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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 복을 가져오는 감사신앙 (눅17:11-19)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라는 책의 저자 겸 가수인 레나 마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양손이 없었고, 한쪽 발도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하는 대신 발로 글을 쓰고, 발로 밥을 먹고,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고, 발가락으로 십자수도 놓았습니다.
이후로도 피나는 노력 끝에 수영과 운전도 하게 되었으며 장애인 올림픽에서 상도 받았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아름다운 찬양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한 인터뷰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장애자가 아니라 단지 일반 사람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으로 세상에 있게 하셨다고 믿었기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매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간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항상 감사 거리를 찾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인생엔 언제든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늘 있는 것을 그간 숱하게 경험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런 ‘고난이 복’이라는 사실을 지나고 나서가 아니라 지금 아는 것이 참된 믿음이자 감사의 조건입니다.
통상 대부분의 사람이 사는 게 편하고 일이 잘 풀리고 하면 잘 믿을 것 같지만 대개는 그럴 때일수록 믿음에 더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 신앙인 중에서 망하는 사람을 보면 환난 때문에 망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게 잘 되는 것 때문에 더 망합니다.
여러분이라면 내 인생엔 어려움이 전혀 없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어려움이 있든 없든 한결같이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해주실 것을 믿으시고,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의 삶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하나님께서 내 건강, 내 생명, 내 가는 길을 지켜 주셔야만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만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하와와 아담이 자기 생각과 자기 결정으로 일을 저지르고 나니까 결국 그 뒷감당도 본인들이 해야만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뿐입니까? 오늘날엔 ‘불한당’이라는 용어가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에덴동산에서 사는 동안에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즉 불한당으로도 얼마든지 편하고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혼자 일을 처리했다가 당한 결과는 창세기 3:19절에서 보듯이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하는 신세 즉 불한당의 복마저 빼앗기는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이 땀 흘린 만큼 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이제까지 땀 안 흘리고 수고 안 하신 적이 있으셨나요?
갖은 애를 쓰고 공들이고 노력했어도 현실에서의 세상 이치는 창세기 3:17절에서처럼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에덴동산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에덴동산 대신 세상에서 얻게 된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세상이 주는 ‘불안증’입니다.
창세기 3:18절 말씀을 보면 현실은 에덴에서 쫓겨나 살아가는 세상에서마저 아무리 땀 흘리고 수고한다 해도 땅, 곧 세상은 언제나 내게 가시와 엉겅퀴만 줄 뿐이었습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내가 하는 일들이 다 성공으로 연결되고 다 복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을 상실했기에 살면서 무얼 하든지 간에 심중 깊은 곳엔 늘 “이게 잘 될까?” 또는 “이게 왜 이러지?” 내지는 “잘 돼야 될 텐데.”라고 하는 불안증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진시황도 보면 중국 천하를 통일했음에도 그의 불안증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외적으로 불안하니까 만리장성을 쌓았고, 내적으로 불안하니까 아방궁을 지었습니다. 또한 늙어가는 게 불안하니까 동남동녀 3천 명을 신선도로 보내 불로초를 구해오게까지 했으며 그리고도 불안하여 대적은 물론이고 자기 측근의 사람들까지 다 죽였지만 그럼에도 결국엔 만으로 마흔아홉 살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렇듯 거의 대다수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 그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서라도 우리에게 들러붙는 세상이 주는 불안증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불안증을 해결하지 않고는 누구도 인생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요? 우리에게서 이 불안증을 제거하려고 하면?
세상엔 방법이 없습니다. 불안증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생겨난 증상이기에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세상으로 쫓겨나 살게 될 때부터 이미 모든 사람이 원죄처럼 불안증을 갖고 삶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래서 불안증은 내가 일부러 하려고 하지 않아도 어느덧 내 마음에 자리 잡아 나로 불안과 염려, 근심과 걱정만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면서 생겨난 것이 불안증이라고 한다면 불안증을 없애는 방법은 그 역순으로 하면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다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면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아들 녀석이 미국 유학 때는 편지 안 하더니 군대 가서는 편지를 잘한다고 하시는 말을 들었습니다.
편할 땐 모르다가도 어려우니 가장 먼저 그리운 게 부모인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한다면, 신앙적으로는 어떨까요?
편할 땐 모르더라도 어려울 때를 만나면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도 그 얘깁니다. 유산을 미리 받아 허랑방탕할 때는 까맣게 잊고 살다가 다 까먹고 돼지우리에 들어앉는 신세가 되고 보니 아버지가 생각나더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15:17절을 보면 탕자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결단합니다. ‘이대로 죽느니 아버지께 가보기나 하자.’고.
탕자가 그랬듯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우리도 결단해야 합니다. ‘이대로 망하느니, 이대로 실패하느니 하나님께 가보기나 하자!’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우리가 살길은 하나님께 가는 것뿐입니다.
(한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께 / 가보기나 하자!”
결국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더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복음 15:20에 기록되기를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리고 22절에서는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하셨습니다.
보세요. 아버지를 떠나 혼자 인생을 살 땐 탕자요 실패자였던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오니 다시 아들이 되었고 성공자가 됐습니다.
이게 인생에서 아버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같은 이치로 인생에서 하나님이 있고 없고가 우리 인생을 실패자냐, 성공자냐를 가르는 차이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인생이라면 모든 불안증은 감사로 바뀌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감사와 믿음에서는 항상 믿음이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먼저이기에 당장엔 감사할 것이 도무지 없다 해도 믿음은 우리로 하나님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결국 우린 감사해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에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내적으로 싸우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켰느니”라고 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만 믿는 믿음을 지키려는 선한 싸움을 이겨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불안증들을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어려움이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만 믿는 믿음을 지켜내기만 하면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기만 하면 응답을 받을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감사 중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감사는 인생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나에게 하나님이 계셔서 이런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만 믿고, 기도할 수 있고, 응답받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하게 될 것을 믿고 기도할 때라야만 성경 말씀대로 “믿고 구한 것은 다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감사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믿으셔서 매사에 하나님을 찾고 믿으려는 노력을 다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10명의 문둥병자 얘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감사를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문둥병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사람이라 여겨 사람들과 격리되어 버림받은 삶을 살아야만 했으며 사람들 근처에라도 오면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예수님 소식을 듣고는 가까이 다가서진 못할지라도 멀리서나마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세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로 작정하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14절을 보니 문둥병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그냥 네 병이 나았다.”라고 하시면 간단할 것을 왜 굳이 복잡하게 말씀하신 걸까요?
이유는, 당시 문둥병 진단은 제사장들이 내렸고 그들에 의해 격리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는 것은 문둥병이 치료되었음을 확인받고 다시금 삶의 자리로 복귀하라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중요한 건 문둥병자들의 병이 아직은 낫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니요?
갔다가 사람들에게서 돌에 맞아 죽으라는 말입니까?
여기서 우린 중대한 선택 앞에 서게 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상황만 볼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를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기억하세요. 예수님의 말씀이 때론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를지라도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병 치료만이 아니라 병 나은 이후의 삶까지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기에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성경을 보니 다행히도 문둥병자들은 불만이나 의심 없이 말씀에 순종하며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려고 떠났습니다. 아직 문둥병이 나은 것도 아닌데, 그냥 그대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과연 그 결과가 어떠했다고 했습니까?
14절을 보세요.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가다가’라는 말은 안 갔다면 병은 그ㄷ래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다가’라는 말은 그 순간만큼은 문둥병자들에게는 자기들에게 아직 ‘병이 있다는 사실’보다는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말씀에 더 우선권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 상황보다 예수님의 말씀에 더 우선권을 두는 것. 이것이 감사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복은 내식으로 받고자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복이 따라 오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본문을 보면 제사장에게 가다가 병이 나은 한 명의 문둥병자가 가던 발길을 돌려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더 큰 복을 받는 기회가 있게 합니다.
(다시 한번 따라 하세요.) “예수님께 돌아가자!”
사실 문둥병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병이 나았으니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아닌 말로 우리나라에서도 군인이 휴가를 나오게 되면 무엇부터 할지를 놓고 그야말로 맘부터 급해지는 것처럼 당시의 문둥병자도 한시가 급할 정도로 길을 서둘러야 했을 형편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 다시 왔습니다. 왜요? 감사하려고.
그런데 그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반응이 좀 이상합니다. 열 명 중 한 사람이라도 감사하러 왔으면 그를 향해 “그래. 기특하구나. 이제부턴 잘 살아라.”
뭐. 이 정도 말씀이시면 되었을 것을 19절 말씀을 보면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왜 예수님은 돌아와 감사하는 자의 감사를 믿음으로 여겨주신 것일까요?
15절에 답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자는 돌아오게 된 이유가 자기에게서 되어진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누구라도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하신다.”는 이 고백이 감사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이 고백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자는 은혜로 병 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아홉 명이 받지 못한, 더구나 당시 사마리아 이방인으로선 언감생심 기대하지도 못한 믿음으로 받는 구원도 받은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한 사람의 감사를 그의 믿음으로 여겨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인정해 주신 믿음이 있었기에 돌아와 감사한 문둥병자에게는 믿음 대로 되는 은혜도 따라오게 된 것입니다.
이젠 우리가 그러하기를 소망합니다. 나에게 있는 문제나 어려움보다는 나에게서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더 굳게 붙들고 살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많은 성도들이 자칫 소홀하게 여기기 쉬운 것 중 하나는 육체가 무감각해지는 몸의 문둥병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무감각해지는 영적 문둥병이 더 문제입니다.
이에 신학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선한 사람은 있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악인은 없는 것을 생각하고 불평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항상 나에게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설사 세상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여려분이라면 ‘나에게는 하나님이 있으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살아가는 데에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건 감사신앙은 그 자체로 이미 믿음이기에 감사신앙엔 반드시 믿음대로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이 있게 됩니다.
게다가 감사신앙을 가지는 방법도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앞에서든 “예수님께 돌아가자.”는 믿음과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만 가질 수 있다면 그런 믿음 자체가 이미 감사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복을 가져오는 감사신앙’으로 인해 ‘나에게도 반드시 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붙드셔서 믿음 대로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