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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하는 영국식 억양으로 미스터리한 이 라디오 진행자는 독일 방송국에서 영국에 방송하며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소문과 과장을 퍼뜨렸다. 최근 국내에서는 북한 노동신문 구독을 허용하느냐 여부를 놓고 가짜 뉴스의 위험성을 과장하는 정치집단을 목격하고 있다. 그런 과장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BBC의 29일(현지시간) '인 히스토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1945년 5월 8일 VE 데이(유럽 전승일)에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기 사흘 전, BBC 전쟁 특파원 윈포드 본-토머스는 함부르크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몇 주 전 나치 선전을 방송했던 같은 마이크와 파장으로 연설했다. "오늘 밤, 여러분은 뉴스에서 윌리엄 조이스의 의견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조이스, 영국인 대부분에게 (알려진) 호 호 경(Lord Haw Haw)의 방송 경력이 아주 안타깝게도 중단됐습니다.... 여기는 BBC입니다. 6년간 조이스의 신랄한 어조를 견뎌야 했던 영국의 모든 청취자들에게 알립니다."
조이스는 몇 주 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가짜 서류를 들고 도망쳤고, 진격하는 연합군에게 붙잡히지 않으려 애썼다. 마지막 녹음에서 그는 술에 취해 패배한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항상 최후의 수단을 희망하고 믿어왔다, 동맹이 있을 것이다... 영국과 독일 간에. 글쎄, 지금으로서는 그게 불가능해 보인다. 좋아.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내 모든 노력이 헛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다."
붙잡힌 나치의 녹음기에서 회수된 이 테이프는 아마도 방송되지 않았을 것이다. 끝까지 헌신적인 나치였던 그는 이렇게 작별 인사를 남긴다. "독일 만세(Es lebe Deutschland), 하일 히틀러 그리고 안녕."
1939년 3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던 그에게는 치욕스러운 결말이었다. 영국 시민들은 히틀러가 즉시 파괴적인 공격을 감행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긴장된 정체기는 '가짜 전쟁'이라 불렸다. 초기 시절 국내 전선의 주요 위험은 공습이 아니라 발목 접질림(twisted ankles)이었다. 독일 폭격기를 저지하기 위해 정부는 정전을 시행했다. 1939년 크리스마스까지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5분의 1이 계단에서 떨어지거나, 어둠 속에서 충돌하거나, 대부분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도로 사망자 수는 거의 두 배로 늘었으나, 휘발유 배급으로 교통량이 줄어들었다. 공연장은 폐쇄되고 모임도 금지돼 밤에는 사람들이 집안에 머무르며 라디오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BBC의 지루한 편성에 실망했다. 보도할 내용이 거의 없는 짧은 뉴스, 지루한 공공정보 안내, 샌디 맥퍼슨의 오르간 리사이틀처럼 시간 때우기 방송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라디오 다이얼을 돌리던 청취자들은 더 활기찬 무언가를 발견했다. 나치 시절 국유화된 라이히스-룬트푹크-게젤샤프트(RRG)에서 중파로 방송하는 미스터리 인물이었다. 과장되고 코맹맹이 섞인 상류층 영국 억양으로 그는 "독일이 부르고 있다, 독일이 부른다"(Germany calling, Germany calling) 는 유행어로 자신을 알렸다.
데일리 익스프레스 라디오 평론가 조나 배링턴은 그를 호 호 경이라고 불렀고, 이 별명은 굳어졌다. 배링턴의 목적은 독일 출신 선전가를 깎아내리는 것이었지만, 많은 청취자들이 호호의 악랄하고도 신기한 공연의 충격 효과를 즐겼다. 그의 스타일은 반쯤 그럴듯한 소문, 과장, 조롱을 통해 의심을 퍼뜨리면서도 영국 청중의 사기를 약화시키면서도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
한 방송에서 그는 "공황과 혼란... 영국에서 매시간 진전을 벌이고 있다"면서 "유일하게 놀라운 점은 운명이 정해진 이 섬 사람들이 자신들을 이끌었던 정치인들의 본질을 깨닫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방송에서 호 호 경은 독일 폭격 위협에 대해 갖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조롱했다. 그는 "영국 허위정보부는 독일 폭탄의 파편에 부상당할 위험으로 영국 여성과 소녀들을 위협하는 체계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여성들은 이런 짐작과 경고에 대응해 모자 제작자들에게 봄과 여름 모자를 아주 얇은 양철판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방송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재미없지만, 아마도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달랐을지 모른다.
방송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매일 밤 600만 명의 영국인이 밤 9시 뉴스 후에 이 방송을 들었다. 영국 정보부 고문이었던 톰 해리슨 교수는 1975년 BBC 인터뷰를 통해 괴링과 히틀러 같은 나치 인물들의 독일어 분노를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호 호는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안심이 되는 소리였다. 왜냐하면 전혀 나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적이 그렇게 끔찍하지 않을 거야" 느끼게 했다고 털어놓았다.
호 호 경은 전쟁이 터지기 한 달 전에 두 번째 아내 마가렛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는데, 그녀 역시 파시스트였다. 영국에서 억류될까 두려워 그는 자신이 영국 태생이라고 거짓말을 해 영국 여권을 갱신했다. 이것이 치명적인 실수로 드러났다.
사실 조이스는 1906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일랜드로 이주해 골웨이 카운티에서 자라났다.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10대 시절, 그는 영국 군사정보부의 전령 역할을 했다. 이런 행동은 그에게 아일랜드에서 많은 친구를 얻지 못하게 했고, 전쟁이 끝난 후 가족은 영국으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젊은 시절 조이스는 유럽에서 퍼지던 극우 이데올로기에 매료됐고, 1932년 오스왈드 모슬리 경의 영국 파시스트 연합에 가입했다. 그는 열정적인 웅변가로 명성을 얻어 선전 책임자로 임명됐다. 그러나 상황은 당에 불리하게 돌아갔고, 1936년 모슬리의 블랙셔츠 부대가 런던 동부 케이블 스트리트 싸움에서 유대인과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공격에 쫓겨났다. 축출된 조이스는 자신의 국가사회주의 연맹을 설립했으나, 자신의 극심한 반유대주의가 환영받는 곳을 찾지 못해 곧 독일의 부름을 느꼈다.
요제프 괴벨스의 언어 전쟁 아래, 영어 라디오 프로그램이 영국에 송출됐다. 영국 파시스트와 영어권 독일인들로 구성된 RRG는 나치의 생활 방식을 홍보하고 영국 사회 문제를 부각시키는 선전을 방송했다. 호 호 경의 원래 목소리는 사실 독일인 울프 미틀러의 것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한 지 몇 주 만에 수다스러운 파시스트 조이스가 꿈의 직장을 찾았다.
조이스의 방송은 그의 메시지를 경멸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마지못하는 존경을 받았다. 비평가이자 작가인 해럴드 홉슨은 1939년 12월 29일 타임스에 편지를 보내, 배급제로 인해 영국인들이 "주당 버터 4분의 1 파운드"로 제한됐다는 농담으로 호 호의 성탄 전야 방송이 "축제 분위기"를 살렸다고 칭찬했다. 홉슨은 호호가 분명 더 적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독일인들이 받은 것을 누락한 점을 BBC가 지적해 이런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곧 호 호 경의 농담은 더 이상 웃기지 않았다. 1940년 4월 9일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은 영국의 이른바 '가짜 전쟁'이 끝나고, 실제 전쟁이 시작된 전환점으로 여겨졌다. 한편, BBC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극적으로 변했고, BBC는 국내와 군 내 사람들에게 정보의 생명줄로 재창조됐다. 호 호는 점점 무의미해졌고, 1945년 4월 마지막 음주 방송 시점에는 그와 나치 정권 모두에게 게임이 끝났다.
연합군이 독일로 계속 진격하자, 조이스 부부는 중립국 아일랜드로 이동하기 전에 스웨덴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덴마크 국경 근처 발트 항구 플렌스부르크까지만 도달했다. 그들은 가명을 쓰고 근처 마을에 정착했고, 때때로 자신들을 모르는 영국 군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조이스는 나무를 모으다 두 명의 영국 장교를 만나는 바람에 운이 다했다.
그 중 한 명인 제프리 페리는 BBC에 이 "매우 이상한 부랑자 같은 인물"과 대화하게 된 과정을 털어놓았다. 동료가 그에게 "윌리엄 조이스와 너무 닮았다"고 말했다. 침엽수와 낙엽수에 관해 친근한 대화를 나눈 뒤, 페리는 두 가지를 확신했다고 말했다. 그 놈이 조이스였고, 자신이 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낯선 사람이 두 손으로 통나무를 집어들자, 페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남자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는 "혹시 윌리엄 조이스는 아니겠지?"라고 물었다.
페리는 BBC에 그 다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했는데 "그리고 그의 손이 다시 주머니로 들어갔다. 총을 꺼내려는 줄 알았다. 난 권총을 꺼내 낮게 겨누고 쐈다." 그의 총알이 조이스의 엉덩이를 맞혔다. 아이러니하게도 페리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1930년대 영국으로 이주한 후에야 호르스트 핀셰워란 이름을 바꿨다.
부상당한 조이스는 영국으로 송환돼 반역죄로 기소됐다. 하지만 어떻게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영국을 배신했다고 비난받을 수 있겠는가? 조이스의 운명은 전쟁 직전에 급히 신청한 여권 신청으로 결정됐다.
당시 영국의 최고 변호사인 하틀리 쇼크로스 경은 1975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조이스가 "유니언 잭을 두르고 있었으며" 영국 왕실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전시 적국을 돕는 행위가 반역죄임을 의미했다. 반면 존 포스터 QC 경은 반역죄 혐의를 "피의 사냥"이라고 묘사하며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사기로 취득한 여권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내 생각에는 왕실의 보호가 전혀 없었고 따라서 윌리엄 조이스의 충성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이스는 1939년 9월 18일부터 1940년 7월 2일까지 영국 여권이 만료돼 독일 시민권을 받은 1940년 7월 2일까지 "국왕의 적들과 함께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여러 차례 법적 항소를 거쳤으나 평결은 동일했다. 그는 끝까지 뉘우치지 않았다. 1946년 1월 3일 아침, 그는 런던 완즈워스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교도소 부지 내 표식 없는 무덤에 묻혔다.
30년 후, 딸 헤더의 긴 노력 끝에 조이스의 유해는 발굴돼 골웨이 카운티에 재매장됐다. 미국인으로 태어나 독일인으로 살다가 영국의 반역자로 죽은 그는 결국 아일랜드인으로 묻혔다.
나무위키를 따라 부족한 대목을 살펴본다. 우선 맨먼저 사진의 귓볼부터 입가까지 이어진, 마치 프랑켄슈타인 얼굴처럼 절개된 흔적이 궁금한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1924년 10월 22일, 총선을 앞두고 영국 보수당 후보 잭 라자루스를 지지하는 회의를 진행하던 중 조이스는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을 받고 오른쪽 뺨에 면도칼 공격을 받아 영구적인 흉터가 남았다. 본인은 유대인이 공격한 것이라고 떠벌였지만, 부인은 아일랜드 여성에게 칼을 맞은 것이라고 다른 얘기를 했다.
그는 1906년 4월 24일, 브루클린에서 아일랜드계 미국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마이클은 1차 대전 때는 협상국을, 아일랜드 독립투쟁 당시는 영국 정부를 지지했다. 이런 연유로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자 조이스 가족은 보복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한 것이었다. 조이스는 나이를 속이고 영국군에 입대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적발돼 쫓겨난다.
조이스는 1922년 버크벡 칼리지의 입학 시험을 통과한다. 그 뒤 런던 대학 학군단에 들어가 영어영문학과 역사를 공부해 1927년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후 헤이즐 바란 여성과 결혼해 두 딸이 태어난다.
앞에 소개된 조나 배링턴은 이런 글을 남겼다. '그의 억양과 성격은 이런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희미한 턱과 뭔가를 찾아다니는 코를 가졌으며 성긴 금발머리를 뒤로 넘겨 빗은 데다 멍한 눈에 단안경을 끼우고 단추구멍에는 치자나무 꽃을 꽂은 그런 사람 말이다. P. G. 우드하우스의 소설에 나오는 버티 우스턴(Bertie Wooster)와 비슷하다.'
처형 직전 마지막 유언으로 전쟁의 원인은 유대인이라고 비난하고, 소련의 제국주의에 대해 경고했으며, 자신의 이상을 위해 죽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싸우는 이유를 모르고 죽은 영국의 아들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대역죄가 적용된 사례는 현재까지 그가 마지막이다.
부인 마가렛 역시 선전방송에서 발언한 대가로 반역죄가 적용될 예정이었으나 윌리엄 조이스의 전기 작가 나이젤 판데일에 의하면 그와 MI5의 연결고리를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검찰과의 사법거래로 기소를 면했다는 내용의 문서가 2000~2005년 사이에 발견됐다고 한다. 덕분에 마가렛 조이스는 독일 선전방송에 활용된 32명의 영국인 중 유일하게 기소되지 않았다.
술을 마셔 취한 채로 한 것이 확실해 보이는 그의 마지막 방송 날짜는 1945년 4월 30일이었으며, 히틀러가 자살한 날이었다. 그는 마지막 방송을 통해 "솔직히 영국이 소련에 맞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저는 독일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