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은 ‘타이이스타젯(Thai EASTARJET) 의혹 사건’이 발생한 현장이다. 타이이스타젯을 중심으로 이스타항공 창업주 이상직(59·수감 중) 수상한 돈의 흐름, 태국인 바지 주주를 내세운 차명 소유, 문의 딸 가족 이주와 사위의 취업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얽히고설킨 곳이다.
취재진은 의혹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관련 인사들을 쫓아다녔다. 이상직은 지난 1월 이스타항공 자금 555억원을 횡령·배임한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라 접근 자체가 어려웠다. 전·현직 사장들은 아예 피했다.
이상직과 타이이스타젯 관련 의혹.
십수명의 전·현직 실무자들은 인터뷰를 거부하거나, 기억을 얼버무리거나, 모호하게 증언하는 등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의혹의 당사자인 문 사위 서모(42)씨의 행방은 묘연하다. 타이이스타젯에서 2년 정도 근무한 뒤 귀국한 것은 확인됐지만 언론과의 접촉은 차단한 상태다.
검찰의 수사 의지는 애초부터 약했다. 지난해 5월 타이이스타젯 사건 고발이 있은 지 1개월쯤 지나 정권 우호적으로 분류되는 수사팀으로 전원이 교체됐다. 전주지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검찰 관계자는 “2021년 6월 인사에서 이상직 사건 혐의를 주사하던 부장-차장-지검장까지 모든 수사라인이 교체됐다. 수사 동력을 떨어뜨리려는 유례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전주지검은 지난해 말엔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수사를 돌연 중단했고, 진척이 없는 상태다.
국내에서는 돌파구를 찾기 힘들다고 판단, 태국으로 방향을 틀기로 했다. “팩트(fact, 사실)는 현장에 있다”는 언론계의 격언을 믿기로 했다. 국내에서는 갖가지 제약으로 취재가 사실상 봉쇄됐다. 떨어지는 증거와 증언은 확보하기 힘들었다. 상대적으로 경계가 느슨한 방콕을 뒤져보기로 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라고나 할까.
타이이스타젯 의혹, 왜 중요한가
지난달 취재진이 찾은 태국 방콕 시내의 타이이스타젯 사무실 문이 닫혀 있다.
국내 정치권과 언론에서 간헐적으로 문제를 제기됐지만 타이이스타젯 의혹의 전모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기자가 왜 방콕까지 왔는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타이이스타젯은 방콕에 사무실을 둔 자그마한 항공사다. 2017년 2월 자본금 2억바트(약 71억원, 당시 환율)로 설립된 태국 법인이다. 항공운송업을 한다지만 지금껏 비행기 한 대 제대로 띄운 적도 없다. 그런데 2018년 7월 문의 딸 일가가 난데없이 태국으로 이주하고, 문의 사위가 이 허름한 항공사에 뜬금없이 간부(전무이사)로 취업했다. 증권·게임 업체 출신의 서씨는 항공의 ‘항’자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타이이스타젯은 한국의 저가항공사(LCC) 이스타항공과 이름이 아주 유사하다. ‘EASTARJET’(이스타항공)과 ‘Thai EASTARJET’(타이이스타젯)으로 영문명과 로고도 ‘Thai’만 빼면 똑같다. 누가 봐도 몸통이 하나인 회사라고 생각한다. 이스타항공의 실질적인 소유주는 이상직이었다. 타이이스타젯 자본금은 이스타항공이 편법을 동원해 댄 것이고, 따라서 타이이스타젯은 이상직이 차명으로 소유한 회사라는 추론이다.
그런 정체불명의 회사에 대통령 사위가 취업했으니 의심의 눈초리가 쏠릴 수밖에 없다. 이상직은 “이스타항공과 타이이스타젯은 서로 관련이 없는 별개의 회사”라며 부인해왔다. 문 사위 취업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뜻이다. 타이이스타젯의 소유를 인정하면 문 사위의 특혜 채용도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스타항공-이상직-문 사위 연결은 ‘우연'?
이상직이 어떤 인물인가. 이스타항공의 창업주로 2017년 문재인 후보 캠프 직능본부 수석부본부장을 지냈다. 문 집권 뒤인 2017년 6월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위원을 거쳐 2018년 3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중진공) 이사장에 올랐다.
중진공 이사장은 중소기업과 창업 지원에 연간 3조7500억원을 주무르는 요직이다. 이상직은 중진공 이사장에서 자진 사퇴한 뒤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전북 전주을에서 당선됐다. 현 정권에서 승승장구한 탓에 문 대통령의 측근이자 실세로 통했다.
타이이스타젯을 중심으로 이스타항공-이상직-문 사위로 이어지는 기묘한 커넥션을 단지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이상한 대목이 많다. 문이 이상직을 중진공 이사장에 임명하고, 4개월 뒤 문 사위가 타이이스타젯에 채용되는 과정은 정상적이지 않다. ‘대가’ ‘보은’ 등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근거다. 문 사위의 취업 이후 변변한 실적도 없는 타이이스타젯에서 판매관리비란 명목으로 60억원대의 뭉칫돈이 빠져나간 흔적도 의아스럽다.
의혹을 풀어줄 열쇠 쥔 박석호
지난 2월 서울 강서구 이스타항공 본사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이스타항공은 국제 항공운송사업 운항증명(AOC) 인가를 국토교통부에 신청하며 재운항 준비에 착수한 상태다.
방콕 취재의 큰 틀은 세 가지였다. ▶타이이스타젯의 핵심 인사 면담 ▶타이이스타젯의 존재 여부 ▶타이이스타젯 실소유 확인이다. 이를 바탕으로 타이이스타젯의 설립 목적, 문 사위의 채용 경위, 이상직의 개입 범위, 이스타항공과 타이이스타젯의 관계를 파악해 의혹의 실체에 접근하려 했다.
박석호(56) 타이이스타젯 대표의 입이 중요했다. 타이이스타젯 설립부터 대통령 사위 고용, 이상직과의 관계, 뭉칫돈의 쓰임새 등 모든 일에 개입한 인물이다. 그를 만나는 게 급선무였다. 출국에 앞서 박석호가 방콕 시내 자택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방콕 취재를 결심했다.
박석호는 녹록지 않았다. 그에게 서울과 방콕에서 핸드폰, 이메일, 카톡으로 수십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허탕이었다. 카톡을 읽기는 했지만, 번번이 묵살했다. 전화는 받지 않고 메시지를 남기라는 기계음만 흘러나왔다. 언론을 피해 방콕 어디인가에 잠적한 모양이었다.
이상직
박석호의 몇몇 지인들이 연결됐지만, 호의적으로 나올지는 미지수였다. 방콕 교민사회에서 타이이스타젯 문제는 ‘금기’처럼 말하기 꺼리는 분위기였다. 타이이스타젯 의혹에 대해 알 만한 교민을 찾아내 면담을 요청했지만 “기자”라고 밝히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현직 문 일가가 연루된 사건인 데다, 타이이스타젯 문제가 겨우 기지개를 켜는 항공·관광업에 찬물을 끼얹을까 극도로 조심했다.
박석호 "이상직에게 검찰 출석 사실 전해달라"
방콕 체류 엿새째인 3월 14일, 박석호의 가까운 지인 A씨(54)을 방콕 시내 L호텔 카페에서 만났다. 타이이스타젯와 관련된 취재 목적을 얘기하자 “언론이 물러나는 정권을 공격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며 경계했다. 그러면서 “타이이스타젯의 실소유주가 누구라는 건 다 아는 얘기인데 뭘 확인하러 왔느냐”고 되물었다. “(박석호가) 이상직 앞에서 너무 굽실거려 ‘왜 그러느냐’고 싫은 소리를 한 적도 있다”고 했다. 내막을 아는 A에게 신뢰가 갔다. 기자가 한국에서 방콕까지 멀리 왔으니 박석호와의 인터뷰를 주선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일단 헤어졌다.
전주지검 청사
A와 두 번째 만남에서였다. “박석호가 검찰에 출두해 다 진술했다” “2기가 바이트 분량의 자료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박석호와의 인터뷰 요청 건을 전달하다가 들었다는 것이다. 박석호가 정말로 한국을 방문했는지 확인해야 A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현지 취재원을 통해 박석호가 지난해 1월 중순부터 한 달간, 그리고 7월 하순부터 약 두 달간 한국에 체류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박석호가 “이(상직) 의원님에게 검찰에 출석해 조사받는다는 사실을 전해달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서울에서 확인됐다. 박석호-타이이스타젯-이상직의 커넥션이 처음으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타이이스타젯과 관련된 배임·횡령 사건에 관한 조사를 받으러 가는 박석호가 “타이이스타젯과 무관하다”고 버티는 이상직에게 ‘출석 사실’을 알리는 건 모순이다. 두 사람이 타이이스타젯에 함께 묶여 있으며, 문 사위의 취업에도 연루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상직이 실소유주이며, 불법 자금으로 만든 회사에 문 사위를 ‘영입’했다면 위법적 소지가 있다.
수사 중단, 윗선 교감 있었나
이상직-문 사위 취업 관련 타이이스타젯 의혹 일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만약 박석호가 이상직과 관련이 없다면, 타이이스타젯이 순수한 태국 회사라면, 검찰은 무혐의 종결하는 게 순리다. 우리의 사법권이 미칠 권한도 명분도 없다. 전주지검은 지난해 12월 시한부 기소중지 처분으로 수사를 중단했지만, 완전히 덮은 건 아니다. 이상직-타이이스타젯-문 사위 사이에 의심스러운 관계가 성립한다는 단서를 포착한 것으로 해석된다. 박석호에게서 타이이스타젯의 실소유주, 문 사위의 취업 경위만 따져 물었어도 유무죄 판단이 서는 단순한 사안을 애써 회피하고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현재 국내에 있는 대통령 사위를 소환 조사했는지도 궁금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박석호를 출국 금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방콕에 머무는 그는 배임·횡령 혐의를 받는 주요 수사 대상이다. ‘공범’이나 ‘범법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검찰은 방콕으로 유유히 도피하도록 방치했다. 관련자들이 입을 맞추고 증거를 인멸 또는 은닉할 시간을 벌어줬다는 비판을 살 수 있다.
사위의 특혜 취업에 대한 문의 인지 여부는 수사의 중대한 변수다. “뇌물죄”(김재원 국민의힘 전 최고위원)라며 현직 대통령을 거명하는 중대한 사건의 수사 중단을 전주지검이 단독으로 결정했을 리 만무하다. 박범계, 김오수 검찰총장, 청와대 측과 교감이 있을지 모른다는 게 합리적 의심이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타이이스타젯 의혹을 은폐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
취재, 정치적 고려 없어, 오해와 억측 없어야
2020년 9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이스타항공조종사노조 관계자들이 정부와 여당이 이스타항공 사태를 해결해 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기자가 태국 방콕에 도착한 3월 8일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타이이스타젯 의혹’ 취재는 6개월 전부터 시작됐다. 코로나19 탓도 컸지만, 취재 결과에 따라 대선에 미칠 정치적 충격을 우려해 방콕 출장을 미뤄왔다. 퇴임하는 문과 관련된 민감한 사건을 왜 하필이면 정권 교체기에 들춰내느냐는 비난과 오해도 우려됐다.
선거일이 임박해오자 더는 늦출 수가 없었다. 윤석열과 이재명, 새 대통령이 누가 당선되든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취재에 들어가야 했다. 현지 취재 섭외와 태국 입국 허가 등을 거치다 보니 마지노선인 8일 떠나게 됐다. 의혹이 제기되면 진실을 밝히는 게 기자의 책무다. 불순한 정치적 고려는 전혀 없었다.
박석호 지인의 말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타이이스타젯이 진짜로 존재하는지, 박석호를 직접 만나 검찰에 어떤 진술을 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절박했다. 타이이스타젯 사무실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