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에 들어와서 2달이 지났을 때 그룹연수가 시작되었다. 지금 내가 사는 대전을 그 그룹연수 과정 중에 처음으로 밟았다.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를 빌려서 한 그룹연수는 그 당시는 참 독특한 방식이었다. 어디 그룹을 가든 창업주의 신화 같은 이야기부터 연수는 시작을 한다. 롯데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 롯데의 신격호 회장이 맨 처음 한 사업은 커팅오일 생산이었다. 하지만 폭격을 맞아 공장이 불타고 말았다. 몇 번의 실패 끝에 화장품을 만들어 돈을 벌기 시작했고 그는 추잉 껌이라는 운명적 만남을 통하여 성공을 한다. 이어서 맛의 예술품’이라 불리는 초콜릿 기술을 터득하여 요즘 말로 일본에서 대박을 터트린다.
1976년 신격호는 기존의 주식회사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해산하고 새로 자본금 3000만 원을 투입해 롯데제과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한국 롯데그룹의 새 역사가 시작됐다. 신격호는 한국 롯데 사장을 맡으면서 대표이사 회장 자리에는 유창순씨를 추대해 롯데제과의 경영을 맡겼다.
그렇게 높은 사람을 지척에서 만나고 직접 토론도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며 나는 감격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롯데와의 인연 (그 소설집의 여주인공이 바로 롯데다.)그리고 가난한 유학생 유창순과 신격호 회장의 만남에 대한 일화는 삶에 대한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내가 롯데에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그의 말, "여러분 트럭 한 대에 껌을 몽땅 실으면 얼마가 될 것 같습니까.70만원 밖에 안 합니다. 다 남아도 70만원입니다. 그렇게 한 푼두푼 모으고 어렵게 노력을 해 지금의 롯데를 만든 겁니다. "
지금은 고인이 된 유창순 회장은 한국은행 도쿄지점장으로 부임했고 그 무렵 재일 한국인 사업가 신격호를 큰손 예금주로 다시 만났다. 당시 관계· 재계· 정계에 폭넓은 대인 관계를 가진 유창순은 회장 취임 이후 14년 동안 한국 롯데 성장의 큰 기둥 역할을 했다. 당시 일본 모리나가와 과자업체 쌍벽을 이뤘던 롯데는 일본에서 돈을 벌어 한국에서 군수품제조를 하려고 한다는 상대의 공세에 휘말려 당시 마음을 먹었던 중공업 분야를 포기하였으며 그 바람에 일본에서 껌 매출액만 줄었다고 그가 말했다. 지금도 내가 알기로 롯데가 중공업분야에는 투자를 안하는 것이 다 그런 연유가 있는 것도 같다. 그런데 배포된 연수일정 시간표상에는 마지막 날 하루일과가 빈칸으로 되어 있었고 저녁만찬만 기재되어 있었다. 당일 날 아침 구보를 하고 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롯데쇼핑 작업복 복장으로 모두 갈아 입게 하고 조별로 버스에 오르도록 했다. 버스안에서 준 상품은 철 지난 앨범, 양산, 샤프... 그런 제품으로 우리를 어딘가에 투입을 해서 그 물건을 팔아서 그 돈으로 점심도 먹고 차비도 해서 6시 이전까지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일 이른 시간내 돈을 제일 많이 남긴 조에게 그때 돈 30만원을 부상으로 준다고 했다.
생전 처음 가는 대전시내 한복판인 흥명상가에 마치 죄수 마냥 번호 달린 이름표를 달고 땡전 한 푼 없이 활보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사나운 일이었다. 우리 팀은 효율을 높이자고 두 패로 나누었는데 한 패는 텍사스 촌이라는 동네로 잘못 들어가 모자를 여자들한테 빼앗기는 상황도 발생되었다. 한 사람이 기지를 발휘하여 병원을 하는 선배를 찾아내 물건을 반강제적으로 떠넘기는 활약에 힘 입어 우리는 2등을 했다.
이후 이런 식의 연수가 대기업마다 펼쳐졌는데 예를 들면 사람이 제일 많이 모이는 곳에서 일장 연설을 하게 하던지 깜깜한 오밤중에 산에 올라 묘 근처에서 정해진 물건을 찾아오는 것 같은 담력 키우는 테스트를 꼭 연수교육에 끼워 넣었다. 이런 방식은 일본에서 하던 것들인데 그대로 모방을 해 우리나라에 들여온 것들이다. 내 근무처는 당시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그 회사가 적자로 경영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적자 업체를 흑자로 만든다는 것,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적자를 줄이고 흑자를 내는 데는 전적으로 소속한 사람들의 업무 자세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가 롯데를 그만 두게 된 것은 당시 부여 조폐창에 발령이 나 그만둔 것이다. 건설회사에서 현장 나가는 게 당연한 것인데 그것을 마다한다면 당연 그만 둘 수밖에는 없다. 사실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자꾸 벌어져 겁이 나 떠나기로 한 것이었다. 당시 0과장은 내가 싹싹해 보였는지 당시 롯데냉동, 롯데제과 현장을 자주 데리고 다녔다. 한창 도면을 보던 때라 현장구경은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현장에 가면 거기서 업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꼭 저녁 때 업자를 만나고 여자 있는 술집을 가는 것이었다. 앉히는 여인들은 나이 역순으로 앉혀서 내 차지는 꼭 늙은 마담이었다.
하루는 아래층에 내려가 서류를 받아오라고 해서 내려갔는데 만난 사람은 며칠 전 술집에서 만난 업자였으며 필시 돈뭉치로 보였다. 회사는 적자라고 직원들을 독려하고 야단인데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살펴보니 하청업체를 자기가 운영하면서 다른 사람 명의로 해놓고 일감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업체와 짜고 도급금액 내역을 올려서 발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부서에서도 편이 갈려 윗사람에게 잘 보이며 실속을 챙기는 사람과 근면한데 요령이 없는 듯 늘 따로 취급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건설의 세계가 이렇구나 싶으니 마음이 불안해지고 조바심까지 이는데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조폐공사 발주에 많은 펌프가 소요되며 이 펌프들은 건설업체가 직접 납품하기로 했는데 0과장의 소개로 만난 펌프회사 부장님은 간이 대단히 부은 사람이었다. 5마력 짜리 펌프를 10마력으로 용량 선정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제품에는 10마력으로 써 붙이고 실제로는 제 용량인 5마력을 납품하겠다는 것이었다. 어이없는 그의 말에 소름이 돋는 상황인데 그는 태연히 윗사람들하고 이야기가 잘되었다고 하며 나를 부추겼다. 그런데 그 다음 날부터 0과장이 나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현장도 데리고 가지 않았으며 말도 줄이고 잘 웃지도 않았다. 그 분의 이해 못하는 행위는 그것 말고도 또 있었다. 그때는 토요일도 근무를 하던 때인데 하루는 아침부터 그분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방금 자리에 계셨는데 안계시니 다음에 전화를 하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 통화 내용을 들은 김대리가 부리나케 쫓아왔다. 다시 전화가 오면 충주공전 현장에 나가서 가을이나 되어야 복귀가 가능하다고 말을 하라는 것이었다. 조금 전 까지도 본 과장님을 그렇게 말하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전화를 걸어 온 여자는 그의 부인이었다. 그는 그러니까 몇 달째 집을 안 들어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몇 달은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과장님은 차장님하고 사이가 너무 안 좋았다. 하루는 차장님이 나를 불러 업무말고는 다른 것은 무시를 해버리라고도 했다. 그쯤 나는 서서히 그만 둘 생각을 했으며 다행히 81년 봄 대기업들의 공채 모집이 나왔다.
그리고 다른 직장으로 옮기고 나 2년쯤 지나서다. 종로에 롯데 내자호텔을 짓다가 보온재로 인한 화재 소식이 뉴스로 나왔다. 그 뉴스에는 내가 많이 듣던 한 분의 이름이 껴 있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당시 차장이던 분은 나중 본부장까지 되었다는 소리를 어디서 듣기는 했는데 이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당시 김대리는 은광여고 옆에 말죽거리 비닐하우스가 자기네 것이라 했으니 지금쯤은 떼 부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당시는 얼굴이 빨개지고 만 이야기였는데 그 과장님은 단골식당에서 손에 대일밴드를 부친 여인에게 야! 세련됐네. 멘스를 손에서도 하는가 봐.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뜸 한마디 했었다. 매사 걸죽하고 능청이 넘친 과장님이지만 집으로 무사귀환 하여 본부인과 백년해로 하고 있지 않을까. 바람은 어디까지나 바람, 나이 들어서는 조강지처만한 존재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는 없다. 나의 첫 직장은 내게 아쉬움만큼이나 어찌 살아야 하고 산다는 소중함에 대한 많은 산 경험을 고스란히 남겨주었다. 34년도 지난 지금 그들은 모두 내게는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 노래 처럼 모두 그리운 존재들이고 가고 싶은 그 시절의 제3 한강교 바로 건너 신사동 사거리, 잠원동 동네이다.
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