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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한국의 시인 (1902~1950?)
정지용(鄭芝溶, 1902년 6월 20일 (음력 5월 15일) ~ 1950년)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서정시인이다. 아명은 지용(池龍)이다.[1] 대한민국에서는 납북 여부와 사인이 모호하여 한때 이름이 '정X용'으로 표기[2]되고 그의 시가 금기시 되었으나, 1988년 해금되어 국어 교과서에도 그의 시 향수가 수록되었다.
생애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에서 한의사인 정태국과 정미하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송재숙(宋在淑,1902년~1971년)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에 입문하여 '방지거(方濟各,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송빛나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 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교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 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고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인천 상륙 작전이 끝나고 대한민국 국군이 수복한 서울에서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그는 납북되어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며, 정지용 사이버 문학관에는 계광순의 증언을 바탕으로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됨.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 감옥으로 이감. 이광수, 계광순 등 33인이 함께 수용되었다가 그 후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이라고 기술하고 있다.[3] 그러나 전쟁 당시 월북하였다가 2001년 남한을 방문한 정지용의 셋째 아들은 북조선에서의 아버지의 행적을 전혀 알지 못하였고, 2003년 문학평론가 박태상은 그가 납북되던 중 1950년 9월 25일 미군의 동두천 폭격에 휘말려 소요산에서 폭사하였다는 내용의 자료를 공개하여[4] 정지용이 실제 납북되어 북조선에서 활동하였는가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단, 박태상이 공개한 자료는 북조선 언론 자료에 기초한 것이어서 남한에서는 신빙성을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고, 현재까지 정지용의 정확한 사망 일자나 원인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력
1902년 (0세) 6월 20일(음력 5월 15일) 옥천군옥천면수북리238번지일원 정태국과 정미하의 장남으로 태어남.
1909년 옥천군옥천면하계리 40번지로 이주해서 정착생활
1910년 (8세)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에 들어감.
1913년 (11세) 동갑인 송재숙과 결혼
1914년 (12세)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함.
1918년 (16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함. 학교성적은 우수하고 집안이 어려워서 교비생(校費生)으로 학교를 다녔음.
1922년 (20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함.마포 하류 현석리에서 첫 시작품인 〈풍랑몽〉을 씀.
1923년 (21세) 일본 교토시의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함.
1924년 (22세) 시 〈석류〉· 〈민요풍 시편〉을 씀.
1925년 (23세) 〈새빨간 기관차〉· 〈바다〉등을 씀.
1926년 (24세)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등 9편의 시, 《신민》· 《문에시대》에 〈Dahlia〉· 〈홍춘〉 등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
1927년 (25세) 〈뻣나무 열매〉· 〈갈매기〉 등 7편의 시를 교토와 옥천을 오가며 씀. 《신민》· 《문에시대》· 《조선지광》· 《청소년》 · 《학조》 지에 〈갑판우〉· 〈향수〉등 30여편의 시를 발표함.
1928년 (26세) 장남 정구관 출생(음력 2월). 《동지사문학》 3호에 일어시 〈馬1· 2〉를 발표함.
1929년 (27세)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함. 12월에 시 〈유리창〉을 씀.
1950년 (48세)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됨.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 감옥으로 이관되는 도중 또는 이관된 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음.
작품 경향
시인 정지용은 초기엔 모더니즘과 종교적(로마 가톨릭) 경향의 시를 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보다는 널리 알려진 작품 <향수>에서 보이듯이 초기엔 서정적이고 한국의 토속적인 이미지즘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그만의 시 세계를 평가 받고 있으며 전통지향적 자연시 혹은 산수시라 일컫는다.
https://www.kocis.go.kr/koreanet/view.do?seq=5400
정지용은 1930년대에 이미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인 김기림은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https://m.blog.naver.com/guboree/140018379376
[시론] 정지용의 삶과 문학 세계
1. 정지용의 문학 세계
최동호 / 1948년생, 시인, 고려대 국문과 교수
감각적인 시어로 고향을 그린 정지용
(중략)
정지용은 우리 현대 시사에서 언어에 대한 자각을 각별하게 드러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까지의 대다수 시인이 감정의 분출에 의거하여 본능적인 시를 썼다면 1920년대 초반에 작품 발표를 시작하여 1930년대 대표적인 시인으로 군림하게 된 정지용에 의하여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선명한 심상과 절제된 언어로 포착해 내는 시가 씌어진다. 감정을 감각화하는 방법은 정지용이 철저히 인식했던 언어에 대한 자각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절제된 언어의 구사는 정지용의 시에서 일관되는 특성이지만 그의 시세계가 그리는 궤적은 몇 단계의 변모 과정을 보인다. 정지용 시의 전개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23년경부터 1933년경까지의 서정적이며 감각적인 시,
1933년 [불사조] 이후 1935년경까지의 카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적인 시,
그리고 [옥류동](1937), [구성동](1928) 이후 1941년에 이르는 동양적인 정신의 시 등이 그것이다.
특히 주목을 요하는 것은 정지용의 종교시가 [카톨릭 청년](1933)의 창간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 지면에 대부분 그의 종교시가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초기의 감각적인 시와 후기의 고전적인 시들의 교량적인 역할을 종교시가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지용의 신앙시는 1934년 [카톨릭 청년]에 발표된 [다른 하늘], [또 하나의 다른 태양] 이후 자취를 감추며 4년여의 침묵 뒤에 [옥류동], [비로봉], [구성동] 등이 발표된다. 이를 카톨릭 신앙의 전면적인 포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그가 1930년대 후반에 나름대로 각고의 방향 모색을 시도했으며, [옥류동], [백록담] 등에서 그 실마리를 찾으려 했고 1939년 [장수산], [백록담] 등에서는 한층 더 정신주의에의 침잠을 시도하면서 현실의 고통스러움을 견인의 정신으로 극복하고자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식민지의 고통 감내 위해 바다, 산 등 소재로 산수시 써
기의 서정시 작품은 20년대 초반의 젊은 문학도가 객지에서 학창 생활을 하며 갖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이국 풍물에 대한 동경을 보여 준다. 초기 시에서 정지용이 남다르게 보여준 감각적 선명함은 후기 산수시와 긴밀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바다 9]에서 드러나는 재기 발랄한 심상이 드러내는 감각적 선명성은 후기의 정신적 고뇌를 함축한 산수시로 나아가는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초기에 정지용은 다수의 '바다' 시편을 썼다. 바다에서 산으로 소재가 이동되면서 산수시 계열의 시들이 씌어진다. 감각에서 정신으로의 변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의 시편들과 '산'의 시편이라는 양자는 겉으로는 지향하는 바가 다를지라도 본질적으로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지용 시의 감각과 정신을 선명하게 돌출 시켜 주는 비법이 소묘적 언어의 정교한 회화성에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구성동]을 발표한 다음해인 1939년 정지용은 [장수산](3월), [백록담](4월)을 발표한다. 감각적 심상을 반향과 흐름을 빌려 정신적 고요의 공간으로 빚어내는 시적 표현과 구성의 긴밀성을 [장수산]과 영혼을 비추는 물의 명징성을 인식하여 주체를 해체하는 시적 인식의 객관화에 도달한 [백록담]은 그의 정신주의가 도달한 최상의 수준이었다. 정지용이 산수시로 나아간 것은 식민지 말기의 고통스러움을 정신적 극기로 감내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변절과 친일을 강요당하던 1930년대 말의 식민지적 압력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은 산수에 자신을 숨기는 일이었을 것이며 동양의 고전적인 전통 속에서 자신의 시적 방법론과 은일의 정신을 체득하려 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의 언어적 인식은 그의 시를 단순히 복고적인 취향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이러한 점에서 그의 시가 지니는 현대적 의의가 명백해진다. 정지용이 자신의 시적 천분을 조탁하여 이룩한 정묘한 산수시는 당대 최상의 수준이며 한국어가 지닌 언어적 가치를 극대화시킨 한 예가 된다. 정지용은 서구 추수주의적인 시적 유행을 넘어서서 우리의 오랜 시적 전통에 근거한 산수시의 세계를 독자적인 현대어로 개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정지용의 대표작으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애송되는 작품 한 편을 들라고 한다면, 우리는 [향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지용의 [향수]를 노래하는 사람 모두가 언제나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감을 느낀다. 정지용은 [향수]에서 독특한 감각적 표현을 율격 언어로 응축시켜 한국인들이 마음의 고향에 도달하는 심정적 통로를 열어 보였다.
[향수]가 그려내는 고향의 정경은 누구에게나 있었음직한 추억이며 따라서 강력한 정서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정서적 호소력에 힘을 더하는 것은 뛰어난 감각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금빛 게으른 울음'이나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전설의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에서 보이는 언어적 환기 효과는 당시로서는 특별한 예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표현한 [향수]는 뛰어난 감각적 표현으로 온 국민의 사랑 받아
째 연의 고향에 대한 공간적 환기와 둘째 연의 전형적인 농가의 풍경에서 제시되는 육친애의 그리움에 이어 셋째 연에서는 화자의 구체적인 성장 경험이 표현된다. 흙에서 자란 마음과 파란 하늘 사이의 화자의 행동 모습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가 생겨나기 이전의 것으로서 유년 시절의 낙원에 대한 믿음을 연상시킨다. 그 정경은 어린 시절의 단순한 반추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이상과 낙원이 괴리되어 떠도는 현재의 상황을 시사한다. 넷째 연은 다시 구체적인 삶의 정경으로 돌아가고 다섯째 연은 계절의 순환과 더불어 포착된 고향집이 그려진다. 고향집이 내포하는 평화롭고 정겨운 감각으로 인해 가난의 어려움마저 넘어서고 있다.
[향수]는 20년대 초반의 젊은이가 고향을 떠나와 고향을 그리는 젊음이 용해되어 있으며, 오늘의 우리들 또한 상실한 낙원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생의 근원에 대한 동경을 담고 있다.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그리고 이를 넘어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향수]는 생의 근원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일깨워 준다. * 글쓴이 : 최동호 / 1948년생, 시인, 고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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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지용 문학 批評
오탁번(고려대 교수)
정지용의 문학은 한국 현대시사의 전개에 있어 실로 중대한 의미로 작용해왔다. 이제 광복 43주년이 된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그동안 캄캄한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지용의 시세계를 활짝 개방하여 다시금 독자와 만나게 한 것은 거의 시대적 요청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용은 한낱 시인이 아니다. 우리 현대시가 그 차체다.
1925년에 나온 소월의 [진달래꽃]과 만해의 [님의 침묵]은 전자가 <율조(律調)>로서 한국 현대시의 넓이에 기여하고, 후자가<어조(語調)>로서 그 깊이에 기여했다면, 지용은 30, 40년대의 암흑과혼란을 거쳐 민족 분단과 전쟁, 그리고 오늘까지의 시 전개에 있어서 표면적혹은 이면적으로 한국 현대시의 높이를 <언어의 비유>로서 지탱한 시인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935년에 나온 [정지용시집]과 1941년의 [백록담(白鹿潭)]은 다 함께 중대한 문학사적 의의를 띤다. 그는 30년대 모더니즘의 영향권 아래에서 출발했으나 오히려 그 영향의 테두리 밖을 지향하여 동양의 고전과 우리의 전통문학과 만난다. 그의 청신한 이미지는 단순한 서양시의 역어적(譯語的) 차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 보다 동양적인 흐름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같은 성격이 현대시사상 그를 가장 탁월한 시인이게 하는 원인이라고 본다.
지용은 초기에서부터 시의 공간성을 확대시켜 나갔다. 즉 시각적인 이미지가 도처에번득이고 있다. 다만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뿐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감각으로 시를 만들어 냈다. 지용 이후의 시인 또는 동연배의 시인조차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그에 의해 한국시가 비로소 한 장르를 형성하게 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6.25이후 이 땅의 현대시인임을 자임했던 청마, 두진, 목월, 지훈 등의 정신적 배후에서 항상 대부 노릇을 수행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오탁번(고려대 교수), 출전 : 1988. 1. 20 [동아일보] 제 6면
3. 지용의 문학과 삶
옥천이 낳은 정지용선생은 한국 현대시사의 한 큰 봉우리로서 우리의 문학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광복 후 우리시단을 이룬 청록파 시인을 탄생시켜 현대문학을 빛내게 했다. 지용선생은 역사적으로 고통스러운 시기에 출생하여 옥천죽향국민학교를 졸업하신 후 어려운 환경속에서 향학에 불타 상경하여 휘문고보에 입학하였고 그때부터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창작활동을 했다. 그리고 이 학교 졸업후에는 일본유학을 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으며, 귀국후에 후진양성과 수많은 주옥같은 시들을 창작하여 한국 문학사를 빛냈다.
"지용은 작은 체구로 얼굴에 예지의 기상이 번득였으며, 비범한 눈빛이 영롱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고 박두진은 한 천재시인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의 천재적인 기질은 오만에 가까운 당돌성과 패기를 느끼게도 하나 그러한 엄숙한 풍모 속에는 소탈함과 자상함 을 숨기고 있음을 아울러 밝힌다. 정지용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서 자신이 추천한 문학청년을 대등한 시인으로서 대하여 주었으며,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를 북아현동 고개 마루에서 20분 넘어 걸리는 서대문 네거리까지의 비탈길을 배웅하면서 마치도 천 리를 멀다 않고 찾아온 옛친구와의 작별을 아쉬워하듯 다정하고 허물없이 대해주었다고 지용의 인간적 면모를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용선생은 일제와 8.15광복, 분단의 6.25전쟁 등 민족수난의 수레바퀴를 그대로 밟아 오시면서 생사조차도 알수 없는 비운을 맞게 되었고, 그의 문학 또한 이념논쟁 등으로 우리의 망각속에 묻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용문학은 오늘에 이르러 우리의 희미해진 망각속에서 되살아나 한국인의 정서를 일깨우고 있다. 지용의 대표적인 시중의 하나인 <향수>는 지금도 수많은 독자들이 읽고 있으며 그들에게 고향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과 다시금 그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정처없는 회귀감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유리창>, <호수>, <바다>, <백록담>,<장수산>등 많은 시편들이 고등학교, 대학의 문학시간에 읽혀지고 많은 독자들이 그의 시를 읽고있다. 그뿐만 아니라,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용과 그의 시에 대한 연구가 대학원의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논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석.박사학위 논문과 학위논문이 아닌 논문에서 지용의 시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용의 시를 다루는 방법론과 비교문학, 분석비평, 의식비평, 원형비평, 문학사회학적 관점등 다양하게 동원되면서 심화되었다. 이들 논문의 질도 국문학 연구 가운데 어느분야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한국 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지용, 일제와 8.15광복, 6.25전쟁 등 우리 민족 수난의 수레바퀴를 그대로 밟고 간 그가 분단된 이나라의 아픔을 온 몸에 짊어져야만 했던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며, 우리 모두의 비극이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전 어느날 <이북통신>이라는 주간지에 *지용월북* 이라는 거짓말이 나오자 스스로 출판사에 돌아다니며 월북 사실이 없음을 해명하기도 했던 지용, 지용의 납북되기 전후의 행적에 대한 갖가지 억측과 오해, 더 많은 시를 쓰고 문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나이에 가족을 남기고 납북되어간 비극적 행적- 이렇게 해서 한 천재 시인이 삶이 비극적 행각으로 끝난것은 분단된 우리 겨레의 아픔을 온통 한 몸에 안고 간 것이며, 그 자체가 이 민족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지용은 우리 현대시사에서 한 큰 봉우리이다. 지용의 시는 이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뛰어넘어 아픈 가슴을 안고 사는 우리 한국인 모두에게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앞으로 우리 민족사와 함께 지용의 시들은 영원히 살아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Copyright : Gun Okchon Chungbuk Korea
Edit by : Korea Telecom International.
(중략)
https://m.blog.naver.com/117hjk/20116535619
* 문학세계 = 섬세한 이미지 구사와 언어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보여준 것이 특징,
첫째는 1926~33년으로,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향토적 정서를 보인 모더니즘 계열의 시.
<카페 프란스>ㆍ<마음의 일기에서> 등에서 시작된다. 이어 이미지 시의 면모를 보여준 <바다> (조선지광 1927. 2)와 <향수> (조선지광, 1927. 3)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했다. 이런 경향은 <시문학> 의 향토적 정서, 섬세한 이미지 표현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이 시기의 시들은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면서도 순수 서정시의 가능성을 아울러 보여준다. 곱게 다듬어진 우리말의 언어적 세련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감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형상화
둘째는 <가톨릭 청년> 에 관여하던 1933~35년에 보 여준 종교적인 시.
이 시기에는 절대적인 신에게 관심을 갖고 시대적 상황에 무력한 자신의 정신적 허기와 갈증을 신앙을 통해 메우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갈수록 열악해지는 현실에 대한 절망과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시인의 정신적 방황을 드러내는 것.
셋째는 1941년까지 발표한 동양적 전통과 정신에 바탕을 둔 산수시.
이 시기에 그는 동양적 정신과 산수의 풍경을 그리는 여행을 떠남으로써, 시적 소재가 <바다> (시원, 1935. 12)를 거쳐 <옥류동> (조광, 1937.11) <비로봉> (청색지, 1938. 8). <장수산> ( 문장, 1939 3). <백록담> (문장, 1939. 4)으로 바뀐다. 소재의 측면 으로 볼 때 정지용의 첫 시집이 *바다*를 주로 택했다면 두번째 시집은 *산*을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 바다*와 *산*은 단순한 소재의 차용이라는 차원을 넘어 시인의 세계관의 이동을 의미. *바다*에서 *산*으로의 이동은 평면적인 것에서 입체적인 것으로, 유동적인 것에서 고정적인 것으로, 감각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의 변모를 내포하고 있으니 시인 자신이 청년에서 장년으로 나이 들어가면서 시대적 환경에 대응하는 방식의 변모와도 연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다를 거쳐 산으로 오르는 이런 시세계의 변모는 즉 일제강점기 말의 암울한 현실에 구애됨이 없이 자연에 몰입하고자 하는 시인의 정신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시어의 조탁과 섬세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독특한 시세계를 표현했는데, 이러한 성격은 한국의 서정시를 계승한 것으로서 이후 제자격인 청록파의 시세계로 이어졌다. 100여 편이 넘는 시 외에도 소설 <3인 =ㅅ> (서광, 1919. 11)과 평론 <조선시의 반성> (문장, 1948. 10). <문학으로 사는 길> (세계일보, 1949. 1. 5) 등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정지용시집> (1935). <백록담> (1941).<지용시 선> (1946)과, 이론서로 <문학독본 8). <산문 등있고, 1988년 민음사에 서 <정지용선집> 을 펴냈다.
* 해방이 되자 정지용은 이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 전반에 걸쳐진 비리를 비판하면서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그런 관심은 시를 쓰기 적합하지 않았는지 해방 후 거의 시를 쓰지 못했다. 5년 동안 시< 곡마단>(감격이나 환희가 사라지고 난 뒤의 작품으로자 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반성적 화자가 나타남.)과 기념시 2편<애국의 노래>, <그대들 돌아오시니>와 시조 5수 이 외에는 작품이 없다
*정지용 시의 특징
1 시어구사의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2 시의 형식면에서 전통적인 기승전결 구성법에 기초한 2행의 단시형과 동시로서는 독특한 줄글식 산문시형을 보여주었다.
3 시인의 감정이 시에 노출되는 것을 엄격히 배제한 대상 묘사의 이미지즘의 시 세계
(중략)
시어를 고르고 다듬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상 에서 흔하게 사용되지 않는 고어나 방언을 시어로 폭넓게 활용하고, 언어를 독특하게 변형시켜 자신만의 시어로 개발했다. 시의 형식면에서 지용은 2행 1연으로 된 단 시형을 즐겨 썼다. 또 줄글식 산문시형도 즐겨 썼는데, 이들 작품은 쉼표나 마침표 없이 문장이 종결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연계적 구성을 보여준다. 20년대 소월이자 아표출을 통하여 자기 감정을 과다하게 노출한 감상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보였다면, 지용은 대상의 뒤에 자신을 숨기고 대상을 적확하게 묘사하는 명징한 모더니즘 이미지즘의 시 세계를 열어 보였다
서구의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답게 형태주의적 기법을 시도한 최초의 이미지스트이자 모더니스트였다. ( <슬픈 인상화>, <파충류동물> 등의 초기시편은 형태주의적 기법을 보이는 대표작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그의 이미지즘은 단순한 시적 기술과 기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용의 이미지즘은 대상 묘사의 심연으로부터 어떤 신, 즉 표현된 것 외의 먼 운치를 감지하게 하는데, 우리는 그의 후기시편들 을 통하여 이러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김우창은 지용이 "감각과 언어를 거의 가톨릭적 금욕주의의 엄격함으로 단련하여 백록담] 에 이르면, 감각의 단련을 무욕의 철학으로 발전시킨 경지에 이른다"고 하였다. 최동호도 "서구 추수적인 아류의 이미지즘이나 유행적인 모더니즘을 넘어서서 우리의 오랜 시적 전통에 근거한 순수시의 세계를 독자적인 현대어로 개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으로 평가
작품
정지용
〈향수〉(鄕愁)
〈유리창〉
〈바다9〉
〈비〉
〈장수산〉(長壽山)
소설 〈삼인〉(三人)
<춘설>
<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