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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전남도청 민원실 지하에는 각종 무기와 실탄,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 등 폭약이 8t 트럭 4대분이 있었다고 한다. 추정치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문용동, 김영복 등 ‘폭약관리반원’들은 자칫 일어날지 모를 불상사가 걱정돼 비밀리에 전투교육사령부(이하 ‘전교사’)를 찾아가 폭약 뇌관 제거를 요청했다.
5월 24일 오후 8시쯤 전교사에서 보낸 배승일(裵承逸·66·당시 26세) 탄약검사사가 찾아와 밤새 뇌관을 제거했다. 그는 전교사 병기근무대에 소속된 군속(現 군무원) 신분이었다.
기자는 지난 3월 26일 충북 영동에 사는 그를 만나기 위해 차를 몰았다. 폭약관리반원 김영복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배승일씨는 뇌관 제거 작업 내내 손을 덜덜 떨었다고 한다. 시민군 강경파에게 발각될 경우 목숨이 위태로울 뿐만 아니라 자칫 실수라도 할 경우 대참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배승일씨는 전남 목포에서 고교(문태고)를 졸업하고 전투경찰에 입대해 복무를 마친 뒤 1977년 4월 군속 공채에 합격했다.
1977년 7월 1일부터 군수지원단 병기근무대 소속인 ‘051탄약창 광주분창(사월산 탄약고)’에서 탄약검사사로 근무하던 중, 1980년 5월 24일 전교사 참모장(준장 장사복)에게 “전남도청에 가서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 등을 분해하고 오라”는 명(命)을 받았다.
당시 배승일씨는 일찌감치 결혼하여 아들 둘(77년생, 79년생)을 두었고, 셋째인 막내는 1980년 6월 출생을 앞두고 있었다. 처음엔 주저했으나 이후 심경의 변화로 5월 24일 오후 9시부터 다음 날 오후 1시까지 17시간 동안 도청에 머무르며 뇌관 제거 작업을 무사히 마쳤다.
안타깝게도 기자와 만난 배승일씨는 교통사고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했고, 발음도 부정확했다. 뇌병변장애 3급, 시각장애 6급에다 최근 위암 진단을 받아 대전 성모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었다. 간단한 대화는 가능하지만 긴 이야기는 나누기 어려웠다. 그는 답답했는지 자신이 쓴 〈내가 겪은 5·18‐생사를 건 60시간〉이란 회고담을 기자에게 건넸다. 비록 일방적인 자기 주장일지 모르나 그의 글은 시간 흐름에 따라 비교적 사실에 충실한 글이었다. 기자는 회고담을 소개하며 일부 비문과 오기를 현대어 표기에 맞게 고쳤다. 또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긴 문장을 임의로 나누었음을 밝혀둔다.
〈…어깨에 ‘시민수습대책위’라는 띠를 대각선으로 차고 광주통합병원 후문 쪽에서 1/4t 군용차(피탈된 차량)를 타고 양동시장을 거쳐 광주천을 따라 적십자병원에 들렀더니 이곳저곳에서 간호사들이 수십 명의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5월 24일 20시경에 도청 뒤편 식당에 들르니 식당 안에는 몇 사람의 외국 기자들이 식사를 하기에 우리 일행들은 음료수를 마시고 나왔습니다.
동일 20시30분경에 전남도청 정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일명 탄약고(도청 지하실 식당)의 출입문을 통과하려고 하였으나 경계를 철통같이 하고 있어, 같이 왔던 문용동(그는 ‘문영동’으로 이름을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편집자)씨와 도청 지하실에 같이 들어갔습니다.
가득 쌓인 폭발물을 본 순간, 제 기억에는 1977년 11월 11일 밤 11시에 발생한 이리역 폭발사건의 처참했던 현장이 떠올랐습니다. 자칫 광주시가지 전체가 불바다로 변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저는 동일 21시경부터 도청 내의 TNT·다이너마이트 뇌관과 손가락 길이 정도의 도화선으로 장치한 폭약 뭉치 2100개의 뇌관을 제거한 후 충전물 콤퍼지션(composition·구조물이란 의미로 추정됨-편집자)과 발(發)당 위력 18m인 인마살상용 세열수류탄 450발의 신관을 제거했습니다. 그다음 최루탄 신관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잘못하다가는 탄로가 날까 봐 그만두고 다량의 전기뇌관, 비전기뇌관, 소구경 탄약인 카빈탄, M1탄, 30LMG탄, 50MG 탄약을 분류하였습니다.…〉
배승일씨는 1953년 전남 무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완고한 유교 집안에서 자라나 결혼 후에도 무릎을 꿇고 부모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는 “5월 24일 당시 적진(敵陣)과 다름없는 도청에 가서 폭약 뇌관을 제거하라는 무모한 지시에도 윗사람 명령이라 거역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지휘관께서 ‘네가 안 들어간다면 명령 불복종으로 군법에 회부하겠다’고 한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기자에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1977년 11월 11일 발생한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폭발물 처리반으로 참여하여 목격한 참담한 모습이 떠올랐다.”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한 기억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만든 것이다.
당시 전교사 측에서도 배승일씨를 보낼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그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었다. 병기부대 군인을 보낼 경우 머리가 짧아 의심을 살 우려가 있었다. 당시 탄약검사반에 3명의 문관이 있었는데 배승일이 가장 어렸다. 위험한 작업이어서 나이 든 문관들은 가기를 꺼렸다고 한다. 당시 그는 3년 차 신참인데다 방통대 행정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5월 25일 새벽 1시경 탄약고를 나와 도청 내의 경계 및 인원 동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도청을 돌아다니는 도중 강경파의 차량에 우측 무릎 장딴지가 충격을 받고 넘어지면서 동시에 좌측 무릎을 다쳤으나 걸음을 걸을 수 있어서 다시 계속 경계 상황을 파악하고 일명 탄약고로 되돌아왔습니다.…〉
배승일씨가 말한 ‘탄약고’는 도청 민원실 지하를 말한다. 도청 마당에 있던 각종 무기와 폭약류를 그곳에 옮겨놓은 것이다. 그는 “(시민군) 강경파 차량에 부딪힌 오른쪽 무릎이 아직도 아프다”며 “그때 부상으로 지금까지 걷기가 불편하다”고 했다.
〈…5월 25일 새벽 5시경 위력 최루가스 70~95m를 비산하고 15~30초간 연소된 최루탄 500발의 신관을 제거했습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식은땀에 가슴을 졸이며, 수차례에 걸쳐 시민군이 들어와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면 ‘수류탄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본다’고 하여 무사히 안 들키고 뇌관, 신관을 제거했습니다. 폭약류의 뇌관, 신관은 쉽게 찾을 수 없는 식당 창고 쌀통 깊숙이 감추어놓았습니다.
또한 5월 25일 08시경에 참모장님께 일반전화로 결과 보고를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광주시내에 전화가 불통되어 연락하지 못하고 탄약고 내에 주둔하면서 계속 들어오는 수류탄 및 최루탄 신관 제거와 소구경 탄약 분류 작업을 마쳤습니다.…〉
뇌관 제거와 관련해 배승일씨는 “수류탄 신관 450발, 최루탄 500발, 다이너마이트(TNT 포함) 2100개의 뇌관을 제거했다”고 주장한다. 어마어마한 양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작업을 모두 마치고 도청 정문으로 빠져나간 것은 25일 오후 1시쯤이다. 비를 맞으며 도청 앞 상무관을 찾았다. 왜냐하면 광주농고(現 광주자연과학고)에 다니는 동생이 전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무관 앞에 60여 구의 관이 있었는데 다행히 동생 이름은 없었다. 이후 전일빌딩과 유동사거리, 양동시장을 거쳐 농촌진흥청 앞을 지나 광주통합병원에 이르러서야 ‘시민수습대책위’라고 적힌 어깨띠를 벗었다. 그리고 전교사에 복귀해 참모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그는 회고담에 자신의 공적을 이렇게 썼다.
〈…생각건대, 당시 본인이 폭약류와 수류탄, 최루탄 신관 제거를 하지 않았다면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보다 더 큰 참사가 있을 수 있었으며 5·18 광주민주항쟁은 5월 27일에 마무리 못 하고 기간이 더 길었을 겁니다. 광주시민 80만명의 인명과 재산 파괴, 전남도청이 생긴 1896년 8월부터 1980년 5월까지 84년 동안의 기밀서류 파괴를 미연에 방지하는 데 무공을 세웠습니다. 5·18 충정작전이 끝난 후 6월 25일 전교사 연병장에서 훈장 수여식을 하려다가 우천 관계로 당시 전남·북 계엄사령부 기밀실에서 소준열 사령관님께서 “대한민국 창군 이래 군속 중에 최초로 훈장을 수여한다”면서 보국훈장 광복장을 전수하시며 그 자리에서 “2계급을 승진시키고 후조치하라”고 인사참모님께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편제가 없어 그 이후 육군본부와 탄약지원사령부로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1년 후에 ‘4급을(乙)’로 승진하였고, 1985년 12월 광주보훈청으로부터 국가유공자 증서를 발급받았습니다.…〉
그러나 2006년 6월 12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행정자치부가 당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5월 27일 도청진압작전)과 관련한 훈장 수여자 68명의 서훈을 모두 취소했다.
배승일씨 역시 보국훈장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자 서훈 취소자 68명 중에 유일하게 행정자치부 장관을 상대로 ‘서훈취소 철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가 받은 훈장은 폭약 신관을 제거해 시민의 생명을 구했기 때문이지,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압작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요지였다.
주목할 사실은 이때 5·18 관련 단체들이 배승일씨의 명예회복에 뜻을 함께 모아준 것이다. (사)5·18민주유공자유족회, (사)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재)5·18기념재단 등이 공동으로 작성한 탄원서는 폭약 뇌관 분리 작업의 필요성과 그로 인한 공로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였다. 그 결과, 서울행정법원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판결문을 소개한다.
〈…비록 5·18광주민주항쟁을 야기한 전두환 등이 무장하고 있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할 목적으로 광주 재진입작전(이른바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하였고, 원고와 함께 훈장을 받은 자들 중에 대부분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원고의 경우는 1980. 5. 24. 전남도청 내에서 폭약의 신관 제거를 함으로써 많은 시민의 생명과 신체, 재산상 피해를 방지하였고, 위와 같은 공적으로 인하여 이 사건 훈장을 수여받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원고가 오로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이 사건 훈장을 수여받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이 사건 처분을 한 것은 위법하다.…〉
이 판결은 배승일씨의 ‘훈장서훈 취소 건’뿐 아니라, 도청 지하실 폭탄 해체에 관한 성격을 규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 김형석 대한민국사연구소 소장은 “오랜 기간 신군부가 도청 지하실의 폭탄 해체 작업을 상무충정작전의 일환으로 내세우면서 문용동을 프락치로 내몬 잘못을 사법부가 법적 잣대로 바로잡은 것”이라며 “법원 판결처럼 배승일과 폭약관리반원들의 의로운 행위는 계엄군과 상관없는 애향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기자에게 자신의 한(恨)을 풀어달라며 ▲사후 국립묘지나 국립 5·18민주묘지 안장 ▲5·18 국가유공자증 발급 ▲참전 유공자증 발급 등을 원한다고 호소했다. 이미 여러 차례 청와대, 국회 등지로 진정서와 탄원서를 넣었으나 회신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는 충북 영동의 한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23년 10개월가량 근무하다 지난해 1월 퇴직했다. 군무원 재직 시 불의의 교통사고로 일찍 군을 떠나야 했다. 그래서 20년 이상 장기복무자만 갈 수 있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소망이다.
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nNewsNumb=20200510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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