니다. 우리민족이 주권을 잃고 일제의 탄압 가운데 있을 때, 우리 선조들이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날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은 참 귀한 날이고, 의미 있는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문제들로 인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스스로를 지켜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어제까지의 확진자수가 3,150명이었습니다(2020년 2월 29일 16시 기준). 주로 대구와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 되었습니만, 우리가 살고 있는 대전시에도 13명의 확진 자가 생겼습니다. 대전시의 확진 자들의 동선(動線)을 살펴보면, 저와 여러분이 자주 드나들던 생활공간들이기에 더욱 염려가 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곳에 모여 함께 예배하기까지 저와 여러분은 현실적인 삶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해마다 바나바훈련원에서 제작한 달력에는 멋진 풍경사진들과 시들로 가득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진들과 시들은 훈련원 원장이신 김정호 목사님께서 전국을 누비며 손수 카메라에 담고, 자작하신 시들입니다. 3월 달력에는 주작산 진달래 사진을 배경으로 “빛의 갑옷” 이라는 제목의 시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나 보기 역겨워
즈려 밟힌 진달래꽃
오늘 소박히 피웠습니다.
빛난 아침 햇살로
오시는 임 위해
붉은 빛 송이로 피웠습니다.
임께서 오시더니
얼굴 환히 빛나도록
송이송이 어루만지십니다.
세상 밝혀 빛이 되고
열방 세울 등불로 피어나니
어둠의 옷을 이제 벗고
빛의 갑옷을 갈아입습니다.
어둠이 저만치 도망갑니다.
김정호 원장님이 지은 이 시에는 예수님을 다시 만날 날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현실은 어렵지만,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나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본문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병든 오라버니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2-3km 떨어진 유대 땅 베다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모두 두 곳의 베다니가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던 곳은 요단강 건너 편 베다니였습니다. 이곳은 지금 예수님이 계신 곳이기도 합니다(요 1:28; 10:40). 그리고 방금 전에 말씀드렸던 예루살렘 동쪽 베다니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살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이 두 곳은 약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였습니다. 원래 베다니는 히브리어로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빈민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빈민촌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주변에 머물며 살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계신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권력자들과 함께 머물지 않으시고, 주로 빈민촌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자, 그 누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는 자가 병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즉시로 유대 땅 베다니로 내려가지 않으시고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깨우러 가노라(11절).”고 말씀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 베다니로 내려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절)’고 밝히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오히려 자기들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유대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영적인 어두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제자들이 육신적으로는 예수님의 곁에 가까이 머물러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의도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자주 오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베다니로 내려가자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거꾸로 자기들도 예수님과 함께 죽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자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열리고, 그들의 믿음이 세워지는 계기를 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선한 목적을 가지시고, 사랑하시는 자가 병 들어 죽게 되었음에도 곧바로 내려가지 않으시고 시간을 지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절).”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이 영광 받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연약한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워주시기 원하셨습니다(15절).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 가운데 찬양사역자 김브라이언이 부른 “주가 일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머물 때, 그 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 될 때, 빈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 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인생의 날이 저물어 가고, 우리가 빈들에서 머물 때, 우리는 외로움과 실패의 감정을 느낍니다. 우리의 때가 다 지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느낄 때 역설적이게도 그 때가 하나님이 일하실 때입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이틀을 더 유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물론 병든 나사로가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아픔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에 집중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리고 연약한 제자들의 믿음을 세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이 비록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예수님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선한 계획이 있습니다.
what’s problem?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기후는 고온다습해서 사람이 죽으면 보통 당일에 매장하거나 아무리 늦어도 3일 이내에 매장했습니다. 그런데 종종 매장하지 않고 시체를 그대로 두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념상 죽은 후 사흘 동안은 그 영혼이 시신을 떠나지 않아 다시 소생할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이 완전하고, 최종적인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20년 2월호), p. 285.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먼저 들은 사람은 언니 마르다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마을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예수님께 자신의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왜 예수님께서 좀 더 일찍 이곳에 오지 않으시고, 이제야 오셨느냐고 불평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좀 더 일찍 이곳에 오셨더라면, 자신의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어서 마르다는 2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다함께 22절을 찾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줄 안다고 말했습니다. 얼핏 보면, 이렇게 말하는 마르다의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마르다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우리는 마르다의 믿음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23절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24절에서 마르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다함께 24절을 찾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유대인들은 종말의 날에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천사도 믿지 않았고, 부활도 믿지 않았지만, 바리새인들은 천사도 믿었고, 부활도 믿었습니다(행 23:8). 그러나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 현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르다의 고백도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현재, 이곳에서 이루어질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현재적 부활을 믿은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마치 이와 비슷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고치실 수 있어. 하지만 지금 그 일을 하지는 않으실 거야. 예수님의 권세는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에게 그런 능력을 사용하실지 모르겠어.”(위의 책, p. 131.)
혹시 우리도 마르다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국제전도폭발훈련의 복음제시 내용을 보면, 믿음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과거에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믿듯이 예수님을 믿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이 과거에 살아계셨지만, 현재 나를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 줄 수 있는 분이라고는 믿지 않아요.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현재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서 마르다의 믿음은 미래적 종말론에 갇혀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또 실제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부활에 너무 강조점을 두어서, 현재적 종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균형 잡힌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을 다시 살려내실 것을 믿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현재 내 삶의 현장에서도 그 일을 이루실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마르다에 대해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제가 보기에 마르다의 신앙은 ‘믿는 신앙’이 아니라, ‘아는 신앙’에 그치고 있다고 봅니다.
마르다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마르다는 시종일관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만약 마르다가 오늘 우리교회 예배에 참석했다면, 아마 사도신경을 이렇게 고백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압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다.
나는 성령을 알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압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이것을 진정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참된 신앙고백은 “내가 압니다.”가 아니라 “내가 믿습니다.”고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이것을 내가 믿느냐?(26절)”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마르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who?
마르다와 대화를 마치신 예수님은 그 동생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29절). 그리고 다음과 같이 행동하고 말했습니다. 우리 다함께 32절을 찾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21절과 32절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반응을 각각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자, 제가 여러분에게 퀴즈를 내겠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했던 행동과 말 중에서 같은 것과 다른 것을 찾아보세요. 퀴즈입니다.
먼저 같은 말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지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똑같은 말을 예수님께 했습니다. 그러면 이 둘 사이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동생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지만,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작아 보이지만, 아주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어려움을 만나면 예수님께 불평할 수도 있고, 섭섭해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왜 늦게 오셔서 병든 오빠를 죽게 내버려두십니까?” 이런 섭섭한 마음은 마르다와 마리아 둘 다 가졌던 마음이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주목하는 것은, 이 둘의 말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섭섭한 마음, 불평하는 말을 결코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죽은 자를 능히 살릴 수 있는데 네가 왜 그것을 믿지 않느냐?”며 마리아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시고,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셨습니다.
33절에 보면,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4절).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히 4:15). 예수님은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눈물 흘리는 자의 눈물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함께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함께 눈물 흘리는 분이십니다.
박완서 작가의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박완서 작가가 다 자란 아들이 사고로 죽고 난 뒤 2주 동안 몸부림치며 쓴 일기입니다. “눈을 뜨니 … 꿈이었으면 하는 몽롱한 착각을 즐길 새도 없이 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서운 괴물처럼 가차 없이 육박해 왔다. … 그 다음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몸을 솟구치면서 울부짖을 차례였다.” 이 비탄에 잠긴 어머니의 고통을 겪어 보지 못한 이들이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김형국, 「오늘, 나는 예수를 만난다1」(IVP, 2010); 「생명의 삶」(두란노, 2020년 2월호), p. 89에서 재인용.
저도 자녀를 잃은 부모의 고통을 잘 알지 못합니다. 제가 직접 체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한 병에 걸려 고통 중에 있는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은 조금 공감이 됩니다. 저는 어제 밤에 딸아이와 2년 전 병원에서 지냈던 일을 회상하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딸이 저와 대화를 나누다가 여러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린 딸에게 몇 달 간의 투병생활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 때만큼 제 인생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습니다. 그 때 저는 같은 병실에서 매일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는 아이들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지금은 딸의 건강이 좋아져서 웃으면서 옛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저는 그 때의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일 이후로 저는 병중에 있는 많은 이들을 고통을 더 깊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what?
예수님은 마르다의 눈물을 보시고 함께 우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34절)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무덤에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을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심한 냄새가 났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나사로는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그 얼굴이 수건에 싸인 채로 굴에서 나왔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았던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모두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우리 다함께 25절과 26절을 찾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첫째로, 예수님은 부활이십니다.
죽은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시신에서 냄새가 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육체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체적 부활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은 우리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적 부활은 미래적 종말론을 상징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죽은 다음에 경험하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적이 없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을 믿고 영원히 누리는 영적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얻게 되고, 현재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 현재적 종말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누리게 되는 영적 생명의 약속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주어져 있습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육체의 부활과 영적 생명을 누가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육체적 부활과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27절에 나오는 마르다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됩니다.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0년 2월호), p. 128-129.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드러내는 표적이 됩니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7가지 표적들과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이 나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문이다(10:7,9)”,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 15:1,5).”
이 중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 되심을 나타내는 일곱 번째 표적입니다. 이 표적이 다른 표적과 다른 점은 나사로의 부활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예표 한다는 점입니다. 더 나아가 부활은 장차 모든 성도가 경험할 중요한 사건입니다.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0년 2월호), p. 284-285.
what’s then?
끝으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진리를 우리가 믿게 될 때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여덟 살에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간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탁월한 재주와 신체 조건으로 어린 나이에 체조에 입문해 전도유망한 체조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올림픽을 꿈꾸며 매일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중에서 540도 회전 훈련을 하던 중 몸이 거꾸로 바닥에 박히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이 소년의 온 몸의 신경이 끊어져 사지가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절망감과 패배감에 빠져 있는 그에게 어느 날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삶에 놀라운 계획이 있으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뉴욕대학교를 거쳐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공중 보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다트머스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해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병원에서 재활 의학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수퍼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승복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여전히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지만, 그는 그렇게 고백합니다.
“제 인생의 여정에는 고통과 불확실함, 두려움, 혼란, 죄의식, 분노 등이 늘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를 향한 지극한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소진시켜 결국 그분의 품으로 이끄셨습니다. 저를 향한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에 감사드립니다.”(위의 책, p. 284.)
불의의 사고로 절망감과 패배감에 빠져 있던 소년에게 찾아오셔서 영적 생명의 실체를 누리게 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그 발 앞에 엎드려 신음하며 우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도 그분의 부활과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부활의 소망과 생명의 능력을 경험하십시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