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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의 한 부분을 화두로 삼아 명상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불교에서는 에고(Ego)를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바라보나요?
무아란 작용은 있지만 실체가 없다는 뜻인가요?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지켜보고 알아차려서 소멸하는 것이 중도입니까?
불교에 대한 질문들이 많이 나와서 스님이 불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이곳 템플에서는 불교를 종합적으로 공부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특정한 종파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와서 여러 가지 의견들을 말한다고 들었어요. 선(禪) 불교가 얘기하는 것과 대승불교가 얘기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고, 대승불교 가운데에서도 정토종에서 얘기하는 것과 화엄종에서 얘기하는 것, 천태종에서 얘기하는 것이 모두 조금씩 다릅니다. 테라밧다에서 얘기하는 것도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조금씩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려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꼭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연기적 세계관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개별 존재의 집합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수많은 것들이 서로 연관된 하나라고 볼 것인가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손을 얘기할 때, 서로 다른 다섯 개의 손가락이 모여 있음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다섯 개의 손가락이지만 한 손에 결합되어 있음을 말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손가락이지만 한 손에 결합되어 있다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연기적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는데, 그 깨달음의 내용이 바로 ‘연기법’입니다. 세월이 흘러 불교가 아무리 바뀌어도 연기적 세계관을 부정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불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중도 사상입니다. 중도는 극단에 치우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사용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양극단은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였습니다. 이 두 가지 방식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시고 새로운 길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둘의 중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양극단을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쾌락주의는 욕구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고행주의는 욕구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둘 다 욕구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행위는 정반대이지만 그 뿌리는 욕구입니다. 붓다는 욕구를 따라가지도 않고, 욕구를 억제하지도 않고, 다만 욕구를 알아차렸습니다. 즉 욕구에 대해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욕구가 있구나’ 하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이런 방식은 전통 사상에는 없었던 새로운 길이었습니다. 붓다가 처음으로 발견한 길입니다. 중도의 길을 발견하자 붓다는 긴장하지 않고 편안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다만 알아차림을 유지했습니다. 붓다는 이런 새로운 길을 발견해서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이 들어있느냐가 중요한 기준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 무상과 무아입니다. 서로 연관되어 있고 연관되어 있으면서 변화한다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공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정리한 것이 무아입니다. 시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로 맺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이렇게 무상과 무아를 깨달으면, 즉 연기법을 깨달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연기법을 깨닫지 못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불교의 사상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하게 되었네요. 이런 내용들이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머리를 깎거나 승복을 입는다고 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체험하게 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자식들에 대해 깊은 사랑을 느낀다며 어떻게 하면 집착하지 않으면서 자식들을 사랑할 수 있는지 중도를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자식에게 집착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Could you address the middle path and non-attachment when it comes to strong feelings like the love and attachment I feel for my children?"
(중도를 지키고 집착을 내려놓음에 있어 제가 아이들에게 느끼는 깊은 사랑이나 집착과 같은 큰 감정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본인이 생각할 때는 ‘깊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냥 본인의 욕망일 뿐입니다. 붓다가 말한 사랑이란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식이라 하더라도 나와 아이는 서로 다릅니다. 아이의 어떤 행동과 말도 나와 다른 상태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존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이해입니다. 이해에 기반을 두었을 때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나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이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 되면 미움으로 바뀝니다.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 상대의 어떤 행동에도 미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자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 아이가 저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겠다 싶으면 아이에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얘기하면 됩니다. 내가 말한 대로 아이가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낸다면, 그것은 내 생각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그렇게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는 한 번 가르쳐서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 번 얘기해야 됩니다. 꾸준히 아무런 미움이 없는 상태에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만약 내가 보기에 옳지 않은 행동을 할 경우에는 내가 그것을 도와주지 않으면 되지 나무랄 일은 아니에요.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많은 도움과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드릴게요. 식사를 준비해 놓고 아이에게 와서 먹으라고 하는데 오지 않을 경우, 우리는 몇 번 부르다가 화를 내거나 음식을 치워버립니다. 아이가 나중에 와서 밥을 달라고 하면 아이에게 야단을 칩니다. 그러고는 또 밥상을 차려 줍니다. 여기에서 혼란이 생깁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야단을 치면 마음에 상처가 생깁니다. 또 시간이 넘었는데도 밥을 차려주면 아이의 버릇이 나빠집니다. 그 결과 아이에게 상처도 주고, 버릇도 나빠지게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선 아이에게 밥을 먹으라고 알려주고 만약에 안 오면 치운다고 얘기를 합니다. 이때 야단은 치지 않아야 합니다. 대신에 아이가 나중에 밥을 달라고 할 때도 밥을 차려주지 않아야 합니다. 울고불고해도 내버려 두는 거죠. 야단을 치면 상처가 되니까 야단을 치지 않는 겁니다. 아이가 우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게 아님을 아이도 깨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밥을 찾아 먹든지, 굶든지 해야 합니다. 엄마가 보기에는 마음이 아프지만 그것이 아이에게는 큰 배움이 됩니다.
엄마라면 내 감정을 중요시하면 안 되고 아이가 어떻게 바르게 자라느냐를 더 중요시해야 합니다. 아이가 올바르게 자라는 데에 목표를 둬야 진정한 부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비심입니다. 이런 관점에 서면 치우칠 일이 별로 없어요.
아이에게 교육상 필요하다면 밥을 안 줄 수도 있습니다. 이때 나는 먹고 아이는 안 주는 것은 부모로서 자식을 위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징벌에 해당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징벌해서는 안 돼요. 그래서 본인 자신도 굶어야 합니다. ‘엄마가 몸이 아파서 오늘 저녁을 할 수가 없다. 네가 밥을 해서 먹어라’ 이렇게 말할 때 아이는 야단도 맞지 않고, 또한 올바른 습관을 갖게 됩니다. 부모는 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게만 하라는 것은 교육상 좋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어떤 것을 깨우쳐 주려면 나도 함께 굶는다든지, 아이의 어려움을 부모도 똑같이 겪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럴까 저럴까 하는 치우침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을 마쳤습니다. 템플에서 스님에게 우롱차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오늘 강연 너무 좋았습니다. 시간을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강연을 마치고 나니 오후 1시 20분이 되었습니다.
다시 김용필 님의 댁으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준비해 주신 권은경 님에게 스님의 책을 선물하고 인사를 나눈 후 오후 3시 30분에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차로 1시간을 이동하여 강연장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샌디에이고 카운티의 해안 마을인 엔시니타스(Encinitas)에 위치한 공립 도서관(Encinitas Library)입니다. 지역 주민을 위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과 교육 워크숍이 열리는 곳인데 오늘은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을 위해 장소를 빌려 주었습니다.
스님은 강연장에 도착한 후 도서관을 한 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태평양의 멋진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도서관 내부에서도 바다가 보였습니다.
봉사자들은 일찍부터 곳곳에서 참석자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일찍 와서 책을 구입하는 분들도 있고, 질문을 신청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오후 5시 정각에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을 함께 본 후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6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하자 모두 큰 박수로 스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번 해외 일정은 한 달 기간인데, 그중 절반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인도적 지원 활동을 했습니다. 주로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목마른 자에게는 먼저 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을 마실 수 있고,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옷을 입고 사는데도 여전히 괴롭다면 그것은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괴로움이 물질적인 것이 부족해서 생긴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불교에서는 '어리석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이런 어리석음 때문에 일어납니다. 어리석음을 깨우치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착한 사람이 되라거나 좋은 일을 하라고 말하기보다,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이 나를 괴롭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괴로움과 스트레스가 사라지게 됩니다.
담마 토크는 불교 사상이나 불교 교리를 얘기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어려움에 직면해서 괴로울 수가 있는데 대화를 통해서 그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것을 담마 토크라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도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꺼내놓고 함께 대화를 해보면 됩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즉석 질문도 받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여섯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고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렵다며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공감하고 관계를 맺는 것이 힘듭니다
"Since I was a kid, I always felt that I was a little different from other people and that I don't feel as much empathy or connection as I believe other people do. It can make it very difficult to make decisions that I think are moral; everyday things like whether to eat meat or connecting to other people, how to relate to them emotionally, how to talk to them, and how to help them in times of need. When I try to help and be nice, I find it to be very exhausting. I'm wondering if you have any advice on how I can cope with this lack of empathy or how I could maybe not feel so exhausted or burdened whenever I try and do what I know is right."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남들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남들처럼 공감이 잘 안 되고 사람들과 연결감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도덕적인 결정을 해야 할 때, 예를 들어 고기를 먹을 것인지 아닌지 또는 남들과 소통하고 감정적으로 공감하고 돕는 것이 어렵습니다. 게다가 남을 도와주려고 해 보면 매우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공감을 하지 못하는 문제를 대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스님의 조언이 있을까요? 남에게 도움을 줄 때 덜 피곤하고 덜 부담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그냥 생긴 대로 사세요. 그렇게 생긴 것을 어떡합니까? 자라는 과정에서 나의 정신적인 사유체계가 그렇게 형성된 것이니까 그대로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꼭 공감을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만 꼭 명심하시면 좋겠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어떤 대상이 까맣게 보이는데 누가 그 대상을 희다고 해도 ‘저 사람의 눈에는 희게 보이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게 어떻게 희냐? 검은색이지!’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 ‘네 눈에는 희게 보이는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또 다른 예로 나는 신을 믿지 않는데 누군가는 신을 믿는다고 합시다. 그럴 때 ‘너는 신을 믿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뿐입니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에는 공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어떤 얘기를 하든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인정하면 됩니다.
둘째, 조금 한 발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하는 겁니다. ‘아내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상사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는 것은 공감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공감력이 높은 사람을 보고 나도 그 사람처럼 공감력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마치 고양이가 ‘나도 호랑이처럼 되어야겠다’ 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호랑이는 호랑이이고, 고양이는 고양이일 뿐입니다. 물론 질문자가 변화를 원한다면 연습을 할 수는 있어요. 예를 들어 100m 달리기를 하는데 나의 기록이 25초이고, 상대편의 기록은 20초라고 해봅시다.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나도 조금 더 빨리 달리고 싶다면 연습을 하면 됩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목표를 너무 높게 잡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실망을 하게 되고, 그것이 쌓이면 결국 열등의식을 갖게 됩니다.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은 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목표를 너무 높게 잡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항상 자신감이 없고, 자기를 믿지 못합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괜찮습니다. 100m 달리기 기록을 25초에서 24초 정도로 당기는 것은 한 3개월 정도 연습하면 가능합니다. 그럴 때 성취감이 생깁니다. 그 성취감을 딛고 ‘그럼 1초 정도 더 당겨볼까’ 하고 다시 도전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실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잘 되려고 욕심을 부리는 데서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상태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목표를 약간 더 높게 설정하고 도전하면 됩니다. 그럴 때 자존감이 생깁니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정신병동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환자들의 언어폭력과 성추행이 빈번해져 힘듭니다. 직업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과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고민입니다.
저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우울증 환자에게 명상을 적용해 보았으나 어떤 환자에게는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트라우마가 있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명상을 어떻게 도입해야 하나요?
저는 야생동물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왜 동물들과 달리 인간들은 환영, 착각, 망상이라는 고통을 느낄까요?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혼자서 저를 키우셨습니다. 그로 인해 생긴 빚을 갚으면서 본인을 희생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오래 살지 못하실 텐데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마지막 질문자는 신앙생활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요. 신의 부름을 받는 길을 가기 위해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신의 부름을 받기 위한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My question is about walking a spiritual path. Being someone like yourself, who has devoted their life to walking the spiritual path, I understand there are sacrifices that need to be made. In terms of seeking guidance on this path, walking in faith, and walking to seek a higher calling, how would you describe a method of connecting with either spirit guides, a higher self, or a God, in a more direct way? In a more concrete, tangible way that is more coherent, at least to the human mind, and more easily understood and received from that source?"
(제 질문은 영적인 길에 관한 것입니다. 저도 스님처럼 평생을 이 길에 헌신해 왔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희생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 길을 걸으며 지침을 구하고, 믿음을 바탕으로 더 높은 소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영적 안내자나 더 높은 자아, 또는 신과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인간의 입장에서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이 있으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높고 낮음도 없고, 어떤 부름도 없습니다. 그냥 내가 선택을 한 것일 뿐입니다. 희생도 없습니다. 누가 희생된다는 거예요? 어떤 여성이 저에게 결혼하자고 했는데 제가 승낙을 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 여성이 희생된 겁니까? 제가 출가할 때 어머니가 반대했다고 해서 어머니가 희생된 겁니까? 제가 어머니를 때렸습니까? 어머니의 돈을 훔쳤습니까? 성추행을 했습니까? 사기를 쳤습니까? 욕설을 했습니까? 제가 어머니에게 어떤 잘못을 했습니까?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어머니가 희생된 겁니까? 만약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만 내가 행동한다면 나는 자유인이 아니고 영원한 어머니의 노예입니다. 내가 가는 길 때문에 누군가 희생된다는 건 없습니다. 성인은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결혼은 상호 간의 사회적 약속입니다.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는 것이 문제이지, 서로 합의해서 약속을 깨는 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누가 희생을 했다’, ‘더 높은 곳이다’, ‘부름을 받았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마시고, 결혼해서 살아가는 길 외에 다른 길도 있다면 그 길을 그냥 가면 됩니다.
제가 승려의 길을 간다고 해서 여러분보다 더 높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과 조금 다른 길을 간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서로 다른 이름을 갖고 있듯이, 제가 가는 길이 더 높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길이 내가 더 만족할 수 있는 길이 될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이 가는 길에 만족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고 합시다. 제가 그 집에 가보니까 너무 부러워서 '나도 결혼을 한번 해볼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그 사람이 더 자기 일에 만족하고 있는 겁니다. 반대로 여러분들이 저를 보고 '스님처럼 혼자 사는 것도 괜찮네. 나도 스님이 한번 되어볼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여러분들의 삶이 저보다 못한 거예요. 지금 여러분과 저는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서 괴롭다고 저한테 늘 하소연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경쟁에서 조금 우위에 있습니다. 만약 제가 혼자 사는 게 힘들어서 여러분께 상담을 한다면 여러분들이 조금 우위에 있는 것이고요. (웃음)
결혼도 여러분들이 했죠. 자식도 여러분들이 낳았죠. 취직도 여러분들이 했죠. 사업도 여러분들이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모두 처음에는 자기가 좋아서 시작했잖아요. 그런데 왜 그 문제를 저한테 와서 자꾸 묻습니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자기 일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거예요. 부부간에 갈등이 있다면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 하고 연구를 해야죠.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면 아이를 나무랄 것이 아니라 ‘왜 아이가 이럴까’ 하고 연구를 해야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연구를 하지 않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여러분들은 삶에 대해 게을러요. 그래놓고 저한테 해결책을 묻습니다. 제가 해결책을 얘기해 주면 '아! 그렇구나' 하고 좋아합니다. 여러분들이 20년 동안 경험한 내용을 그에 대해 아무런 경험이 없는 저한테 물어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더 정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여러분들은 도대체 20년 동안 뭐 한 거예요?
더 높은 길은 없습니다. 그냥 다른 길이 있을 뿐입니다. 많은 길이 있고,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과 다른 길을 가는 게 좀 망설여졌지만 결과적으로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는 과학자가 되려고 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처음에는 많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너무 많이 반대하셔서 그게 늘 부담이 됐습니다. 제가 속한 한국 불교계가 너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이 또한 부담이 됐습니다. 저도 이런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런 어려움의 책임이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막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것도 다 저의 문제입니다. 당시에는 어려웠지만 그것을 다 극복하고 나서 돌아보면 모두 자기 자신의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 가지 길 중에서 본인이 선택을 하십시오. 저한테 물어본다면 저야 당연히 제가 가보고 좋았던 길을 권유할 수밖에 없죠. 어떤 사람이 의사에게 갔더니 운동이 부족하니 운동을 하라고 처방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축구 선수한테 '어떤 운동을 하면 좋겠어?' 하고 물으면, 축구 선수가 뭐라고 하겠어요? 축구하라고 하겠죠. 농구 선수한테 물어보면 농구하라고 하겠죠. 이때 한 사람은 축구하라 하고, 한 사람은 농구하라고 하니 도대체 뭘 해야 되느냐고 물을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길을 가도 좋지만, 저한테 묻는다면 출가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부님한테 물으면 신부가 되라고 말하겠죠. 그러나 그것이 헷갈릴 이유는 없습니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큰 박수와 함께 대화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질문자들과 참석자들에게 다가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외국인들에게는 직접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강연이 어땠어요?”
“아주 좋았습니다.”
“무엇이 좋았나요?”
“스님의 답변을 듣고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녁 7시까지 도서관을 비워주어야 해서 곧바로 무대에서 책 사인회를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사인을 받으며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The lecture today was very impressive. Thank you.”
(오늘 강연이 무척 감명 깊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책 사인회를 마치고 다 같이 강연장을 뒷정리했습니다.
스님은 강연을 준비한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샌디에이고, 파이팅!”
강연을 총괄한 김성민 님과 운전 봉사를 해준 이창석 님에게는 스님의 영어 번역 책을 선물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저녁 7시에 샌디에이고를 출발하여 오렌지카운티로 향했습니다.
차로 1시간 20분을 달려 저녁 8시 20분에 오렌지카운티에 위치한 고본화 님의 댁에 도착했습니다. 고본화 님 부부와 인사를 나눈 후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북미서부 순회강연 중 여섯 번째 순서로 로스앤젤레스 동쪽에 위치한 클레어몬트 맥케나 칼리지(CMC)에서 현지 미국인을 위한 영어 통역 즉문즉설 강연이 열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