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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50주년 기념, 보길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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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기러기 모임에서 봄 가을에 간헐적으로 떠나는 여행은 흔한 일이었지만 올해 2018 년도 봄 여행은 특별했다. 1968년 전남 광주에서 까까머리 단발머리로 만났던 사람들이 아직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 그런데 그 세월이 50 년이라는 것.
서울에 거주하는 기러기 일곱 명, 광주지역 기러기 세명이 참가했다. 2018 년, 5월 26일 오전 9시 40분, 수서역 SRT 호남선 목포행 승차 대기실에 수남, 동원, 동희, 영신. 상숙, 영애, 그리고 나 일곱 명이 차질 없이 제시간에 도착했다.
따지고 보면 기러기 단체 모임으로 초고속 열차 SRT를 이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좋은 자리를 골라 배정하지 못한 총무의 불찰로 우리 일곱 명은 출입문 맨 앞쪽 (그래도 화장실은 없었다)부터 코를 박듯이 붙어 앉았다. 상숙이 짝 없이 혼자 앉게 되었다. 잠시 두 시간 동안이지만 그 자리에 상숙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아리따운 여성이 앉게 될까 말까 우리들 모두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는데... 결국 거구의 조폭 스타일 젊은이가 어기적거리며 나타나 우린 모두 으윽! 소리를 질렀다. 아무렴, 행운이 그렇게 쉽게 나타나면 되갔어?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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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즐거움에 관하여 늘 음미하면서 살아가는 편인 영애가 주섬주섬 누룽지를 꺼냈고 상숙은 까페라떼를 한 개씩 돌렸다. 이 와중에 영신은 수첩을 꺼내들고 깨알 같은 글씨를 읽기도 하고 뭔가 쓰기도 했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자꾸만 기억력이 희미해져가기 때문이라 했다. 나 또한 나이가 들어가고 기억력이 희미해져 가지만 붙잡아야 할 무언가를 위해 영신처럼 애쓰지 않는다. 작은 짜투리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영신의 열공모드, 성실성을 반에 반이라도 본받자, 나는 남몰래 반성했다.
열차는 지루할 틈 없이 나주역에 도착했다. 홍식, 유선 춘순이 승용차 세대를 대동하고 우리를 반겼다. 아담한 나주역 광장에 서서 올려다 본 나주의 하늘은 더 할 수 없이 맑고 푸르렀다. 아직은 오월, 연두의 향연이 막바지 초록을 행해 마구마구 치닫는 계절, 우리들의 가슴도 덩달아 부풀어 올랐다.
지금, 열사람의 청춘들이 이박삼일의 시간을 운명으로부터 조건 없이 선물 받았다네.
아아, 가자!
어디로든 가자!
즐거움과 웃음과 환한 햇살이 있는 곳이라면
그리고 우리들 추억에 빠질 수 있는 곳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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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첫날 밤 숙소, 보길도로 향하자면 해남을 들러야 했고 해남 가는 중간 길목에 강진이 있었다. 강진은 산과 바다와 들이 가까이 있어 식재료가 풍부해서인지 음식이 참 맛깔스런 고장인 것 같다. 우리들의 여행 첫 식사로는 강진의 무지개 식당이 당첨되었다. 그곳 주인은 음식 맛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다 만든 콩나물 무침도 과감하게 엎어버린다는 소문이 있는 장인 정신의 소유자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서울에서 온 나그네, 광주지역에서 온 나그네의 입맛을 모두 단숨에 사로 잡았다.
그 다음 우리의 발길이 향한 곳은 해남, 두륜산 줄기에 위치한 대흥사였다. 나말 여초 시기에 국토의 남단, 지방의 절집으로 창건되어 미미하던 대흥사가 일약 변신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1592-1598) 이후 서산대사 (1520- 1604) 가 자신의 의발을 두륜산에 둘 것을 유언하면서부터라 한다.
그리고 또 우리가 기억해야 될 분은 대흥사의 초의선사 ( 1786-1866) 인 것 같다. 그는 불교의 굴레를 벗어 학문으로서 선교를 연구하고 유학과 도교에 까지 지식을 넓혔으며 차 문화를 일으켜 동다송이란 명저를 남겼고 실학정신을 실천했다. 또 그의 평생지기가 추사 김정희였다 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 는 북학파의 실학자로서 예술과 학문에 기수가 되어 기고만장한 세월을 보내다 50 대에는 정변으로 인해 제주도 귀향길에 올랐다. 대흥사 대웅보전의 원교 이광사 글씨 현판 떼었다 붙이기 해프닝에서 한 사람의 인생과 예술에 관해 생각해본다. 제주도 유배시절 세한도를 그리며 뼈속 깊은 한기를 견디어냈을 역경이 없었다면 한 차원 높아진 그의 인격과 예술도 불가능했을 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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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해창 주조장에 들렀다. 일제 강점기 시대 때 일본인에 의해 지어졌다는, 정원이 아름다운 그곳은 한국인 주인으로 넘겨져 지금도 프리미엄 12 도 짜리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었다. 요쿠르트처럼 걸쭉하고 맛있는 먹걸리를 시음도 해보고 아름다운 정원도 거닐어보다가 차후 우리들 여행 분위기를 책임질 막걸리를 한보따리 사들고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영애는 그곳 웅덩이에서 짙푸르게 자라고 있는 야생 물수세미 몇 줄기를 기념으로 비닐봉지에 담아왔다.
그리고 해남 땅끝 마을에서 비로소 보길도행 배를 탔다. 배는 노화도까지 운행하고 노화도와 보길도는 섬과 섬을 연결시키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숙소를 찾아가는 길에 바닷가에 늘어선 많은 집들을 보았다. 낡고 허름한 어촌마을이 아니었다. 비슷비슷하게 규격화된 집들이 조금 아쉬웠다. 우리의 욕심은 교통이 편리하고 도시화된 보길도가 아니고 그 옛날 고산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를 읊으며 은둔했던 그 시절의 자취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기만을 바랬던 것 같다.
드디어 보길도의 우리들 숙소 보옥펜션에 도착했다. 작은 섬들이 내다 보이는 아담한 이층방 두 개가 배정되었다. 그곳에서 저녁식사를 했는데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갖가지 특이한 반찬들이 올라와 있었다. 모두 간단히 씻고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 여행의 A에서 Z까지 꿰고 있는 유선이 미리 준비해온 수박을 들고 우리는 한 자리에 둘러 앉았다. 도란도란 열심히 얘기를 나눴다. 근데 그때 우리가 무슨 무슨 얘기를 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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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우리는 숙소 근처를 산책하며 새로운 풍광을 눈에 혹은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육지 최남단 해남에서도 더 아래쪽에 있는 섬인지라 그곳의 나무나 꽃들 모습은 평상시 우리 눈에 많이 익은 게 아니었다. 약으로도 쓴다는 황칠나무, 바닷가 덤불의 인동초가 특이했다. 언젠가 김대중 선생이 좋아한다고 알려진 그 인동초인 것 같았다. 식물 이름이나 특성에 관해서는 거의 박사님이라 해도 좋을 홍식이 곁에 있어 묻고 대답해주고 우리의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승용차로 보길도 일주...보길도에서 한번 둘러봐야할 곳은 윤선도 원림, 세연정, 땅끝 전망대, 공룡 해변,예송리 갯벌 해변 정도였다.
고산 윤선도(1587-1671)는 해남에 있을 때 병자호란 소식을 듣고 강화도에 도착했으나 인조는 이미 남한산성에서 적에게 항복한 후였다. 이에 고산은 세상을 버리고 제주도로 가는 길에 보길도 경치에 취해 이곳에 머물러 ‘어부 사시사’ 등 시가를 창작하며 자연과 산수를 노래하다 낙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한다.
우암 송시열 글씐 바위에도 가 보았다. 바닷가 이 바위에 씌여진 시문은 조선 인조-숙종 때의 대 정치가이자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1607-1689) 이 사망하던 해( 숙종 15년 1689) 지은 것이다. 당파 싸움으로 제주도 귀향길에 올랐는데 풍랑을 만나 며칠 백도 부근에 머물며 자신의 심경에 관해 읊은 시가 그곳 바위에 적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통상.... 거물급 정치인들이 중앙 무대에서 정치하며 주로 당파싸움으로 치고 박고 싸우다가.... 어느날 문득 패자가 된 사람들은 모두 제주도를 향하여 차렷! 그리고 가까운 장래의 화려한 패자 부활전을 꿈꾸며..... 강진 지나, 보길도 찍고, 제주도로.... 돌아돌아 대전, 블루스더란 말이냐? 200년 전 300년 전 이땅의 상황을 헤아려보려는 내게 심히 필요한 것은 과도한 상상력! 그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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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길도를 떠나오는 길..... 육지에 당도하여 해남 땅끝 마을 시외버스 정류장에서는 가히 눈물, 콧물, 손수건 없이는 볼 수 없는 이별의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으니.... 떠나가는 처자역에는 천사, 옆구리에 보길도 특산품 전복 보퉁이를 움켜쥔 채 우리의 주인공은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한사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거디어따. 서울 하고도 강남, 현대 부동산 사무실에서 그녀를 급히 찾는다는 전갈이 방금 당도했다지 않은가 “나, 더 놀다가고 자픈디~” 처자는 연신 중얼거렸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는 무정한 버스는 그녀의 가녀린 몸을 밀어 넣고 “나 잡아부우아라, 붕붕...” 매연을 뿜으며 저멀리 달아나고 말았던 거디어따.
남은 우리는 이별의 후유증으로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수습하고 둘째 날의 숙소, 장흥 우드랜드에 무사히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일제 시대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전통의 격조 높은 해창 막걸리를 나 또한 비주류 아닌 주류 소속 선수로 마음껏 마셨다. 안주는 물론 전복회였다.
술 기운과 여독으로 한 명 두 명 쓰러져 잠자리에 들었지만 우리의 베스트 드라이버 겸 명 가이드 유선양의 독무대는 바로 그때 그 시점부터였다. 화투와 함께 동전꾸러미가 짠하고 나타났다. 고스톱의 세계,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세계, 얼마나 큰 즐거움의 세계인지 나로서는 잘 가늠할 수 없는 세계가 꿈결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유선이와 함께 그라운드를 누빈 선수는 상숙, 동희, 동원(맞나?) 이었다. 유선이의 깔깔대는 뒤집어지는 웃음소리가 5 분 간격으로 들려왔다. 깊어가는 밤 순도 100 프로 짜리 즐거움을 햇살 아래 분수처럼 눈부시게 뿜어내는 친구의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는 잠이 들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잠, 깊고 푸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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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우드랜드에서의 이튿날 아침은 가히 낭만의 계절이었다. 홍식이 담장에 피어난 활짝 핀 넝쿨 장미를 한 송이 꺾어 하얀 사기 컵에 살포시 담아 여학생 방에 가져온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선물에 여학생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홍식이 저러엏게 멋진 남자였어?” 나는 정신이 혼미해져 잠시 쓰러질 뻔 했다. 이 소식을 쪼르르 남학생 방에 전하니 “홍식이는 앞으로 왕따시켜야겠네” 라는 강경파와 “홍식이는 앞으로 꽃 당번을 시키자” 라는 온건파로 의견이 나뉘었다 한다.
그곳에서의 아침 식사는 한 마디로 여학생들의 정성이었다. 강진 음식 장인들의 손맛에야 비할 수 없었겠지만 여학생 세 사람은 쌀을 씻고 전복을 손질하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맛있고 푸짐한 전복죽을 만들어냈다. 유선이 담아온 양파 장아찌와 김치, 춘순이가 가져온 김과 함께 우리는 두 세 그릇의 전복죽을 먹어 치웠다. 누군가, “우리 자식들 세대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절대로 여자들 음식 못 얻어 먹는다~” 라고 말했다. 맞아, 남학생, 니들은 이 대목에서 복 받은 거 인정해~! 아니라고?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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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랜드 뒤로는 억불산이라는 500 여미터의 가파를 산세를 자랑하는 산이 있었다. 전복죽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억불산을 좀 올라가봐야겠다 결심하는 순간 하늘에서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인데 뭐 오다 말겠지 그러면서 우산을 챙기는 둥 마는 둥 우리는 길을 나섰다.
허약한 도시인들을 위해 산 정상까지 모두 데크로 이루어진 등산길이었는데 비가 오니 그것도 만만치는 않았다. 올라갈 때 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하산길이 문제였다.
비는 내리고 발밑은 미끄럽고... 이런 위급한 순간에 동원이 내게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튼튼해서 무거운 우산을 이쪽 손 저쪽 손 번갈아 들어가며 혹여라도 “네가 한번 들어부아~!”이런 윽박지름도 없이...그런데 이 대목에서 확실히 밝혀둘 것이 있다. 노력 봉사는 동원이 했느나 우산은 엄연히 홍식거라는 것! (이건 중요한 문제라고 홍식이 내게 틈나는 대로 주지시켰다) 동원이 신사는 신사였다. 아참 그리고 미투운동에 저촉되는 행위도 없었다. 그림자처럼 계속 우리 뒤를 따라와는 상숙의 존재감에 쫄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동원은 그 부분에서 참 잘했어요 별 다섯 개를 받았다.
그런데 춘순, 동희, 영신 홍식으로 이루어진 한 조가 늦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이쪽저쪽 돌려보며 우리는 발을 동동 굴렀다. 뒤늦게 도착한 그들의 사연을 들어본즉... 하산 어느 지점에서 지름길이라 생각해서 접어든 길이 아불싸, 영원히 목표지점에서 멀어지고 있더라는 야그였다. 결국 총들고 작전을 준비하는 군인들과 맞닥뜨렸다지 않은가?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에 춘순이가 홀연히 지도자가 되어 여차지차 지차여차 쏼라쏼라 군인들과 담판을 짓고 마침내 세 사람은 군인차 까지 얻어 타고 유유히 우리 숙소 입구까지 입성할 수 있었다한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겠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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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해프닝 때문에 예정보다 늦은 체크아웃,...이제 SRT 시발점 나주를 향하여 go, go!... 원, 투, 쓰리, 세대의 승용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밀조밀 아기자기 끝없이 펼쳐지는 남도의 들과 해안을 달렸다. 또 강진만의 시원스럽고 넓은 갯벌을 감상할 수 있었다. 똑같은 경치라도 누구랑 어느 시기에 감상하는 가에 따라 느낌이 크게 다르다. 지난 가을 찬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좀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기 까지 했던 강진만의 풍경이 오늘은 초록의 따뜻함에 싸여 아늑하고 아담하기까지한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또 조선 시대의 삼대 정원의 하나로 꼽힌다는 백운동의 별서정원도 감상했다.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특징은 주변의 경치를 자신의 정원으로 불러 들인다는데,,, 그 원칙에 아주 잘 들어맞는 곳인 것 같았다. 월출산에서 출발한 심심산골의 거대한 물줄기가 거의 평지에 이르른 이곳에 와서도 아직 생명을 다 하지 않은 곳, 그래서 그 물줄기가 작은 폭포로 정원을 휘감아 돌 수 있는 그 지점에 정원을 만들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리에 매우 예민했던 게 아닌가 싶다. 강진의 다산을 화들짝 놀라게 했던 그 풍경은 그러나 세월의 무게에 못이겨 무너지고 훼손되고 빛이 바래가고 있다. 그 시절을 다시 회복해내려는 복원사업 못지 않게 우리들의 상상력 또한 중요한 게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나주역에 도착하여 열차 출발시간을 카운트 다운 하고 있는 시점에 갑자기 나주에 살고 있는 제평이 나타났다. 운영하고 있는 사업 때문에 잠시도 사업체에서 벗어날 수 없어 우리 팀과의 여행 합류 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었던가 싶다. 그래도 잠시 얼굴 볼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 속 우정은 늘 함께 있었다고 그 징표가 여기 있다고 말하듯 제평은 우리에게 큼직한 배즙 상자를 내밀었다. 만남과 헤어짐의 인사를 거의 동시에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재빠르게 배즙 한 웅큼씩을 여행가방속에 밀어 넣었다.
마지막 하산지점 나주.... 어떤 사람은 서울로 어떤 사람은 광주로 또 나주로....
우리는 마침내 황홀한 선물 2박 3일을 모두 소비했다.
기러기 50 주년 기념 보길도 여행,
아직 우리들의 봄날은 가버리지 않았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싶었던 시간들
이후로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만 같은 2박 3일
짧지만 짧지 않은 기인 시간이었다.
첫댓글 한때 익숙했던 길이 이렇게 험난하고 더듬거릴줄이야...
이 길이 맞는거야?
같은시간 같은 풍경을 보고도 그 느낌과 감동을 섬세한 필치로 이렇게 생생하게 드러낼수있다는 것, 가히 강작만이 할 수있는일일쎄. 글을 작성하기위해 많은 시간과 마음을 써 주심에 감사합니다.
그렇지? 고 세월이라는 녀석때문이야..... 거구의 조폭은 다름아닌 LG야구선수였어. 저 거구의 무거운 몸으로 어떻게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선수가 될수있을까....
카페에 들어오는 것이 왠지 낯설기만하네요...50년이나 됐다니 세월 그놈 참 빠르기도 하지요...그날이 그날이겟지만 50이라는 숫자를 특별하게 기념해놓는 것도 훗날 돌이켜본다면...'특별'하게 다가오지않을지??? 필력좋은 강작님 덕분으로 50주년 보길도-장흥 2박3일 짧은여정이 새록새록 기록으로 남길수 있어 너무나 다행.감사감사.
맛짤스러운 강작이 있어서 참 좋구나! ! 다음엔 목포에서 배타고 제주도 숲속을 걸어보자. 5월 말, 영실의 철쭉도 좋고 사려니 오름의 삼나무도 좋더라...숙소는 내가 책임할께. (우체국 수련원 이용).우리의 청바지와 원더풀!
보길도 보옥 민박집 앞 몽돌 (공룡알) 바닷가의 인동초 꽃향기와
글씐바위 에워싼 하얀 다정큼 나무 꽃향기도 기억 하세요
눈 호사와 코 입 모두 호사 하였습니다
장미 향기도 여전하지요 ?
그저 감사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