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토가족의 고향
김 선 구
은시토가족묘족자치주는 호북성 서남부에 위치하여 중경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 곳 지형이 산과 협곡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근래까지도 개발이 늦어져 수억 년 간 빚어진 자연 모습이 그대로 보존 될 수 있었다한다. 산과 들에는 자생하는 약초들이 많아서 약제창고라 불리었고, 토가족을 위시한 소수민족들에게 삶의 터전이 되었다. 산과 협곡에서 운무가 펼치는 대 자연의 향연 그리고 맑은 공기가 항상 감도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유네스코에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주정부청사가 있는 은시(恩施)는 의창에서 서쪽으로 250km정도 더 이동하여 도착했다. 장강의 지류인 청강을 끼고 있는 은시는 춘추시대 사천성 동부 중경시 일대와 호북성 서부에 걸쳐 세워졌던 파(巴)나라의 수도였다. 지금은 토가족, 묘족 등 소수민족들의 다채로운 풍습과 민족문화를 엿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파 나라가 진나라에 흡수되어 멸망하자 파인들은 묘족 한족 등 다른 민족과 통혼하고 융합하였다. 이렇게 하여 새로 형성된 민족이 토가족이다. 현재 팔백만 명 정도로 호남성 남부와 호북성 서남부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한다. 조상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민족으로 백호(白虎)를 숭상하는 토템문화를 갖고 있었다. 토가족 왕궁인 토사성(土司城)에는 왕의 집무실 좌석 뒤편에 백호무늬가 영묘하게 조각되어 있고, 들어가는 입구에도 백호의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토사(土司)란 토사성의 군주를 말했다. 옛날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서남부 지역의 소수민족들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그 지역에서 수장을 뽑아 중앙정부 대신에 공부와 군사징발을 담당케 했던 제도였다. 토사라는 직책은 세습이 가능했기에 실질적으로는 해당 지역의 왕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명나라 때에 중앙집권의 강화와 변방소수민족을 한인화 한다는 구실로 토사를 중앙에서 임명해 내려 보내기 시작했다. 때문에 각 지역 토사들의 반발로 많은 토사성들이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다행히 은시토사성은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고, 소수민족의 풍경구로 지정되어, 토가족 묘족 등 여러 민족문화의 전시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만리장성의 웅장함과 남방장성의 신비로움을 함께한다는 성벽과 성 건물에서 특유의 건축문화를 느껴볼 수 있었다.
저녁에는 토가족 전통식당으로 안내 받았다. 식당은 넓었지만 꾸밈이나 분위기는 산만한 느낌이었다. 농가 헛간 같은 넓은 홀에 놓여 진 사각 식탁에 둘러 앉아 “빠만즈“라는 전통음식을 제공 받았다. 음식의 종류나 맛은 별로 칭찬 할 것이 못되었지만 술을 마신 후 사기로 된 술잔을 땅에 내동댕이쳐서 깨뜨리는 습속이 특이했다. 옛날 사이가 나빴던 마을족장들이 화해의 의미로 마신 술잔을 깨면서 생긴 문화라 한다. 지금은 서로의 약속을 지키거나 소원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술잔을 깨면서 식사를 한다고 한다. 깨뜨리는 술잔의 수는 제한이 없었다. 토가족 전통음식문화를 경험했다는 자부심으로 위안을 받았다
다음 날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70km 이동하여 은시대협곡에 도착하였다. 호남성에 장가계가 있다면 호북성에는 은시대협곡 있다는 말로 자연의 경의로운 모습을 연출했다. 외국인 산악전문가들이 미국 그랜드캐년의 웅장함과 뉴질랜드 밀포드의 트래킹코스를 합쳐 놓았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신의 선물이라는 은시대협곡은 크게 지하구간과 지상구간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지하구간인 운룡하지봉(雲龍河地縫)은 2억5천 만 년 전 트라이아이스기에 지각변동으로 형성된 지하협곡이었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지하 75m까지 내려가서 산책로를 이동하며 암벽이 갈라진 틈을 관찰하였다. 총길이 20km중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는 것은 1.5km이었다. 바위절벽 사이 좁은 틈새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줄기와 여러 가지 식물들 그리고 양쪽의 절벽을 보는 것이 묘미였다. 서로 마주 바라보는 절벽의 한쪽은 1.8억~2.3억 년 전에, 다른 한쪽은 2.5억 년 전에 생성되어 최소 3천만년의 나이 차가 난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극히 드믄 일이라 하지만 보는 입장에선 특이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지상구간인 칠성채(七聖寨)는 해발 2000m의 고지대에 형성 되어 있었다. 험준한 지대에 7개의 채문(寨門, 좁은 성문)이 마치 북두칠성처럼 분포되어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까지는 케이블카를 타고 10여분 이동하였다. 케이블카 아래로 드믄드믄 인가들이 보였다. 토가족 마을 인 모양. 그들은 높은 산기슭의 언덕이나 계곡에 터전을 잡고, 계단식 밭은 일구어 옥수수나 감자, 차등 여러 작물들을 재배하기도 하고,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고, 약초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독특한 삶의 방식이다. 가끔 TV에서 보았던 중국 소수민족들 삶의 모습들이 바로 이런 것이었나! 하는 환희심이 솟아났다.
출발지 안내판에 그려진 관광안내도를 보니 요소마다 특정한 이름을 적어놓았다. 이를테면 루문석낭(樓門石浪), 천의유봉(天衣有縫), 일선천(一線天), 절벽장랑(絶壁長廊), 영객송(迎客松), 일주향(一주香), 대루문(大樓門), 모자정심(母子情深) 등이다. 이름만으로도 그 형상을 대강 짐작 할 만 했다.
출발점인 소루문에서 트랙킹을 시작 하여 먼저 물결모양의 바위 숲 루문석낭을 지나자 천의유봉이라는 컴컴한 바위동굴로 이어졌다. 하늘이 준 옷이 해어져 꿰매었다는 곳이다. 어떤 얘기가 숨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을 통과하면 ‘일선천’이라는 거대하고 좁은 바위 틈 사이로 안내되었다. 여기를 통과할 때는 바위틈으로 하늘이 한 줄기 빛으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뒤이어 해발 1,700m 절벽에 설치된 잔도(棧道)에 이르렀다. 잔도란 수직의 절벽에 새집처럼 붙여놓은 다리이다. 잔도가 좁은 복도처럼 길게 이어져서 절벽장랑이라 불렀다. “절벽잔도는 위험하니 고소공포증이 있거나 심장이 약한 사람은 다른 코스를 택하라”는 안내문이 보였다. 수직절벽위에 걸려있는 잔도를 걷다보면 가슴이 조마조마 움추러 들었다. 절벽아래 마을과 잔도 사이 낙차가 300m에 달하고 보니 발아래 펼쳐진 절경들을 보면서도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깎아지른 듯 높은 절벽에 어떻게 다리를 놓고 길을 만들었을까? 옛날 한나라 유방이 초패왕 항우에 밀려 서 촉으로 쫓겨 갈 때도 잔도를 건넜다. 잔도를 건넌 후 장량이 잔도를 불태워 버리자 다시 관중 땅을 밟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눈물짓던 영상이 떠올랐다. 예부터 중국인들은 가파른 절벽에 다리를 놓는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던가 하는 의아심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는 ‘절벽화랑(绝壁画廊)’이라 불리는 풍경이었다. 마치 거대한 동양화를 대하는 느낌이다. 절벽잔도에 서면 구불구불한 산세가 끝없이 이어지고, 그 아래 고즈넉한 마을과 너른 들판이 구름사이로 감지되었다. 더 장관인 것은 협곡을 채우고 있는 운해(雲海)의 모습이었다. 산과 구름이 어우러져 마치 선계(仙界)를 방불케 하였다.
앞으로 더 나아가니 바위 암벽에 솟아있는 소나무와 마주했다. 마치 손님을 영접하는 것 같다하여 영객송이라 했다. 영객송의 환대를 받고 나서 마주하는 것은 일주향이라는 거대한 촛대바위였다. 일주향은 높이 150m에 둘래가 4-6m정도의 바위기둥이다. “하늘을 향해서 한 개의 향을 곶아 놓은 모습”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부러질 것처럼 보이면서도 오랜 세월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신기로웠다. 바위 뒤로 기암괴석들이 둘러 펼쳐졌다. 일주향을 보호하는 부처의 손이란다.
일주향은 2억5천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 지구상의 온갖 천재지변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본연의 모습을 지탱해 온 것에 엄숙함마저 느껴졌다. 미국 CNN이 평가한 중국 40대 경관중의 하나이다. 칠성채의 대표적인 경관으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었다.
이어서 엄마가 아이와 입맞춤 하는 모습의 바위 모자정심과 코끼리를 닮았다는 바위 등을 대하고 나니 하산 길로 접어들었다. 하산 길에 관광 에스컬레이터를 이용 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계단을 이용하여 하산했다. 우리가 걸은 코스가 8km에 4시간정도 소요되었다. 대협곡의 전체길이는 100km에 이르고 계속 확장 중이라 했다. 어떠한 모습들이 더 출현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모습만으로도 자연이 주는 매력을 느끼기에 넉넉하다고 생각되었다.
은시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는 청강화랑(淸江畵廊)이리는 유람선 관광이었다. 청강은 은시 토가족자치주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장강과 합류하는 강으로 토가족들이 어머니의 강으로 불렸다. 우리는 분수하 부두에서 유람선에 탑승하여 강을 따라 이동하며 주변 경계를 관망하였다. 강 양쪽으로 펼쳐진 협곡에서 폭포가 계속 나타났고, 폭포와 산이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산수화의 파노라마 같은 협곡과 그 사이로 이어지는 수많은 폭포들. 청강화랑이란 동양화들을 전시해 놓은 화랑이라는 뜻이다. 그 중에서 최고의 절정은 나비폭포였다.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나비 날개 모양을 하고 그 사이로 폭로가 떨어지니 한 마리 나비처럼 보였다, 거기에 운무와 산수가 어우러지면 마치 신선세계를 상상케 한다고 했다. 4시간 정도 유람 후 수포아 부두에서 하선. 의창으로 향하였다.
이동 중 주변경관을 살펴보니 첩첩 산 중이었다. 군데군데 감귤 밭이 보였고 지나는 마을마다 노점에는 진열된 과일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옛날에는 토가족들이 근근히 살아가던 땅이 오늘에 와서는 일급관광지로 호평을 받고 있었다. 산과 계곡도 시대를 잘 만나면 명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토가족의 고향이 개발의 바람을 타고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일찍이 호남성장가계에 갔을 때 토가족 마을 사람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돈벌이에 나선 모습이 떠올랐다. 사진을 찍어 팔기도 하고, 손님을 태워 운반 해 주는 가마꾼도 있었다. 뿐만 아니고 가격흥정에 속임수가지 끼어들었다. 전통복으로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사진모델이 되어 준다거나. 한국가요를 부르며 팁을 요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은시대협곡에서는 아직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머지않아 그 곳에도 그러한 바람이 불어 올 것이다. 그때에도 유네스코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선정 해 줄지 의문이 들었다. 은시대협곡의 개발이 토가족의 고양마저 잃게 만들지 모른다는 헛걱정이 뒤를 이었다.
첫댓글 현장을 가지 않고도 직접 보듯이 그려놓은 그곳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마도 이글을 쓰기 위해 들인 공력이 대단하리라 생각하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시 토가족 묘족의 자치주를 방문하고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해발 1700m 절벽잔도를 체험하면서 쓴 글에서 현장에 있는 것처럼 조마조마하고 아찔했습니다. 제대로 중국 여행을 하셨으며 한권의 책으로 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기행수필 이라기 보다. 중국 역사서의 한켠을 들어다 보는 느낌 입니다. 생도감 넘치는 묘사와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들게하는 상세하고도 재미있는 묘사에 흠뻑 젖어 봅니다. 해박하신 중국 역사와 소수민족의 생활을 보는듯 펼치신 글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외국인 산악전문가들이 미국 그랜드캐년의 웅장함과 뉴질랜드 밀포드의 트래킹코스를 합쳐 놓았다며 극찬했다고 하니, 은시대협곡의 풍광이 무척 궁금해 집니다. 상세하고 현장감 있는 서술로 인해 앞으로의 여행에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우한가는길 4탄을 이제야 읽어봅니다. 눈이 아파서 잔 글씨를 읽지 못하다가 지금은 볼수있게 되었습니다. 대구 신천 최상류 동이 巴洞의 지명 유래가 중국 양자강 상류 에 파동이 있었으며 지형이 비슷하여 동명을 파동이라 했다는 것이 긍금하였는데 파나라가 있었다니 의문이 풀립니다. 은시대헙곡 길이가 100 km 이라하니 대단하며 협곡에 운무가 연출하는 장관이 상상 됩니다 토가족의 고향 잘 읽었습니다.
산과계곡도 시대를 잘 만나면 명당이 될 수 있다는 말씀 가슴에 닿습니다. 옛날에 첩첩산중에 살던
토가족의 삶이 그려집니다. 개발의 바람을 타고 일급관광지가 되어 토가족들이 잘 살수 있는 변화의
삶이 보인다니 조상 잘 둔 덕분일까요. 우리나라도 7~80 년도 개발 붐을 타고 하천부지가 옥토보다
비싼곳이 많았지요. 지금 저가 절벽잔도를 걷고 있는 느낌이 갑니다. 천혜의 자연과 수직절벽에
인위적으로 놓은 다리, 은시대협곡,너무 가고싶습니다. 광활한 중국이란 나라 무진무궁한 볼거리들
조상들이 일구어 놓은 노고가 후손들의 관광수입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동감이 깃던
기행문 너무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