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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내전, 한국전쟁, 문화혁명, 그리고
북미대결전은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모택동 미유대 간잽이론에 대해서 좀더 명확히 정리해봤다.
이러한 추론에서 결정적인 증거는 2011.3.11 후쿠시마 9.0 이후에
정보를 내놓은 키신저와 중국 감옥에서 풀려난 추이박사의 옥스포드 논문이다.
읽어보시고 과학적인 반론이나 이론 제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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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6월 보천보 전투과 관련된 후속 뉴스
김일성-최현부대가 수천명으로 추정된다는 당시의 뉴스.
보천보 사건으로 추격하던 무장경관 60여명과 교전하여
경관 7명 사망하고 7명 중경상.
폭격기까지 동원하여 교전을 벌일 정도.
36~37년 시즌에 동북항일연군의 교전 기록이 3970회라고 한다.
동북항일연군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이들 세력은 일본패망 후
동북민주연군의 주축이 된다.
커밍스의 미네소타 법학장과의 대담에서 좀 더 확인된다.
동북항일연군은 실제적으로 병사의 90%,
동북의 중국공산당간부들도대부분
조선인이었다는 것이다.
일본항복이후 중공 팔로군이 만주로 들어온게 아니라,
자체적으로 구성된 동북위원회 산하에 항일연군출신들이
주도로 동북민주연군이 46.2월에 구성된다. 소련군과 동북으로 진입한
최용건의 88여단은 무장해제한 관동군과 만주군의 무기와 장비로
동북민주연군을 무장시킨다.
이 때 미해군이 국민당군을 수송기로 대도시로 공수한다.
대도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동북민주연군이
장악한다. 이 시기 이후에 중공 팔로군이 북경 북부의 장자구를
미군 마샬장군의 명령에 의해서 통과하고 인근의 일본군 무장해제
장비를 획득한다.
1946.2월
만주의 대도시는 국민당군이 그 외 지역은 동북민주연군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46.11월, 국민당군이 중공이 수도인 연안을 선공할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동북의 팔로군과 동북민주해방연군이 통합하여 대응하게 된다.
국부군이 연안을 공격하는 의도와 움직임을 분명히 하자
북에서 무기, 탄약과 대규모 부대를 만주로 출병시킨다.
중국내전이 전면화된다.
1947.4월
북에서 지원군을 보내는데 김책의 2만부대를 시작으로
최고 14.5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당시 북조선공산군의 참전규모에 대한 많은 뉴스들이 있는데
최소 10만명 정도는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1947.10월
46.11월에 중공 팔로군과 동북민주연군이 통합하여 민주국군으로
편성된다. 위 기사의 중국인력 24.5만명에는 이러한 동북민주연군의
조선인 병사가 포함된 숫자이다.
그 당시 소련이 시베리아에 억류한 일본군 포로는 1백만명이었다.
그 중 사회주의 혁명에 동조하는 1.5만명 지원병으로 부대가 편성된다.
중국내전의 향방은 만주의 장춘, 선양, 북경-천진 전쟁에서 장개석군
300만 중에서 정예군이 주로 포함된 200만이 붕괴되면서
결정된다. 그 당시 미군은 산동에 10만, 천진항 등 주요항구와 도시에
5만의 해병대가 진주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요동반도 대련-여순에 진주한다.
소련은 얄타회담을 통해 대련-여순 조차지와 만주 철도에 대한 권리인정를
루즈벨트와 합의했다. 당시 만주는 산업화된 지역이고 이에 반해서
중국 본토는 대부분 농업종사지역이었다. 소련이나 미국이나
전략적으로 만주는 매우 중대한 곳이다.
일본 항복 2주전에 얄타회담의 합의에 의해 참전한 소련의 전격적인
만주침공 이후에 만주지역은 기존 동북항일연군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된 동북민주연군들이, 소련군이 넘겨준 관동군과 만주군의 군사장비로
무장하게 된다. 대신 국민당군은 미군에 의해서 행정권이 있는
대도시를 소련으로부터 이양받아 정예 사단들을 공수하게 된다.
소련군은 47.4월 만주에서 철수하여 일부는 조차지로 인정된
대련, 여순항으로 가거나 일부는 북으로 들어간다.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보면 전략적으로 매우 난감한 위기였던 셈이다.
산업화된 만주와 북한이 소련권으로 넘어가고 농업지역인 중국본토조차도
연안의 모택동 정부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중국내전에서 미국이 장개석정부를 지원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미군 15만 부대가 산동성과 주요항구에 포진했지만
직접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택동군을 철저히 돕는다.
<영문위키, 중국패망에 대한 청문회에서 마카시는 마샬을 공격한다>
만주로 넘어가는 길목인 북경 북쪽의 장작코우를 팔로군이 통과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 장비가 적재된 곳으로 접근가능하도록 먀샬이 허락한다.
전쟁이 본격화되자 미국은 양쯔강개발계획 지원 차관의 부정과 횡령을
이유로 장개석정부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지해버리고,
무기대여법에 의한 지원도 중지시키고 장개석 정부에 대한 무기금수
조치를 내린다. 이러한 조치의 주동자는 마샬장군이었다.
장개석정부 패망과 관련된 청문회에서 매카시는 마샬의 조치가
장개석정부의 패망에 결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조치를 주도한 인물은 '마샬플랜'으로 유명한 마샬장군이다.
마샬은 중국내전이 본격화되는 과정인 47.3월까지 15개월간
장개석정부의 충칭에 머물면서 공산군의 수도인 연안도 방문하면서
타협에 의한 중국건설을 설득하게 된다. 그 당시 40여명의 고급장교로
구성된 딕시 부대가 중공의 연안에 상주하고 있었다.
<연안에 상주한 딕시부대의 책임자 바렛대령>
<마샬은 국민당 수도 충칭에 머무르면서 중공수도 연안을 방문하여 중재한다>
마샬은 마샬플랜으로 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한국전쟁 발발후 3개월에 트루만에 의해서
국무장관에 오른 인물이다. 마샬플랜은 유대인 싱크탱크인 CFR의
작품이다. 국제연맹, 국제연합, 나토, 마샬플랜, IMF 등도
모두 CFR이 산출한 것이다. 트루만을 이기고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오르자 CFR 수장이던 덜레스가 국무장관에 오른다.
동생 웰쉬 덜레스는 중국공산화로 기울자 CIA를 저강도전쟁수행에
알맞게 혁신하기 위해 덜레스-코레아 백서를 발간하여 개혁을 주도하여
정보와 공작을 통합하고 외부 견제와 감시를 무력화시킨다.
미유대의 세계전략으로보면 그 당시 산업화가 집중된 만주와 북한의
소련권 편입으로의 진행은 가장 우선 순위의 전략위협이었다.
더구나 농업중심의 중국본토 내부에는 모택동 세력이
토지개혁을 무기로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장개석정부에 대한 재정지원 중지,
무기대여법 적용 중지, 그리고 미국과 타국으로부터 무기수입봉쇄
조치를 내리게 된다. 미국이 모택동 중공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고 모택동은 청과 중화민국의 만주영토권을 소련이 침해하고
친소국가인 북에게 요녕성과 길림을 넘겨줘야 하기 때문에
미유대와 이해관계가 합치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경우에 명확히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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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11일 후쿠시마 츠나미 이후에
키신저는 책을 통해서 중요한 고백을 한다.
2011.5.18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17일 시판된 저서 '중국에 관하여'(On China)에서
스탈린이 당시 남침 계획에 'OK' 사인을 주면서 "미국이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했다고 했다. 키신저는 스탈린이 태도를 돌변한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스파이망을 통해 입수된 미국의 대(對) 아시아정책을 담은 극비문서가 중요한
배경이 됐다고 여러 외교문서와 자료들을 바탕으로 진단했다.
이 문서는 'NSC-48/2'라고 명명된 문서이다. NSC는 미국의 국가안보정책을
결정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약자로 NSC-48/2는 NSC 참모들이 입안해서 1949년
12월30일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국가안보정책 보고서이다. 이 문서는
"한국을 미국의 극동 방어선 외곽에 둔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었다.
키신저에 따르면 이 문서는 소련을 위해 일한 최고의 이중 스파이였던 영국 정보부
출신 도널드 매클린을 통해 소련에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매클린은 영국 명문 케임
브리지대 출신으로 미국 정보기관에 침투해있던 스파이였다. 2차 세계대전후 워싱턴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의 핵무기 정보와 유럽원조계획인 마셜플랜을 먼저 빼내 소련에
제공하는 등 스파이로 맹활약하다 1951년 5월 소련으로 도주한 인물이다.
당시 미국의 극동방어선 대상을 일본에서 필리핀까지로 하고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은 1950년 1월12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밝혀 알려진 사실이다. 또 앞서 더글러스 맥아더 미
극동사사령관이 1949년 3월 도쿄 회견에서 유사한 내용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키신저는 미국의 한국전 개입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던 스탈린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굳힌게 이 NSC-48/2 극비문서의 입수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키신저는 "이 문서가 극비문서로 분류돼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분석가들에게 특히
신뢰감을 준 것 같다"고 해석했다. 한편, 키신저는 NSC-48/2 보고서의 목적과 당시
애치슨 장관의 연설은 중.소 갈등을 야기시키고 양측을 이간질하려는 계산이 담겨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이 문서는 "대만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공공연한 군사적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규정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1월5일 "미국은 대만의 중국군에
군사적 원조나 자문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애치슨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장기적으로 중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존재는 소련이라고 규정했고,
소련과 분리된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유고슬라비아 티토와 같은 노선을
밟아야 한다는 점을 공공연히 제안했다고 키신저는 설명했다.
애치슨은 특히 "동서간 과거 관계는 끝났다. 이제 그 관계는 상호 존중과 호혜의 관계로
가야 한다"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국익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미.중관계 정립에
대한 비전을 제안했다고 키신저는 강조했다.
키신저는 "공산주의 중국을 향한 이 같은 비전은 닉슨 대통령이 정책으로 진전시킬 때까지
그후 20년동안 미 행정부에 의해 더 진전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70년 미.중 국교정상화
구상의 씨앗이 애치슨 연설과 NSC-48/2 문서에서 뿌리가 내려졌다는 키신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키신저는 "애치슨 연설은 대부분 스탈린의 신경을 자극하려는 의도로 구성됐다"고
강조했다. 스탈린은 이후 마오쩌둥에게 애치슨 연설에 대해 "중상모략"이라고 강력히
비난하는 입장을 발표할 것을 종용했지만, 마오쩌둥은 즉각 반응하지 않았고 며칠후 스탈린의
요구보다는 훨씬 낮은 톤으로 애치슨의 제안을 거절하되, 중국의 선택지를 열어두는
입장을 취했다고 키신저는 전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1956년 12월 소련과 거리를 두는
중국식 사회주의 노선을 천명했다고 키신저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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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전까지 미-소의 핵전력의 차이는 475:25로 큰 차이가 있었다.
히로시마, 나까사키 핵공격을 선보인 미국의 압도적인 핵전력은
방금 핵시험한 소련이 1950년의 미국을 바라볼 때 큰 공포였다.
하지만 미국으로써는 동북아 전략요충지이며 산업화가 집적된
만주를 소련과 조선인이 주축인 동북민주연군의 친소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전략적 낭패였다.
모택동 입장에서는 미-소-영이 얄타비밀회담에서 청제국과 중화민국의
영토인 만주의 철도운영권과 대련-여순 조차지를 소련의 권리로
합의한 것에 큰 불만이었을 것이고, 중국내전의 승부를 결정지은
동북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조선인이 주축인 동북군사 세력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느꼈을 것이다. 더구나 요녕과 길림을 북에
넘겨줘야 되는 상황이었다.
중국내전의 승리에 10만 전후의 병력을 지원한 김일성은
4.3과 여순사건을 거치며 무력통일에 대한 신념을 강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5년전에 공포의 파괴력을 보여준 미국의 압도적인 핵전력을
무시하고 CIA가 49년부터 상주하고 500~1000명의 미군사고문단이
남아 있는 남한을 무턱대고 공격한다는 것을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키신저의 고백은 NSC 48/2 극비문서를
이중스파이를 통해 소련에 제공하고 애치슨 선언을 적절히 구사하여
스탈린의 판단을 바꿔놓는다.
그리고 여기에 모택동이 중요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중국이 지금까지 철저히 숨기고 숨겨왔던 부분이다.
94.7.20 러시아가 공개한 한국전쟁 외교전문.
▲1950.4 = 모스크바 회담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데 동의. 이와함께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측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
▲1950.5.12 = 슈티코프는 金日成및 박헌영과 면담. 김일성은 소련에서 귀임한후
이두연대사로부터 모택동(毛澤東)과 면담결과를 보고받았다고 통보. 김일성에
의하면 모택동은 한국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함. 김일성은 모택동과 면담하기 위해 5월13일 북경(北京)으로
출발할 것이라고 함. 모택동은 가까운 시일안에 金日成과 면담하되 김일성이
대남 군사행동을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함. 북경 회담시
김일성은 하기 사항을 협의코자 한다 함.
모택동(毛澤東)은 중국.북한 국경에 중공군의 추가배치나 무기 및 탄약의 공급이
필요한지 여부를 문의. 金日成은 이에 감사를 표했으나 동 제의를 사양.
(1950년 7월 주은래는 로신대사에게 모택동은 5월에 김일성과 만났을때
한국전쟁에 대한 미군의 직접 참전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으나 김일성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답했다고 언급. 1950년 5월15일 로신과 페도렌코는
북한대표단을 위한 모택동주최 만찬에 초청되었음. 만찬전 김일성은 모택동이
있는 자리에서 회담기간중 모든 문제에 관해 완전합의에 도달했다고
로신대사에게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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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94년 영변핵위기 국면에서 북을 압박하기 위해서
공개한 한국전쟁관련 비밀외교전문을 보면
김일성과 주은래의 전언은 서로 완전히 엇갈린다.
요약5,
[김일성에 의하면 모택동은 한국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함]
요약6
[1950년 7월 주은래는 로신대사에게 모택동은 5월에 김일성과 만났을때
한국전쟁에 대한 미군의 직접 참전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으나
김일성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답했다고 언급.]
여기서 로신은 중국주재 소련대사를 말한다.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4월에 방문하고 스탈린과 합의하길,
5월에 김일성-모택동 만남에서 모택동의 의견을 물어보고
통일전쟁의 개시 여부를 최종결정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5월의 김일성-모택동 대화에 대해서
김일성의 전언과 주은래가 중국소련대사 로신에게
전한 말은 완전 반대이다. 실상 한국전쟁 개시를 결정한
부분인데 김일성의 전언과 주은래의 전언이 반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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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11 후쿠시마 9.0 이후에
김정일전용열차의 일방적인 중국방문 이후에
옥스포드 논문 때문에 11년동안 교도소에 갖힌 데이비드 추이 박사가
석방된다. 그 논문에 한국전쟁 개시를 결정지은
50.5월의 김일성-모택동 대화의 실체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있다.
2011.7.30
[중앙일보] 입력 2011.07.30 00:57 / 수정 2011.07.31 13:41
중국의 기밀자료를 인용해 중공군의 참전 과정 등 한국전쟁을 재조명한
홍콩 정치학자 데이비드 추이(徐·57·사진) 박사가 그의 논문 『조선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에서 주장한 핵심 내용이다. 중국이 이러한 판단에 근거해
김일성의 도발을 승인하고 대대적인 지원을 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추이 박사의 논문은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 주장하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입장에 배치되는 것이다. 지난해 시진핑(習近平·습근평)
중국 국가부주석은 “항미원조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강조했었다. 추이의
논문은 미국 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한 내전론 또는 이승만 정부가 남침을
유도했다는 수정주의 사관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추이 박사는 논문을 쓰면서 인민해방군 측으로부터 입수한 내부
자료들을 인용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이 기밀문서로 분류되는 바람에 11년
동안 중국에서 옥고를 치르다 지난달에야 석방됐다. 이 논문은 1999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제출된 것이다.
홍콩 역사학자 데이비드 추이 박사가 중국군 기밀문서를 바탕으로 작성한
논문에 따르면 마오는 미군이 남한을 지키기 위해 개입할 리 없다며 한국
전쟁 참전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항미원조 전쟁관’과는
배치되는 주장이다.
본지가 입수한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발행하는 '당대중국연구2호
(2000년)'에 실린 논문 요약본에 따르면 1949년과 50년 두 차례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는 김일성의 6·25전쟁 계획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당시 마오는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은 약 7만 명 수준의 일본
지상군 을 파병할 것이며 절대 본국에서 미군을 차출하지 않을 것’으로
오판했다고 추이 박사는 주장했다. 일본 지상군과 한국군 정도는 중국이
인해전술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전쟁 준비 과정을 돌이켜
볼 때 적잖은 순풍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추이 박사는 논문에서 시종 북한의 남침을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전제한 뒤 논리를 전개했다. 추이는 “중국이 이 전쟁에
일찌감치, 그것도 매우 깊숙이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전쟁에
임박해서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역할 분담이 결정됐지만
중국에서는 일찌감치 참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50년 2월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주덕)는 만주까지 행군하던
인민해방군 42사단이 베이징을 경유할 때 만나 “한편으론 생산건설에
힘쓰고 다른 한편으론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공군이 참전할 때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압록강을 건넌 것을 두고
서방 학계 일각에서는 갑작스럽게 중공군의 참전이 결정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추이 박사는 이는 스탈린과 마오 사이의 불신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석한다. 중공군이 확실히 전쟁에 뛰어드는 것을 확인한 뒤
소련의 무기 지급이 이뤄진 것이라고 풀이했다. 스탈린이 중국의 국공
(국민당과 공산당) 내전 때 장제스(將介石·장개석), 펑위상(馮玉祥·풍옥상·
군벌 총사령관), 마오에게 무기 등 군사적 지원을 해주고도 한 차례씩
뒤통수를 맞았던 경험 때문에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6·25전쟁에서 명령의 시달자이면서 북한과 중국을 조종하고
훈련시키는 교관이었다고 추이 박사는 판단했다.
추이는 대만 탈환이라는 공산당 차원의 역사적 사명을 뒤로 하고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중공군이 뛰어든 주요인을 마오와 스탈린의
관계에서 찾았다.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이후 줄곧 스탈린의 지원을 받았던 마오의
부채 의식도 참전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1, 2차 국공내전
과정에서 소련으로부터 결정적 군사 원조를 받은 마오로서는 이 빚을
털고 가지 않은 채 대만 상륙을 위한 소련의 해·공군 지원은 요원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만주에 진주한 일본 관동군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 일대의 팔로군에게 소련의 최신식 무기를 제공하겠다는
스탈린의 제안을 거절했던 마오로서는 스탈린의 보복 가능성도 신경
쓰였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마오에게 “당신이 나의 승패에 관심 없다면
나도 당신의 생사에 관심을 끊겠다”고 위협했다고 추이 박사는 지적했다.
논문에 따르면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북한이 밀릴 경우 참전을 결심한
마오는 치밀하게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베이징의 공산당·군 수뇌부는
전쟁 발발 전인 50년 6월 22~26일 연일 회의를 소집했다. 전쟁을 전후로
한 국제 정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다. 7월엔 일본 관동군이
쓰던 만주 일대의 31개 비행장 개·보수에 들어갔다. 추이 박사는 “이 정도
비행장 규모라면 미그기 2000여 대를 작전에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썼다.
◆데이비드 추이 박사=홍콩의 분석가들은 형식상 기밀을 누설한 죄가
추이 박사에게 적용됐지만 내용을 따져보면 항미원조 전쟁관을 흔들어
괘씸죄를 물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입을 모은다. 11년 동안 수감됐다 지난달
석방된 그는 ‘자신은 무죄’라며 재심청구 의지를 밝혔다. 그는 1980년대
중반 홍콩으로 건너와 관영 신화통신에서 재직했다. 홍콩 중문(中文)대에서
정치행정학 석사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6·25전쟁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정치학)를 받았다. 그가 1981년 제출한 보고서 ‘홍콩 일국양제
(一國兩制·한 나라 두 체제) 제언’은 당 중앙에까지 올라가 지도부 인사들에
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항미원조 전쟁=내전 성격의 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중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됐다는 주장.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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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이박사가 11년동안 수감된 혐의는 군사기밀을 논문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의 기밀로 11년 감옥에 집어넣을 정도면
상당한 중대성을 갖는 논문이라는것을 알 수 있다.
[본지가 입수한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발행하는 '당대중국연구2호
(2000년)'에 실린 논문 요약본에 따르면 1949년과 50년 두 차례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는 김일성의 6·25전쟁 계획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당시 마오는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은 약 7만 명 수준의 일본
지상군 을 파병할 것이며 절대 본국에서 미군을 차출하지 않을 것’으로
오판했다고 추이 박사는 주장했다. 일본 지상군과 한국군 정도는 중국이
인해전술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전쟁 준비 과정을 돌이켜
볼 때 적잖은 순풍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추이 박사는 논문에서 시종 북한의 남침을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전제한 뒤 논리를 전개했다. 추이는 “중국이 이 전쟁에
일찌감치, 그것도 매우 깊숙이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전쟁에
임박해서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역할 분담이 결정됐지만
중국에서는 일찌감치 참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50년 2월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주덕)는 만주까지 행군하던
인민해방군 42사단이 베이징을 경유할 때 만나 “한편으론 생산건설에
힘쓰고 다른 한편으론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475:25의 압도적인 핵전력을 보유했고 불과 5년전에 일본에서
핵위력을 시연한 미국이 한국내전에 전면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50년 4, 5월 지속적으로 스탈린과 김일성을 설득한 사람은
모택동이었고 50.5월 스탈린이 최종결정을 위임한 순간에도
미국참전에 대한 우려를 불실시키며 한국전쟁의 개시를
결정한 것이다. 이는 애치슨 선언과 이중스파이 블랭크린을 이용해
NSC 48/2 극비문서를 소련에 투입하여 스탈린의 생각을
바꾸는 공작에 모택동과 주은래가 박자를 마춘 것이다.
50.5월의 김일성-모택동대화는 한국전쟁개시를
최종결정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전쟁은 남북한 백성이 대거 희생됐고 동북의 조선 동포까지
지원병으로 동원되어 소모됐다. 국토의 산업시설은 철저히
파괴되고, 49년 중소비밀협정에 규정된 요녕성, 길림성의
영토권도 사라졌다.
하지만 모택동은 미-소 얄타비밀회담에 의해 위태로왔던
만주, 신장, 내몽고의 영토주권을 되찾거나 굳건히 했고,
중국내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선인 출신이 많은
동북민주연군세력 또는 4야전군을 한국전쟁에서 소모시켰다.
이이제이와 토사구팽의 제왕적 전술이 적용된 셈이다.
이러한 동북세력은 문화혁명에서 집중 탄압받고,
중국내전의 동북전투와 한국전쟁의 영웅들인 팽덕화와 림표는
숙청되거나 비행기 사고로 암살된다.
미국은 50년봄에 핵물리학자 주광야를 중국으로 보낸다.
56년 중국이 소련에서 벗어난 독자노선을 선언하고
미국은 중국 ICBM의 아버지 전학삼을 보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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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감사합니다
퍼즐조각처럼 연결되는 추론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세계의 비핵화가 이루어지고 통일한국이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아무리~님/
중국내전 전면화 국면에서
국민당정부에 대해 무기금수를 명하고, 무기대여법 적용을 폐지하고 , 차관공여를 중지하고,
모택동정부에대해서 일본군 무장해제 군사장비 획득을 가능하게 해주고,
미국 이브센드 화물기선회사가 팔로군 화물수송해줍니다.
애치슨, 이중스파이 매클린, 모택동과 주은래의 이중적인 거짓말이
한국전쟁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모택동정부와 미유대와 유착은 문화혁명 전후의 군사기술 상황에서
좀더 자세히 묘사됩니다.
위에 나열한 증거만으로도 모택동정부와 미국의 유착은 뚜렷하다고 보야겠죠.
단지 아무리~님은 안볼려고 노력할 뿐이겠죠.
눈을 안뜨는데 증거가 보일리가 있을까요?
전면적 전쟁에서 미국의 이러한 국민당정부에 대한 지원철회와 무기금수는
철저히 모택동 정부를 이롭게 하고 역으로 지원하는 정책입니다.
더구나 연안의 팔로군이 장자구를 거쳐 일본군 군장비를 획득할 수 있도록
마샬은 통과 명령을 내립니다.
이런 경우 그당시 매카시즘선풍을 감안하면 용공 반역혐의에 걸립니다.
전략상황에서 이정도면 모택동과 미유대의 유착은
충분히 증명되는 기술입니다.
아무리~님/
아무리~님이 만족할 증거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군요.
공식문서, 사진, 체내약물검사, 지문은 패권세력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지만,
전략적 이익자를 분석하거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조작이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제가 내놓은 것은 미국이 그당시 실행한 명령이나 정책입니다.
패권세력은 공식문서, 사진, 의학적검사결과도 조작이 가능합니다.
이런 것은 전략분석에서 부차적이고 기만에 취약한 증거들이죠.
그렇지만 이미 행한 굵직한 일련의 정책과
그에 대한 전략적 이득자를 분석하는 것은
조작이 불가능하죠,
대단한 글입니다. 예전 어느분이 한국전쟁은 조선족 말살 전쟁이라 들은적 있는데... 한국 전쟁에서 의문이 많았는데 어느정도 해소 되었네요.
간잽이는 국어사전에 없는 단어!!
그렇군요.
분석관님의 논리에 따르면
중국의 국공내전과 조선해방전쟁 모두
미 유대의 손바닥아래서 놀아났다는 결론으로
귀결될수밖에 없죠.
일각의 음모론에 의하면
사회주의 창시자 맑스 레닌 모두
유대인이고 그 유대인들의 음모에 의한것이
인터내셔널 그리고 코민테른 (국제 공산당 조직)까지
유대인들의 작품이라면 ...
스탈린이 굳이 모택동한테 속을수는 없죠.
아니면 속은척 하거나,,
그리고 김일성 주석마져도 다 유대인의
음모에 속은것이죠.
결론은...
국제 공산당 (코민테른) 본부가
소련에 있었고
전 세계 모든 사회주의 국가는
코민테른을 통해 정책을 공표하고
시행에 옮길 때입니다.
다시말해서...
국제 공산당 협약과 협의에의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었단 말이죠.
그러므로 스탈린의 (모택동에 속아서)독단적인 결정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아놔 키스트 덧 붙히서 ...
6.25전쟁전 김 주석이 소련을 방문하였던
이유도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기위해서였죠.
당시 3.8선은 크고작은 분쟁과 총격전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고
리승만의 북침 야욕으로 인해
수도없이 많은 무장게릴라들이
월경하여 북조선을 침탈하던 때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코민테른으로 끌고 간것이죠.
@아놔 키스트 조선 해방전쟁이 유대에 포섭된
모택동에의해 일어났다는 주장은
참으로 동의하기 어렵네요..
아놔키스트님/
미국으로부터 무기대여법에 따라 대규모 군사원조를 받은 스탈린은
43년 비밀명령으로 코민테른을 해체하고 중요인물을 숙청합니다.
중국에게 수십억달러의 차관과 무기대여법에 의한 무기공급을 미유대가 제공합니다.
막대한 재정과 무기를 지원한다는 것은 중국 상황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패권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내전 내내 미육군 10만, 해병대 5만이 중국대륙에 진주하고 있었습니다.
중국과 만주가 미유대의 세계전략차원에서 중요한데
미유대가 가만히 공정한 심판처럼 구경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그리 현명하지 않는 시각입니다.
43년 독 소 전쟁시기 코민테른이
해체되었다구요...?
금시초문이군요.
@아놔 키스트 미안합니다.
잘못 알고있었네요
코민테른은 43년 해체된것이 맞고
이후 코민포름으로 대체되었네요.
@아무리힘들어도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자신있게 말하시니 당황스럽군요.
대규모 무기대여법 원조를 받은 소련은 코민테른을 해체하고
미영과 어느 정도 신뢰관계를 유지합니다.
영국이 전후에도 미그기에 장착할 롤스롤이스 젯트엔진을 수출한 것도 그러한 신뢰의 일종이죠.
그런데 소련은 사회주의화 물결, 민족해방 물결의 후원자라는 위치이기 때문에
미-소의 대립은 점차 불가피하게 됩니다.
모순된 요소가 병존하는 모델로 해석해야겠죠.
뜬금없는 미유대의 소련지부 언급은 논의를 저급하게 만듭니다.
분석관님 주장이 맞는지 의 핵심은
NSC48/2라는 미기밀문서 때문에 스탈린이 전쟁을허가 또는 지시했다는키신저의
주장이맞는지 여부네요..
에치슨라인을 미국이 속인것인지
속이지도 않았는데 스탈린 이 속은 것인지 몰라도
한국전으로 인해 중공이 덕본건분명한것이고
마오 입장에서는마다할이유가없는 것이고
한반도북쪽의지도자는 미안한 얘기지만
무슨이유가되었든
조직의쓴맛을 몰랏군요..
에치슨라인이고 뭐고간에 2차대전 끝난직후 상황에서
미국이 참전 안할거라고 믿었다는게참... 신기하네요..
러시아가 확인을 해야겠지만,
키신저에 따르면 미국의 원자탄정보 유출과 마샬플랜 정보를 소련에 전해준 이중스파이가 NSC 48/2를
전해줬다는 것으로 보아 소련이 안믿을 재간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미국원자탄 설계도를 빼돌린 스파이가 전해준 사소해보이는 정보는
믿을 수 밖에 없죠. 이미 애치슨은 한반도를 방위선 밖으로 그어서 선전하지만,
이러한 극비 정보로서 평이하게 방위선 배제가 명기되어 있으면 확신할 수 밖에 없죠.
미유대의 전략가들의 이러한 기만 설계는 항상 벌어지는 일입니다.
지성에서 앞서지 못하면 미유대의 패권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상한 걸로 기막혀 하시는군요.
그냥 구체적으로 반론이나 다른 해석을 쓰시면 될 것 같은데
저도 답답하군요.
주간에 밭일 때문에 답글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분석관님 글 전체적 맥락을 보면
이희진이 쓴 6.25 미스터리 를 인용한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유사하구요
다만 단락 단락을 연결하는 부분에서
해석이 다르군요...
@아놔 키스트 그런데 이희진의 역사학은
그리 신뢰할만한 것은 아니던데..
물론 서술된 팩트들은 당연히 정확할 것이고(전문 연구원이기에)
다만 각 팩트들의 연결고리가
굉장히 자의적인 부분이 보이고
특히 러시아의 공식 문서들은 거의 인용
안돼었다는것이 문제죠....^^:
역사의 흐름은,. 거대한 강물과도 같아서,.
때론,. 평탄한 흐름을 보이다가,. 지형이 사나운곳을 만나면,. 급류를 타기도 하고,.
넓은 분지에선,. 호수처럼 잔잔하게 휴식을 취하다가도,. 낭떠러지를 만나면 폭포수를 쏟기도 하는 것인데,..
분석관님의 역사는,. 모든 강물이 그저,. 운하로만 흐르는듯한 느낌이,..
역사에도,. 혹,. 사주팔자,. 라는게,. 있다면 모를까,.
이유불문,. 정해진 역사,. 라는 주장인듯 싶어서,.
끝까지 읽기엔 좀 많이,. 불편한 글이네요,..
적절한 비유인듯.
전문직고소득자.교직원.공무원들이 사기에 취약한것과 유사한 맥락이 아닐지..
분석에선 자고로 사람이 빠지면 안된다 봅니다.
미국은 유대를 앞세운 영국의 조종을 받는다고 봅니다.
물론 일부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 자기들의 목적과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 정세에서 가장 쉬운 길을 선택하게 되는데 한국전쟁에서 아마도 중국과 소련의 콧대를 꺾으려다가 못한 것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그들이 더 이상 위헙적이지 않게 요리를 해야 됐는데 결국 안된 것입니다.
월남전도 그래요.... 미국이 깨졌는데...왜 중국가서 핑퐁외교를 하고 .......달러결재시스템을 포기하게 됐나요?
아무리 도움을 줬다고 해도 그것은 그때의 상황일 뿐입니다.
모두가 주권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고 싶은 것이지요.
아무리가~~또 주접을떨기 시작하는구만~~~ㅎㅎ
조선 해방전쟁과 관련해서 거기에 따른 기록이나 미국이 남한을 점령해서 철저하게 식민지하고 있는 상황을 북조에서 뻔이 보고있었는데 미국이 개입을 안한다고 말했다니 줄레가 그랬으면 몰라도 김일성 장군이 그렇게 판단할 확률은 "0"에 가까울것 같은데 그렇게 보다니 참 이상하군~~~
ㅆ
몇? 있지요 ㅎㅎ 확실한 반론을 하시길 바랍니다
6.25 종료시 양키고위직 놈들이 비명을 질렀답니다. '이 전쟁은 잘못 고른 장소에서 잘못 고른 상대와 잘못 고른 시간에 잘못한 전쟁이다' ---> 전 이것을 믿습니다. 양킨 유태의 똘마니고 짐승 대표 유태에게 사람 대표 한 민족은 언제든 갈아마시고 싶은 눈의 가시였을터. 물론 놈들이 우려했던대로 이제 곧 짐승들의 종말과 사람의 개벽이 시작되겠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천마산 덧붙여 625때 엄니 경험담.
당시 어른들은 혹여나 난리에 휩쓸릴끼 피신.
엄니는 삼촌과 집으로 심부름.
인민군; 어디가니
엄니; 집에 고추장 가질러요.
인민군; 머하러 왔니
엄니; 머 가지러요..
인민군들;둘이 남맨가부네.. 음..그른거 같지?..기타등등..
이런식이었다는..당시 엄니 나이 13세.끝
댓글들이 변죽, 딴죽, 비아냥에 머물러서야,,,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간 '글, 논지'가 옴싹달싹 못하고, 깝깝스러울 뿐,,,
,글의 취지를 살리는 정면도전이 아쉽넹,,
분석관님 또 분석 사고~~~ 우선 천안함 해명부터 ~~
천안함은 제 예전 글을 읽어보시고
문제가 있는 부분을 반론게시글을 올려보시면 토론하기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