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영천 은해사
나는 어린 시절을 경주의 시골에서 보내면서 동화사보다는 ‘영천 은해사’를 훨씬 더 많이 들었다. 사월 초파일에 오백 부처님이 계시는 절에 간다는 말도 들었다. 지금보니 거조암인 듯하다.
108사 절집 답사 계획을 세우고 찾아다니는 지금은 내게 차가 없는 탓에 은해사는 멀어 보였다. 그래서 답사가 미뤄졌다. 그렇더라도 은해사는 동화사만큼은 아니지만 예전에 자주 찾았던 절이다. 내가 처음으로 은해사를 찾았을 때에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 것은 절집이 아니고 절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이었다. 자연석으로 무질서해보이도록 쌓아 올린 돌담이었는데, 어떤 돌들은 내 키보다 더 높았다. 절 앞으로는 제법 큰 개울이었고, 개울에도 이끼 낀 돌들로 묵직하게 축대를 쌓아두었다. 너무나 자연스런 모습이어서 내 기억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 담과 축대는 세월이 묻어 있어 절집을 찾는 사람의 마음을 경건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돌담은 허물어지고, 날렵하고, 새로운 모습의 담장으로 바뀌어서 속된 세상의 허세를 느끼게 해주어 실망했었다. 그 담장은 은해사를 찾아 온 지금의 나를 그때나 마찬가지로 실망하게 한다.
이번 일요일은 꽃샘 추위도 한 발짝 물러서고, 아파트 담벼락에는 봄꽃들이 얼굴을 드러낸다. 날씨가 풀렸네, 은해사나 갈까 했더니 집 사람도 그러자고 했다. 하양에서 택시를 대절하였다. 불교 신자증이 없으면 일주문 안으로 차가 들어갈 수 없어서 내려야 한다. 입장료가 3000원인데, 노인이라서 무료 입장이란다. 일주문을 지나면 절까지는 소나무 숲 속의 길이다. 예전에는 흙길이었는데, 지금은 시멘트 포장길이다. 소나무 숲은 조선시대 때도, 또 얼마 전에도 일부러 조성하였다고 하였다.
절의 역사를 보면, 신라 41대 헌덕왕이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해(809년)이다. 혜철이 해안평에 왕위 찬탈로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위로하려 해안사를 지은 것이 은해사의 창건이리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해안평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절을 지나 백흥암과 운부암으로 갈리는 곳 쯤이라고도 하고(지금은 저수지이다.), 아예 운부암의 자리라고도 한다. 지금의 절 자리는 원래의 절 터가 아니고 이건하였음으로 절의 구조가 옛 절의 형태가 아니다. 그래서 참배객이 아닌 답사팀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절이다.
지금의 은해사가 세워진 때는 중종 15년(1522)이다. 이때는 조선서 성리학이 성행하던 때라 불교의 탄압이 심했다. 조선 초기에는 왕실에서는 절을 짓고, 불교에 그토록 탄압적이지는 않았다. 고려 말에 불교의 부패를 이유로 왕조를 바꾼 유가의 선비들 입장은 달랐다. 억불정책을 끊임없이 주장했고, 한양의 절을 불 질러서 태운 일도 조선실록에 실려 있다. 유생이 절에 가서 분탕질을 한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불교 부패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저지른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려는 이념 투쟁이 아니었을까. 그 때문에 폐사의 위기에 몰린 사찰이 한 두 곳이 아니다.
이 절이 중종 때 세워진 것이 맞다면, 운부암에는 조선초기의 금동보살상이 있으므로, 운부암이 더 일찍 건립되었다. 운부암 터가 본래의 은해사 터라는 말도 일리는 있다.
불교의 사찰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가장 좋은 방법은 파계사처럼 왕실의 원당이 되어서 절의 앞날을 탄탄하게 하는 일이다. 은해사도 살아남을 길을 찾아다녔다. 운 좋게도 그 길을 찾았다. 동국여지승람의 영천조에 의하면 백지사라는 절 이름이 나온다. 오늘의 백흥암이라고 한다. 백흥암의 바로 뒷산이 인종의 태실을 묻은 태실봉이다. 이것을 이유로 태실수호 사찰이 되면서 서둘러 은해사를 창건하지 않았나 하였다. 인종을 이은 명종의 모후인 왕대비인 문정황후가 독실한 불교신자여서, 정적이었을 인종의 태실을 그대로 두었으리라고 한다. 어쨌거나 은해사는 심한 불교탄압정책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임진왜란 때도 승군이 절을 굳게 지키자 왜군이 신령 쪽으로 방향을 틀므로 불타지 않았다고 한다. 파계사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원당 사찰이 되면서 영조가 왕자시절에 파계사에 완문을 보내 은해사를 잘 돌봐주라고 했다. 영조가 왕으로 등극하자 영조의 글을 ‘어제완문’이라 하여 각별하게 보관하였다. 어느 누가 이런 절에 시비를 걸었겠는가.
헌종 13년(1847)에 큰 불이 나서 절이 거의 전소되다시피 했다. 인종의 태실을 모시고, 영조의 어제완문이 있는 이 절을 어떻게 불탄 채로 둘 수 있었겠는가. 당시의 영천군수 김기철이 자기의 봉급까지 털어서 동전 30꿰미를 절의 건립에 시주하였다. 이에 경상감영에서도 시주했고, 서울에서까지도 시주가 들어왔다. 3년 여 만에 불사를 끝냈다. 지금처럼 절을 꾸미기 이전의 모습이 바로 그때 건립한 절이었다.
은해사가 유명 사찰인데도 내 관심에서 멀어진 이유라면, 새롭게 단장한 절의 여러 모습들이 나를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일주문만 해도 그렇다. 일주문은 이름 그대로 한 줄의 기둥을 늘어세우고 지붕을 얹어야 하는데, 이곳은 앞뒤로 한 칸이어서 기둥이 두 줄로 늘어서 있다 두 개의 기둥을 옆으로 펼쳐서 지붕을 얹으서니, 이주문이라고 해야할까. 일주문은 불교의 교리적인 의미도 있는데.
요즘은 어느 절집을 찾아가더라도 새로 지은 요사체가 겹겹이 들어서 있다. 은해사는 이미 오래 전에 절을 꾸미는 일은 끝났나 보다. 산으로 오르는 길의 옆에는 절의 뒤편 쯤에 텔플 스테이를 위한 웅장한 건물이 들어선 것이 새롭다.
이 절을 유명하게 해준 것은 추사가 남긴 여러 현판 때문이다. 대웅전, 보화루, 불광의 현액이 바로 추사의 글씨이다. 추사의 생부인 김노경이 순조 16년에서 순조 18년까지 3년 간 경상감사로 지냈다. 이때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와서 현액을 썼다고도 한다. 그러나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가 풀린 64세 썼다고도 하여 어느 주장이 맞는지는 모를 일이다.
본래는 절의 현판에 낙관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절에 와서 분탕질을 하는 사람은 주로 유생이었다. 그러나 유명한 유학자가 현판을 쓴 건물은 쉽게 훼손하지 않는다. 그래서 절의 현판에 낙관이 나타났다고 한다. 정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대상황을 생각하면 그럴싸하게 들린다.
은해사는 다른 절과 비교하여 창건년대가 늦다. 그래서 다른 절만큼의 불교문화 유적이나 유물이 적다. 대신에 추사 글씨를 비롯하여 근, 현대의 역사적 사실이나 유물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탱화나 백흥암의 수미단 조각 등의 뻬어난 불교 미술품도 소장되어 있다.
운부암에 들렸다 내려오는 길에 은해사에 들렸다. 나는 여러번이나 방문했고, 또 특별하게 둘러 볼 만한 곳도 없어서 마당의 돌 위에 앉아 절을 눈으로만 둘러보았다. 주불전은 대웅전 현판이다. 집사랍은 늘 하듯이 절의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법당에 들려 기원 참배를 올린다. 마당에 나와 기와불사에 우리 가족의 이름을 올린다.
은해사를 이야기하면서, 절의 바깥 이야기를 많이 했다. 등산객들이 갓바위에서 능선을 타고 와서 돌구무(구멍)절과 백흥암을 거쳐 은행사로 내려오는 코스를 좋아한다. 나도 여러번이나 다녔다. 여기서 돌구무 절은 토속신앙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 백흥암은 여승들의 수도 사원이라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다. 예전에 수필문예대학에서 얼굴을 익힌 스님의 안내로 방문했다. 수미단의 화려한 문양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다시 그런 일이 없으리라.
주차장으로 걸어서 내려오니 하양가는 버스가 곧 온다고 하여 기다렸다.
첫댓글 은해사 말사인 거조암을 젊었을때 몇번가서 헤헤스님과 놀다오곤 했지요 거조암500나한님의 표정이 어뗗게 하나같이 다를수가 있는지 신기하던데요 그옆이나 숲에 뱀이 너무많이 우글거려서 섬찍합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