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하얀 세계 속에 날개를 펼친 네가 있어.'
'하지만 그 날개는 검고 어두운 운명에------그대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아.'
'도와주고 싶어, 구해주고 싶어, 내가 할 수 있다면.'
만일 섀도우 갤럭티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들이 초래한 대우주적인 재앙이 아니었다면 하얀 달의 황녀이자 장래
태양계를 통치할 고귀하고 우아한 여성이 고작 변경의 별똥별에 지나지
않는 일개 세일러 전사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리도 없을 터.
츠키노 우사기와 세이야 코우.
평화로운 일상과 행복이 계속되었다면 그 생의 곡선이 겹쳤을 리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은하의 그림자로 인해 파멸을 맞으면서 마주치게 되었고,
신분과 입장을 넘어선 평등한 관계로 만난 두 사람은 예전처럼 행복하고
외롭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들이 마주칠 무렵, 세이야 코우는 같은 모성에서 도망쳐 나
온 두 동료와 함께, 섀도우 갤럭티카에게 살해당한 동포들과 생사불명이 된
프린세스로 인한 타오르는 거대한 복수심을 품고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섀도우 갤럭티카에 대항하며 우주 각지를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상대와의 전력 차이가 너무 컸지만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정처없이 별똥별로서 우주를 돌아다니며 가능한 한도 내에서 전투
를 계속하던 그들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들이 찾고 있던 프린세스가 발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섀도우 갤럭티카에 맞설 수 있을지도 모르는 전설의
힘에 대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
***
세이야 코우와 그 동료들, 세일러 스타 라이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세일
러문의 행동은 지나치게 이상했다.
엄밀히 말해서 섀도우 갤럭티카든 그들이든, 지구와 태양계의 기준에선 둘
다 침입자에 지나지 않으며 경계의 대상이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세일러문은 그들을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같은 동지로 삼으려 했다.
지나치게 순진하다.
너무도 생각이 없는 무책임한 행동이다.
그들은 우주를 돌아다니면서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너무도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섀도우 갤럭티카에 의해 멸망하는 별들의 종말은 언제나 똑같았
다. 자신의 별을 지키겠다고 일어선 자들이 무력하게 죽어간 것만이라면 차
라리 장렬하게 산화했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잔혹한 결말보다도 더한 것들이 넘쳐났다.
그들 중 대부분이 자신의 목숨을 위해 배신하고 자신의 별을, 어제의 친구,
가족, 자식, 부모를 향해 칼날을 돌렸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목숨은 누구에게라도 소중한 것이니까. 그들의 행동에 대
해서 비난이야 할 수 있지만 최소한의 이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목숨 이전에 자신의 이득을 위해, 하찮은 질투 때문에 배신한 자들
도 존재했다.
자신이 태어난 별이 죽음의 불길에 싸여 처참하게 멸망해 가는 것을 보면서
도 그 자신이 지닌 신분과 힘을 간직하기 위해서, 자신보다 더 강하고 뛰어났
던 존재들을 구둣발로 짓밟아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추악한 욕망을 충족시키
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어갔다.
몇 번이나 배신당했던가.
함께 섀도우 갤럭티카에 맞서며 동료가 되겠다고 일어선 자들이 등 뒤에 숨은
칼날에 죽어가는 비참한 꼴을 얼마나 더 보아야 했을까.
지구에 도착할 즈음 세일러 스타라이츠는 인간을 마음 속 깊이 불신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동료들은 이 시점에서 그녀를 앞으로 닥쳐올 섀도우 갤럭티
카와의 처절한 싸움엔 적당하지 않은 존재로 생각했으며, 미끼나 방패막이 정
도로나 쓸 수 있으리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녀와 가장 가까이서 함께 시간을 길게 보내며 수 차례의 전투를 겪
었던 세이야 코우의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그녀는 결코 생각없이 믿는 것이 아니었다.
세일러문은 그렇게 타인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강한 것이었다.
***
싸움은 날로 격화되었다.
섀도우 갤럭티카의 간부들은 하나 둘씩 지구를 향해 내려왔고, 강대한 힘을
이용하여 자유자재로 지구에 스며들어오는 그들의 공격을 사전에 막아낼 수
있는 방어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운명의 날이 닥쳐왔다.
유원지에 나타난 섀도우 갤럭티카의 공격을 평소처럼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던 츠키노 우사기는 친구들과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언제나 친구가 많구나. 그대의 찬란한 광채 때문인 것인가."
갑작스럽게 들려온 고혹적인 목소리에 츠키노 우사기는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그녀의 바로 앞에 찬란한 황금 갑주를 두르고 있는 여성이
홀연히 서 있었다. 마치 저 하늘 위의 타오르는 태양처럼 불타는 금발이 잘 어울려
금속의 갑옷조차도 감출 수 없는 화려한 미모를 뽐내고 있는 요염한 여인이었다.
인간의 선혈을 담은 것 같은 진홍빛 두 눈은 고귀하고 우아함을 드러내면서도
한없이 차가워서 그 눈빛을 받은 자 모두를 공포에 질리게 할 것만 같은 두려운
힘을 쏟아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
우사기가 가까스로 입술을 열자, 여인은 유혹어린 붉은 입술에 웃음을 띠며 마
치 악수를 청하듯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 ■■■■■■■■■■■■■■■■■■■■■■■■■■■■■■■■■■■■■■■■! ! ! !
삽시간에 여인의 몸으로부터 황금빛 광채가 피어오르며 광포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지상에서 또 다른 작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
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것을 본 츠키노 우사기는 반사적으로 양팔을 내밀며 은수정을 일깨웠다.
"문 크리스탈 파워!"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운 은수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삽시간에 찬란한 월광이 우사기의 전신을 감싸면서 그녀를 재 하나
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리려는 듯이 휘감겨오는 여인의 거대한 파괴 에너지를 차단
하고 흘려버리기 시작했다.
'크윽, 누구지, 대체?'
이제까지 본 그 누구보다도 강대한 힘.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로막기만 하고 있는 데도 전신이 너덜너덜하
게 타버릴 것만 같았다.
'설마, 그녀가 말로만 들었던------세일러 갤럭시아?'
- 콰과아아아아아앙! ! !
우사기가 펼친 은빛의 방어막에 충돌한 작은 태양은 그 여파만으로 무시무시
한 열폭풍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고막이 터져버릴 폭음이 거리를 뒤흔들었다.
잘게 깨어진 고층빌딩들의 유리들이 별빛처럼 반짝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럭저럭 버티는데-"
황금의 여인이 맛있는 개구리를 본 뱀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조금 더 노력해 봐."
여인의 팔이 가볍게 놀리듯 손짓하며 앞으로 움직였다.
곧이어 거대한 폭발이 그녀의 손끝으로부터 발생했다. 강렬한 폭음이 터지고
시야가 멀어버릴 것 같은 순백의 광채가 무시무시하게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 찌직, 찌지직!
방어막이 당장에라도 찢어발겨질 것처럼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거리가, 도쿄가------"
폭발로 인해 발생한 후폭풍이 도시 전체를 덮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화려
하게 번영을 뽐내고 있던 대도시는 마치 아이들에게 짓밟혀 엉망이 된 모래성처럼
박살이 나 황폐화되어 있었다. 적어도 츠키노 우사기의 시야에 닿는 곳 중에서
멀쩡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크윽-"
그 순간, 우사기의 시야가 암전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직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의 여인만이 미
소를 띠며 다가오고 있었다.
시공을 조작하여 두 사람만 일시적으로 현실의 차원과 분리된 것이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 ! 당신이 갤럭시아야?"
"그래."
빈정거리는 듯한 웃음으로 답한 갤럭시아는 천천히 붉은 눈동자를 위협적으로
빛내며 속삭였다.
"어때, 이만 항복하고 나의 부하가 될 생각이 들었나? 나도 혼자 하기에는 귀찮
은 일이라서 도울 사람이 필요하거든. 너 정도의 힘을 지닌 자라면 자격이 있다."
"무슨......일을......?"
우사기의 물음에 갤럭시아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삽시간에 칠흑처럼 어둡던 공간은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은하로 바뀌어 버렸다.
"이것이 이 우주의 모습이다. 여기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들의 에너지를 모두 손에
넣는 것이 내가 하고 있는 일이지."
갤럭시아가 재차 손가락을 튀기자, 근처에서 빛나고 있던 푸르스름한 별이 삽시
간에 그 빛을 잃고 잿빛으로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그 위에 살아가고 있던 모든
생명들 역시 흔적도 없이 재가 되어 소멸해 버렸다.
마치 전구가 꺼져가듯이 우주의 모든 별들이 차례차례 그 빛을 잃고 암흑 속으
로 잠겨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들리는 수많은 이들의 비통한 울음과 절규가 세일러문의 마
음에도 그대로 전해져왔다.
"......어,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이렇게 잔혹한 짓을!"
"전 우주는 나, 세일러 갤럭시아의 것. 나의 물건을 내가 어떻게 다루든 자유이지."
"그럴, 수가-"
"이미 90% 정도는 모두 에너지를 수집했다. 남은 것은 너희들을 비롯한 변방뿐.
아랫 것들에게 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너 정도면 쓸만하다고 생각해서 말이지."
"......"
시공의 비틀림이 사라지고, 폐허가 된 도쿄로 돌아온 갤럭시아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게 반항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았을 것이다. 세일러문, 내게
몸과 마음을, 네 스타시드를 바칠 준비가 되었는가?"
".......그럴 수 있을 리 없잖아......"
작은 목소리가 떨리듯 흘러나왔다. 갤럭시아는 피식 웃으며 다시 두 손을 앞으로
가볍게 내밀었다.
- 투두두두두두두두 ! ! !
그 직후 황금의 섬광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면서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갤럭시아의 연약해 보이는 손길이 한 번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그야말로 산을
뭉개고 지상을 부수어 버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절망한 세일러문의 얼굴을 보며 갤럭시아는 즐겁게 웃었다.
"어라, 겨우 이걸로 끝인가? 좀더 제대로 하면 아예 이 별 자체가 날아가버릴 텐데?"
"그렇게, 둘까......!"
순간, 은수정을 앞에 꺼내든 세일러문의 몸에서 이상할 정도의 광채가 급격히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갤럭시아조차 놀랄 정도로 압도적이며 따스한 빛이었다.
'뭐지, 이 빛은?'
세일러문을 감싸고 있는 빛은 갤럭시아의 섬광을 완전히 차단하고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빛과는 정반대의, 세상
모든 것을 따스히 치유하는 빛이었다.
마치 시공간을 되돌린 것처럼 거리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버렸다.
"......건방진 것!"
혀를 찬 갤럭시아는 삽시간에 사라졌다.
***
싸움의 여파에 휘말렸던 세이야 코우를 비롯한 세일러 스타즈가 가까스로 달려왔
지만, 이미 갤럭시아는 돌아가고 없었다.
그토록 심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회복된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바뀌어 있는 것은 정신을 잃고 지면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츠키
노 우사기뿐이었다.
"......도시가 원래대로 돌아왔어!"
"변신도 하지 않았는데 이런 기적을......"
경악한 동료들의 말을 들으며 세이야는 자신이 사랑하는 소녀를 안아든 채,
작게 중얼거렸다.
"은수정으로 저 갤럭시아와 맞싸울 수 있어. 여기에 전설의 힘만 얻으면-"
너무나 멀게 보였던 복수는 가깝게 다가왔다.
증오스런 갤럭시아의 파멸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간 세이야는 주먹을 강하게
움켜 쥐었다.
"......마모 짱......어디 있는 거야......언제나 함께 하겠다고 했잖아......"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우사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슬픈 목소리에 세이야는
다시 그녀를 감싸안고 속삭였다. 이 외계의 별에 내려와 가장 소중하게 느끼는
소녀를 향해.
"너를 위해서라면 목숨마저도 내던질 게. 불안할 때도, 괴로울 때도, 내가 곁에
있어. 그러니까 언제나 너의 미소를 보여줘."
......내가 그의 대신이 될 수는 없는 거니-
마지막 말을 삼키고, 세이야는 그녀가 매혹당한 소녀의 밝은 미소를 보며 가슴
이 터질 듯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