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세요」
남자 하나가 다가온다. 비는 내리고 있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꽉꽉 들어찬 자동차들로부터 쏟아져나온 검은 매연이 빗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보인다. 남자 하나와 나 사이에도 지독하게 습하고 냉기가 피어오르도록 비가 가득 내리꽂히고 있다. 하지만 그 빗줄기들은 나에게까지는 확산되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그 남자 하나가 내 코앞까지 다가오며 바보같은 질문을 한다. 어디가냐구요. 글쎄요. 어디 가는걸까. 이 애는 어디로 가고있을까? 당신이 좀 알아봐주실래요. 라고 소리지르고 싶은 것을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간신히 목구멍에 안착시킨다. 네에. 나는 백만년 전 고대 생물이 걷는 속도로 느릿느릿, 그러나 착실하게 말한다. 네에. 나는 대답한다.
「이러다가 감기걸려요」
첫말과 전혀 연관성이라곤 없는 두번째 말을 너무나 태연스럽게 이으며 남자 하나가 엎어지면 닿을 듯한 곳까지 다가온다. 가깝다. 그와 나 사이에 비로 들어찬 빈 공간이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뭉개버린 목탄화처럼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괴물이야.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꾸역꾸역 간신히 삼켜버리고 나는 또다시 대답한다. 네에.
「들어가세요. 아줌마가 이러고 있으니까 이 애도 슬퍼하잖아요」
이 애? 걔가 누군데? 나는 이앨 몰라요. 라고 나는 또다시 대답한다. 안그래도 일그러져 있는 남자 하나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짐을 더한다. 괴물이야. 나는 또다시 소리지를 뻔한 것을 목언저리를 손끝이 새하얘지도록 움켜쥠으로써 참아냈다. 목소리. 나의 목소리는 의지대로 나오지 않는다. 남자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그 남자 하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앨리스를 사랑한 남자가 있었어요.
아니, 어쩌면 여자였을지도 모르죠.」
네에. 나는 대답한다. 그것은 다음 이야기를 듣기 위한 하나의 주문이다. 나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있다. 하지만 뭔가에 얻어맞아 중간 부분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 내 머릿속에서 중간 과정은 상실되어있다. 앨리스가 어떻게 되었던가?
「남자는 앨리스를 사랑했어요. 정말로 사랑했어요. 사랑했습니다.
앨리스는 어리고, 남자는 어른이었지만,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고백했어요.
사랑해.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해야 하는 거라고 배웠거든요.
자, 이 남자가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아뇨오. 없어요. 이야기 속의 남자는 분명 잘못한 것이 없었다. 비로소 비가 내 몸에 떨어져 날 적시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몸이 추운 것이 느껴진다. 비가 기름칠으로 번들거리는 대리암 비석에도 방울져 떨어진다. 그것은 앨리스의 비석이다.
「그럼 계속합니다.
하지만 앨리스는 웃으면서 거절했어요.
미안. 미안해요. 아저씨, 미안하지만 난 어리고, 아저씨는 늙었어요.
늙고, 추하고, 순수하지 못해요.
미안. 난 아저씨가 싫어요.
자, 앨리스가 잘못한 것이 있나요?」
아뇨오. 없지요. 앨리스가, 내 아이가, 그 착한 앨리스가 잘못한 것이 있을리 없었다. 그녀는 분명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있었다. 20XX년 X월 X일. 정확히 일주일 전이다. 내가 그녀를 방문한 바로 그날이다. 저 비석은 앨리스의 비석이다‥
「그럼 또 계속하겠습니다.
남자는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증오스러웠습니다. 앨리스를 사랑했고, 앨리스를 증오했습니다.
그는 그녀가 어른이 되었을 때 자동으로 그녀의 소중한 것을 폭파시킬 시한 폭탄 같은 것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뭐였을까요?」
글쎄요오.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그게 바로 내 상실된 기억의 핵심부에요. 남자씨. 말해주세요. 뭉개진 얼굴의 몬스터양반. 당신의 뒤죽박죽 된 그 얼굴에서 입술만을 들어내서 내게 말해주세요. 그게 뭐였을까? 앨리스의 비석은 새하얗고도 붉다. 나는 비가 비석에서 흘러내리는 앨리스의 피를 희석시키는 것을 본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남자는 동화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공주님과 매력적인 왕자님이 주인공이고
못되고 못생기고 잔혹한 마녀와 계모와 새언니들이 죽게되는 아름다운 동화였죠.
그리고 남자는 한 편의 동화마다 짝이 되는 동화를 한벌씩 더 썼습니다.
똑같은 배경에 똑같은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똑같은 사람이 죽는 동화.
뭔가 잘못된 게 있습니까?」
아뇨오. 없어요. 없어요.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일단 없다고 대답해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드디어 길고 어두운 상실의 터널을 지나 앨리스의 비석을 기점으로 삼아밝은‥ 아니 붉은 핏물이 들이치는 현실로 돌아오는 내 몸뚱아리를 느낀다. 아. 앨리스. 내가 널-
「뜨겁게 달아오른 철구두를 계모에게 신겨 죽을때까지 춤추게 한 뒤 그것을 즐겁게 지켜보는 백설공주와 푸른 수염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왕자를 시작으로 남자 999명을 살해한 어느 미녀, 값비싼 늑대 가죽을 차지하기 위해 할머니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살인을 직업으로 삼게된 빨간망토.
모두 그 남자의 작품이었습니다.
자, 이제 뭔가 잘못된 게 있습니까?」
네에.
네.
최악의 단계에서야 잘못이 드러나는 정말 잔인한 트릭이네요, 남자씨. 앨리스가 어른이 되어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했을때 그녀의 관절을 모조리 빼내는 것보다 더 잔인한 트릭이네요. 그녀가 동심의 최고조에 달했을때, 그녀를 부수며 추락하는 것을 즐기자는 속셈이었습니까, 당신은, 나는, 우리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되었나? 나는 팔근육을 있는 힘껏 늘려서 앨리스의 비석에 부들거리며 손을 뻗쳐본다. 그러나 닿지 않는다. 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녈 죽였다. 닿지 않아서.
「그래서 남자는 앨리스를 죽였습니다.
자기의 일그러진 세계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건 오로지 그녈 위한 것이었는데 말이죠.
아니, 어쩌면 여자였으지도 모르죠.」
나는 주저앉았다.
나는 이제 현대의 기계들보다도 더 크고 빠른 심장 고동을 느끼며 그에게 매달렸다.
아니, 앨리스의 망령에게 매달렸다.
가늘은 앨리스의 하얀 목이 내 손안에 있을 때보다 더 커다란 절망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앨리스의 비석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붉고 끈적이는 피를 들이마시고 싶은 충동이 인다.
제발.
제발 나의 앨리스를 죽이지 말아줘.
남자 하나는 발치에 매달려있는 나를 더러운 흙탕물에 가만히 놓아두고 웃으며 멀어져갔다. 그는 사신이다. 그는 저승사자다. 그와 나 사이의 공간에 내리치는 비가 더욱 거센 냉기를 풍기고 있다. 비다. 비릿한 비의 냄새다.
저것은 말입니다.
밤에 생각난것을 잊어버릴까봐 급하게 마구 옮겨쓰면서
만들어진 그런 개수작[‥]이랍니다.
죄송해요:D 꺄하하핚
첫댓글 이상의소설을보는듯하네요. 동화의내용하고글의문체랄까요? 하여간분위기가멋졌어요.
우와,,왠지 좀 무서웠어요//하지만 잘 쓰셨네요^-^
엄태현님, 사쿠라즈카님 모두 감사해요 ^^; 이상을 개인적으로 존경하기 때문에 감사할따름입니다‥ 무한정육면체의 비밀 이었던가? 그 영화 보고싶은데, 혹시 구할 방법을 아시는지?; 비디오방에는 당연히 없더군요:D [하핫] 사쿠라즈카님 글도 잘 봤어요~
앨리스가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